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엔젤의 미니밴은 지금 막 도착했다.
"이제 왔군."
그는 손을 비볐다.
최근 그의 분노는 종종 심술궂게 좋은 기분으로 나타나곤 했다. 이 땅에 머물 시간이 점점 줄어들수록 자신이 천하무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만사가 자신의 계획대로 잘 따라주기만 한다면야. 리틀 엔젤이 대학에 가서 그 유럽 책들을 전부 읽으며 무어라 했더라?
"타인은 지옥이야."
약은 문제없이 들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뛰어난 그의 능력, 모든 사람과 모든 것, 심지어 죽음까지도 능가하는 그의 능력은 초능력이었다. ‘죽음 네까짓 게 뭐란 말이냐‘
벌레와 병아리나 죽는 거지, 천사는 죽지 않는다고.
골수암? 지난번에 약초와 미네랄을 발견했다고. 그걸 복용하면 산호초처럼 뼈가 다시 자라난다고! 비타민 C, 비타민D, 비타민 A도 있어. 차가버섯 차를 마시면 돼. 장내 종양? 강황을 먹으면 돼! 셀레늄도 있고. 저런, 저런.
"나는 천하무적이야." 그는 혼잣말을 했다. "나는 천하무적이아니야" - P93

그는 보이지 않는 인터뷰어에게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100세 가까이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도 최소한 그때까지는 살겠거니 싶었다.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어린애였다. 웃고 싶고, 좋은 책을 읽고 싶고, 모험을 떠나고 싶고, 페를라가 만든 알본디가스 수프를 한 번 더 먹고 싶었다. 대학에 갔다면 좋았을 텐데. 파리에 가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카리브 해협을 일주하는 크루즈를 탈걸 그랬어. 내심 스노클링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일단 건강해지면 하러 가야지. 그는 시애틀에 가볼 생각도 했다. 막냇동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봐야겠어. 그러다 불현듯, 자기가 샌디에이고의 북쪽인 라호이아에도 안 가봤다는게 떠올랐다. 그곳에서는 부자 미국 놈들이 다 모여서 선탠하고다이아몬드를 사대지. 그 해변을 걸어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성게와 조개껍데기를 줍지 않았지? 갑자기 성게가 꼭 한번가져봤어야 할 좋은 물건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디즈니랜드에 가보는 것도 까먹었군. 그는 충격을 받은 채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너무 바빠서 동물원에 가볼 새도 없었다니. 자기 이마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자나 호랑이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보고 싶은 건 코뿔소였다. 미니에게 코뿔소 모형을 좋은 놈으로 하나 사달라고 해야겠다. 그러자 그걸 또 어디다 둬야하나 고민이 되었다. 침대 옆에 둬야지. 딱 맞는 장소 아닌가. 그는 코뿔소였다. 그러니 죽음이란 놈을 들이받아 확 처박아버릴것이다. 랄로는 문신이 있지. 나도 하나 새겨보면 어떨까. 건강이좋아지면 말이다. - P104

"나의 엔젤, 무척 섹시하네."
페를라는 사람들이 다 모인 곳에서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온몸의 뼈가 죄다 석회처럼 굳어가고 다리가 밤낮으로 아픈데 섹시하기란 참 힘든 법이다. 게다가 기저귀까지 차고있지 않나. 그의 용감한 딸은 종종 이렇게 묻곤 했다.
"아빠, 아직 오줌 안쌌죠?"
예수님 제기랄. ‘죄송합니다. 주님.‘ 하지만 어쩌다가 그는 딸보다 더 작아져버렸을까?

