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공장식 축산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고 동물복지는 궁극의 해결책이라는 논리를 제시한다. 좁은 면적에서 키워진 불쌍한 닭들이 면역력이 떨어지고 질병에 쉽게 감염된다는 생각에는 과학적 오류가 있다.
우선 좁은 사육 면적과 면역력은 인과 관계가 없다. 케이지나 바닥에서 키워지는 닭들은 A4 용지 한 장만큼의 생활 공간이 넓은지, 좁은지 모르겠지만, 건강의 측면에서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 오히려 동물복지 케이지나 바닥 사육 시스템을 도입한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기생충, 골절 등 더 많은 질병과 부작용으로 동물복지 시스템에 대한 회의론과 무용론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또한 동물복지 사육 환경과 좋은 사료라도 전염성 질병의 위험은 여전히 피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면역, 스트레스, 비타민이라는 단어에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도 세 가지 모두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면역력이 떨어져 병에 걸렸다.‘는 말은 계량화하기 어렵다. 스트레스에 대한 지표가 아직까지 표준화돼 있지 않고 면역력에대한 정량적인 근거도 없다. 간혹 몇몇 질병이나 감염병에 대해서는
‘항체가 이외에 높다,낮다를 증명해줄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면역은 일반 면역과 특수 면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 면역은 측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좁은 곳에 살아서 면역력이 떨어지고 스트레스가 없어서 면력이 올라갔다는 말은 아직까지는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특정 전염병에 대한 면역은 오직 백신이나 사전 감염으로만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한 면역은 백신이 없다면 아무리 건강한 어떤 닭이라도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 P127

현재 한국에는 긴급 백신을 만들 수 있는 항원 뱅크가 만들어져있다. 항원 뱅크란, 백신을 만들기 전에 바이러스만 증식해 보관한상태를 말한다. 여기에 적당량의 보조제를 넣어 병에 포장하면 몇시간 안에 백신을 생산할 수 있다. 항원 뱅크용 고병원성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어떤 바이러스가 유행할지, 피해가 큰지를 선택해 국내에 큰 가금단지를 2회 접종할 만한 규모의 백신을 비축한다. 닭에게 주사하는 백신은 ‘사독오일백신‘이라는 형태로 사람에게 주사하는 투명한 형태가 아니라 우윳빛의 진득한 액체다.
여기서 ‘사독‘의 의미는 균이 완전히 죽어 변화되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한편 ‘오일백신‘은 반드시 주사로 근육에 접종해야 하는데, 닭을 한 마리 한 마리 잡아서 백신을 주사하는 일은일반 가금 농가에서 항상 해오던 일이다. 백신 바이러스 균주에 대해서는 2년에 한 번씩 업데이트하며 만약 2년 이내에 사용하지 못하고 유효 기간이 지나면 폐기한다.
생산을 마친 백신은 마리당 50원 수준이므로 긴급방역비용이라고 하기엔 전혀 부담이 없다. 이런 준비가 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FAO에서 제조를 지원하기도 하지만, 한국은 원조를 받을 만한 수준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2007년부터 저병원성 인플루엔자 생산시설이 있으며 백신에 대한 제조 기술도 충분하다. 이와 같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 인플루엔자에 대한 플랜B로서 백신 정책이 도입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2016년 대규모 조류인플루엔자 발병 이후 가금수의사회 등에서 백신 정책을 주장해 항원 뱅크를 수립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렇게 준비된 백신을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이 백신 정책이다. - P128

