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끔찍하게도 방청석에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녀는 위층의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더니 입술을 실룩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우우 하고 야유를 보냈다. 그 야유가 빌리를 향한 건지, 콧방귀를 낀 사람을 향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빌리는 그 소리에 더욱 격하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건 진실하고, 성숙하고, 고통스러운 눈물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부어오르면서 비통한 감정이 만면에 떠올랐다. 관리원이 물을 한 잔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주워다 주는 것처럼 중립적이고 사무적인 태도였다. 트레실리안 씨는 냉담하고 무감동한 표정으로 기다리기만 했다. 빌리의 오열에 눈에 띄게 동요한 사람은 단한 명, 피고석에 선 소년이었다. 스펜서는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서기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얼핏보기로는 작고 하얗고 네모진 물건이길래 무슨 쪽지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스펜서는 증인석에 선 소녀가 눈물을 닦을 수 있도록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전해주려는 것이었다. 서기가 손수건을 건네받고 애매하게 머뭇거리자, 재판장이 그걸 보고는손짓해서 제지했다. - P699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무슨 일? 그게 무슨 뜻이니? 아아, 우리는 너무 울적해졌어! 이리나오거라 그렇게 어두운 곳에 있지 말고."
"아니 잠시만요.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요. 제가 어머니에게늘 잘해드리지는 못했다는 건 알아요. 아버지에게도 그랬고요. 저는언제나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런데도 가끔은....."
어머니의 맞잡은 두 손에서 종잇장 같은 소리가 났다. "속상한 생각하지 말려무나 프랜시스. 로렌스 박사님 말씀을 생각해야지."
"그냥 묻고 싶어요. 무슨 일이 있대도, 저를 경멸하시지는 않을 거지요 어머니?"
"경멸하다니! 맙소사! 내가 왜 그러겠니?"
"가끔은 삶이 뒤죽박죽 꼬여버려요. 어머니, 너무 심하게 꼬여서, 마치 모래 늪에 빠진 것 같을 때도 있어요. 한 발짝 디뎠더니, 빠져나올 수 없어서, 그래서...."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심란한,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너는 늘 만사에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프랜시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평범한 것뿐인데 말이다. 남편, 가정, 자식. 그렇게 평범한, 평범한 것들. 저택 문제는 걱정하지 말거라. 이 저택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 됐어. 사실 객식구들을 들일 만한 집도 아니잖니. 바버 부인은 여기 왔을 때부터 불행한 사람이었고, 너의... 너의 친절을 이용했던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는 않아. 하지만 내가 너를 경멸하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내가 내 손을 경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걸. 자, 이제 그만 내려가지 않으련?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자꾸나." - P717

터벅터벅 걸으면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안전하다, 나는 안전하다. 이제 모두가 안전하다. 자신도, 릴리안도, 그리고 그 소년도 이미 무죄로 밝혀진 사람이 똑같은 살인죄로 다시 체포될 리는 없다. 만약 경찰이 그를 정녕 범인이라고 믿는다면 법적 공방이 더 길어질수도 있겠지만••• 안 그럴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피고석에서서 인중에 맺힌 땀을 닦고 있던 그 소년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너는 안전하다, 너는 안전하다•••.‘ 아니, 하지만 이건 안전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그녀가 언제나 경멸해왔던, 전쟁 이후에 찾아온 안전과 같은 것이었다. 그걸 얻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다쳤으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쳤나! 생각하자니 욕지기가 올라왔다. 레너드, 레너드의 부모님, 스펜서, 그의 어머니, 빌리, 찰리••• 피해자명단이 한도 끝도 없어 보였다. 그 사람들이 그녀의 옆에서 같이 터덜터덜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유산된 아기도 있었다.... - P733

알 수 없었다.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프랜시스의 마음은 그렇게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녀와 맞닿은 릴리안의 손, 어깨, 엉덩이 이상으로는 조만간 둘 다 일어나야 할 것이다. 신문팔이 소년이석간신문이 나왔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쯤 어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릴리안의 가족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렇게 있을 수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은 바랄 수 없었다. 둘만의 돌 모퉁이에 앉아 있는 그들의 검은 옷이 황혼으로 번져 들고, 도시에는 불빛들이 켜지고, 하늘에는 희미한 별 몇 개가 돋아났기에. - P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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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리들리 박사의 알약과 핏물, 레너드, 그리고 계단과 정원을 거친 무시무시한 여정까지도 너무나 강렬한 충동이었다. 말해도 되나? 확 말해버릴까? 그날 밤의 기억을 하도 들고파며 곱씹은 나머지 객관적인 시야가 무너져버렸다. 자신과 릴리안이 한 일이 그렇게까지 나쁜 짓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범죄라고 할 것도 아니었지 않나. 둘이서 지레 공포와 죄책감에 사로잡혀 절절매니까 범죄처럼 느껴지는 것뿐, 실제로는 어리석은 실수로 빚어진 재난에 불과하다. 크리시에게 다 털어놓아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럼 크리시는 아연실색해서 쳐다볼 테고 •••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구겨진 드레스와 진흙 색깔 카디건이 눈에 들어왔다. 지저분한 방안 풍경이, 엉터리 보헤미안풍 인테리어가 보였다. 이제껏 여기서 한 거짓말이라고는 죄다 무해한 것밖에 없었다. 타락하지 않은, 안전한 거짓말밖엔•••.  프랜시스는 크리시에게 아무것도밝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자신이 아무것도 밝히지않으면 그녀와의 사이에 금이 가리라는 것도, 이미 금이 생겨버렸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날 밤 내가 정원에서 봤던 게 바로 이거구나.‘ 암담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프랜시스는 평범한 세상 밖으로 벗어나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릴리안이 그녀를 끌고 나갔다고 해겠지만, 그렇다고 릴리안을 탓하지는 않았다. 절대로 그러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아아, 릴리안은 왜 하필 재떨이를 집어 들었나? 이건 너무나 가혹했다! 겨우 그녀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참이었는데, 프랜시스는 이미 삶을 한 번 빼앗겼다. 바로 여기서 크리스티나와 함께할수도 있었던 삶을 빼앗겨버렸다. 그런데 지금 이 삶마저 또 빼앗겨야한단 말인가? - P598