내 자식들보다 더 키가 커지기

빅 엔젤은 언제나 가족의 지도자였다. 돈 안토니오가 가족들을 라파스에 굶어 죽게 내버려두었을 때, 형제자매들은 빅 엔젤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랬던 빅 엔젤이 이제는 자기 딸의 아기 노릇을 하고 있다니. 지금은 딸애가 그의 가랑이에다 베이비파우더를 바르고 있다. 이 상황이 가족들이 전부 모였을 때 그가즐겨 하던 야한 농담같이 느껴졌다.
"아빠, 괜찮아요?"
그녀가 물었다.
"내가 괜찮아질 날이 언제 또 오겠냐."
그는 저 먼 곳을 응시했다. 미니는 아버지 마음속에서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나는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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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그가 자녀들에게 분명히 선언한 메시지가 두 가지 있었다. 시간을 잘 지켜라. 그리고 변명을 하지 마라. 그런데 지금 그는 늦어서 무슨 알리바이를 댈지 수십 가지 변명을 만들어내고 있지않은가. 자기 생일 전날 엄마를 묻으러 가게 되다니. 그의 마지막 생일이 될 터였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명령을 선포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가족을 불러들였다. 이 생일은 아무도잊지 못할 완벽한 파티가 되리라.
"너는 좋은 애다."
빅 엔젤은 가만히 있다가 말하고는 미니의 손을 토닥였다.
그리고 자신의 거대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떠야만 했다. 눈까지 맛이 가고 있구나. 참 잘됐군. 시력이 뛰어나다는 걸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그는 시간이 흘러가도록 그냥 놔두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직 안경을 쓸 때는 아니었다.
이만하면 됐지.
"라디오 꺼라!"
그가 쏘아붙였지만, 아들은 대꾸했다.
"라디오 안 켰는데요, 아부지."
"그럼 라디오 켜라!"
랄로는 라디오를 켰다.
"다시 꺼!" - P45

그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만큼 "난 이제 죽을 때가 됐어"라는 말도 많이 했다.
그는 이미 신부에게 고백했다. 소변에 다시 선혈이 나오기 시작하면 곧 쓰러지게 될 거라고 나겔 의사가 말했을 때, 곧바로 고해성사를 했다. 참으로 묘하게도, 그 순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는 의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의사 이름은 메르세데스 조이 나겔이지. 그러고 보니 메르세데스 벤츠를 한 대 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나도 기쁨을 느꼈을 테니까.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 속 그의 복부 안에 주렁주렁 열린 죽음의 모습과 폐에 생긴 두 개의 어두운 반점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 진료실에 홀로 앉아 더없이 엄숙한 전사의 얼굴을 꼿꼿이 들고 의사를 응시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손을 한 번 쓰다듬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몇 주 정도요."
"나 사탕 먹어도 됩니까?"
그가 묻자 의사는 유리병을 열어주었다. 그는 체리 맛을 좋아했다. - P51

리틀엔젤은 착륙했다.
"막냇동생이 집에 왔다고!" 그가 혼잣말을 했다.
빅 엔젤의 배다른 동생인 그는 자신이 늦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나이 든 지 한참 되었는데도, 모두 그를 아직도 꼬마로 보았다. 하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는 지구상에서가장 나이를 많이 먹은 스물여덟 살짜리 인간이다. 28세로 지낸지 그럭저럭 20년쯤 되었다.
가모장의 장례식에는 빠질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늦어서도안 되었다. 그분은 리틀 엔젤의 엄마가 아니었다. 그는 종종 비딱하고 소심하게 그 점을 떠올렸다. 리틀 엔젤은 이 가족의 각주같은 존재였다.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모든 이들이마음먹고 받아들여야 할 세부 사항 같은 존재 말이다. 왕 할아버지 돈 안토니오를 뺏어간 미국 여자, 바로 이 가족의 전설에 낙인을 찍은 미국 여자의 아들. 가족들은 심지어 그의 어머니가 일찍 죽은 것도 은근히 개탄스러워했다. 마마 아메리카가 저세상에서 미국 여자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할아버지를 몸싸움으로 뺏어 와야 하는데, 그 전에 선수를 쳐서 내세로 할아버지를 따라가다니. - P52

