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모두가 주자파로 공격당하게 된 것은 두 분이 공무부의 지도적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는 "욕가지죄, 하환무사(欲加之罪, 何患無辭)", 즉 "죄를 씌우려고 마음먹으면 증거는 있는 법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런 속담에 입각하여 전국 각지의 크고 작은 모든 직장의 지도자들은 부하 직원들로부터 "자본주의적" 이거나 "반마오쩌둥 주석적" 정책을 실시했다는 이유로 주자파라는 공격을받았다. 이러한 공격이 행해진 이유에는 농촌에서 자유시장의 개설을 허가하고, 노동자들에게 보다 수준 높은 전문기술을 습득하도록 종용하고,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허가하는것과 같은 정책들이 포함되었으며, 심지어 스포츠 분야에서 경쟁을 장려한 것마저 "우승컵과 메달만을 노리는 부르주아적 광기"라고매도하면서 공격 이유로 삼았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당원들은 마오쩌둥이 이런 정책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모든 시책들이 마오쩌둥을 정점으로 한 당 중앙의 명령으로 하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제 와서 뜬금없이 지금까지의 모든 시책들은 당내의 "부르주아 사령부" 가 내려보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P501

"권력 탈취, 奪權둬취안]!" 이것은 중국에서 특별한 마력을 지닌 단어였다. 권력은 정책에 대한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민에 대한 생사여탈의 권력을 의미했다. 권력은 돈과 함께 특전, 사람들의 경외, 아첨, 보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중국에는 일반 인민들이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전혀 없었다. 나라 전체가 마치 내부에서 고압수증기가 부글거리는 압력밥솥처럼 불평불만으로 끓고 있었다. 인민들이 열광할 수 있는 축구시합도 없었고, 인민들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 압력단체도 없었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도 없었고, 심지어 폭력영화마저도 없었다. 체제와 당국에 의한 권리침해에 대해서 어떤 항의의 목소리도낼 수 없었고, 가두시위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불만을 분출시키는 중요한 수단인 정치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도 중국에서는 금기 사항이었다. 하급자들이 상급자의 불공정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상급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불만을 분출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므로 마오쩌둥이 인민들에게 "권력 탈취"를 요구했을 때, 그는 수많은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복수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이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권력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보다 바람직했으며, 특히 권력을 한번도 쥐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이제 일반 인민들에게는 마치 마오쩌둥이 권력은 잡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 P505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괴물로 변하게 한 것일까? 이처럼 아무런의미도 없는 잔학행위를 연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오쩌둥에 대한 나의 신뢰가 퇴색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전에는사람들이 박해를 당했더라도 나는 그들이 과연 무고한 사람들인지를 100퍼센트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무고는 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의 완전무결한 우상이었던 마오쩌둥주석에 대한 의심이 차츰 마음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마오쩌둥 주석이 아니라 장칭과 중앙문화혁명소조라고 생각했다. 신과같은 황제인 마오쩌둥은 여전히 의문의 여지 없이 완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P546

그러나 문화혁명이 오랜 기간 계속되면서 국가 경제의 대부분이마비 상태에 빠졌다. 도시 인구가 수천만 명 단위로 증가했음에도불구하고, 도시에 주택이나 공공시설을 새로이 건설하는 사업은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소금, 치약, 화장지와 같은 품목은 물론이고 모든 종류의 식품과 의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생필품들이 배급제로 공급되지 않으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청두의 경우에는1년 동안 설탕을 구경할 수가 없었으며, 비누 한 조각 없이 6개월을지내기도 했다.
1966년 6월부터는 학교 수업도 정지되었다. 교사들은 규탄대회에내몰리거나, 자신들의 조반파를 조직하는 활동에 나섰다. 학교 수업이 없었으므로 학생들에 대한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학생들은 자유로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 사실상 책, 음악, 영화가 전무했으며 극장, 미술관, 찻집 등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허가된 것은 아니지만 카드놀이가 은밀하게 되살아났다. 대부분의 혁명과는 달리 마오쩌둥이 추진하는 혁명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몰두해야 할 일거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연히 젊은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홍위병 활동"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열기와 욕구불만을 분출할 수 있는유일한 방법은 규탄대회에서 폭력을 휘두르거나, 서로를 육체적으로나 말로 치고받는 길밖에 없었다. - P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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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관계의 파탄에는 이 ‘돌봄 역량‘의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이,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는 거예요. 모르면서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굽니다. 아는 것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을 조심하는 것도 아니라,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문자 그대로 ‘함부로‘대해요. 그러니 관계는 파탄이 나고 사람을 피하지 않을 수 없죠. 제가 리터러시에서 특히 말귀를 강조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말귀가 열려 있어야 돌볼 수가 있고, 또 돌보는 와중에 말을 알아듣는 역량이 커지거든요. - P217