‘친밀한 관계‘... ‘유부남 바버 씨....
마치 공중에 흩뿌려진 무수한 동전 같은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니다가 멈춘 것처럼, 그 말들이 겨우 머릿속에 들어와 제대로 파악이 되었다.
그동안 레너드도 외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여자를 빌리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남자친구가 레너드를 죽인 용의자로 검거된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배신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레너드가 그동안 뒤에서 이딴 짓을 하고 다니면서 앞에서는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 자신이 그에게 감쪽같이 속았다는 데에 격분이 치밀었다. 그런데그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검거당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에 생각이 미치자 속이 메스꺼워졌다.
" 안돼, 안돼, 안돼. 이건 말도 안 돼."
"무슨..."
"이건 너무 끔찍해, 크리시!"
"뭐? 아니, 왜... 경찰이 살인범을 잡았으면, 이제 다 해결된 거 아니야?"
"아니야! 이해가 안 돼?"
크리스티나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이 아수라장을 그녀가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경찰은 무고한 사람을 체포한 것이다! 프랜시스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해버릴까? 다시금 갈등이 일었다. ‘말해도 될까? 진짜로?‘ - P603

경악이 분노로 바뀌었다. 너무나 순전하고 철저한 분노여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그 감정이 지금껏 내내 프랜시스의 안에서 밖으로나올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자신이 지난 열흘간 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벽들을 미친 듯이 떠받치며 지냈던 나날이 기억났다. 크리스티나와의 우정에 금이 갔던 순간도 어머니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의혹도.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휴가 갔을 때 네가 임신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임신이라는 걸 아는 상태에서 그 티켓을 본 거야. 맞지?"
"이러지 마, 프랜시스.."
"맞잖아?"
"제발...."
"애를 지우고 싶었던 것도 당연하네."
릴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아니야, 그건 오로지 너랑 나를위해서 한 일이었어."
"재떨이를 그렇게 세게 휘두른 것도 무리가 아니었고."
"하지만... 나는 그걸 휘두를 생각이 아예 없었는걸. 너도 알잖아. 그건 실수였어."
프랜시스는 릴리안을 빤히 마주 보았다. "정말?"
미리 생각해둔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그 의문 역시 진작부터 마음속을 맴돌면서 밖으로 나오려 기를 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켐프 경위에게 생명보험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아니면 그 전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던 순간부터? 자신이 레너드의 등에 귀를 대보고 심장박동이 들리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던 그때부터? - P614

"그 말 좀 그만해!" 프랜시스가 쏘아붙였다. "너는 항상 그 말뿐이었어! 맨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다고! 우리가 처음 공원에 갔을 때...
기억나? 서로 잘 알지도 못했던 그때, 같이 공원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언덕을 올라가는데… 네가 나를 차도 쪽으로 몰고 인도 안쪽으로 비켜서더라. 너만 인도 안쪽에서 걸었다고, 릴리안. 그때는 너의 그런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너는 그때부터 지금껏 항상 안쪽에서만 걸었어. 영원히 그럴 순 없는 거야. 넌 거기서 나와야 돼. 지금 당장."
프랜시스의 어조가 아래층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부엌에 있는 여자들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듯 잠잠해진 게 느껴졌다. 릴리안도 식구들을 의식했는지, 그 자리에 웅크려 앉은 채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올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릴리안의 표정이 변하면서 얼굴이 반듯하게 퍼졌다. 릴리안은 잠자코 일어나 침대 옆으로 걸어 나오더니, 천천히, 퉁명스럽게, 외출 준비를 했다. 소매 안에서 젖은 손수건을 빼내 깨끗한 손수건으로 바꿨다. 서랍 안의 깡통에서 잔돈을 얼마나 꺼낼지 망설이다가 지폐 뭉치에 동전을 감싸서 모조리 핸드백에 넣었다. 화장대 거울 앞에서서 얼굴과 부어오른 눈꺼풀에 파우더를 칠하고, 뺨과 입술에 루주를 찍어 바르고, 빗으로 정성껏 머리를 빗었다.
프랜시스는 그걸 쭉 지켜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릴리안이 미적거리거나, 더듬거리거나, 울음을 터뜨릴 줄 알았는데,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한결같이 주의 깊은 태도로 방 한쪽의 벽감에 쳐진 커튼을 젖히더니, 가로대에 걸린 옷들 중에서 자기 코트를 빼내고는 거울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코트를 걸쳐 입고서 칼라를 매만져 편 다음, 앞자락에 길게 줄지어 달려 있는 많은 단추들을 하나씩, 침착하게 잠그기 시작했다. - P616