매년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야생 조류에서 항상 검출되는봉강천, 풍세천 인근 천안 지역은 여름부터 모든 농장에 백신을 보급할수도 있다. 매년 야생 철새가 찾아오는 곳은 서해안벨트로 불리는 지역이다. 어차피 위험해질 거라면 백신을 이용해 처음부터 발생 속도를 늦추거나 살처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을 ‘예방 백신‘이라 부른다.
한편, 한두 농장에 인플루엔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발생 농장을중심으로 에워싸듯이 링 백신 형태로 사용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런 방식을 ‘긴급 백신‘이라 부른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백신 정책이긴급 백신 개념으로 수립돼 있다. 살처분 정책을 지속하다 방어하기 어렵거나 바이러스의 전파가 너무 빠르다고 판단되면 긴급 백신을 하도록 결정한다.
현재 규정상 발생 농장을 중심으로 10km 밖에서 3km 안쪽에 위치한 농장에 긴급 백신을 접종하고 3km 안쪽 지역은 예방적 살처분을 실시한다. 하지만 이런 긴급 백신 방식은 긴급할 때 빠른 속도로 수행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이 요즘처럼 교통과 도로가 발달한 체계에서는 3km, 10km 단위로 바이러스가 전파되기보다는 수십 km까지도 사람이나 차량을 통해 전파될 수 있다. 발생 농장을 둘러싼이런 링 백신 형태의 방어막은 바이러스의 증폭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긴급하고 정확하게 수행돼야 한다는 부담이 크고 각 개체마다 면역이 만들어지는 시간이 2~3주 걸린다는 것을 고려하면 면역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바이러스에 감염될 확률이 높다. 따라서 백신은 긴급 백신보다는 예방 백신이 효과적이다.
백신의 장점 중 하나는 희귀종이나 멸종위기 동물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유전 가치가 있는 귀한 가금류(예: 오골계, 관상용 희귀종)는 백신 우선순위에 있다. 이런 개체들은 당연히 백신 후 개체들의보호가 목적이고 비록 백신 후 감염됐다고 하더라도 동물이 살아 있고 바이러스가 이미 소멸됐다면 살처분하지 않을 수 있다. 바이러스의 박멸이 목적이지 생명을 희생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 P130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코로나 바이러스만큼 변이가 잘 일어난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스스로 진화하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인플루엔자가 한 몸에 섞여 바이러스끼리 유전자 정보 교환을 하면서 변이가 일어나기 쉬워진다. 이런 일이 생기기 쉬운 조건은 다른 종의 동물들이 혼재된 환경이다. 즉, 오리와 닭이 함께 사육되거나 돼지와 닭이 함께 키워지는 축산 환경이나 자연에서 일어날 확률이 크다.
일단 한국의 산업화된 농장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낮기 때문에 자연적인 변이를 만들기 어렵다. 동남아나 중국에서는 연못이나 강의 주변에서 자연 방목을 하는 조류들이나 물새들이 날아오는 철새와 바이러스를 공유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바이러스변이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 동남아 전통시장에서는 닭과 오리가 한바구니에 담겨 거래되거나 사육된다. 이런 경우도 바이러스가 지속적으로 유행하며 변이될 확률이 높다. 즉, 한국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변이된 바이러스가 유입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 P141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바이러스를 더 추적하고 정보를 공개하고 아이디어를 모으는 게 더 현명하다. 백신을 하든, 살처분을 하든 공중 보건상 바이러스가 증가하는 현상을 막는 것이 우선이며 위험한 기간이 끝난 후에도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바이러스의 변이와 향후 전망을 예상해야 한다. 돼지에서도 바이러스를 예찰해야 한다. 이런 원헬스 개념을 가진 수의사들을 통해 예찰해야 다음을 대비할 수 있다. 단지 현재의 코로나와 겨울철 인플루엔자 발병에만 매몰되면 안 된다.
과학적 연구가 효과를 내려면 반드시 정부 정책과 맞물려야 한다. 민·관·학이 함께 방향을 맞춰야 한다. 과도한 방역보다는 과학적인 방역과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살처분 일변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한층 성숙한 방역을 기획해야 한다. 전 세계가 18세기 살처분 방법에만 의존하는 방역 프레임에서 이제는 벗어나길 바란다. 21세기의 도구를 지속적으로 연구, 개발하고 사용하고 정책을 유연하고 다양하게 구사하길바란다. 새로운 백신 개발, 시범 사업, 예방 백신이 첫걸음이다.
방역을 한차원 높이기 위해서는 백신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나는 우리가 조만간 세계의 축산 방역도 선도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이미 우리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 - P146

안 박사는 우리에게 닭 사체의 뼈를 꺾어 보이면서 땅속의 사체가 아직 온전함을 설명해줬다. 땅속에 들어가면 토양의 미생물로 분해되고 나중에 흙과 같은 형태로 변할 줄 알았는데, 미라 형태로 남아 있는 닭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10년이 지나도 저런상태라면 살처분이라는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묻으면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우리눈에 안 보일 뿐이었다.
한꺼번에 저렇게 많은 동물을 묻었는데, 토양이 스스로 자정 작용을 쉽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저 인간들의 무지와 욕심일 뿐이었다. 묻으면 안 보일 뿐 우리는 어쩌면 이런 현실을 애써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심란합니다."
"열처리해야 하겠는데요? 간단하게 끝내려고 했더니.."
"미생물 처리로는 안 되겠어요."
"네, 열처리해야 할 것 같아요."
"열처리하고 미생물 처리해야 할 것 같아요."