리터러시 교육에서는 그런 짧은 호흡, 내가 당장 뭔가를 해야 될것 같은 시간의 개념을 바꿔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긴 글이라는게 단순히 길이가 길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읽어내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고 자신을 돌아보며 심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긴 글이에요. 이해가 되지 않았던 측면이 드러날 수도 있고,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의 반전이 나올 수도 있죠. 이런 건 긴 글을 끝까지 읽어야 경험할수 있어요. 그런데 소셜미디어에서는 당장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내존재감이 없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돼요. - P246

세 번째 키워드는 ‘반복‘입니다. 독서를 할 때 텍스트 자체의 이해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경험이 동시에 일어나죠. 그런데 책을 처음읽을 때는 텍스트 이해에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어요. 다시 한 번 읽을 때에는 전자에 할당되는 자원이 확 줄어들면서 경험을 두텁게 만드는 데 쓸 수 있는 자원이 확연히 커져요. 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면에서 재차 읽는/보는 행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여정을 약속하죠. 영화 감상이건 독서건 ‘반복‘은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 되는 거예요. 많은 경우 첫 읽기는 저자에게로 가는 길이지만다시 읽기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에요. 여러 사람이 "다시 읽지않았다면 읽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다시 읽기의 이런 속성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이런 측면에서 ‘많이‘보다 ‘반복‘의 힘에 주목하는 리터러시를 상상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 P264

《페다고지》의 입장에서 보면 문해력의 방향이 바뀝니다. 즉 민중이 천문과 인문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아니라 민중을 대하는 지식인들이 그들의 언어에 대해 무지한 것이 되죠. 어쩌면 이 이야기야말로선생님과 제가 이 대담에서 말한 리터러시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리터러시가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이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에요. 문제는 내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교과서적으로 정확하게 말을 하고 글을 쓸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은 두루뭉술하게 말을 하거나 얼버무리기도 하죠. 또 상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많아요. 이럴 때 우리가 그 사람을 비난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말과태도, 분위기의 ‘무늬‘를 읽을 줄 안다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바벨탑이 아니라 다리가 놓이겠죠. - P275

선생님과 제가 말하는 ‘리터러시‘는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역량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마무리의 시작을 리터러시 앞의 ‘삶‘에 대해 감히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삶의 리터러시, 삶을 위한 리터러시란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입니다. ‘옳음‘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삶을 억압하는 리터러시가 아니에요. ‘좋은 삶‘을 생각하도록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 삶의 리터러시입니다. 이런 점에서 리터러시는 모두를 해방하고 자유롭게 하며, 그 자유로운 사람들이 서로서로 다리를 놓으면서 그것이 바로 ‘좋은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각자의 몸, 그리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을줄 알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글과 책이 어떤 시대에 어떤 세대의 사람들에게 몸이었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였으며 몸의 변신 수단이었고 그 사람들의 말이었다면, 지금은 이미지와 유튜브가 몸이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이자 말이며 변신 수단이 된 시대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그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하며, 그 몸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겠죠. 그 변신 수단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몸을 보호하는 법 또한 배우고 존중할 수있어야 합니다. - P277

