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정말로 간호사들이 출근하기전에 몸을 피해야겠다는 듯이 어질러진 주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조각은 점차 긴장이 풀리며 의사에 대한 작은 믿음이 생겼는데, 이것은 방역업자가 타인을 대할때 갖게 되는 양면의 관점으로서 우선 닥치는 대로 누구든의심하고 보자는 반면에 그가 진실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눈도 발달한 결과로, 이 의사는 물에 빠진 걸 건져줬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적개심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며, 그 태도에는 방법이 약간 올바르지 않으나 그 상황에 의사로서 할 수밖에 없었던일을 했을 뿐이라는 심상함과 무관심이 깃들어 있었다. - P87

할머니의 말에 아이는 샐쭉하게 입을 내밀어 보인다. 아저 아이가 강 박사의 딸이구나. 저 아이는 그날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었을까. 아니면 예쁜 옷 한 벌이라도 새로 해입었을까. 요즘 아이들 옷은 터무니없이 비싸다던데 그걸론모자라지나 않았을까.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아이의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 P96

"공주님 몇 살?"
"여섯 살이에요."
여섯 살•••••• 강 박사의 딸은 여섯 살. 알면서 물었으나 굳이 아이의 목소리로 듣고 나니 ‘- 쌀‘이라는 발음에 맺힌 수분이 언제까지고 증발하지 않은 채 귓가에 맴돌 듯하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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