프랜시스는 허공을 빤히 노려보며, 찰리의 진술에서 드러난 추저분한 진실들과 지난 몇 달간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들을 짜 맞추고 있었다. 지난 여름 레너드가 야근을 한다고 귀가가 늦어졌던 나날들이 기억났다. 그가 특유의 과장스러운 투로 하품을 하면서 집에 들어왔던 날이며, 밤늦게 휘파람을 불며 들어와서는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던 날이 기억났다. 그때마다 레너드는 사실 그 여자를 만나고 온 것이었다. 현관문에 열쇠가 꽂히는 소리에 프랜시스와 릴리안이 서로에게서 후닥닥 떨어졌던 그때마다, 레너드는 그 여자와 막 키스하고 왔던 것이다. 프랜시스는 고개를 수그리고 입가에 손을 얹었다. 얽히고설킨 지저분한 거짓말과 불륜의 연결 고리가 이제야 처음으로 명확하게 눈에 보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연결 고리의 한쪽끝에 엮여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레너드가, 그리고 다른 쪽 맨 끝에는, 정확히 누가 있나? 바로 저 소년이 있었다! 피의자석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히죽거리며, 디킨스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불결하고고약한 이빨을 떡하니 드러낸 저 소년! 프랜시스는 릴리안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찰나의 한순간, 증오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만큼 격한 분노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어?‘ 릴리안에게 그렇게 악을 쓰고 싶었다. ‘어떻게 나를 이딴 일에 끌어들일수가 있어? 이런 곳에, 이 끔찍한 방에, 추잡한 사람들과 그들이 흘리고 다닌 역겨운 찌꺼기들 사이에 나를 끌고 들어오다니!‘ - P633

한 주가 흘러가는 동안 프랜시스는 착잡한 심경을 떨치지 못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앞으로 자신이 누릴 자유의 나날이 실감되어 안도감으로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옷을 갈아입고, 언덕 아래의 신문 가판대에 들르지않을 수 없었다. 단 하루라도 스펜서 워드를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면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이 단 하루라도 그를 염려하고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사라져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스펜서가무슨 기계에 끼어버렸는데 프랜시스만이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톱니바퀴 사이로 갈려 들어가지 않도록 옷깃을 붙잡고서 혼자 아득바득 끌어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스펜서는 나날이 프랜시스의 손아귀에서 조금씩 빠져나가는 듯했다. - P647

둘은 만나기만 하면 이런 식이었다. 바이니 씨의 거실에서나, 베라의 침실에서나, 월워스 거리로 나가는 출입문 앞 어두침침한 복도에서, 툭 하면 속닥거리며 말다툼을 벌였다. 아니면 아예 아무 말도 않고 마주 앉아만 있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죽음 같은 침묵을 깨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둘이 계획했던 미래는 다 어디로 갔나?
미술학교에 다니고, 빵과 버터로 근근이 끼니를 때우는... 프랜시스는 함께 꿈꿨던 둘만의 방을 떠올려보았다. 한때는 자신이 그 방의 문을 닫고 열쇠를 돌려서 온 세상을 차단해버리는 순간이 눈앞에 보이기까지 했는데. 하긴 지금도 그들은 둘만의 방에 있기는 했다. 치명적인 비밀이라는 방 안에 이미 감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쩔 땐화가 치밀었다. 어쩔 땐 설움이 북받쳤다. 어쩔 땐 헤어지기 전에 서로 끌어안기도 했고, 그러면 또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다 한번은 릴리안이 갈망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나를 사랑해?"라고 물었는데, 마치 베라나 민에게서 그런 질문을 들은 것처럼 신경에거슬렸다. 프랜시스는 릴리안을 끌어당겨 키스해주었지만, 그건 무엇보다도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 P658