얼마 전 타계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은 "정의는 정의당한 자들이 아니라 정의한 자들에게 속하는 것이다(Definitions belong to the definers, not the defined)."라는 말을 남겼죠. 리터러시를 논의하는 맥락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현재의 ‘리터러시 생태계의 변동‘을 사유할 때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의 단초가 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누가 리터러시를 정의하는가‘라는 질문이죠. 이는 다시 누가 리터러시의 평가 방식을 정하는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활용되는가, 리터러시는 사회적으로 어떤 차별과 기회를 만들어내는가, 공공성에 기반한 리터러시 생태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같은 질문들로 연결돼요. 그런데 흔히들 ‘디지털네이티브‘라고 불리는 이들은 아직 리터러시를 정의하고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죠. 리터러시를 권력화할 수 있는 단계에 진입하지 못한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이 리터러시에 관련된 정책을 디자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자리에 올랐을 때 리터러시를 어떻게 정의하고 권력화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듯합니다. 그 작업은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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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이야기와 활동에도 불구하고 계급의 적들이라는 개념은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 어린이들 대부분에게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그림자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멀고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마오쩌둥은 어린이들에게 계급의 적들을 일상생활에서의 구체적인 형태로 전달할 수가 없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된 한 가지 이유는 마오쩌둥 자신이 과거를 너무나 철저하게 불식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계급의 적들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내 의식 속에 자리잡았다.
동시에 마오쩌둥은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한 포석을 착실하게 깔아나가고 있었다. 나 자신을 포함한 청소년 세대는 마오쩌둥의 노골적이면서도 교활한 세뇌 작업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마오쩌둥이 교묘하게도 도덕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인민에게는 충성이라는 이름을 빌려계급의 적들을 철저하게 분쇄하도록 요구하는 한편으로, 자신에 대한 전면적인 복종이야말로 무사무욕(無私無欲)의 애국적인 자세라고 기만적으로 호소했다. 이런 주장의 뒷면을 파악하기란 힘든 일이었으며, 특히 성인층으로부터 어떤 대안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마오쩌둥의 저의를 간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실제로 성인들은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 인민들은 2,000년 동안이나 정치적 권력과 정신적 권위가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황제를 추대해왔다. 세계의 다른 지역 사람들이 신에 대해서 가지는 종교적 감정을 중국인들은 항상 황제에 대해서 품고 있었다. 부모님도 수억 명의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정신적인 전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 P401

마오쩌둥은 위기감을 느꼈다. 스탈린은 사후에 흐루시초프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지만, 마오쩌둥은 자신이 생전에 스탈린과 같은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선제공격을 취하여 자신이 "중국의 흐루시초프" 46 이런 공작에 "문화혁명"이라는 기만적인 명칭을 붙였다. 그는 이번에는 자신의 공작이 외로운 싸움이 될 것임을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가슴속으로 온 세상을 상대로 대작전을 전개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당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가진 적을 상대로 싸움을 해야만 하는 자신을 비극의 영웅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오쩌둥은 자기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우한의 연극을 비판한 논문을 기사화하기 위한 자신의 노력이 반복적으로 실패하던 끝에 마오쩌둥은 1965년 11월 10일, 마침내 자신의 추종자들이 당을 장악하고 있는 상하이에서 그 논문을 기사화할 수 있었다. "문화혁명" 이라는 명칭이 이 기사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 P423

11월 30일 「인민일보」가 마침내 그 기사를 전재한 지 한참 후인12월 18일에야 「쓰촨 일보」가 기사를 전재함으로써 쓰촨성은 그기사를 뒤늦게 보도한 몇몇 성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인민일보」는권력투쟁 과정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해왔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편집자"의 이름으로 문화혁명은 "학술논쟁"의 범주에 머무를 것이라는(즉 비정치적이어야 하며 정치투쟁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붙인 후에야 그 논문을 전재하는 데 동의했다.
그 후 3개월간 마오쩌둥의 마녀사냥식 정치박해를 막아보려는 저우언라이 총리까지 합세한 반대세력과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세력들사이에서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1966년 2월, 마오쩌둥이 잠시 베이징을 떠나 있는 동안에 베이징의 중앙정치국은 "학술논쟁이 정치적 박해로 발전해서는 안 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마오쩌둥이 이런 결의안에 반대했으나 그의 의견은 무시당했다.
4월에 아버지는 중앙정치국이 2월에 통과시켰던 결의 내용에 맞추어 쓰촨성의 문화혁명을 지도하기 위한 문서를 작성했다. 아버지가 작성한 문서는 "4월 의견"이라고 알려졌다. 논쟁은 철저하게 학술적이어야 한다. 상식을 벗어난 고발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 당의 권력은 지식인들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버지가 작성한 "4월 의견" 의 골자였다.
그러나 이 문서는 5월에 발표될 예정이었는데, 발표 직전에 갑자기 제지당하고 말았다. 저우언라이와 공모한 마오쩌둥이 중앙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여 분위기를 지배하면서 새로운 결의를 채택했던것이다. 마오쩌둥은 2월에 결의된 내용을 무효라고 선언하고는 모든 반체제 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은 "청산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강한 어조로 반체제 학자들과 그 밖의 계급의 적들을 옹호해온것은 공산당원들이었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이런 당원들을 "당내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자들(走本主義道路的當權派)""이라고 불렀다. 이에 따라 이들 세력은 주자파(走資派)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제 거대한 문화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 P424