렌터카 센터에 도착했을 때 아직 아침 8시도 안 되었다는 걸깨닫고, 그는 갑자기 자신이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안심도 되었다. 장례식에 못 갈 일은 없겠군. 마음속 깊이 상처받은 눈빛으로 자기를 쏘아보는 큰형의 타박을 받을 일도 없을 거다.
그는 빅 엔젤의 일정에 맞추고 있었다. 언제나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그 일정에 술에 취해 있을 때면, 빅 엔젤은 둘의 형제 관계를 두고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했다. 리틀 엔젤은 테킬라가 그에게 정말 잘맞는 술이라고 생각했다. 빅 엔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성스러움을 벗겨버리는 술이니까. 그래, 우리가 처음과 나중이라는 거지? 리틀 엔젤은 그 말의 속뜻을 모르지 않았다. 국경조차 뛰어넘는 형제자매라는 신비한 존재론에 대해서는 박사 학위를 받을수 있을 정도로 잘 알았다. 그는 어쨌든 미소를 지었다.
빅 엔젤은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그들이 무슨 레슬링 태그 팀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렇게 선언하곤 했으니까.
"선수 입장! 몸무게 250파운드, 출신지 불명의 오메가!"
그러면 리틀 엔젤은 손을 들었고, 당황한 여자들과 아이들은 박수를 치곤 했다.
이 소리를 들을 때면 리틀 엔젤은 증인을 가진 기분이어서 내심 좋았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쳇. 본 적도 없음은 물론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리틀 엔젤과 나머지 가족을 확실하게 갈라놓았으니까.
하지만 빅 엔젤은 리틀 엔젤을 보았다.  - P53

빅 엔젤은 리틀 엔젤을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이세상 속에서 고립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리틀 엔젤은 몇 년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형이 ‘선수 입장‘ 선언을 외쳐댔을 때 그들은 후에 리처드 레인이 KTLA 방송국에 출연했을 때 소리치던 영어 표현도 공유했다. V 모양 안테나를 달아놓은 TV로 지지직대고 화질이 깨지는 방송을 같이 보다 고른 표현이었다.
"후아, 넬리! (대박 놀랍군!)"
더 디스트로이어가 블레시를 코너로 몰아붙여 무릎을 꿇고빌게 만들 때마다 레인은 이렇게 외치곤 했다.
그래서 빅 엔젤이 그를 ‘선수 입장‘이라는 말로 소개할 때, 리틀 엔젤은 가끔 이렇게 외치곤 했다.
"후아 넬리!"
그러면 나머지 가족들은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 P56

빅 엔젤은 자기 모습이 훌륭해 보인다고 여겼다. 그 옛날 토킹헤드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너무 큰 정장을 입은 남자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미니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서 TV 게임 쇼를 보며 살충제를 지지직 뿌려대는 소리가 난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다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든 채였다.
그는 이제는 가느다란 갈대같이 변해버린 목소리로 선언했다.
"엄마한테 내가 이런 꼴을 보일 수야 없지."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바짓단 아래로 슬쩍 보이는 그의발목은 닭 뼈 같았다. 고통을 꾹 참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의자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온갖 노력을 하느라툴툴거리면서, 순전한 분노를 품고 미친놈처럼 씩 웃었다. 알루미늄 보행기를 쓰는 것도 거부했다. 사람들이 자기가 보행기를잡고 걷는 모습을 보고 무어라 생각할지 상상만 해도 너무 아팠다. 다들 그쪽으로 몸을 숙이며 도와주려고 하다가도 혹시나 그몸에 손이 닿을까 조심하고 있었다. 그의 바지와 하얀 셔츠는 부풀어 오른 텐트처럼 텅 빈 채로 앙상한 몸을 감쌌다. 그는 눈물을 훔쳐내고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어머니의 병실로 걸어갔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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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링은 1931년 어머니의 사망 이후로 심각한 우울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어떻게든 아내를 우울에서 벗어나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32년 그녀를 위해서 특별한 선물을 마련했다. 보통의 선물과는 차원이다른 그것은 산 중턱에 조성한 ‘목걸이‘였다. 목걸이에 매달린 보석에 해당하는 것은 밝은 녹색의 유리 기와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별장으로, 쯔진산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목걸이의 줄이 되는 것은 별장에서부터부지 출입구까지 길게 늘어선 플라타너스 길이었다. 이 가로수들의 나뭇잎 색은 주변의 자생 삼림과 달라서, 가을이 되면 특유의 노랗고 붉은빛으로 물들어 그 대비가 더욱 장관을 이룬다. 전용기를 타고 하늘 높이 오르면 선물받은 ‘목걸이‘의 절경, 별장의 녹색 기와가 거대한 에메랄드처럼 번쩍이며 빛을 내는 광경이 메이링의 눈앞에 펼쳐졌다. - P240