그날 밤 프랜시스는 바이올렛의 인형 유모차 같은 수레에다 레너드의 시체를 싣고서 북적거리는 거리로 나아가는 꿈을 꿨다. 시체를 덮은 것이라고는 작은 인형 이불 한 장뿐이었다. 레너드의 머리를 가리려고 이불을 끌어 올리면 밑으로 퍼드러진 두 다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그걸 가리려고 이불을 도로 홱 끌어 내리면 부풀어 오른 보랏빛 얼굴이 노출되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을 땐 어두컴컴한 새벽이었다. 그런데 깨고 나서 그녀에게 남은 감정은 레너드의 시체를 유모차로 실어 나르는 공포가 아니었다. 외로움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완전히 혼자서, 범죄의 책임을 모조리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릴리안은 어디 있나? 릴리안은 떠나버렸다! 프랜시스는 버림받은 아이가 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릴리안에게 마음을 주었는데, 릴리안은 반쪽짜리 진실, 회피, 발뺌, 거짓말밖에 주지 않았다. - P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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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오랫동안 운동선수들에게 성별 검사를 받도록 요구하고 있다. 처음에 사용된 방법은 신체검사였고 이후에 호르몬 수치 측정, 그다음으로 염색체 검사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검사를 뒷받침하는 논리는 분명하다. 테스토스테론이 육체를 강화하는 까닭에 남성과 여성이 운동 경기에서 따로 경쟁을 펼치지 않으면 우승은 거의 남성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검사 자체에는 모순과 문제가 많다.
200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육상 선수 카스터 세메냐는 세계 육상선수권대회 IAAF 여자 800m 경기에서 우승한 뒤에 성별 검사를 받았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그녀가 <희귀한 의학적 상태>이며 불공평한이점을 가졌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검사 결과 세메냐는 자궁과 난소 대신 몸 안에 고환을 가지고 있었으며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유전적인 여성의 평균 수치보다 세 배나 높았다. 이 논쟁의 여파로 IOC는 남성호르몬이 과다한 여성이 경기에서 실격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치가 개인마다 매우 상이하기 때문에 여성에게 정상적인 남성호르몬 수치가 있다는발상은 허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IOC에서는 전문가 집단이 모든 의혹을 검토하되 엄격하게 비밀을 유지한 채 각각의 사례별로 재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최근의 논쟁이 있기 이전에도 IOC 의무 분과 위원장 아르네 융크비스트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 수 있는 과학적으로 타당하며 실험을 통해 증명된 기술은 없다>‘고 주장했다. 세메냐는 자신의 굴욕적인시련에 대해 하느님은 지금 내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나를 만드셨다. 나는그런 나 자신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 P458

수 있는 왕복 티켓이한편으로 나는 선택이. 특히 일상적이지 않은 선택이 부담스럽고 고단하며 두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내가 처음으로 쓴 책은 소련의 예술가 집단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들이 서구 사회로 넘어왔을 때 나는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서로 다른 상표의 20가지 버터가 진열되어 있던 독일 슈퍼마켓에서 서구 사회가 그에게 요구하는 수많은 선택을 견딜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데 능숙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선거 민주주의에서 자신의 투표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거나, 사상 최고의 이혼율을 보이거나, 가족계획 없이 태어난 아이에게 애정을 주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재량이 주어지면 오히려 스스로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서 선택은 우리가 누릴 수있는 단 하나뿐인 진정한 호사이며 의사 결정 과정에 내재된 노력이야말로 결정을 가치 있게 만든다고 믿는다. 오늘날의 미국에서 선택은 열망의 가치를 보여 준다. 나는 피곤한 선택이 수반될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모든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미래가 온다면아마도 나는 내가 지금 가진 것들을 선택할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 - P474

그 뒤로 20년동안 사회가 크게 변화했고 2세를 갖는 문제로 나는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미처 준비가 되기 전에 2세를 갖기로 앞서 결단을 내린 다른 동성애자들의 공이 컸다. 그럼에도 보다 최근에 내가 친자식을 갖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치자, 사람들은 대체로 훌륭한 가정이 절실하게 필요한 버려진 아이들도 많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상기시키면서 내 바람을 거듭 평가절하했다. 이미 친자식이있고 본인이 직접 입양하는 문제는 한 번도 고려한 적 없는 사람들이 그런주장을 밥 먹듯 내세우는 행태가 충격적이었다. 친자식을 갖길 원하는 동성애자의 바람은 사람들에게 유별나거나 방종한 욕심처럼 비쳐졌다.
동성애가 유전되는 형질이 아닌 까닭에 나는 미래의 내 아이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대신 이상한 환경에 처하게 해서 그들에게 잠재적인 불편을 초래할 터였고, 일부 비평가들은 그 편이 차라리 문제가 덜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태어날 내 아이가 이성애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낳아도 괜찮다는 암시가 싫다. 수직적 정체성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수평적 정체성을 수용한다는 이런 식의 태도는 극단적인 우월주의다. 미래의 내 아이가 게이가 될 확률이 높다고 알았다면 나는 친자식에 대한 욕심을 그토록 일찌감치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아이가 이성애자가 될 확률이 높다고 해서 단념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내 아이가 난독증이나 우울증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거나, 내게서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빼앗은 암 같은 것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등의 우려 때문도 아니었다. 요컨대 게이 아버지가 되는 데 따른 나 자신의 불안감이 크게 작용했을 뿐이다. - P479

