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 장제스는 쑨원을 호위하여 상하이로 안내했다. 같은 달 쑨원과 소련의 거래가 성사되었고, 곧이어 군대 양성을 비롯한 소련의 전방위적인 지원 계획도 승인되었다. 쑨원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쑨원에게서 군대총사령관 자리를 약속받은 후, 장제스는 쑨원과 한배를 타기로 결심했다. 그 첫 단계로, 1923년 장제스는 소련의 군사 제도를 시찰하러 가는 대표단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장제스는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닌 데다가 자신만의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을 둘러보는 동안 그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고, 중국을 공산화하려는 ‘붉은 러시아의 계획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소련과 협력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쑨원을떠날지 고민하던 그는 중국으로 돌아온 뒤에 쑨원이 광저우에서 거듭 호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찰 보고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결국 장제스는 쑨원을 대신해서 그와 서신을 주고받고 있던 쑨원의 오랜 측근 랴오증카이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소련은 진실된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중국에 대한 소련의 유일한 목표는중국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우리 당이끝까지 협력하여 함께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상대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중국 정책은 만주, 몽골, 회족 지구, 티베트 전체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것이고, 중국 본토를 넘보는 마음도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제주의와 세계 혁명은 전부 옛 황제의 제국주의가 이름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랴오중카이가 보낸 답장에는 소련과 관련된 장제스의 의견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단지 보고가 늦어져서 쑨원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 빨리 광저우로 오라고 재촉하는 말만 담겨 있었다. 서신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장제스가 소련과의 협력을 반대하더라도 쑨원은 여전히 그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소련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를 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을 수도 있다. 광저우로 건너간 장제스는 쑨원과 비밀리에 만났다(이때의 대화 내용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장제스는 쑨원의 속마음이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확신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그가 보기에 쑨원은 그저 소련을 이용하려는 것뿐이었다. 장제스는 그대로 광저우에 머물렀고, 1924년 소련이 쑨원 군대의 장교들을 육성하기 위해서 광저우에 황푸 군관학교를 설립하자, 그곳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반소련파인 장제스에게 자신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자 한 쑨원의 의도였다. - P188
훗날 스스로 고백한 바에 따르면, 보로딘은 속았다. 장제스는 "말을 잘듣고 순종적이며 겸손한 사람으로 보였다." 보로딘은 모스크바에 장제스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하다"고 보고했다. 소련은 황푸 군관학교에 돈과 전문 인력을 쏟아부었다. 대포와 비행기를 포함한 무기도 함께였다. 배 한척이 무기를 400만 루블어치나 싣고 온 적도 있었다. 1926년 1월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소련은 사실상 국민당을 탈취했고, 그 결과 당 지도부는 대부분 공산당원들과 친러파 국민당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칭링은 중앙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지도부의 일원이되었다(마오쩌둥은 같은 위원회의 "후보 위원이었다). 국민당이 거의 소련의 손에 넘어가자 장제스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나설 때라고 판단했다. 