서론
현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 같은 이야기‘는 19세기 끝자락에 태어난 상하이 태생 세 자매의 이야기이다. 자매들은 부유하고 유명한 도시의 엘리트 계층인 쑹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어머니의 외가는 중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기독교 가문인 쉬씨 가문이었다(상하이에 이 가문의 성을 본뜬 쉬자후이 지역이 있다). 아버지는 10대일 때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남감리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세 딸 아이링愛齡, 1889년 출생], 칭링[慶齡, 1893년 출생], 메이링[美齡, 1898년 출생])은 어린 시절에 교육을 받기 위해서 미국으로 보내졌는데, 당시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몇 년 후 귀국한 세 자매는 중국어보다 영어에 더 능통했다. 왜소한 체구와 각진 턱을 가진 이 자매들은 전통적인 기준에서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다. 그들의 외모는 참외처럼 둥근 얼굴, 아몬드같은 눈, 늘어진 버들가지 같은 눈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자매들은 고운 살결과 섬세한 이목구비, 우아한 맵시를 갖추었고, 세련된 옷차림은 이들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자매들은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지적이었고, 자립심이 강했으며,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들에게는 ‘격조‘가 있었다. - P11
국부의 부상
1894년 7월 4일, 하와이가 공화정을 선포했다. 여왕 릴리우오칼라니가 폐위된 이듬해였다. 중국 해안으로부터 약 9,650킬로미터 떨어진 태평양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여파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오늘날의 중국을 만드는 데에 일조한 것이다. 스물일곱 살의 급진주의자 쑨원이 하와이 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모두의 입에 ‘공화정‘이라는 단어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왕당파가 릴리우오칼라니의 복위를 노리는 동안 공화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왕당파를 격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뜨거웠다. 조국의 군주제를 무너뜨릴 계획을 꾸미고 있던 청년 쑨원은 중국도 하와이처럼 공화국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P21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만주족은 소수의 이민족 지배자로 간주되었고, 토착 한인(漢人)들의 끊임없는 저항에 시달렸다. 쑨원도 그러한 한인 중의 한 명이었다. 저항 세력들은 대개 만주족 지배 이전의 한족 왕조인 명나라(1368-1644)의 복권을 외쳤다. 그러나 명나라를 부활시키자는 주장에는 문제가 많았다. 명나라 말기에 조정은 이미 뿌리까지 썩은 상태였고, 농협들의 반란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었다. 만주족은 혼란을 틈타 쳐들어와서 사태를 종결했을 따름이었다. 사람들은 명나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구체적인 장래 계획은 없었다. 하와이의상황을 목격한 덕분에 쑨원은 중국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명료하고도 전향적인 청사진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해답은 공화정이었다. 그해 11월, 햇볕이 내리쬐는 호놀룰루에서 쑨원은 ‘흥중회(興中會)‘라는 정치조직을 설립했다. 창립총회는 현지의 한 중국인 은행장의 가정집에서 열렸다. 격자 창살과 열대 관목이 그늘을 드리우는 넓은 베란다가 딸린 2층목조 주택이었다. 스무 명 남짓한 회원들은 모두 하와이 방식대로 왼손은 성서에 두고, 오른손은 치켜든 채 쑨원이 작성한 서약문을 낭독했다. "만주족을 몰아낸다.•••••• 그리고 공화국을 수립한다." 두 목표를 결합한 것은 신의 한 수로 드러났다. 공화주의가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11년에 만주족 왕조는 무너졌고, 공화국이 된 중국에서 쑨원은 ‘국부(國父)‘로 알려지게 되었다. 쑨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머지않아서 공화정을 대안으로 떠올렸을것이다. 쑨원은 하와이 덕분에 그 발상을 선점한 것이었다. 이렇듯 쑨원의 야심만만한 성격,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향은 공화국 중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였다. - P22
해외에서 지낸 경험으로 인해서 쑨원은 조국을 경멸했고, 모든 문제를 만주족 정권의 탓으로 돌렸다. 수년 동안 그는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만나서 생각을 공유했다. 등 뒤로 땋아내린 변발에서부터 만주족의 중원 정복으로 짓밟힌 치욕스러운 역사에 이르기까지, 만주족이라면 치가 떨린다는이야기였다. 차를 마시고 국수를 먹으며, 그들은 만주족 황제를 끌어내리는 꿈을 꾸었다. 친구들 가운데에는 예전에 마을의 신상을 부수는 데에 함께했던 루하오둥도 있었고, 광저우의 비밀 결사 삼합회(三合會)의 두목이던 새로운 동지 정스량도 있었다. 두 친구의 외모는 정반대였다. 루하오둥은 낯빛이 온화한 반면, 정량은 두꺼운 쌍커풀 아래에 음험한 시선을 숨기고 처진 입꼬리를 꽉 다물고 있어서 범죄 조직의 조직원이 되기에 알맞은상이었다. 쑨원 무리는 시시한 오합지졸로 보였지만, 만주족 왕조를 끝장내고 자신들의 손으로 중국을 다스리기 전까지는 절대 만족하지 않겠다는 대단한 야심을 지니고 있었다. 거대한 국가에 맞서야 함을 알면서도 이들은 주눅 들지 않았다. - P30