마오쩌둥의 통치 아래에서 나와 같은 10대의 젊은이들은 계급의적과 싸워야 한다고 배우며 자라났다. 또한 문화혁명을 수행할 것을호소하는 신문의 논조는 우리들에게 마치 "전쟁"이 임박한 듯한 느낌을 주입시켰다. 정치적 감각이 예민한 일부 젊은이들은 경애하는 마오쩌둥 주석이 문화혁명에 직접 개입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마오쩌둥 숭배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은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6월 초부터 중국 굴지의 명문대학교들 중 하나인 칭화대학교 부속중학교의 일부 학생 활동가들은 여러 번 집회를 가지고 다가오는 투쟁에 대처할 전략을 협의했으며, 자신들을 "마오쩌둥 주석의 홍위병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이들홍위병들은 마오쩌둥의 말이라고 「인민일보」에 소개된 "모반이 도리이다(造反有理)를 자신들의 모토로 채택했다.
이들 초기의 홍위병들은 "고급 관리의 자녀들이었다. 그들만이 이런 종류의 활동을 벌이더라도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정치적 환경 속에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컸다. 홍위병의 존재를 파악한 장칭은 7월에 그들의 대표를 만났다. 8월 1일에 마오쩌둥은 홍위병에게 이례적으로 공개서한을 보내어 "제군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고 전했다. 이 서한에서 마오쩌둥은 이전의 "조반유리"를 "반동파에 대한 조반유리"로 교묘하게 변형시켰다. 마오쩌둥을 열광적으로 신봉하는 10대의 젊은이들에게 이 서한은 신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이런 일이 있은후 베이징의 각급 학교에서는 홍위병 그룹들이 대량으로 조직되었고, 이어서 전국적으로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 P435

지금까지는 모든 정책과 명령이 당이 전적으로 관리하는 철저한 통제체제를 거쳐서 전달되었다. 이제 마오쩌둥은 종래와 같은 통치기구를 버리고 젊은이들을 직접 조종하고 나섰다. 마오쩌둥은 이를위해서 두 개의 매우 이질적 방법을 교묘하게 결합시켰다. 그것은한편으로는 신문을 사용하여 민중에게 공허하고 터무니없는 슬로건을 호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문화혁명소조, 특히 그의 아내를이용하여 음모와 선동 공작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슬로건의 해석을결정하는 것은 중앙문화혁명소조였다. 1960년대에 서방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조반(反)", "교육혁명", "구세계를 타파하여 신세계를 창조하자", "새 인간 창조와 같은 슬로건들은 폭력행사를 호소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폭력적으로 변하기 쉬운 젊은이들의 속성을 간파한 마오쩌둥은 젊은이들이 밥은 잘 먹으면서도학교 수업은 중단되었기 때문에 쉽게 선동할 수 있는 그들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방출시켜 대혼란을 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을 통제된 폭력집단으로 내몰기 위해서는 대상이 필요했다. 어느 학교에서나 가장 눈에 잘 띄는 대상은 교사들이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지난 몇 달 동안 공작조와 학교 당국에 의해서 "반동적 부르주아 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제 반항적인 학생들이 교사들을 습격했다. 가정에서 일대일로 대결해야 하는 부모들보다 교사들은 집단으로 공격하기가 쉬운 대상이었다. 중국에서는 부모보다도 교사가 더 권위 있는 존재였다. 전국의 학교에서 예외없이 교사들이 매도되고 구타당했다. 때로는 교사가 구타를 당한 끝에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일부 학생들은 학교 내에 감옥을 설치하여 교사들을 고문하기도 했다. - P437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예의바르게 행동하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이제 혁명전사는 무릇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점잖은 사람은 "부르주아"로 간주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점잖다는 비판을 받았다. 내가 홍위병에 입대할 수 없었던 것도 이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문화혁명이 진행되는 몇 해 동안 나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너무 자주 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당하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는 "부르주아적 위선"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제 예절은 풍전등화 같은 상태였다. - P448