매몰지 재처리 작업은 이렇게 다 파낸 다음에 오염된 흙에 톱밥처럼 생긴 미생물 발효물질과 함께 섞어 다시 넣어주면 토양이 쉽게 복원된다고 했다. 사체들은 모아 퇴비화시킬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곳 매몰지의 토양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결국 열처리를 통해 한번 태운 후 미생물 처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흙에 생각보다 물기가 많았고 그 물기는 거의 닭의 지방이나 피였기 때문이었다. - P154

살처분의 생명이 ‘신속함‘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시스템‘이 필요해보였다. 현재는 PVC로 된 저장 탱크에 살처분한 사체들을 넣고 나중에 거름으로 재처리하는 방식으로 변했다고 한다. 아마 10년 전에는 땅에 묻으면 다 썩겠지 하는 생각으로 살처분 매립을 했을 것이다. 이후 이런 토양 오염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침출수 등이 문제가되자, 토양이 아닌 저장조에 일단 묻는 형식으로 변했을 것이다. 물론 저장조에 통조림 또는 젓갈처럼 썩어가는 사체들도 이런 재처리과정을 거쳐야 한다. 역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애초에이렇게 대량으로 살처분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57

"우리 국민들은 동물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생명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법에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법체계에는 소위 ‘법적 도그마 (DOGMA)의 장벽‘이 높게처져 있는데요. 즉, 모든 권리의 주체는 인간이 되고 인간 이외의 다른 것들은 권리의 객체가 되죠. 사실 ‘동물의 존엄성‘이나 ‘동물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법학에서는 굉장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법은 ‘가치 세계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물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인식과 가치관에 변화가 있게 되면 동물생명의 존엄성이나 동물의 권리 등은 우리 법학 내로 수용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도 선진국으로 갈수록 또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고 진보된 사회로 갈수록 동물의 법적 지위를 높이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보다 크게 나타날 겁니다. 우리나라의 법체계도 동물은 ‘살아있다‘라는 점을, ‘생명의 주체‘라는 점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때가 곧 올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농장동물이나 야생동물 등에 대해서도 보다 특별한 법적 고려와 대우를 하게 될 것입니다." - P160

2020년 코로나를 겪으며 극도로 예민해진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와 피로감은 조류인플루엔자라는 질병에 강력한 대응을 요구했고, 지금도 발병농가 3km 이내의 농장에서는 멀쩡한 닭과 오리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덮어놓고 죽이는 것은 우리 인간의 아주 오랜 이기적인 관습이다. 이제는 이 관습에 의문과 반론을 제기해야 한다. 그만큼 과학이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지구는 우리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별이 아니다. 그리고 높은 수준의 과학발전은 인간만을 위해쓰려고 준 재능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런 바이러스의 위협에 동물들을 구하고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라는 인간의 ‘사명‘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까지 동물은 죽이고 인간은 살려야만 하는 사고방식이 팽배한 사회를 살고 있다. 백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축이라불리는 동물에게는 쓰지 않는 인간, 코로나에는 없는 백신을 개발해서라도 빨리 달라고 아우성치는 인간의 모습을 보라. 딜레마가 느껴지지 않는가?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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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처분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 농장 문을 열고 취재에 응해준 곳도 대부분 동물복지 농장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복지 농장은 살처분과 관련해 좀 더 면밀하게 관찰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에서 동물복지인증을 장려하고 있으면서 항상 똑같은 잣대로 살처분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 심했다.
참사랑 농장의 임희춘 씨는 처음 동물복지 농장 설명회에서 만난 수의사에게 실망을 했다고 한다. 기껏 동물복지하라고 해놓고 막상 전염병이 돌면 모두 똑같이 살처분하라는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희 동물복지 농가들은 수의사 선생님들에게 1년에 한 번씩 교육을 받습니다. 지난번 교육 때는 그분께서 힘들지만 열심히 하라고,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근데 그분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살처분하라고 하더군요.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교육장에서는 열심히 하라고 해놓고 이제와서 살처분하라는 것은 저희보고 죽으라는 거잖아요. 이럴 거면 교육이 왜 필요한 거죠?"