먼저 그는 정적들이 한층 더 경계를 낮추도록 유도했다. "혁명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소련에 가고 싶다고 요청했고, 이를 자신의 일기에 적기까지 했다(장제스는 57년간 일기를 썼고, 자신에 대해서 알아내려고 하는누군가가 자신의 일기를 읽을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또한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데, 사적인 편지의 형식을띠고 있었지만 소련 측이 열어보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서 쓴 것이었다. 이렇게 연막을 친 다음 장제스는 3월 20일 별안간 기습을 단행했다. 적당한구실을 붙여서 공산주의자 수십 명을 체포했고, 소련 출신 고문들을 자택에 연금한 다음 그 경호 인력은 무장 해제시켰다. 그는 단칼에 소련이 국민당군을 통솔하지 못하도록 손을 묶어버렸다. 준쿠데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장제스는 일부러 소련이 자신의 의도를 곡해하도록 이끌었다. 소련은 이번 사건을, 자신의 군대에 낯선 소비에트식 체계를 강요하며 윗사람 행세를 하는 러시아인 고문들 탓에 자존심이상한 콧대 높은 중국인 장군의 소행으로 여겼다. 장제스를 달래는 것이최선이라고 판단한 그들은 주요 군사 고문들을 철수시켰다. 한편으로는 언젠가 "이 장군을 제거할 준비를 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장제스는 우리와 협력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무엇보다 장제스는 당시 광저우에 없었던 보로딘이 그에게 "사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따라서 보로딘이 돌아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소련 측이 믿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번 쿠데타가 장제스가 구상한 책략의 일환으로 사전에 계획되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결과 장제스는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국민당군 총사령관으로 진급했다. 당시 국민당 당수였던 왕징웨이는 장제스가 쿠데타를 저지르고도 태연하게 처벌을 면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했다.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웠던 그는 종적을 감추었다가 이내 해외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타고난 책략가 장제스는 국민당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 P190
한편 베이징 정부를 상대로 한 그의 북벌은 성공적이었고, 여러 성들이국민당군의 손에 들어왔다. 11월에 「뉴욕타임스」는 한 면을 전부 할애하여 장제스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제목은 "새로운 강자, 중국의 절반을 차지하다"였다. 1927년 3월 21일 장제스의 군대는 상하이를 점령했다. 4월이되자 장제스는 공산당 및 소련 세력과 공개적으로 결별을 선언하고, 그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다. 수배자 명단에는 보로딘의 이름이 가장 먼저 적혔다(마오쩌둥도 이 명단에 포함되었다). 보로딘은 고비 사막을 가로질러 소련으로 도피했다. 사막에서 천막을 치고 누운 어느 밤, 그는 장제스를믿은 자신의 실수를 곰곰이 되짚었다. 장제스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의 진정한 적이 베이징 정부가 아니라공산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은 서서히 명확해졌다. 폭도들이 득세하여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살던 상하이의 사업가들과 서양인들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점차 장제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가 벌이는 일을 감사하게 여겼으며, 때로는 탄복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자신의 진정한 정치적 입장을 밝히고 자격을 증명하여 메이링의 지인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된 후에야 장제스는 다시 그녀에게 구애하기 시작했다. - P196
메이링은 장제스의 승리가 내분을 종식시켜 중국에 평화를 가져오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남편의 승리를 돕고 훌륭한 퍼스트레이디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우선 서양식 옷을 벗고 전통 의복인 치파오를 입기 시작했다. 꽃모양이 수놓이고 치마 양쪽이 종아리 중간까지 트인 비단 치파오는 그녀의 ‘유니폼‘이 되었다. 머리모양은 당시 중국 여성들이 흔히 하던 대로 생머리에다가 단정한 앞머리를 냈다. 장제스 정부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오빠 쑹쯔원이 사의를 밝히자 그를 만류하여 업무를 계속 맡게 했다. 장제스가 북벌의 최전선에 나간 동안은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한 의약품을 구입했고, 대량의 옷과 침구를 조달했으며, 적십자사 소속 의사와 간호사들의 구호 활동을 주선했다. 중국에 주재하는 서방 국가의 영사들에게 장제스의 의사를 전달했고, 국민당군이 교전 지역에서 그들의 동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메이링은 장제스의 특별 대리인과도 같았다. 그녀가 처리한 일들은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장제스는 일기에자신이 거둔 승리는 반절이 아내 덕분이라고 적었다. 국민당의 승리에 기여했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그녀의 업적은 또 있었다. 메이링은 장제스의 군대에 인도주의적 관행을 도입했고, 그녀의 영향을 받아서 장제스 역시 전반적으로 교화되었다. 중국의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전사한 병사와 장교들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설립한 것도 그녀였다. 중국의 전쟁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메이링은 오랜 기간 헌신적으로 그 아이들을 돌보았다. 죽는 날까지 그들은 그녀의 ‘자식들‘로 남았다. - P203