이렇게 큰일을 벌이려면 많은 돈이 들었다. 폭력배들을 부리고 무기를 사는 데에 필요한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쑨원이 1894년 하와이로 돌아간 것은 반란을 일으킬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만주족을 타도한 이후의 미래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바로 공화정이었다. 하와이의 중국인들은 수천 달러를 내놓았다. 쑨원은 더 많은 돈을 모금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바로 그때, 상하이의 친구가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즉각 귀국하여 혁명을 개시하라는 것이었다. 중국은 일본의 공세에 신음하고 있었다. 전쟁에 대응하기에는 만주족 정권의 능력이역부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민심은 나날이 사나워져갔다. 쑨원은 지체없이 귀국하는 배에 올랐다. 쑨원에게 편지를 보내서 공화주의 혁명의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 일조한 사람은 미국의 남(南)감리 교회의 전도사였다가 지금은 상하이의 부유한 사업가가 된 서른세 살의 쑹자수였다. 쑹자수는 신상 파괴 사건 이후 상하이로 와서 살고 있던 루하오둥의 소개로 쑨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1894년초에 쑨원이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세 사람은 밤늦도록 정치를 논했다. 쑹자수는 쑨원과 마찬가지로 만주족을 증오했고, 불평만 늘어놓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 쑨원을 높이 평가했다. 당시 쑨원은 유명하지 않았지만, 이미 절제되면서도 강한 확신을 내비쳤다. 그는 자기 자신을 믿었고,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확신했으며,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보았다. 자신감에 가득찬 쑨원의 태도는 쑹자수와 같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은 쑨원에게 넉넉한 후원금을 보탰다. 쑹자수는 쑹씨 세 자매의 아버지였다. - P32
청조는 쑨원의 동정을 낱낱이 감시하고 있었다. 런던의 청나라 공사관은 슬레이터 탐정 사무소에 의뢰하여 쑨원의 뒤를 밟았다. 10월 1일 사무소의 소장 헨리 슬레이터는 첫 보고서를 제출했다. "지시하신 사항에 따라서 우리 직원 한 명을 리버풀로 보내 화이트스타 사의 SS 머제스틱 호에 탑승하는 신 우[쑨원의 가명]라는 남성을 추적한 바, 보내주신 인상착의에 부합하는 중국인 남성 한 명이 어제 정오 리버풀 항구의 프린스 잔교에서 상기한 배에 탑승하는 장면을 포착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탐정 사무소는 이어서 쑨원의 런던행 일정도 자세히 기록했다. 보고서에는 그가 어떤 기차를 놓치고 어떤 기차를 탔으며,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보관소에서 짐을 찾아 "12616번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는 것까지 꼼꼼히적혔다. 이튿날 쑨원은 런던 중심부의 데번셔 가 46번지에 위치한 캔틀리 박사의 집을 찾아갔다. 캔틀리는 그해 2월에 귀국하여 런던에 머물고 있었다. 나중에 캔틀리는 그가 홍콩을 떠나기 전 쑨원의 친구가 나를 찾아와서는, 쑨원이 호놀룰루에 있는데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했습니다"라고영국 당국에 증언했다. 이 말을 들은 캔틀리는 먼 여행을 감수하면서까지하와이로 가서 옛 제자를 만났다. 그는 쑨원의 진정한 동지였다. - P37
그러나 책을 쓸 때에는 그렇게까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없었다. 쑨원은캔틀리 박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서둘러 책을 집필했다. 런던에서 납치당하다(Kidnapped in London)」라는 간결한 제목의 책이었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몇몇 언어로 번역되었다. 쑨원은 이제유명 인사였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피해자를 향한 영국 대중의호의적인 여론은 곧 시들해졌다. 그들은 폭력적인 혁명을 꺼렸다. 캔틀리의 친구들은 쑨원을 가리켜 "자네의 그 골칫거리 친구"라고 비웃고는 했다. 쑨원을 지지하는 유럽인은 여전히 캔틀리 부부가 거의 유일했다. 그러나 쑨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가 중국인 급진주의자들에게 전해져 그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쑨원을 찾아왔고, 그의 말에 열렬히 귀 기울였다. 1897년 7월 마침내 쑨원은 런던을 떠났다. 그의 뒤를 미행하던 사설 탐정의 보고에 따르면, 캐나다를 경유해서 극동으로 향하는 내내 모든 곳의 사람들이 두 팔 벌려 그를 환영했다. 쑨원의 일정은 빌 틈이 없었고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연설할 때마다 "청중이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들은 지갑도 기꺼이 열었다. 