한쪽에서 동물복지 농장을 장려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묻지마식의 ‘살처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살처분을 둘러싼 동물복지 농장의 최대 쟁점이다. - P111

"어떻게 보면 정말 가장 싼 돈으로 가장 많은 단백질을 공급해주는 게 달걀이에요. 그런데 적어도 내 아이가 먹고 내 가족이먹는 달걀이 어떻게 유통되고 어떤 곳에서 어떻게 달걀이 나왔는지 정도는 국민 여러분들이 알고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달걀을 주기 위해 아이(닭)들이 얼마만큼 고통을 당하고 얼마만큼 죽임을 당하고 얼마만큼 죽어 나가고 있는지 국민 여러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달걀을 쉽게 돈으로 살 수 있지만 그 달걀 한 알 때문에 수많은 아이(닭)들이 떼죽음 당하고 있어요. 멀쩡한 아이들까지…. 어렸을 때 강아지, 닭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는데 이제는 생명이, 생명이 아니에요. 너무 많은 죽음을 보다 보니 뭐죽음을 봐도 ‘죽나 보다‘, ‘당연히 죽였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AI나 살처분 이야기가 나오면 국민 여러분들은 ‘그냥 다 병에걸렸나 보다‘. ‘그래서 죽였나 보다.‘라고 생각하죠. 그게 아니거든요. 병에 안 걸려서 죽는 애들이 더 많아요. 그 ‘예방‘이라는 말 때문에..."

결국 묻지마식 살처분에 대한 문제를 동물복지 농장에서 제기한것이다. 이런 저항과 반대는 정책 결정 기관에서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8개월 동안 비상근무를했다는 익산시 어느 공무원의 고층도 이해가 가고 생명윤리를 외치는 동물복지 농장의 목소리도 이해가 간다. 어쨌든 가축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죽음을 당해야 했던 동물들을 보호할 방안은 무엇인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 P112

주위에서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굉장히 바쁘시겠네요?"라고 묻는다. 아니,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정부가 조류인플루엔자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종 가축 전염병은 정부가 도맡아 하고 민간인인 우리는 그 이외의 조류 질병을 담당한다. 심지어 우리는 국내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하면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세월호 사건처럼 ‘가만히 있으라‘는 국가의 명령이 발동되고 수의사나 가축 관련 종사자들은 모두 ‘잠재적)전파자‘로 취급된다.
행정에서 보는 방역과 현장에서 보는 방역은 다르다. 조류인플루엔자를 코로나 사태에 비유하자면 의사들은 집에서 쉬고 환자들 접한 경험이 없는 공무원들이 모두 동원되어 진료하고 환자를 분류하고 방역활동을 하는 셈이다. 과연 행정력만으로 방역이 될까? 정부는 행정으로 질병을 처리하고 우리는 질병과 생명을 다루는 입장이므로 서로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의 경험과 정부의 행정력이 상호 보완된다면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116

 고병원성이라는 이름에서 시작된 오해
국제수역사무국OE 이 정의한 조류인플루엔자의 고병원성 highly path-ogenic 이란, 단지 닭에서 바이러스가 얼마나 빠르게 증식하고 치명적인지를 기준으로 만든 이름이다. 즉, 오리나 기러기 같은 다른 조류는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려도 아무런 증상이 없고 다만 바이러스를 배출하고 보균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야생 철새들이 국가와지역을 넘어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2007년 야생 조류가 조류인플루엔자의 전파 원인이라고 알려지면서 모든 관심사와 책임이 애꿎은 야생 조류에게 돌아갔다. 청둥오리, 기러기가 모든 공무원과 학자의 공공의 적이 됐다.
한때 조류독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이를사람의 계절 독감과 혼동하곤 했다. 2003년 이후 매 차례 발생하자, 어느 순간 이 질병이 ‘공포‘라고 보도됐고 이 시점 이후 마치 사람의 질병인 것처럼 다뤄졌다. 고병원성이라는 이름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마치 걸리면 많이 아플 수 있다는 느낌을 줬다. 적어도 몇몇 언론은 고병원성이라는 이름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하지만 사람은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수용체가 호흡기 깊숙이 있어서 바이러스를 직접 흡입한다 해도 상부 호흡기에서 대부분 걸러진다. 단순히 물가에 가고 새똥을 밟는다고 하더라도 조류인플루엔자에 감염될 확률은 0%에 가깝다. 아직까지도 겨울이면 도심 근처의 호수나 철새가 찾아오는 물가에는 마치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사람에게 직접 감염을 일으킬것처럼 표현돼 있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 P121