신생활 운동은 그녀의 남편이 공산당 점령 지역을 시찰하던 때에 구상한 아이디어였다. 그곳에서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특히 10년 전 모스크바를 방문한 장제스가 그토록 진저리를 쳤던 계급투쟁 관념이 대세였다. 이 관념은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게 부자의 것을 빼앗아도 된다고 가르쳤고, 고용인들에게 고용주를 배반하거나 심지어 죽이라고 부추겼다. 아이들에게는 부모를 비난하라고 촉구했다. 장제스가 보기에 이러한 행태는중국 전통 윤리의 "모든 기본 원칙을 뿌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책임지고 신의와 명예를 숭상하는 중국의 전통 윤리를 다시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장제스는 1934년 봄 난창에서 신생활 운동을 개시했다.
메이링은 이 사업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운동의 의의는 조금 달랐다. 남편과 함께 내륙을 방문하면서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진짜 중국을 목격했다. 상하이의 호화로운 금박 칸막이 너머에서 처음 길을 잃은 서양인들이 그러했듯이, 그녀는 눈앞의 광경이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혼돈스러우며 난폭하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반쯤 헐벗고 다녔다. 남자아이들, 심지어 어른들도 길모퉁이에서 소변을 보았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느낀 것처럼 그녀의 눈에도 중국은 "낡고 더럽고 역겨웠다." 메이링은 "사람이 바글거리는 내륙 도시의 지저분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시야가 나쁜 날 비행할 때보다도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국을 자랑할 만한 곳으로 바꾸고 싶었다. 메이링에게 신생활 운동의 본질은 전 인구가 올바른 행동 양식을 익히게 하는 것이었다. - P243

신생활 운동은 장제스 부부가 각별히 챙기는 사업이자 국민당 정권의 대표적인 대내 정책이 되었다. 이 운동은 모든 해악에 대한 치유법이며 중국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선전되었다. 예의범절과 질서를 지키는 태도가 문명화된 사회의 필수 조건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겠지만, 이렇게까지 과장된 주장은 명백히 허위였다. 54개의 규정과 42건의 위생 요건을 명시한 정부 소책자를 두고, 대표적인 자유주의자 후스는이렇게 적었다. 이러한 규정들은 대부분 "문명인이 익혀야 할 최소한의 상식적인 생활양식이며, 그 안에 나라를 구원할 만병통치약이나 민족을 부흥시킬 기적의 명약 따위는 없다." 그는 또 지적했다. 많은 누습들은 "가난의 산물이다. 보통 사람들은 경제 사정이 너무 열악해서 좋은 생활 습관을익히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이들이 타고 남은 석탄 부스러기, 더러운 넝마 한 조각을 얻겠다고 쓰레기를 뒤지고 있는데, 그들이 남의 분실물을 찾아내서 자신이 가진다고 해서 정직하지 못하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신생활 운동의 규정 중의 하나는 "분실물을 발견하면 돌려주어라"였다.) "정부가 책임지고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보통 사람들에게 적정한 생활 수준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른바 신생활을 영위하도록 가르치는 일은 가장 마지막 과제이다." - P245