대자보에 관해서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즉시 그것은 쓰촨 성 당 지도부의 짓이라고 말했다. 대자보가 지적한 두 가지 건은 상부에 있는 소수의 수뇌들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그들이 자신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청두의 대학생들은 공격의 대상으로 쓰촨 성의 당 지도부를 지목하기 시작했다. 중학생들과 달리 대학생들은 중앙문화혁명소조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었다. 따라서 그들은 마오쩌둥의 진정한 의도가 "주자파", 즉 당내에서 실권을 장악한 간부들을 격파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공산당 간부들의 대다수는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에야 결혼을 했기 때문에 대학에 다닐 연령의 자식들이 없었다. 따라서 공산당 간부를 공격하는 대학생들은 고급 간부의 자녀가 아니었다.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당 간부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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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가깝고 어머니도 가깝지만
마오쩌둥 주석만큼 가깝지는 않답니다"
마오쩌둥 숭배(1964-1965)

우리가 마오쩌둥을 부를 때 항상 사용하는 "마오쩌둥 주석"이라는 단어는 내가 열두 살이었던 1964년에 내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대기근 이후 얼마 동안 물러나 있다가 정계복귀를 시작한 마오쩌둥은 작년 3월에는 전 인민에게,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들을 향해서 "레이펑 동지로부터 배우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레이펑은 1962년에 스물두 살의 나이로 사망한 병사였다. 생전에 레이펑은 연장자, 환자, 가난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등 많은 선행을 했다. 자신의 저금을 털어서 재해 구조기금으로 기부했고, 병원에 입원 중인 동료들에게 자신이 배급받은 식량을 건네주기도 했다.
레이펑은 곧 내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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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공무원의 직급제가 도입되자 정의실현을 위한 아버지의 성전은 정점에 달했다. 모든 당원들과 공무원들은 26개의 직급으로 구분되었다. 최하위 직급인 26급의 봉급은 최고위 직급의 20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러나 실제적인 차이는 봉급 이외의 수당과 특권에있었다. 지급받는 코트가 비싼 모직물로 만들어진 것인지 또는 값싼 무명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로부터, 아파트의 크기와 아파트에 실내화장실이 있는지 또는 공동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이 직급에 따라 결정되었다.
입수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도 직급에 따라 결정되었다. 모든 정보를 국가가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보를 세세하게 구분하여 정보에 어두운 일반 대중에게뿐만 아니라 당 내부에서조차 직급에 따라 차별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중국 공산주의 체제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 P276

마오쩌둥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 않았던 혁명 참가자들에게는 공산당이 집권한 후 이런 유형의 무언의 낙인이 붙여졌다. 이런 현상은 지하공작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지하공작원으로 일했던 수많은 공산당원들 중에는 용감하고 헌신적이며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에게도 그런 낙인이 항상 따라다녔다. 이빈지구에서는 과거에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런저런 압력을 받고 있었다. 지하공작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으며 그들의 가족들이 공산당의 손에 의해서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한 요인이었다. 더구나 지하공작원들은 일반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이 농민 출신으로 문맹자가 많았던 홍군 병사들로부터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 P286

