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끔찍하게도 방청석에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녀는 위층의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더니 입술을 실룩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우우 하고 야유를 보냈다. 그 야유가 빌리를 향한 건지, 콧방귀를 낀 사람을 향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빌리는 그 소리에 더욱 격하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건 진실하고, 성숙하고, 고통스러운 눈물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부어오르면서 비통한 감정이 만면에 떠올랐다. 관리원이 물을 한 잔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주워다 주는 것처럼 중립적이고 사무적인 태도였다. 트레실리안 씨는 냉담하고 무감동한 표정으로 기다리기만 했다. 빌리의 오열에 눈에 띄게 동요한 사람은 단한 명, 피고석에 선 소년이었다. 스펜서는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서기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얼핏보기로는 작고 하얗고 네모진 물건이길래 무슨 쪽지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스펜서는 증인석에 선 소녀가 눈물을 닦을 수 있도록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전해주려는 것이었다. 서기가 손수건을 건네받고 애매하게 머뭇거리자, 재판장이 그걸 보고는손짓해서 제지했다. - P699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무슨 일? 그게 무슨 뜻이니? 아아, 우리는 너무 울적해졌어! 이리나오거라 그렇게 어두운 곳에 있지 말고." "아니 잠시만요.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요. 제가 어머니에게늘 잘해드리지는 못했다는 건 알아요. 아버지에게도 그랬고요. 저는언제나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런데도 가끔은....." 어머니의 맞잡은 두 손에서 종잇장 같은 소리가 났다. "속상한 생각하지 말려무나 프랜시스. 로렌스 박사님 말씀을 생각해야지." "그냥 묻고 싶어요. 무슨 일이 있대도, 저를 경멸하시지는 않을 거지요 어머니?" "경멸하다니! 맙소사! 내가 왜 그러겠니?" "가끔은 삶이 뒤죽박죽 꼬여버려요. 어머니, 너무 심하게 꼬여서, 마치 모래 늪에 빠진 것 같을 때도 있어요. 한 발짝 디뎠더니, 빠져나올 수 없어서, 그래서...."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심란한,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너는 늘 만사에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프랜시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평범한 것뿐인데 말이다. 남편, 가정, 자식. 그렇게 평범한, 평범한 것들. 저택 문제는 걱정하지 말거라. 이 저택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 됐어. 사실 객식구들을 들일 만한 집도 아니잖니. 바버 부인은 여기 왔을 때부터 불행한 사람이었고, 너의... 너의 친절을 이용했던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는 않아. 하지만 내가 너를 경멸하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내가 내 손을 경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걸. 자, 이제 그만 내려가지 않으련?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자꾸나." - P717
터벅터벅 걸으면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안전하다, 나는 안전하다. 이제 모두가 안전하다. 자신도, 릴리안도, 그리고 그 소년도 이미 무죄로 밝혀진 사람이 똑같은 살인죄로 다시 체포될 리는 없다. 만약 경찰이 그를 정녕 범인이라고 믿는다면 법적 공방이 더 길어질수도 있겠지만••• 안 그럴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피고석에서서 인중에 맺힌 땀을 닦고 있던 그 소년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너는 안전하다, 너는 안전하다•••.‘ 아니, 하지만 이건 안전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그녀가 언제나 경멸해왔던, 전쟁 이후에 찾아온 안전과 같은 것이었다. 그걸 얻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다쳤으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쳤나! 생각하자니 욕지기가 올라왔다. 레너드, 레너드의 부모님, 스펜서, 그의 어머니, 빌리, 찰리••• 피해자명단이 한도 끝도 없어 보였다. 그 사람들이 그녀의 옆에서 같이 터덜터덜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유산된 아기도 있었다.... - P733
알 수 없었다.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프랜시스의 마음은 그렇게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녀와 맞닿은 릴리안의 손, 어깨, 엉덩이 이상으로는 조만간 둘 다 일어나야 할 것이다. 신문팔이 소년이석간신문이 나왔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쯤 어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릴리안의 가족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렇게 있을 수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은 바랄 수 없었다. 둘만의 돌 모퉁이에 앉아 있는 그들의 검은 옷이 황혼으로 번져 들고, 도시에는 불빛들이 켜지고, 하늘에는 희미한 별 몇 개가 돋아났기에. - P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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