1932년 12월, 장제스 정권은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회복했다. 공공의 적인 일본 때문에 우호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상하이를 공격하고 만주에는 괴뢰 정부인 만주국을 세워서 남쪽으로 잠식해오고 있었다.
전면 충돌이 불가피해 보였다. 중국은 소련이 필요했다. 오래 전부터 극동에서 일본과 대립각을 세워온 소련에도 중국이 필요했다. 스탈린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일본이 중국을 장악한 다음 중국의 자원을 이용해서중소 국경을 넘어 침공해오는 것이었다. 7,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중소국경 전체를 방비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는 일본이 소련으로 방향을 틀지 않도록 중국이 그들에 맞서 싸우기를 바랐다. 소련과의 적대관계가 조금씩 개선되자, 장제스는 본격적으로 아들을 되찾아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소련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조건으로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생각은 중국공산당으로 향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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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제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일반 민중을 경멸한다는 인상까지 풍겼다. 그는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들은 "수치도 없고, 도의도 없다", "게으르고, 무감각하고, 부패했고, 타락했고, 오만하고, 사치를 즐기고, 고생을 견디거나 규율을 지키지 못하고, 법을 존중하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고, 도덕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대다수는 반은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산송장‘이다."
민중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문제는 장제스의 안건에 포함되지 않았다.그가 중국 본토에서 쫓겨날 때가 되어서야 후회한 치명적인 실수였다. 소작농들이 지주에게 내는 소작료를 삭감해주는 안건이 발의된 적이 있었지만, 몇몇 성에서만 시범적으로 시행되다가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폐기되고 말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공산당이 파고들어, 자신들의 목표는 인민이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산당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그들이 차지한 영토도 넓어졌다. 소련을 등에 업은 그들은 1931년 상하이에서 멀지 않은 부유한 중국 동남부 지역에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했다. 전성기를 기준으로 이 독자 정부가 지배한 토지는 총 15만 제곱킬로미터, 인구는 1,000만 명 이상이었다. 중대한 위험 요소가 장제스의 바로 턱밑에서 자라고 있었다. - P216

니구이전의 장례식이 거행되기 하루 전, 덩옌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지하에서 은밀히 제3당을 조직한 이후였다. 중국에 돌아온 뒤로 칭링과 덩옌다가 만날 기회는 없었다. 당시 장제스의 정적으로는 쑨원의 아들 쑨커도 있었지만,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은 덩옌다였다. 그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감이었을 뿐만 아니라, 장제스에게는 없는 신중하게 세운 정강도 있었다.
덩옌다는 유럽과 아시아를 다니면서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유심히 관찰했고, 농민층의 빈곤 완화를 핵심으로 하는 상세한 정책을 이미 구상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장제스를 골치 아프게 한 것은 국민당군 내에 덩옌다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장제스의 명에 따라서 덩옌다는 1931년 11월 29일 난징에서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소식은 새어나갔다. 뜬소문일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간직한 채, 칭링은 난징으로 달려가서 장제스에게 덩옌다를 석방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녀가 매부와 직접 만나서 무엇인가를 호소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칭링은 내면의 상냥함을 최대로 끌어모아서 장제스에게 말했다. "당신과 덩옌다의 의견 차이를 중재하러 왔습니다. 그를 불러와서 함께 이야기해보도록 해요." 한동안 침묵하던 장제스는 이렇게 우물거렸다. "너무 늦었습니다....." 칭링은 폭발했다. "살인마!" 그녀가 소리쳤다. 장제스는 황급히 방을 나갔다. 칭링은 비탄에 잠긴 채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녀는 펜을 들어 국민당을 비난하는 글을 길게 썼다. 처음으로 국민당의 "파멸"을 공개적으로 촉구했고, 자신은 공산당 편으로 넘어갈 의향이 있음을 내비쳤다. 그녀의 글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이 기고문에 두 쪽이나 지면을 할애했고, 생각에 잠긴 칭링의 사진 아래에는 "나는 혁명 중국을 위해 말한다"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 P234

덩옌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칭링은 상하이의 코민테른 비밀공작원에게 접근하여 공산당 가입 의사를 전했다. 이미 그녀는 공산당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코민테른이 계획대로 그녀를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당원까지 될 필요가 없었다. 만약 공산당원이 된다면 공산당 조직의 명령을 받고 그들의 규율에 따라야 했다. 그녀를 향한 위협이 커지리라는 사실역시 명백했다. 장제스는 물론, 그녀가 직접 목격했던 당 내부의 계파 갈등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칭링의 결심은 굳건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장제스를 처단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코민테른 비밀공작원에게 "기꺼이 모든 것을바치겠다"고 말했다. 상하이에서 비밀공작을 수행하는 데에 뒤따를 위험부담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도 했다. 비밀공작원은 망설였으나 칭링은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가입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얼마 후 코민테른은 이것이 "크나큰 착오였다고 판단했다. "공산당원이 되면 그녀만의 특별한 가치를 잃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민테른은 칭링이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칭링이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은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철저히 감춰진 비밀 가운데 하나였고, 그녀가 사망한 뒤인 1980년대에 와서야 랴오증카이의 아들 랴오청즈에 의해서 세상에 드러났다.  - P235