소인이나 청각 장애인 가족처럼 그녀의 가족 내에서는 수직적 정체성이 틀림없이 일종의 소속감을 보장할 것이다. 그럼에도 처참한 몸 상태로 태어난 자녀의 잠재적 현실에 대한 그녀의 교감 부족은 우려를 자아낸다.
다수의 글을 통해서 그녀는 그녀와 남편의 질환이 자식들에게 많은 육체적 고통을 유발했다고 인정했으며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일관되게 명백한 태도를 보여 준 듯하다. 이를테면 그녀는 사회적 장애 모델을 제시하고자 자식의 건강을 희생시킨 셈이다. 나는 자신의 특별한 도전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들을 많이 만났고 행복해하는 그들의 가족들을 만났다. 아울러 꼭 외부적인 환경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그들의 아픔도 목격했다. 실제로 쿼파시아 존스의 결정은 가족들에게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어머니는 우리 부부가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 자체가 무책임하다고 설명하면서 내게 아기를 지우라고 요구했다. 한편 남편의 어머니는 내가 달이 찰 때까지 아기를 배고 있지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특별한 큰 통증 없이 출산일이 11일이나 지났음을 알았을 때 나는 흐뭇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게 많은 설명이 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자아 혼동은 인구통계학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자녀에게 나름의 꿈을 키우도록 도와주는 행위와 자녀를 부모의 틀 안에 가두는 행위의 차이를 구별하는 일은 결코쉽지 않다. 쿼파시아 존스의 아이들은 그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괴로워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어머니가 어떤 특정한 목적에서 그들을 낳았다고 판단할 경우 무척 분개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생각에빠져 있는 부모들은 예컨대 축구장이나 체스 클럽, 피아노 공연장 등 어디에서나 자녀를 그들 자신의 후광으로 이용한다. 나르시시즘은 장애 인권운동가조차 피해갈 수 없는 근시안적인 소견이다. - P481

인간은 이런저런 것들을 고치길 좋아한다. 인간이 날씨를 마음대로 조종할 줄 알게 된다면 아마도 얼마 못 가서 우리는 허리케인의 장엄함도 보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눈보라에 뒤따라오는 정적도 용납하지 않을것이다. 독물학자 마르크 라페Marc Lappé는 이미 40년 전에 <유전적인 장애를 《정복》하는 일에만 너무 집착해서 우리가 검사를 통해 낙태시키는《불량품들이 우리보다 훨씬 인간적임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정말 생각하기도싫고 비윤리적인 처사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2005년에 저널리스트 패트리샤 E. 바우어 Patricia E. Bauer는 「워싱턴 포스트」에태아기 검사에서 다운증후군 진단을 받은 딸을 그녀가 그대로 낳기로 하면서 견뎌야 했던 압박감을 설명했다. 그녀는 <태아에게 장애가 있을 경우 낙태할 수 있는 권리를 태아기 검사는 그 아이를 낙태하는 것이 마치부모의 의무인 양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여성도 당사자가 두려워하는 임신을 강요받지 말아야 하고, 또 어떤 여성도 당사자의 의지에반해서 낙태를 강요받지 말아야 한다. 수평적 특징을 가진 자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태아기 검사를 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그들의 아이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생식에 관련된 과학기술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어떤 아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우리가 어떤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추측한다. 이러한 추측을 기피하는 것도무책임한 행동일 수 있지만 추측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무지한 행동이다. 가정에 근거한 사랑은 실질적인 사랑과 아무런 공통점이없는 까닭이다. - P489

그럼에도 만약 50년 전이었다면이 책에서 살펴본 범주의 그 누구도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한 사실은 그들 대다수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과학기술의 아찔한발전이 보다 관대한 세상을 추구하는 정체성 정치학과 병행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갈수록 더 다양해지고 있으며, 이 다양성에 따라오는 관용의 교훈은 지나친 박탈감으로 자신의 요구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나 시민 평등권 운동가들이 상상했던 그 어떤 것보다 광범위한 변화였다. 그 결과 이제는 장애인들이 텔레비전에 출연하고, 트랜스젠더가 공무원으로 일하며, 자원봉사자들이 범죄자와 신동, 강간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세상이 되었다. 또한 정신분열증이나 자폐증을 앓는 사람들을 위한 직업 훈련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세상이 되었다. - P490

<특별함>은 숫자로 결정되는 숫자 게임이다. 우리는 특별한 어떤 것이 좋거나 나쁘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어떤 것이 특별하다고 또는 그렇지않다고 실효성 있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특별함>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주장에 의해 끊임없이 휘둘린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반면, 특별한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태도를 고수한다. 우둔한 사람이 놀라운 존재로 여겨지길 좋아한다면 뛰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소박한 위안을 얻고자 한다. 평범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녀가 보여 주는 믿기지않을 정도로 특별한 행동을 부각시켜 이야기하고, 명백히 특별한 자녀를둔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가 심각한 질병이나 놀라운 재능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이런 엇갈린 태도는 우리가 차이를 갈망하는 동시에 거부한다는 보다 큰 이중성을 보여 준다. 요컨대 우리는 개성을 열망하는 동시에 두려워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물려받는 가장 도전적인 차이는 그들의 부모에게 익숙하지 않은 영역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녀의 실제 모습을 어느 정도 부풀리거나 축소해서 이야기하려는 부모의 성향은 개성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그들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다. - P491

이상적으로는 부모가 수용의 깊이를 더할수록 자식은 보다 진정한 자아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런 가족 내에서는 가족 중 누가 왜소증이나 자폐증, 신동,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 장애 아동은 그 부모에게 다른 누구보다 이상적인 자식이며, 가족이라는 소국의 시민으로 오롯이 인정받는다.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자식에게 장애가 있어도 무조건 사랑해야 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장애가 있는 자식을 둔 부모는 어쩌면 자식의 불완전함 속에서 놀라운 진실을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현명한 어떤 정신과 의사는 내게 <사람들이 점점 더 나아지길 바라면서 변화는 싫어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나는 수평적 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에게 변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그들을 나아지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누구나 보다 행복한 자신이 될 수 있지만 완전히 다른 누군가가 될 수는 없다. - P493