조류인플루엔자가 모든 인플루엔자를 대표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조류가 거의 대부분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감수성은 어떤 종류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닭에게서 증식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그래서 조류가 위험한거야.‘라고 해석하지만 조류가 없거나 달걀에 바이러스를 접종해 배양할 수 없다면 백신을 만들 수 없다. 만약 지금 팬데믹이 코로나가 아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였더라면, 아마도 백신이 실험실에서 빠르게 테스트되고 달걀에서 백신 바이러스 배양을 시작해 빠르게 백신을 보급했을 수도 있다. 실제 우리가 매년 겨울에 주사로 맞는 3가, 4가 계절 독감은 거의 대부분 달걀에서 생산한다. 만약 조류에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증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바이러스 배양 시스템을 찾아내야 하고 빠르고 저렴한 백신 생산은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조류들은 새로운 바이러스를 가져와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응할 백신을 만들 수 있도록 알을 내주는 고마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 P122

3km 방역대는 공기를 전파할 수 있는 바이러스 특성들 때문에 주변을 빠르게 살처분해야 하는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생겨난 방역 관습이다. 하지만 지금은 차량으로 하루 안에 어느 곳이든 이동할 수있는 시대인데, 오히려 바이러스 역학적으로 주변 농장이 꼭 더 위험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공기와 쥐나 야생동물이 병을 매개할수 있다며 단순히 동그라미로 그려놓은 18세기 방역대 논리를 21세기에도 계속 따라야 할까? 차량의 동선과 사람의 이동을 좀 더 세밀하게 추적해 좀 더 정교한 방역을 할 수는 없을까? 운송 수단과 사회 변화는 21세기를 달리고 있지만, 질병 통제 수단은 아직도 18세기 살처분 방식에만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바이러스 없이 유전자만으로도 백신을 만들고 재조합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는 시대인데 말이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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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인플루엔자가 본격적으로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20031년으로, 당시 홍콩에서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SARS, 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이 발병, 확산되고 이를 조류인플루엔자로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3월 18일자 경향신문 기사는 ‘지구촌 괴질 비상‘이라는 제목으로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경고를 날렸고 4월이 되자, 이내 이 괴질은 ‘조류독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치며 공포심을 극대화시켰다. 사실 ‘괴질‘이라는 것도 쉽게 쓰면 안 되는 단어이지만, 독자의 공포심을 자극하기에는 괴질 같은 어감의 용어가 제격이다.
2003년 4월 4일자 한국일보에서는 ‘괴질‘이라는 용어사용과 관련해 서울대병원 감염 전문의 최강원 교수의 인터뷰를 기사로 실었다.

"괴질이라는 용어는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원인도 모르는 이상야릇한 병, 걸리기만 하면 죽을병이라는 공포감에 쏙믿음만 키워줄 수 있습니다. 물론 주의는 해야겠지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전, 이 바이러스는 우리나라에서 ‘괴질‘로 불렸다. 홍콩에서 조류인플루엔자로 사람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이 2003년 2월 21일경이었다. 약한 달 후 이 병의 명칭은 ‘괴질‘로 변경된다. 이렇게 원인 미상의 폐렴을 일으킨 바이러스는 처음에 조류인플루엔자로 불리다가 괴질을거쳐 ‘급성중증호흡기 증후군‘, 또는 ‘사스SARS‘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사스라는 정식 명칭이 나오기 전까지 이 바이러스는 계속 조류인플루엔자와 연관 지으며 괴질의 원인을 조류인플루엔자에서 찾고자하는 추측성 기사들이 쏟아졌다. 감염 증상이 비슷한데다, 1997년도 홍콩의 조류인플루엔자 인간 감염 사례가 만든 유추였을 것이다.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 인류가 얼마나 전염병에 민감한지 느낄 수있었다. 지금도 ‘괴질‘이라는 말을 들으면 영화 속의 좀비가 먼저 떠오른다. 마치 종말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언론에겐 아주 달콤한 단어이다. 단독에 목마른 기자들에겐 이것만큼 안성맞춤인 단어가 없다.
누가 ‘괴질‘이라는 단어를 보고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대중의 공포심은 이런 식으로 점점 커져만 갔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뉴스를 자세히 보지 않은 사람들의 뇌 속에는 자연스럽게 괴질과 조류인플루엔자가 연결된다. 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한 알 수 없는 공포가 추가되는 것이다. - P62