금전적으로 여유로워진 쑨원은 밴쿠버에서 캐나다 돈으로 100달러의 차액을 지불하고 2등실 좌석 대신 1등실에 탔고, "이전에는 본 적 없는 근사한 양복을 갖춰 입었다." 그때부터 쑨원의 행보는 그가어린 시절 친구인 루찬에게 활짝 웃으며 전한 그대로였다. "어디를 가든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네." 루찬은 덧붙였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쑨원은 명성 하나로 지구 반대편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탈것과 머물 곳, 먹을 것이 끊이지 않았고, 청하는 족족 기금이 마련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승용차와 보트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공사관에 들어가서 감금되었던 경험 덕분에 쑨원은 중국의 혁명가들 가운데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 P46
1900년, 외세 배척과 기독교 반대의 기치를 내건 비밀 결사 의화단의 반란으로 중국 북부가 쑥대밭이 되었다. 청조의 의화단 진압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한 열강은 일본과 미국, 영국 등 8개 국의 연합군을 조직하여 베이징을 점령했다. 청조는 수도에서 쫓겨나 옛 수도였던 서북 지역의 도시시안으로 망명했다. 이 시기에 만주족 황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쑨원은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남부의 성들을 점거한 다음, ‘공화국‘을 수립하겠다며 일본 정부에 후원을 요청했다. 당시 타이완은1894-1895년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쑨원은 자신이 중국 동남부 해안 지방에서 삼합회 반란을 일으키면, 바다 건너 타이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이 "소동"을 빌미로 중국 본토를 침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일본 정부는 심사숙고한 끝에 쑨원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쑨원은 계획을 스스로의 힘으로 실현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삼합회의 두목인 친구 정스량에게 해안 지방에서 봉기를 일으키라고 주문한 다음 타이완으로 건너갔다. 당시 타이완의 일본인 총독은 중국 본토로 진군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10월 초, 정스량은 수백 명을 동원해서 동남부 해안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대규모 항구가 있는 도시 샤먼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탄약과 군대를 지원하려던 타이완 총독의 계획은 일본 정부의 강경한 제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봉기는 실패했고, 쑨원은 타이완에서 추방되었다. (수 개월 후 정스량은 홍콩에서 식사를 마친 뒤에 갑자기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뇌졸중이었으나, 독살되었다는 의혹은 한참 후까지 이어졌다.) - P48
대신 주변국들은 당시 청조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서태후에게 협력하는 쪽을 택했다. 쑨원이 중국 바깥에서 폭력에 의한 혁명을 부르짖는 동안, 중국 안에서는 서태후의 지휘 아래 비폭력적인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범상치 않은 여성은 선황 함풍제의 후궁으로, 1861년 남편이 승하한 이후 궁정 내부 쿠데타를 통해서 최고 권력자 지위에 올랐고, 그때부터 전근대적인 중국 사회를 근대화하는 사업을 벌였다. 성과는 놀라웠다. 서태후는 1889년 양아들인 광서제가 성인이 되면서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1895년 청일 전쟁의 뼈아픈 패배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1898년부터 개혁을 다시 추진해나갔다. 광서제가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서태후 암살 시도, 의화단의 난동 등으로 인해서 개혁이 몇 차례 중단되었지만, 혼란이 잦아들면 서태후는 더욱 강하게 개혁을 밀어붙였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서태후의 개혁은 여러 방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교육 제도가 도입되었고, 언론의 자유라는개념이 소개되었으며, 1902년의 전족 금지령을 위시한 여성 해방 정책이시행되었다. 서태후는 선거를 통해서 의회를 조직하고 중국을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하고자 했다. 이러한 계몽 사업의 진척 속도는 무척 빨라서, 쑨원마저 하루에 1,000리를 가는 속도"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쑨원에게 세례를 해주었던 찰스 해거 박사는 1904년 쑨원과 마주친 로스앤젤레스의 한 자리에서 청조가 "당신이 이전에 주장했던 개혁책들을 추진하고 있으니" 만주족 왕조 치하에서도 중국은 충분히 새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쑨원의 대답은 간절했다. "만주족은 반드시 몰아내야 합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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