그녀가 수행한 한 가지 특별한 임무는 미국인 기자 에드거스노가 공산당 점령지에서 마오쩌둥과 그 동료들을 인터뷰하도록 주선한일이었다. 이때의 인터뷰를 담은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은 마오쩌둥을 누구나 좋아할 만한 사람으로 서방에 소개했고,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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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장제스는 쑨원을 호위하여 상하이로 안내했다. 같은 달 쑨원과 소련의 거래가 성사되었고, 곧이어 군대 양성을 비롯한 소련의 전방위적인 지원 계획도 승인되었다. 쑨원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쑨원에게서 군대총사령관 자리를 약속받은 후, 장제스는 쑨원과 한배를 타기로 결심했다.
그 첫 단계로, 1923년 장제스는 소련의 군사 제도를 시찰하러 가는 대표단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장제스는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닌 데다가 자신만의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을 둘러보는 동안 그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고, 중국을 공산화하려는 ‘붉은 러시아의 계획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소련과 협력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쑨원을떠날지 고민하던 그는 중국으로 돌아온 뒤에 쑨원이 광저우에서 거듭 호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찰 보고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결국 장제스는 쑨원을 대신해서 그와 서신을 주고받고 있던 쑨원의 오랜 측근 랴오증카이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소련은 진실된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중국에 대한 소련의 유일한 목표는중국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우리 당이끝까지 협력하여 함께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상대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중국 정책은 만주, 몽골, 회족 지구, 티베트 전체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것이고, 중국 본토를 넘보는 마음도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제주의와 세계 혁명은 전부 옛 황제의 제국주의가 이름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랴오중카이가 보낸 답장에는 소련과 관련된 장제스의 의견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단지 보고가 늦어져서 쑨원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 빨리 광저우로 오라고 재촉하는 말만 담겨 있었다. 서신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장제스가 소련과의 협력을 반대하더라도 쑨원은 여전히 그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소련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를 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을 수도 있다. 광저우로 건너간 장제스는 쑨원과 비밀리에 만났다(이때의 대화 내용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장제스는 쑨원의 속마음이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확신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그가 보기에 쑨원은 그저 소련을 이용하려는 것뿐이었다. 장제스는 그대로 광저우에 머물렀고, 1924년 소련이 쑨원 군대의 장교들을 육성하기 위해서 광저우에 황푸 군관학교를 설립하자, 그곳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반소련파인 장제스에게 자신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자 한 쑨원의 의도였다. - P188