 이렇게 공포와 혐오가 커질수록 국민들은 더욱 높은 수준의 방역 수준을 원하게 된다. 시간이 걸리는 정책보다는 신속하게 감염원을 차단하는 ‘살처분‘ 방식이 인간의 입장에서는 더욱 믿음직한 정책이었을 것이다. 국민의 공포심이 커질수록 살처분의 수요는 올라간다. ‘백신‘이라는 불확실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 P67

"새끼를 죽일 때 어미젖을 물리는데요, 그때 주사를 놔서 죽입니다. 그러면 어미의 커다란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져요. 그 장면이 떠올라 잠을 잘 수 없었어요. 매일 술을 마셔야 잠을 겨우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상상 이상으로 잔혹한 현장을 버텨내야 했다. 우리가 자동차 하부 세차를 고민하고 있을 때, 농촌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두려워한 전염병, 바이러스가 이렇게 또 다른 형태로 괴롭히고 있었다. - P70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또 다른 형태로 논쟁의 중심이 됐다. 2010~2011년 구제역 파동 당시, 정부는 결국 긴급 백신 투입을 지시한다. 구제역 청정국의 지위를 포기하고 백신 접종으로 전염병을 막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살처분에 지친 국민들에게 당연히 지지받을정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백신을 맞은 고기의 유통‘의 문제였다.
사람들은 과연 백신 맞은 고기를 사 먹을까? 어릴 적 우리 집은작은 소 농장을 운영했다. 약 50여 두의 소를 키우면서 때가 되면 주사를 맞는 소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구제역 백신을 맞는 것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백신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 고기를 믿고 먹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오염된 고기‘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또한 도시 사람들은 모르는 ‘비가시성‘의 세계였다.
농가의 입장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취재를 나갔다 온 동료의 테이프를 돌려보다가 한 농부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방역 담당자들에게 외치는 장면을 보게 됐다.

"백신 맞은 고기를 누가 사 먹어! 농민들은 죽으라는 거야?"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백신도 안 되고 살처분도 안 된다. 우리에게 가축이라는 동물은 이런 존재다. 무엇보다 백신이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백신과 같은 방법이 있는데 왜 그렇게 끔찍한 살처분을 계속해야만 했을까? 지금은 이 문제에 얽혀 있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지만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P71

‘과연 사람들은 진짜 백신을 한 번도 맞지 않은 고기만을 먹고 있을까?"
‘혹시 다른 질병에 대한 백신을 맞고 있는 건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의 5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가금류(새) 농장에서는 이미 다른 질병에 대해서는 백신 접종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그 접종으로 인해 바이러스가 고기나 알에 남아 있다는 보고는 전혀 없다고 한다. 다만 우리는 닭들이 이렇게 여러 차례 백신을 접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아니 사실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 P74

"개발도상국(후진국)의 경우, 이 바이러스는 감염병의 주기적인 유행엔데믹, endemic입니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가축을 죽게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가축은 소셜 파워를 상징하는데, 그걸 잃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유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는데 구제역은 그 생산성을 떨어뜨립니다. 메인 이슈는 결국 ‘생산성의 저하‘ 입니다. ... (중략)…선진국에서는 ‘경제적 이슈‘입니다만 후진국에서는 ‘생존(존속)의 이슈‘입니다."

