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의 손아귀 안에서 릴리안은 무슨 물건처럼 흔들렸다. 마치 융단이나 식탁보를 탈탈 털어 빵 부스러기를 떨어내는 걸 보는 듯했다. 프랜시스는 뛰어가서 그의 손가락을 떼어내려 했지만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급기야 그의 칼라 뒷덜미를 붙잡고 끌어당기자 레너드는 어깨로 그녀를 밀쳐버렸다. 프랜시스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레너드는 릴리안을 계속 흔들면서 얼굴에 대고 윽박질렀다. "누구야? 이름 불어. 어디 사는 놈이야? 말해!"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프랜시스의 안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진 것 같았다. "내가 그 남자야, 레너드!" 그녀가 고함쳤다. "내가 바로 그 남자야. 알겠어? 릴리안과 나는 연인 사이야. 몇 달 전부터 그랬어.." 지금껏 숱하게 상상했던 말이었다. 레너드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할 기회가 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왔다. 홀로 침대에 누워, 릴리안의 옆에 레너드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외로움과 분노에 사무쳐 잠들어야 했던 그 수많은 밤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꿈꿔왔던 환상과 전혀 달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새되게 갈라지고 떨렸고, 승리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일말의 승리감도 없었다. 레너드는 프랜시스의 간섭이 마냥 성가신 듯 또 그녀를 밀치고 아내를 제대로 붙잡을 기세였지만, 프랜시스의 표정을 보고서야 그 말뜻이 비로소 머리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손을 놓았다. 릴리안은 소파에 팍삭 널브러졌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덜룩해진 얼굴을 그린 채, 죄책감이 뻔히 드러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너드가 입을 열었다. "사실이야? 프랜시스가 한 말?" 잠시 망설인 끝에 릴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드는 프랜시스를 돌아보았다. 그 숨김없는 눈빛을 마주한 순간, 프랜시스는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그를 배신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얼굴을 실룩거리다가, 입을 한일자로 앙다물고서 몇 차례 콧바람을 씨근거렸다. 그리고 두 여자 모두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소파에서 두세 발짝 물러났다. - P421
레너드가 프랜시스의 발목을 걷어찼다. 둘은 함께 앞으로 기우뚱거렸다. 다시 몸을 똑바로 세운 순간, 레너드가 릴리안에게 또 한 번 얻어맞는 감각이 전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뭇 다른 소리가 났다. 퍽하는 소리이긴 했는데, 크리켓 방망이로 젖은 공을 후려친 것처럼 질척한 느낌이었다. 레너드는 요란한 신음과 함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프랜시스를 꿇어앉히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내리누르다가, 손아귀의 힘이 풀어지면서 바닥에 털썩 엎어졌다. 프랜시스는 그가 미끄러운 카펫 위에서 발을 헛디뎠는 줄 알았다. 고개를 돌리니 레너드에게서 몇 발짝 뒤에 떨어져 있는 릴리안이 보였지만, 그녀의 손에 쥐인 곤봉 같은 것도 보였지만, 그 순간 ‘저게 뭐지? 재떨이! 스탠드 재떨이잖아!‘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릴리안이나 재떨이가 레너드가 쓰러진 것과 하둥의 연관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녀는 레너드가 다시 일어나 자신을 붙잡기 전에 얼른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릴리안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길을 좇아 시선을 내려보니, 레너드는 다시 일어나기는커녕 그 자리에 잠잠히 엎드려 있었다. 얼굴이 카펫에 눌려 짜부라지고 두 팔을 자기 가슴 밑에 깔아뭉갠 채로 얕고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모습도그렇고 숨소리도 그렇고, 꼭 고주망태가 된 술꾼처럼 보였다. 귓가로 추켜올려진 외투 옷깃 때문에 뒷머리는 그림자에 파묻혀 보이지 않왔다. - P423
프랜시스는 쿠션으로 레너드의 머리를 계속 누르면서 몸을 굴려 반듯이 눕혀보았다. 그러자 레너드의 입에서 한줄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릴리안이 후닥닥 다가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레너드의 신음은 마치 가방을 패대기쳤을 때 주둥이에서 쉭 새어 나오는 바람처럼 기묘하게 생기가 없었고, 게다가 사지가 몸뚱이와 같이 움직이질 않고 처음 쓰러졌을 때의 위치에 축 늘어져 있었다. 프랜시스는 레너드의 두 팔을 잡아 들었다가 다시 떨어뜨려보고, 가슴과 복부를 손으로 눌러보면서 폐에 공기를 넣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도, 반쯤 열린 눈꺼풀 너머의 눈동자와 입술, 분홍색 혀에서 습기가 말라가는 게 보였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닮은 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무언가 커다랗고 텅비어 있고 잘못되어버린 물체.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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