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리들리 박사의 알약과 핏물, 레너드, 그리고 계단과 정원을 거친 무시무시한 여정까지도 너무나 강렬한 충동이었다. 말해도 되나? 확 말해버릴까? 그날 밤의 기억을 하도 들고파며 곱씹은 나머지 객관적인 시야가 무너져버렸다. 자신과 릴리안이 한 일이 그렇게까지 나쁜 짓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범죄라고 할 것도 아니었지 않나. 둘이서 지레 공포와 죄책감에 사로잡혀 절절매니까 범죄처럼 느껴지는 것뿐, 실제로는 어리석은 실수로 빚어진 재난에 불과하다. 크리시에게 다 털어놓아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럼 크리시는 아연실색해서 쳐다볼 테고 •••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구겨진 드레스와 진흙 색깔 카디건이 눈에 들어왔다. 지저분한 방안 풍경이, 엉터리 보헤미안풍 인테리어가 보였다. 이제껏 여기서 한 거짓말이라고는 죄다 무해한 것밖에 없었다. 타락하지 않은, 안전한 거짓말밖엔•••. 프랜시스는 크리시에게 아무것도밝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자신이 아무것도 밝히지않으면 그녀와의 사이에 금이 가리라는 것도, 이미 금이 생겨버렸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날 밤 내가 정원에서 봤던 게 바로 이거구나.‘ 암담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프랜시스는 평범한 세상 밖으로 벗어나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릴리안이 그녀를 끌고 나갔다고 해겠지만, 그렇다고 릴리안을 탓하지는 않았다. 절대로 그러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아아, 릴리안은 왜 하필 재떨이를 집어 들었나? 이건 너무나 가혹했다! 겨우 그녀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참이었는데, 프랜시스는 이미 삶을 한 번 빼앗겼다. 바로 여기서 크리스티나와 함께할수도 있었던 삶을 빼앗겨버렸다. 그런데 지금 이 삶마저 또 빼앗겨야한단 말인가? - P598
‘친밀한 관계‘... ‘유부남 바버 씨.... 마치 공중에 흩뿌려진 무수한 동전 같은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니다가 멈춘 것처럼, 그 말들이 겨우 머릿속에 들어와 제대로 파악이 되었다. 그동안 레너드도 외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여자를 빌리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남자친구가 레너드를 죽인 용의자로 검거된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배신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레너드가 그동안 뒤에서 이딴 짓을 하고 다니면서 앞에서는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 자신이 그에게 감쪽같이 속았다는 데에 격분이 치밀었다. 그런데그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검거당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에 생각이 미치자 속이 메스꺼워졌다. " 안돼, 안돼, 안돼. 이건 말도 안 돼." "무슨..." "이건 너무 끔찍해, 크리시!" "뭐? 아니, 왜... 경찰이 살인범을 잡았으면, 이제 다 해결된 거 아니야?" "아니야! 이해가 안 돼?" 크리스티나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이 아수라장을 그녀가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경찰은 무고한 사람을 체포한 것이다! 프랜시스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해버릴까? 다시금 갈등이 일었다. ‘말해도 될까? 진짜로?‘ - P603
경악이 분노로 바뀌었다. 너무나 순전하고 철저한 분노여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그 감정이 지금껏 내내 프랜시스의 안에서 밖으로나올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자신이 지난 열흘간 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벽들을 미친 듯이 떠받치며 지냈던 나날이 기억났다. 크리스티나와의 우정에 금이 갔던 순간도 어머니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의혹도.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휴가 갔을 때 네가 임신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임신이라는 걸 아는 상태에서 그 티켓을 본 거야. 맞지?" "이러지 마, 프랜시스.." "맞잖아?" "제발...." "애를 지우고 싶었던 것도 당연하네." 릴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아니야, 그건 오로지 너랑 나를위해서 한 일이었어." "재떨이를 그렇게 세게 휘두른 것도 무리가 아니었고." "하지만... 나는 그걸 휘두를 생각이 아예 없었는걸. 너도 알잖아. 그건 실수였어." 프랜시스는 릴리안을 빤히 마주 보았다. "정말?" 미리 생각해둔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그 의문 역시 진작부터 마음속을 맴돌면서 밖으로 나오려 기를 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켐프 경위에게 생명보험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아니면 그 전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던 순간부터? 자신이 레너드의 등에 귀를 대보고 심장박동이 들리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던 그때부터? - P614
"그 말 좀 그만해!" 프랜시스가 쏘아붙였다. "너는 항상 그 말뿐이었어! 맨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다고! 우리가 처음 공원에 갔을 때... 기억나? 서로 잘 알지도 못했던 그때, 같이 공원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언덕을 올라가는데… 네가 나를 차도 쪽으로 몰고 인도 안쪽으로 비켜서더라. 너만 인도 안쪽에서 걸었다고, 릴리안. 그때는 너의 그런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너는 그때부터 지금껏 항상 안쪽에서만 걸었어. 영원히 그럴 순 없는 거야. 넌 거기서 나와야 돼. 지금 당장." 프랜시스의 어조가 아래층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부엌에 있는 여자들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듯 잠잠해진 게 느껴졌다. 