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그가 자녀들에게 분명히 선언한 메시지가 두 가지 있었다. 시간을 잘 지켜라. 그리고 변명을 하지 마라. 그런데 지금 그는 늦어서 무슨 알리바이를 댈지 수십 가지 변명을 만들어내고 있지않은가. 자기 생일 전날 엄마를 묻으러 가게 되다니. 그의 마지막 생일이 될 터였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명령을 선포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가족을 불러들였다. 이 생일은 아무도잊지 못할 완벽한 파티가 되리라.
"너는 좋은 애다."
빅 엔젤은 가만히 있다가 말하고는 미니의 손을 토닥였다.
그리고 자신의 거대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떠야만 했다. 눈까지 맛이 가고 있구나. 참 잘됐군. 시력이 뛰어나다는 걸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그는 시간이 흘러가도록 그냥 놔두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직 안경을 쓸 때는 아니었다.
이만하면 됐지.
"라디오 꺼라!"
그가 쏘아붙였지만, 아들은 대꾸했다.
"라디오 안 켰는데요, 아부지."
"그럼 라디오 켜라!"
랄로는 라디오를 켰다.
"다시 꺼!" - P45

그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만큼 "난 이제 죽을 때가 됐어"라는 말도 많이 했다.
그는 이미 신부에게 고백했다. 소변에 다시 선혈이 나오기 시작하면 곧 쓰러지게 될 거라고 나겔 의사가 말했을 때, 곧바로 고해성사를 했다. 참으로 묘하게도, 그 순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는 의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의사 이름은 메르세데스 조이 나겔이지. 그러고 보니 메르세데스 벤츠를 한 대 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나도 기쁨을 느꼈을 테니까.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 속 그의 복부 안에 주렁주렁 열린 죽음의 모습과 폐에 생긴 두 개의 어두운 반점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 진료실에 홀로 앉아 더없이 엄숙한 전사의 얼굴을 꼿꼿이 들고 의사를 응시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손을 한 번 쓰다듬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몇 주 정도요."
"나 사탕 먹어도 됩니까?"
그가 묻자 의사는 유리병을 열어주었다. 그는 체리 맛을 좋아했다. - P51

리틀엔젤은 착륙했다.
"막냇동생이 집에 왔다고!" 그가 혼잣말을 했다.
빅 엔젤의 배다른 동생인 그는 자신이 늦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나이 든 지 한참 되었는데도, 모두 그를 아직도 꼬마로 보았다. 하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는 지구상에서가장 나이를 많이 먹은 스물여덟 살짜리 인간이다. 28세로 지낸지 그럭저럭 20년쯤 되었다.
가모장의 장례식에는 빠질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늦어서도안 되었다. 그분은 리틀 엔젤의 엄마가 아니었다. 그는 종종 비딱하고 소심하게 그 점을 떠올렸다. 리틀 엔젤은 이 가족의 각주같은 존재였다.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모든 이들이마음먹고 받아들여야 할 세부 사항 같은 존재 말이다. 왕 할아버지 돈 안토니오를 뺏어간 미국 여자, 바로 이 가족의 전설에 낙인을 찍은 미국 여자의 아들. 가족들은 심지어 그의 어머니가 일찍 죽은 것도 은근히 개탄스러워했다. 마마 아메리카가 저세상에서 미국 여자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할아버지를 몸싸움으로 뺏어 와야 하는데, 그 전에 선수를 쳐서 내세로 할아버지를 따라가다니. - P52

렌터카 센터에 도착했을 때 아직 아침 8시도 안 되었다는 걸깨닫고, 그는 갑자기 자신이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안심도 되었다. 장례식에 못 갈 일은 없겠군. 마음속 깊이 상처받은 눈빛으로 자기를 쏘아보는 큰형의 타박을 받을 일도 없을 거다.
그는 빅 엔젤의 일정에 맞추고 있었다. 언제나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그 일정에 술에 취해 있을 때면, 빅 엔젤은 둘의 형제 관계를 두고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했다. 리틀 엔젤은 테킬라가 그에게 정말 잘맞는 술이라고 생각했다. 빅 엔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성스러움을 벗겨버리는 술이니까. 그래, 우리가 처음과 나중이라는 거지? 리틀 엔젤은 그 말의 속뜻을 모르지 않았다. 국경조차 뛰어넘는 형제자매라는 신비한 존재론에 대해서는 박사 학위를 받을수 있을 정도로 잘 알았다. 그는 어쨌든 미소를 지었다.
빅 엔젤은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그들이 무슨 레슬링 태그 팀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렇게 선언하곤 했으니까.
"선수 입장! 몸무게 250파운드, 출신지 불명의 오메가!"
그러면 리틀 엔젤은 손을 들었고, 당황한 여자들과 아이들은 박수를 치곤 했다.
이 소리를 들을 때면 리틀 엔젤은 증인을 가진 기분이어서 내심 좋았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쳇. 본 적도 없음은 물론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리틀 엔젤과 나머지 가족을 확실하게 갈라놓았으니까.
하지만 빅 엔젤은 리틀 엔젤을 보았다.  - P53

빅 엔젤은 리틀 엔젤을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이세상 속에서 고립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리틀 엔젤은 몇 년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형이 ‘선수 입장‘ 선언을 외쳐댔을 때 그들은 후에 리처드 레인이 KTLA 방송국에 출연했을 때 소리치던 영어 표현도 공유했다. V 모양 안테나를 달아놓은 TV로 지지직대고 화질이 깨지는 방송을 같이 보다 고른 표현이었다.
"후아, 넬리! (대박 놀랍군!)"
더 디스트로이어가 블레시를 코너로 몰아붙여 무릎을 꿇고빌게 만들 때마다 레인은 이렇게 외치곤 했다.
그래서 빅 엔젤이 그를 ‘선수 입장‘이라는 말로 소개할 때, 리틀 엔젤은 가끔 이렇게 외치곤 했다.
"후아 넬리!"
그러면 나머지 가족들은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 P56

빅 엔젤은 자기 모습이 훌륭해 보인다고 여겼다. 그 옛날 토킹헤드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너무 큰 정장을 입은 남자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미니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서 TV 게임 쇼를 보며 살충제를 지지직 뿌려대는 소리가 난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다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든 채였다.
그는 이제는 가느다란 갈대같이 변해버린 목소리로 선언했다.
"엄마한테 내가 이런 꼴을 보일 수야 없지."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바짓단 아래로 슬쩍 보이는 그의발목은 닭 뼈 같았다. 고통을 꾹 참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의자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온갖 노력을 하느라툴툴거리면서, 순전한 분노를 품고 미친놈처럼 씩 웃었다. 알루미늄 보행기를 쓰는 것도 거부했다. 사람들이 자기가 보행기를잡고 걷는 모습을 보고 무어라 생각할지 상상만 해도 너무 아팠다. 다들 그쪽으로 몸을 숙이며 도와주려고 하다가도 혹시나 그몸에 손이 닿을까 조심하고 있었다. 그의 바지와 하얀 셔츠는 부풀어 오른 텐트처럼 텅 빈 채로 앙상한 몸을 감쌌다. 그는 눈물을 훔쳐내고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어머니의 병실로 걸어갔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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