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사는 동안 좌절도 많이 겪었지만, 쑹자수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사랑했다. 여섯 아이의 아버지가 된 후,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자식들에게 미국식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고, 실제로 버는 데에 성공했다. 수입의 대부분은 자녀를 교육하는 데에쓰였다. 쑹자수의 딸들은 세 명 모두 미국에서 공부했고, 막내 메이링은고작 아홉 살에 미국으로 가서 10년이나 머물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돌봐주는 어른 한 명 없이 스스로 생활했다는 점이다. 감리 교회와미국 사회에 대한 쑹자수의 신뢰는 그 정도로 두텁고 굳건했다.
쑹자수는 겉으로는 언제나 "남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미국인 친구들 중에는 그를 "진중한 생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벼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들도있었다. 그러나 쑹자수는 이미 굳은 결심을 한 상태였다. 조국 중국을 ‘아름다운 나라‘ 미국(美國)처럼 만드는 데에 일조하겠다는 다짐이었다. 1885년 말 쑹자수는 사랑하는 미국을 뒤로 하고 상하이로 향했다. - P61
특권에 대한 칭링의 반응은 아이링과 매우 달랐다. 칭링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릴 적에는 일요일마다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를 따라서 교회에 갔다. 우리가 교회에 도착하면목사와 전도사들은 옷차림이 남루한 여자들을 앞자리에서 서둘러 쫓아냈다. 우리에게 좋은 자리를 주겠다고 말이다!" 이때의 기억은 칭링이 선교사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훗날 공산주의로 전향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면서도 상냥했던 그녀가 사귄 친구는 몇 명 되지않았지만, 우정은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