릴리안도 식구들을 의식했는지, 그 자리에 웅크려 앉은 채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올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릴리안의 표정이 변하면서 얼굴이 반듯하게 퍼졌다. 릴리안은 잠자코 일어나 침대 옆으로 걸어 나오더니, 천천히, 퉁명스럽게, 외출 준비를 했다. 소매 안에서 젖은 손수건을 빼내 깨끗한 손수건으로 바꿨다. 서랍 안의 깡통에서 잔돈을 얼마나 꺼낼지 망설이다가 지폐 뭉치에 동전을 감싸서 모조리 핸드백에 넣었다. 화장대 거울 앞에서서 얼굴과 부어오른 눈꺼풀에 파우더를 칠하고, 뺨과 입술에 루주를 찍어 바르고, 빗으로 정성껏 머리를 빗었다. 프랜시스는 그걸 쭉 지켜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릴리안이 미적거리거나, 더듬거리거나, 울음을 터뜨릴 줄 알았는데,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한결같이 주의 깊은 태도로 방 한쪽의 벽감에 쳐진 커튼을 젖히더니, 가로대에 걸린 옷들 중에서 자기 코트를 빼내고는 거울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코트를 걸쳐 입고서 칼라를 매만져 편 다음, 앞자락에 길게 줄지어 달려 있는 많은 단추들을 하나씩, 침착하게 잠그기 시작했다. - P616
프랜시스는 허공을 빤히 노려보며, 찰리의 진술에서 드러난 추저분한 진실들과 지난 몇 달간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들을 짜 맞추고 있었다. 지난 여름 레너드가 야근을 한다고 귀가가 늦어졌던 나날들이 기억났다. 그가 특유의 과장스러운 투로 하품을 하면서 집에 들어왔던 날이며, 밤늦게 휘파람을 불며 들어와서는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던 날이 기억났다. 그때마다 레너드는 사실 그 여자를 만나고 온 것이었다. 현관문에 열쇠가 꽂히는 소리에 프랜시스와 릴리안이 서로에게서 후닥닥 떨어졌던 그때마다, 레너드는 그 여자와 막 키스하고 왔던 것이다. 프랜시스는 고개를 수그리고 입가에 손을 얹었다. 얽히고설킨 지저분한 거짓말과 불륜의 연결 고리가 이제야 처음으로 명확하게 눈에 보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연결 고리의 한쪽끝에 엮여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레너드가, 그리고 다른 쪽 맨 끝에는, 정확히 누가 있나? 바로 저 소년이 있었다! 피의자석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히죽거리며, 디킨스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불결하고고약한 이빨을 떡하니 드러낸 저 소년! 프랜시스는 릴리안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찰나의 한순간, 증오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만큼 격한 분노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어?‘ 릴리안에게 그렇게 악을 쓰고 싶었다. ‘어떻게 나를 이딴 일에 끌어들일수가 있어? 이런 곳에, 이 끔찍한 방에, 추잡한 사람들과 그들이 흘리고 다닌 역겨운 찌꺼기들 사이에 나를 끌고 들어오다니!‘ - P633
한 주가 흘러가는 동안 프랜시스는 착잡한 심경을 떨치지 못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앞으로 자신이 누릴 자유의 나날이 실감되어 안도감으로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옷을 갈아입고, 언덕 아래의 신문 가판대에 들르지않을 수 없었다. 단 하루라도 스펜서 워드를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면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이 단 하루라도 그를 염려하고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사라져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스펜서가무슨 기계에 끼어버렸는데 프랜시스만이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톱니바퀴 사이로 갈려 들어가지 않도록 옷깃을 붙잡고서 혼자 아득바득 끌어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스펜서는 나날이 프랜시스의 손아귀에서 조금씩 빠져나가는 듯했다. - P647
둘은 만나기만 하면 이런 식이었다. 바이니 씨의 거실에서나, 베라의 침실에서나, 월워스 거리로 나가는 출입문 앞 어두침침한 복도에서, 툭 하면 속닥거리며 말다툼을 벌였다. 아니면 아예 아무 말도 않고 마주 앉아만 있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죽음 같은 침묵을 깨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둘이 계획했던 미래는 다 어디로 갔나? 미술학교에 다니고, 빵과 버터로 근근이 끼니를 때우는... 프랜시스는 함께 꿈꿨던 둘만의 방을 떠올려보았다. 한때는 자신이 그 방의 문을 닫고 열쇠를 돌려서 온 세상을 차단해버리는 순간이 눈앞에 보이기까지 했는데. 하긴 지금도 그들은 둘만의 방에 있기는 했다. 치명적인 비밀이라는 방 안에 이미 감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쩔 땐화가 치밀었다. 어쩔 땐 설움이 북받쳤다. 어쩔 땐 헤어지기 전에 서로 끌어안기도 했고, 그러면 또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다 한번은 릴리안이 갈망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나를 사랑해?"라고 물었는데, 마치 베라나 민에게서 그런 질문을 들은 것처럼 신경에거슬렸다. 프랜시스는 릴리안을 끌어당겨 키스해주었지만, 그건 무엇보다도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 P658
그날 밤 프랜시스는 바이올렛의 인형 유모차 같은 수레에다 레너드의 시체를 싣고서 북적거리는 거리로 나아가는 꿈을 꿨다. 시체를 덮은 것이라고는 작은 인형 이불 한 장뿐이었다. 레너드의 머리를 가리려고 이불을 끌어 올리면 밑으로 퍼드러진 두 다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그걸 가리려고 이불을 도로 홱 끌어 내리면 부풀어 오른 보랏빛 얼굴이 노출되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을 땐 어두컴컴한 새벽이었다. 그런데 깨고 나서 그녀에게 남은 감정은 레너드의 시체를 유모차로 실어 나르는 공포가 아니었다. 외로움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완전히 혼자서, 범죄의 책임을 모조리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릴리안은 어디 있나? 릴리안은 떠나버렸다! 프랜시스는 버림받은 아이가 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릴리안에게 마음을 주었는데, 릴리안은 반쪽짜리 진실, 회피, 발뺌, 거짓말밖에 주지 않았다. - P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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