베이징 정부를 격파한 장제스는 1928년 7월 3일 수도 베이징에 입성했다. 국민당 정권이 수립되었고, 수도는 난징으로 정해졌다. 장제스는 국민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중국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역사책에서는 1913년부터 1928년까지의 시기를 ‘군벌 전쟁 시기‘라고 부정적으로 묘사하고는한다. 사실 휴전 기간이 있기는 했어도 이 시기에 발생한 가장 중요하고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은 군벌들이 아니라 쑨원, 그리고 장제스가 벌인 것이었다. 군벌 간의 전쟁은 지속 기간이 훨씬 짧고 범위도 국한되어서, 사회에 혼란을 초래하는 정도가 훨씬 덜했다. 총격전에 휘말리지 않는 이상 일반인들의 삶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무엇보다 군벌들의 갈등은 의회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한 노력이 재개됨에 따라서 종식되었다. 가령 장제스의 마지막 표적이었던 원수 우페이푸는 민주주의의 신봉자로 유명했다. 정계를떠나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베이징 정부가 승리하여 국회가 다시 소집되기를 소망하며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던 수백 명의 의원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여비를 챙겨주는 것이었다. 장제스의 승리로 민주주의를 향하던 중국의 여정은 끝이 났다. 그렇게 중국은 뻔뻔한 독재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장제스는 독재자로 군림하면서 보로딘의 표현에 따르자면 레닌주의의 몇몇 ‘투쟁 방식‘인 소련식 조직, 프로파간다, 통제 기제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거부했고,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지도 않았다. 훗날 그를 몰아내게 되는 마오쩌둥과의 차이점이었다. 장제스 정권 아래에서 중국은 다방면에서 이전 시기와 같은 자유를 유지했다. 메이링은 정책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독재자 장제스가 보다 인도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 P204
"내 아내 말고는 조금이라도 책임을 나눠 지거나 일을 나눠 할만한 사람이 없다", "나는 모든 일을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 대내 정책부터 대외 정책까지…민간 업무부터 군사 업무까지 말이다." 실제로 국제사회의 지원이 절실했던 중대한 고비, 가령 1931년 일본의 침략이 목전으로 다가오던 시기에 서양에 주재하고 있던 장제스 정부의 대사는 한 명도 없었다. 장제스의 몇 안 되는 측근들은 대부분 쑹씨 가족의 일원이었다. 장제스본인의 가족으로 말하자면, 그는 항상 이복 남동생을 혐오했다. "그를 보면 얼마나 역겹고 구역질이 나는지 모른다." 여동생도 업신여겼다. 하루는그가 메이링과 함께 여동생을 보러 잠깐 들렀다가 여동생의 손님들이 왁자지껄하게 카드놀이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장제스는 "수치스러웠고", "사랑하는" 메이링이 시가 식구의 행태를 보고 자신을 멸시할까봐 전전긍긍했다. 그에게는 대부 천치메이와의 끈끈한 관계에서 얻은 또다른 ‘가족‘이 있었다. 천치메이의 조카 천궈푸와 천리푸는 장제스의 정보기관을 설립해서운영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장제스의 신임을 오롯이 얻지는 못했다. 천씨형제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질까봐 우려하며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한 장제스는 별도의 정보기관을 만들어 그들의 영향력을 제한하고자 했다. 쑹씨 가족만이 장제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다. 쑹씨 가족은 자신을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장제스는 그들에게 정권의 생명줄인 재정관리를 맡겼다. 중국의 주요 은행 네 곳을 관할하는 기구인 사련총처(四處)를 창설하여 아이링의 남편 쿵샹시에게 주재하게 했다. 가장 순종적인 부하인 그를 위해서, 그리고 처남 쑹쯔원을 위해서 장제스는 가장 높은직책인 재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중화민국 국무총리직의 정식 명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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