이런 새로운 정치운동은 주로 저명한 작가 후평과 같은 일부 공산주의 작가들의 언행을 마오쩌둥이 문제 삼음으로써 촉발되었다. 그들이 마오쩌둥과 사상적으로 대립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독자노선 추구가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렸고, 또한 사상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마오쩌둥은 이들을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그들의 자유로운 발언을 방치할 경우에는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가 손상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신생 중국은 모두가 하나같이 행동하고 생각해야 하며 중국을 단결시키기 위해서는 엄격한 조치를 취해야 국가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다수의 저명한 작가들을 "반혁명 혐의"로 투옥시켰다. "반혁명"은 최악의 경우 사형까지도 당할 수 있는 중대한 혐의였다.
이런 조치는 중국에서 자유로운 언론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다. 공산당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모든 언론기관을 당의 지배하에 놓았다. 이제부터 온 국민의 사상이 국가의 더욱 엄격한 통제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 P299

반우파투쟁은 중국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반우파 투쟁은 학생, 교사, 작가, 예술가, 과학자 및 기타 전문직 종사자와 같은 55만 명에 달하는 지식인들을 우파분자로 낙인찍고 1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추방되고, 공장이나 농촌의 육체노동자로 내몰렸다. 일부 지식인들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중노동을 해야 했다. 우파분자로 낙인찍힌 지식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사회의 하층민으로 전락했다. 반우파 투쟁이 남긴 교훈은 분명했다. 어떤 종류의 비판도 앞으로는 허용치 않겠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어떤 불평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때 사람들사이에서 회자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삼반운동 이후에는 누구도 돈을 만지려고 하지 않고 반우파투쟁 이후에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三反以後莫管錢,反右以後莫發言)." - P333

이런 소동은 마오쩌둥이 중국을 최강의 현대 국가로 만들겠다는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철이 산업의 "쌀이라고 규정하고는 1957년에 연간 535만 톤이었던 철강 생산을 1년 후인 1958년에는 두 배인 1,070만 톤으로 증가시킬 것을명령했다. 그러나 전문기술자와 노동자들을 데리고 본래의 철강업을 발전시키는 대신에 마오쩌둥은 철강 생산에 온 인민을 동원했다. 모든 직장에 철강 생산 목표량이 하달되자 모두들 몇 달씩 일상 업무를 중지하고는 목표량을 달성하는 일에 매달렸다. 경제발전의 지표는 몇 톤의 철을 생산했느냐 하는 단순한 목표에 집약되었으며, 모든 인민들이 이 작업에만 내몰렸다. 정부의 추계에 따르면, 식량생산을 담당하던 거의 1억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농사일에서 손을놓고 철강 생산에 매달렸다고 한다. 용광로에 투입할 장작을 마련하느라 산의 나무를 벌목하자, 수많은 산들이 민둥산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야단법석을 피우면서 전 인민을 철강 생산에 내몬 결과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사람들이 "쇠똥"이라고 부르는 무른 쇠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런 한심한 결과는 마오쩌둥이 경제에 무지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무시한 채 몽상에 빠져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몽상에 빠진 시인은 멋진 시라도 지어내지만, 정치 지도자가 몽상에 빠져 있다면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마오쩌둥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밑바닥에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경시가 자리잡고 있었다.  - P338

조작된 이야기를 타인들에게 전하고 또 그것을 사실인 양 믿는 가식적인 행위가 전국적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는 시기였다. 당 직원들이 시찰을 오는 경우에 농민들은 여러 구획에서 작물을 모아다가 한 구획에 옮겨심어서 자신들이 기적적인 수확을 달성했다고 보여주었다. 러시아에서 극성을 부렸던 농작물 생산량을 조작하는 "포템킨식 밭"의 중국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밭들은 잘 속아넘어가거나 스스로 못 본 체하는 농업 전문가, 기자, 다른 지방의 시찰단, 외국인들에게 자랑거리로 과시되었다. 이렇게 급조된 밭의작물들은 때 아닌 이식과 경작 이론을 무시한 밀식(植)으로 인해서 심은 지 수일 내에 말라죽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시찰단들은 그런 사실을 몰랐거나 또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국민의 대다수가 이런 혼란스러운 광기의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인다는 의미의 자기기인(自欺欺人)이 전국을 휩쓸었다. 농업전문가와 당 간부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기적을 직접 목격했노라고 말했다. 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 농민들은 한편으로는 다른 농민들의 기적 같은 산출량을 수상쩍게 여기면서도 자책하기 시작했다. 정보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마오쩌둥 시대의독재 사회에서 일반 민중이 자신들의 체험과 지식에 확신을 가지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개개인의 냉철한 사고를 마비시키는 집단적인 열광이 온 나라를 집어삼켰다. 사람들은 현실을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마오쩌둥을 맹신하는 길로 들어섰다. 집단적인 광기에 파묻혀 생활하는 것이 가장 편한 길이었다. 행동을 멈추고 신중하게생각하는 자세는 곧 말썽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했다. - P342