훗날 스스로 고백한 바에 따르면, 보로딘은 속았다. 장제스는 "말을 잘듣고 순종적이며 겸손한 사람으로 보였다." 보로딘은 모스크바에 장제스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하다"고 보고했다. 소련은 황푸 군관학교에 돈과 전문 인력을 쏟아부었다. 대포와 비행기를 포함한 무기도 함께였다. 배 한척이 무기를 400만 루블어치나 싣고 온 적도 있었다.
1926년 1월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소련은 사실상 국민당을 탈취했고, 그 결과 당 지도부는 대부분 공산당원들과 친러파 국민당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칭링은 중앙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지도부의 일원이되었다(마오쩌둥은 같은 위원회의 "후보 위원이었다). 국민당이 거의 소련의 손에 넘어가자 장제스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나설 때라고 판단했다. 먼저 그는 정적들이 한층 더 경계를 낮추도록 유도했다. "혁명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소련에 가고 싶다고 요청했고, 이를 자신의 일기에 적기까지 했다(장제스는 57년간 일기를 썼고, 자신에 대해서 알아내려고 하는누군가가 자신의 일기를 읽을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또한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데, 사적인 편지의 형식을띠고 있었지만 소련 측이 열어보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서 쓴 것이었다. 이렇게 연막을 친 다음 장제스는 3월 20일 별안간 기습을 단행했다. 적당한구실을 붙여서 공산주의자 수십 명을 체포했고, 소련 출신 고문들을 자택에 연금한 다음 그 경호 인력은 무장 해제시켰다. 그는 단칼에 소련이 국민당군을 통솔하지 못하도록 손을 묶어버렸다.
준쿠데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장제스는 일부러 소련이 자신의 의도를 곡해하도록 이끌었다. 소련은 이번 사건을, 자신의 군대에 낯선 소비에트식 체계를 강요하며 윗사람 행세를 하는 러시아인 고문들 탓에 자존심이상한 콧대 높은 중국인 장군의 소행으로 여겼다. 장제스를 달래는 것이최선이라고 판단한 그들은 주요 군사 고문들을 철수시켰다. 한편으로는 언젠가 "이 장군을 제거할 준비를 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장제스는 우리와 협력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무엇보다 장제스는 당시 광저우에 없었던 보로딘이 그에게 "사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따라서 보로딘이 돌아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소련 측이 믿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번 쿠데타가 장제스가 구상한 책략의 일환으로 사전에 계획되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결과 장제스는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국민당군 총사령관으로 진급했다.
당시 국민당 당수였던 왕징웨이는 장제스가 쿠데타를 저지르고도 태연하게 처벌을 면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했다.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웠던 그는 종적을 감추었다가 이내 해외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타고난 책략가 장제스는 국민당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 P190

한편 베이징 정부를 상대로 한 그의 북벌은 성공적이었고, 여러 성들이국민당군의 손에 들어왔다. 11월에 「뉴욕타임스」는 한 면을 전부 할애하여 장제스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제목은 "새로운 강자, 중국의 절반을 차지하다"였다. 1927년 3월 21일 장제스의 군대는 상하이를 점령했다. 4월이되자 장제스는 공산당 및 소련 세력과 공개적으로 결별을 선언하고, 그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다. 수배자 명단에는 보로딘의 이름이 가장 먼저 적혔다(마오쩌둥도 이 명단에 포함되었다). 보로딘은 고비 사막을 가로질러 소련으로 도피했다. 사막에서 천막을 치고 누운 어느 밤, 그는 장제스를믿은 자신의 실수를 곰곰이 되짚었다. 장제스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의 진정한 적이 베이징 정부가 아니라공산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은 서서히 명확해졌다. 폭도들이 득세하여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살던 상하이의 사업가들과 서양인들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점차 장제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가 벌이는 일을 감사하게 여겼으며, 때로는 탄복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자신의 진정한 정치적 입장을 밝히고 자격을 증명하여 메이링의 지인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된 후에야 장제스는 다시 그녀에게 구애하기 시작했다. - P196

메이링은 장제스의 승리가 내분을 종식시켜 중국에 평화를 가져오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남편의 승리를 돕고 훌륭한 퍼스트레이디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우선 서양식 옷을 벗고 전통 의복인 치파오를 입기 시작했다. 꽃모양이 수놓이고 치마 양쪽이 종아리 중간까지 트인 비단 치파오는 그녀의 ‘유니폼‘이 되었다. 머리모양은 당시 중국 여성들이 흔히 하던 대로 생머리에다가 단정한 앞머리를 냈다. 장제스 정부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오빠 쑹쯔원이 사의를 밝히자 그를 만류하여 업무를 계속 맡게 했다. 장제스가 북벌의 최전선에 나간 동안은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한 의약품을 구입했고, 대량의 옷과 침구를 조달했으며, 적십자사 소속 의사와 간호사들의 구호 활동을 주선했다. 중국에 주재하는 서방 국가의 영사들에게 장제스의 의사를 전달했고, 국민당군이 교전 지역에서 그들의 동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메이링은 장제스의 특별 대리인과도 같았다. 그녀가 처리한 일들은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장제스는 일기에자신이 거둔 승리는 반절이 아내 덕분이라고 적었다. 국민당의 승리에 기여했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그녀의 업적은 또 있었다. 메이링은 장제스의 군대에 인도주의적 관행을 도입했고, 그녀의 영향을 받아서 장제스 역시 전반적으로 교화되었다. 중국의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전사한 병사와 장교들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설립한 것도 그녀였다. 중국의 전쟁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메이링은 오랜 기간 헌신적으로 그 아이들을 돌보았다. 죽는 날까지 그들은 그녀의 ‘자식들‘로 남았다. - P203