구제역과 같은 전염병의 통제는 한 국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결국 지구상에 있는 바이러스 전체를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이곳에서는 전 세계에 공급이 가능한 백신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비용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백신 공급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바이러스는 많은 유형이 있으므로 하나의 백신만으로 모든 구제역 혈청(유형)을 막을 순 없습니다. 영국과 같은 섬나라는 조금 쉬울 수도 있겠지만, 한국과 같이 국경을 접한 나라에서는 어떤 유형의 바이러스가 유입될지 알수 없습니다. 따라서 백신 뱅크 설립과 인프라 구축을 통해 질병이 전파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백신은 이렇게 여러 요소를 충족해야 개발할 수 있다. ‘가격‘, ‘보관‘, ‘신속한 진단과 투입‘이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이런 것들이 갖춰지지 않으면 백신은 무용지물이다.  - P80

벡터 백신이란 유전자에 백신을 주사해서 닭에게 주입한 후, 어떤 질병 증후군이 보일 때 이 백신을 맞은 가축의 항체를 보고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다. 닭에서 벡터로 쓰이는 바이러스는 뉴캐슬병 바이러스, 전염성 기관염 바이러스, 마렉 바이러스 등이 있다. 이들 바이러스는 이미 유전자 조작에 의해 병원성이 제거되고 필요에 따라 면역과 관련된 유전자 일부를 재조합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수많은 과학자가 에이즈, 암 등과 같은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바이러스 기반의 재조합 벡터 백신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한다.
벡터 백신을 사용해 빠른 판단과 대응을 해야 한다는 점은 서유럽 국가의 생각과 비슷하다. 하지만 홍콩은 중국과 인접해 H5N1, H7N9과 같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를 거의 해마다 막아야 하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다. - P92

"홍콩의 백신 정책은 2002년부터 시작됐습니다. 2003년 12월부터 홍콩에 오는 모든 조류에 백신을 접종했고 AI는 오늘날까지(2018년 기준) 2008년 오직 한 농장에서 발발한 사례밖에 없습니다. 그 AI 발발 사례는 항원 장벽이 있는 바이러스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예방 목적의 백신 사용이 효과가 있었다는 좋은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홍콩은 아직까지 중국 본토로부터 살아 있는 가금류가 들어오고 있고 또한 철새의 이동도 활발합니다. 또한 중국 본토에는 바이러스가 근절되지 않고 계속 발생하는 중입니다. 따라서 백신 정책은 높은 감염의 위험이 있는 홍콩이라는 지리적특성 때문에 진행됐습니다. 대부분의 백신을 사용하는 나라는 이미 풍토병이 된 곳에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콩도 1997년 백신으로 컨트롤하지 않았을 때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살처분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금류 시장이 파괴됐습니다. 하지만 예방적 백신 정책을 사용한 이후에는단 한 건의 감염 사례만 있었는데요. 이때는 농장이나 시장의 가금류에 대해 살처분을 시행했습니다. 물론 발병 사례가 생기면 가금류 살처분이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바이러스에 대한 부담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백신을 통해 이 부담까지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P93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다른 종에의 감염에 대한 고려가 우선돼야 합니다. 개인적 견해로는 백신이 질병의 전파나노출에 대한 상황을 좋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감염돼서 닭이 죽으면 바이러스는 더 빨리 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신은 그런 급성폐사를 막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더욱방역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백신이 이 상황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이러스가 적게 순환될수록 인간에게 노출될 확률도 낮아지죠. 저는이런 측면에서 백신을 강하게 신뢰합니다. - P94