<다양성>이란 속된 말로 나이트클럽에서 소수 민족의 입장을 허용해야 하고 대학이 동성애자의 입학을 허가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용어가 균형 잡힌 투자 전략을 의미하거나 숲이나 바다, 늪지 등의 종(種) 다양성을의미하는 경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이타적인 마음이 다양성을 유효하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내가 대학을 다닌 마을에는 오랫동안그 마을의 명물로 내려오는 느릅나무들이 있었다. 실제로 그 마을은 네덜란드 느릅나무 병이 북아메리카를 덮쳐서 마을의 길거리와 공원을 온통 벌거숭이로 만들기 전까지 느릅나무 도시로 불렸다." 변화에 직면할 때단일 문화는 걸림돌이 된다. 사회적 가치가 극적으로 변하고, 물리적 환경이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달라지는 가속화된 대 변화의 시대에 무엇이 적응해서 끝까지 남을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왜소증이나 청각 장애, 범죄 성향, 동성애 등을 어떤 중요한 문제의 해답으로서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를 느릅나무로 만들려는 발상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비록 그렇게 할 경우 느릅나무와 조화를 이루어 길게 이어진 골목들이며, 대칭 형태로 줄을 맞춰 늘어선 고상한 느릅나무 몸통이 보기 좋을 수는 있지만 도시 전체의 조경을 계획하는 측면에서는 무책임한방식이다. - P494

가족과 이 책을 둘러싼 여정을 통해서 나는 사랑이 확대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즉 어떤 사랑이든 늘어난다면세상의 다른 사랑도 그만큼 강해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또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행동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떤가족이든 그들의 사랑으로 다른 모든 가족들의 사랑을 강화할 수 있음을배웠다. 나는 생식 과정의 자유의지론을 신봉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양한 선택권이 있을 때 사랑 그 자체가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서 찾은 사랑은 보다 나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식의 사랑이고, 이 행성이 지속하기 위해 종 다양성을 유지가 필수적인 것처럼 사랑의 다양성은 배려의 생태계를 강화한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도 종국에는 동일한 곳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 P516

50년 전에는 우리 같은 가족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나는 진보를 옹호할 수밖에 없다. 내 입장에서 변화는 늘 좋은 것이었고도움도 많이 받았다. 나는 지금의 이런 이야기들이 세상의 거친 표면을 매끄럽게 연마하는 격류에 일조하길 희망한다. 이 세상이 매끄러워질 때까지 사랑은 계속되는 포위 공격에도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주변의 위협이사랑을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들지라도 사랑은 위협 속에서 오히려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 책의 주제인 냉혹한 상실의 순간에 직면해서 사랑은 자칫 흔들릴 수 있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 준다. 나는 조지가 스타트랙」에 등장하는 소품처럼 생긴 CT 촬영 기계에 누워 있을 때 그에게 아주선명하고 무서운 어떤 감정을 느꼈다. 아직 그런 불행한 일을 맞닥뜨린 적이 없는 작은 블레인이나, 나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자아가 완성되어 있던 올리버나 루시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들 모두와 나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아이들은 내가 아버지로서 상실감에 빠질 뻔했던 바로 그 순간에 나를 붙잡아 주었다. 하지만 내가 이 연구를 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과연 그 사실을 인지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토록 많은 이례적인 사랑을 접하면서 나는 그런 사랑의 황홀한 방식에 매료되었고 아무리 비참한 취약성도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목격했다. 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책임이 주는 놀라운 기쁨을 보고 배웠으며, 그 기쁨이 어떻게 삶의 다른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되었다. 이례적인 아이들과 함께하는 인생행로에서 스스로 노예가 되길 자청하고, 고통을 정체성으로 승화시키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 책의 영웅적인 부모들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연구를통해 내게도 삶의 강령이 생겼으며, 마침내 내가 그들과 같은 배에 탈 준비가 되었음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P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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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의 손아귀 안에서 릴리안은 무슨 물건처럼 흔들렸다. 마치 융단이나 식탁보를 탈탈 털어 빵 부스러기를 떨어내는 걸 보는 듯했다. 프랜시스는 뛰어가서 그의 손가락을 떼어내려 했지만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급기야 그의 칼라 뒷덜미를 붙잡고 끌어당기자 레너드는 어깨로 그녀를 밀쳐버렸다. 프랜시스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레너드는 릴리안을 계속 흔들면서 얼굴에 대고 윽박질렀다. "누구야? 이름 불어. 어디 사는 놈이야? 말해!"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프랜시스의 안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진 것 같았다.
"내가 그 남자야, 레너드!" 그녀가 고함쳤다. "내가 바로 그 남자야. 알겠어? 릴리안과 나는 연인 사이야. 몇 달 전부터 그랬어.."
지금껏 숱하게 상상했던 말이었다. 레너드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할 기회가 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왔다. 홀로 침대에 누워, 릴리안의 옆에 레너드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외로움과 분노에 사무쳐 잠들어야 했던 그 수많은 밤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꿈꿔왔던 환상과 전혀 달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새되게 갈라지고 떨렸고, 승리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일말의 승리감도 없었다. 레너드는 프랜시스의 간섭이 마냥 성가신 듯 또 그녀를 밀치고 아내를 제대로 붙잡을 기세였지만, 프랜시스의 표정을 보고서야 그 말뜻이 비로소 머리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손을 놓았다. 릴리안은 소파에 팍삭 널브러졌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덜룩해진 얼굴을 그린 채, 죄책감이 뻔히 드러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너드가 입을 열었다. "사실이야? 프랜시스가 한 말?"
잠시 망설인 끝에 릴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드는 프랜시스를 돌아보았다. 그 숨김없는 눈빛을 마주한 순간, 프랜시스는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그를 배신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얼굴을 실룩거리다가, 입을 한일자로 앙다물고서 몇 차례 콧바람을 씨근거렸다. 그리고 두 여자 모두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소파에서 두세 발짝 물러났다. - P421