베이징 정부를 격파한 장제스는 1928년 7월 3일 수도 베이징에 입성했다. 국민당 정권이 수립되었고, 수도는 난징으로 정해졌다. 장제스는 국민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중국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역사책에서는 1913년부터 1928년까지의 시기를 ‘군벌 전쟁 시기‘라고 부정적으로 묘사하고는한다. 사실 휴전 기간이 있기는 했어도 이 시기에 발생한 가장 중요하고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은 군벌들이 아니라 쑨원, 그리고 장제스가 벌인 것이었다. 군벌 간의 전쟁은 지속 기간이 훨씬 짧고 범위도 국한되어서, 사회에 혼란을 초래하는 정도가 훨씬 덜했다. 총격전에 휘말리지 않는 이상 일반인들의 삶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무엇보다 군벌들의 갈등은 의회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한 노력이 재개됨에 따라서 종식되었다. 가령 장제스의 마지막 표적이었던 원수 우페이푸는 민주주의의 신봉자로 유명했다. 정계를떠나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베이징 정부가 승리하여 국회가 다시 소집되기를 소망하며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던 수백 명의 의원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여비를 챙겨주는 것이었다. 장제스의 승리로 민주주의를 향하던 중국의 여정은 끝이 났다. 그렇게 중국은 뻔뻔한 독재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장제스는 독재자로 군림하면서 보로딘의 표현에 따르자면 레닌주의의 몇몇 ‘투쟁 방식‘인 소련식 조직, 프로파간다, 통제 기제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거부했고,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지도 않았다. 훗날 그를 몰아내게 되는 마오쩌둥과의 차이점이었다. 장제스 정권 아래에서 중국은 다방면에서 이전 시기와 같은 자유를 유지했다. 메이링은 정책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독재자 장제스가 보다 인도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 P204

"내 아내 말고는 조금이라도 책임을 나눠 지거나 일을 나눠 할만한 사람이 없다", "나는 모든 일을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 대내 정책부터 대외 정책까지…민간 업무부터 군사 업무까지 말이다." 실제로 국제사회의 지원이 절실했던 중대한 고비, 가령 1931년 일본의 침략이 목전으로 다가오던 시기에 서양에 주재하고 있던 장제스 정부의 대사는 한 명도 없었다.
장제스의 몇 안 되는 측근들은 대부분 쑹씨 가족의 일원이었다. 장제스본인의 가족으로 말하자면, 그는 항상 이복 남동생을 혐오했다. "그를 보면 얼마나 역겹고 구역질이 나는지 모른다." 여동생도 업신여겼다. 하루는그가 메이링과 함께 여동생을 보러 잠깐 들렀다가 여동생의 손님들이 왁자지껄하게 카드놀이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장제스는 "수치스러웠고", "사랑하는" 메이링이 시가 식구의 행태를 보고 자신을 멸시할까봐 전전긍긍했다.
그에게는 대부 천치메이와의 끈끈한 관계에서 얻은 또다른 ‘가족‘이 있었다. 천치메이의 조카 천궈푸와 천리푸는 장제스의 정보기관을 설립해서운영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장제스의 신임을 오롯이 얻지는 못했다. 천씨형제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질까봐 우려하며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한 장제스는 별도의 정보기관을 만들어 그들의 영향력을 제한하고자 했다.
쑹씨 가족만이 장제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다. 쑹씨 가족은 자신을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장제스는 그들에게 정권의 생명줄인 재정관리를 맡겼다. 중국의 주요 은행 네 곳을 관할하는 기구인 사련총처(四處)를 창설하여 아이링의 남편 쿵샹시에게 주재하게 했다. 가장 순종적인 부하인 그를 위해서, 그리고 처남 쑹쯔원을 위해서 장제스는 가장 높은직책인 재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중화민국 국무총리직의 정식 명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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