각 나라마다 질병의 통제에 대한 생각과 여력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14년 당시, 방역위원회 소속 모 수의대 교수님께 우리나라에서도 백신을 쓰면 안 되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교수님은 살처분으로 막아내는 방법이 최선이며 백신으로 막아내는 방법은 후진국에서나 쓰일 법한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백신이 더 과학적인 방법이고 선진국에서나 쓰일 법한 방식이라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대답은 정반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덮어놓고 무조건 죽이는 방식이 더선진국다운 방식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살처분은 훨씬더 많은 비용을 수반하는 정책이다.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나라는 선진국뿐이다. 경제적인 논리로 보면 그렇다.
이런 논리에 사로잡혀 빠른 살처분을 최우선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나라의 방역 정책이다. 2018년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도 이런 기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강연 내용을 봐도 조류인플루엔자가 인간에게 옮길 수 있는 인수공통 감염병이라는 점, 또한 변이가 활발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현 단계에서는 살처분이 가장 깔끔한 방식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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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얼핏 보아 말투는 천진하고 느슨하며 시시껄렁한 태도는 시러베장단에 호박 국 끓여 먹을 기세이고 가명도 어딘가 미련하게 들리는 데다 지금 하고 나타난 차림새는 사업 실패로 집을 날리고 장롱에 식탁까지 차압당한 뒤 신장이 떼이기 일보 직전인 알코올중독자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로, 뜯어보면 은근히 밀알진 얼굴에 신체 기능이 떨어진다며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높으신분들을 자주 상대하다 보니 명품 양복을 수시로 갈아들인다. 신속 정확 치밀과 같은 방역업자가 기본으로 장착해야할 속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거기에 서비스 정신까지 딸려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방역을 완수하기만 하면 된다고생각하는 업자들이 있는 반면, 투우는 사소한 과정 한 단계까지 고객의 필요에 따라 이행한다. 요구 사항이 따로 없는경우는 목표물을 찾아내어 제거하기까지 국내 거주자인 경우 1박 2일 정도면 충분하지만, 귀퉁이를 물그릇에 담가둔수건처럼 작은 징후가 번져나가게 하고 목표물의 영혼을 불안과 초조에 충분히 적신 뒤 그가 온몸의 구멍으로 남김없이 배설물을 쏟아낼 만큼의 공포에 사로잡혀 가능한 한 처참하게 가도록 해달라는 옵션 주문이 들어오면 개중에는모든 손가락을 한 마디씩 끊어서 총 스물여덟 개의 조각을먼저 보내달라거나 팔다리 관절부터 분질러달라는, 깊은 원한의 소산이라고만 하기엔 참으로 번거롭고 정서적으로 문제 있어 보이는 주문들도 많았다-그에 필요한 무대를 짜고연출을 하여 최장 석 달 가까이 목표물 주위를 맴돌기도한다. - P36

처음에는 사소한 이변과 의구심 정도였다가 압박감과 고조되는 두려움으로 호흡곤란 지경이 되면 비로소 목표물은 어그러진 일상과 폐허를 목도하게 되고, 목표물이 미쳐버리기 직전 투우는 그 앞에 본색을 드러낸다. 이때 목표물이 완전히 미칠 틈을 주지 않도록 그의 정신 공간의 여분을 치밀하게 계산하는 한편 작품에 꽂을 나사를 쥐었다 풀었다 하면서 보다 정확한 견적을 낼 필요가 있는데, 정신이 나간상대를 제거하는 것은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셈이 되어서 의뢰인의 요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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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밀착을 넘어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서로에게 흡착되다시피 한 생면부지의 몸사이에 종잇장만 한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누군가 입을 열거나 숨을 쉴 때마다 머리 위로 끼얹어지는 고기 누린내와 마늘 냄새 문뱃내에 들숨을 참더라도, 그 냄새가 닷새간의 노동이 끝났음을 알려주기에 안도하는 시간. 과연 내년에도 혹은 다음 달에도, 심지어 당장 다음주에도 이 시간에 전차를 탈 수 있을지에 대한 실존의 불안을 잠깐이나마 접어두는 시간. 다음 역 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한 무더기의 노동자들-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피로와 고뇌와 얼른 귀가하여 젖은 휴지 같은 몸을 매트리스에 부려놓고 싶다는 갈망 사이로 그녀가 들어선다. - P7

복잡한 장소에서 일 마치고 코너를 돌 때는••••••.
속도를 줄이거나 벽쪽에 붙지 말고 바깥으로 원을 넉넉하게 그리라고 했지. 마주 오던 사람이랑 부딪혀 갖고 있던걸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여기 증거물 있으니다 가져가세요 하게?
그렇게 말하던 이의 표정을 바로 어제인 양 떠올리며 그녀는 집에 닿는 가능한 한 복잡한 경로를 머릿속에 그린다.
이대로 나가 한 블록 걸어가면 버스 정류장이 나올 테고 거기서 아무 번호나 잡아탄 다음 이곳으로부터 최대한 멀리떨어진 또 다른 노선의 전철역에 내려 굳이 먼 길을 돌아가리라, 최대한의 궤적을 그리며 잔손금과도 같이 펼쳐진 길을 돌아가리라, 몸이 허락하는 한 그녀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간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지상의 찬란한 어둠을 향해 나아간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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