레너드가 프랜시스의 발목을 걷어찼다. 둘은 함께 앞으로 기우뚱거렸다. 다시 몸을 똑바로 세운 순간, 레너드가 릴리안에게 또 한 번 얻어맞는 감각이 전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뭇 다른 소리가 났다. 퍽하는 소리이긴 했는데, 크리켓 방망이로 젖은 공을 후려친 것처럼 질척한 느낌이었다. 레너드는 요란한 신음과 함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프랜시스를 꿇어앉히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내리누르다가, 손아귀의 힘이 풀어지면서 바닥에 털썩 엎어졌다. 프랜시스는 그가 미끄러운 카펫 위에서 발을 헛디뎠는 줄 알았다. 고개를 돌리니 레너드에게서 몇 발짝 뒤에 떨어져 있는 릴리안이 보였지만, 그녀의 손에 쥐인 곤봉 같은 것도 보였지만, 그 순간 ‘저게 뭐지? 재떨이! 스탠드 재떨이잖아!‘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릴리안이나 재떨이가 레너드가 쓰러진 것과 하둥의 연관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녀는 레너드가 다시 일어나 자신을 붙잡기 전에 얼른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릴리안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길을 좇아 시선을 내려보니, 레너드는 다시 일어나기는커녕 그 자리에 잠잠히 엎드려 있었다. 얼굴이 카펫에 눌려 짜부라지고 두 팔을 자기 가슴 밑에 깔아뭉갠 채로 얕고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모습도그렇고 숨소리도 그렇고, 꼭 고주망태가 된 술꾼처럼 보였다. 귓가로 추켜올려진 외투 옷깃 때문에 뒷머리는 그림자에 파묻혀 보이지 않왔다. - P423

프랜시스는 쿠션으로 레너드의 머리를 계속 누르면서 몸을 굴려 반듯이 눕혀보았다. 그러자 레너드의 입에서 한줄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릴리안이 후닥닥 다가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레너드의 신음은 마치 가방을 패대기쳤을 때 주둥이에서 쉭 새어 나오는 바람처럼 기묘하게 생기가 없었고, 게다가 사지가 몸뚱이와 같이 움직이질 않고 처음 쓰러졌을 때의 위치에 축 늘어져 있었다. 프랜시스는 레너드의 두 팔을 잡아 들었다가 다시 떨어뜨려보고, 가슴과 복부를 손으로 눌러보면서 폐에 공기를 넣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도, 반쯤 열린 눈꺼풀 너머의 눈동자와 입술, 분홍색 혀에서 습기가 말라가는 게 보였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닮은 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무언가 커다랗고 텅비어 있고 잘못되어버린 물체.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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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환은 여전히 의료계와 치료 단체에 의존한다. 최상의 경우에 이런 현실이 의미하는 바는 책임 있는 전문가들이 부모의 두려움과 욕망을 자녀들의 그것들과 분리하고, 불변의 명령과 일시적인 노이로제를 구별할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벅찬 임무일 수 있다. 정신의학과 내분비학, 신경 인지학을 분리하는 것은 한심할 정도로 구식이다. 요컨대 현대 정신의학은 정서장애 및 사고장애의 화학적 경로를 찾고 있지만 정신과 뇌를 구분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아직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성정체성 장애처럼 복잡한 질환은 동시에 여러 각도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위원회에서 일하는 하이노 메이어-발부르그는성 정체성 장애에 대해서 <순전히 과학적인 근거로만 설명될 수 없다>고인정했다.  - P406

부모로서 트랜스젠더 자녀를 염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은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09년에 전국 트랜스젠더 평등 센터와 전미 게이 레즈비언 태스크포스재단은 미국의 모든 주와 영토에서 일반인의 인구 분포와 대체로 비슷한 분포를 보이는 트랜스젠더들에 대해 광범위한 설문 조사를 벌이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설문지가 온라인으로 배포되었다는 점에서 조사가 상대적으로 특권층에게 치우친 감은 있다.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다섯명중 네 명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육체적 또는 성적으로 폭행을당했고, 그런 사례 중 대략 절반은 교사에 의한 것이었다. 일반인 가운데 대학 이상의 교육을 받는 사람들 숫자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데 반해 트랜스젠더는 90퍼센트 정도가 적어도 대학을 졸업했지만 실업률은 일반인의 두 배였다. 10명 중 한 명은 직장에서 성폭행을 당했으며, 비슷한 비율로 육체적인 폭행을 당했다. 4분의 1이 젠더 불일치로 해고된 적이 있었다. 트랜스젠더가 빈곤을 겪는 비율은 미국 전체 비율의 두 배이다. 5명 중 한 명은 집이 없었으며 그들 중 3분의 1은 쉼터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그들의 젠더 문제 때문에 거부당한 적이 있었다. 3분의 1은 무례나 차별 때문에 병원 진료를 연기하거나 회피했다. 일반인의 2퍼센트가 자살을 시도하는데 반해 트랜스 청소년은 절반 이상이 자살을 시도했다. 약물 남용과 우울증의 비율은 충격적인 수준이다. 집 없는 청소년들의 20~40퍼센트가 동성애자나 트랜스이고, 유색 인종 트랜스젠더들의 절반 이상이 길거리에서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성매매를 하다가 뉴욕 퀸즈의 트랜스 아동쉼터에서 지내는 한 청소년이 말했다. 「나는 주목받는 것이 좋아요. 사랑받는 느낌이 들거든요. - P431

중도 장애 아동이나 자폐 아동, 정신분열증을 겪는 아동,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 중 상당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건강한 아이에 비해 사망할 위힘이 훨씬 높다. 하지만 트랜스 자녀를 둔 부모의 경우는 독특하다. 그들은 똑같이 무서운 두 가지 가능성 사이를 오간다. 성전환을 할 수 없는 아이는 자살할 수 있는 반면 성전환한 아이는 그 때문에 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살인 사건이 매번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설령 알려지더라도 그 사건이 증오 범죄였다는 상황까지 알려지지 않는경우도 많다. 1999년 이후로 미국에서는 400명 이상의 트랜스젠더가 살해되었고,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단체는 살인에 관련된 증오 범죄의 발생률이 한 달에 한 건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전 세계적으로는 3일에 한 명꼴로 트랜스젠더가 살해된다. - P437

1990년에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에 두 가지 성별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뒤흔든 책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을 출간했다. 1999년에 다시쓴 서문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가능성을 여는 행동》이 궁극적으로무슨 소용이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 즉 명료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으며 비현실적이고 불법적인 존재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10‘ 책이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가능성은 버틀러가 희망했던 것보다도 넓게 열려 있다. 미국 중서부 지역의 대학 교수인 친구가가르치던 학생 중 한 명은 자신의 첫 아이 이름을 에이버리라고 지을 계획이라고 자진해서 말했다. 「나는 에이버리가 좋은 것 같아요. 중성적인 이름이니까 아이가 나중에 타고난 성별과 다른 성별을 갖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그 이름을 쓸 수 있잖아요.」 노먼 스팩도 비슷한 대화를 언급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남들과 다른 사람들이 뒤처지지 않는 새로운 시대〉라고칭했다. 젠더에 관한 가벼운 대화는 예전보다 훨씬 더 흔한 일이 되었다. 메이어-발부르그는 <트랜스젠더리즘이 어느 정도는 유행처럼 되었다고주장했다. 메이어-발부르그의 주장은 나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내가 대학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은 혁명적인 감정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개성을 어필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젠더퀴어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자신의 젠더에 대해 유동적인 입장이었지만 성별 불쾌감은 보이지 않았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이런 현상이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출생 성별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황과는 공통점이 매우 적었다. - P447

긍정심리학 분야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에미 워너Emmy Wemer는 성역할 및 회복탄력성과 성 역할의 관계에 대해 많은 글을 썼으며, 회복탄력성을 가진 아이들이 하나같이 전통적인 성 역할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을발견했다. 「회복탄력성이 있는 남자아이들은 자기주장이 무척 강하기도 하지만 울어야 할 때는 기꺼이 눈물을 흘린다. 또한 회복탄력성이 있는 여자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보살피고 배려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 전통적인 성 역할에 충실한 양육은 인생의 돌발 사태에 직면했을 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젠더 세계에서는 2년 전까지도 진보적이었던 정책이 오늘날에는 보수적이 된다. 브릴이 오클랜드의 한 어머니를 예로 들었다. 그 어머니는 트랜스젠더 학생들을 포용하려는 학교의 정책이 젠더가 유동적인 아이들에 대한 우려를 명확하게 반영하지 않는다면서 불만을 제기했다. 실제로 이런식의 진전을 불편하게 여기는 트랜스젠더들도 있다. 르네 리처즈는 1970년대에 성전환을 한 이후로 여자 프로 테니스 경기에 출전할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을 벌여 왔다. 그녀는 <하느님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면서 성별 다양성을 갖도록 하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젠더를 실험하는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다음 <나는 트랜스젠더가 중간에 있는 존재. 예컨대 제3의 성 혹은 비현실적인 별난 미치광이가 되는 것을 바라지않는다>고 덧붙였다. - P454

성전환 초기에 엘리엇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 「나는 때때로 나인 남자 엘리엇-가 저 바깥 어딘가에서 내가 그를 찾아 주기를, 내가 나 자신이 되는 법을 알아내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것이 불안정하게 느껴져서 불안하다. 어디에서 이정표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를 절대 찾아내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 하지만 내게 정말 소중한 어떤 이가 언젠가 말했다. <괜찮아. 너는 강해. 그리고 엘리엇이라고?그가 너를 찾을거야.> - P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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