우리가 살고 있는 단지에는 종종 만면에 미소를 짓는 농부들을 태운 트럭들이 들어오곤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룩했다는 획기적인 농작물 생산량을 보고하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은 길이가 트럭의 절반이나 되는 괴물 같은 오이를 싣고 오기도 했다. 한번은 두 어린이가 들기에도 무거운 대형 토마토를 가져왔다. 또 한번은 트럭에 꽉 차는 초대형 돼지를 싣고 왔다. 농민들은 보통 돼지를 그토록 크게 길러냈다고 주장했다. 그 돼지는 종이로 만든 모형이었으나 어린 나는 그것을 진짜 돼지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주위의 어른들이 하도 진짜 돼지인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내가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성을 무시한 채 가면을 쓰고 연극 속에서 살아갔다.
온 국민이 앞뒤가 안 맞는 허튼 이야기만을 내뱉고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고, 책임의식과 본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말속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거짓말을 했으며, 어느 누구도 상대방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 P344

농민 조직화를 위한 또다른 수단으로써 마오쩌둥은 당시에 인민공사 안에 공공식당을 어떻게 설치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특유의 경박한 표현으로 공산주의란 "무료급식이 가능한 공공식당"이라고 정의했다. 공공식당 스스로가 식량을 생산해내지못한다는 점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58년에 정부는 농민들이 자택에서 식사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했다. 농민들은 누구나 공공식당에서 식사해야 했다. 밥솥과 같은 조리도구를 소지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지방에서는 돈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국가와 인민공사가 모든 농민들을 보살펴준다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하루의 작업을 마치고 나서 열을 지어 함께 공공식당으로 가서 음식을 마음껏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토지가 가장 비옥한 지역에 풍년이 들었을 때에도 농민들은 식사를 마음껏 해본 적이 없었다. 그 결과 농민들은 농촌지역에 비축되어 있던 모든 식량을 소비하거나 낭비했다. 그들은 경작하러 들판에 나갈 때도 열을 지어 행진했다. 그러나 생산량은 전량 국가에 귀속되고 작황이 좋든 나쁘든 자신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작업능률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물질적 재화를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중국이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 중"이라고 발언했으나 농민들은 이 말을 자신들의 작업능률과는 관계없이 분배의 몫이 돌아오는것으로 받아들였다. 작업할 동기가 부여되지 않았으므로 농민들은 열을 지어 밭으로 나가서는 낮잠을 즐겼다. - P345

당원들의 대다수가 속으로 펑더화이 원수의 발언 내용에 동감하고 있었으므로 "우경 기회주의분자" 추방운동은 다시 한 번 당을 크게 흔들었다. 결국 마오쩌둥이 분명히 잘못했더라도 그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발언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교훈이었던 셈이었다. 아무리 지위가 높더라도(펑더화이는 국방부장이었다) 그리고 아무리특별한 입장에 있더라도(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소문난 심복이었다)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자는 추방당하고 만다는 것을 당원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또한 당원들은 소신을 밝히고 사직하거나, 심지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사직하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사직은 용납할 수 없는 항의로 간주되었다. 요컨대 빠져나갈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민과 당 간부들의 입은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펑더화이 원수가 추방된 후 대약진운동은 광기의 도를 더해갔다. 상부로부터 더욱 실현 불가능한 경제목표들이 하달되었다. 더욱 많은 농민들이 철강 생산에 동원되었고, 생각이 모자라는 각종 명령들이 쏟아져내려오면서 가뜩이나 피폐된 농촌은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 P351

나는 내 사생활과 나만의 공간을 지킬 수 있었다. 중국어에는 이 두 가지 개념에 부합하는 정확한 단어가 없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이런 것들을 동경하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내 형제들도 자신들만의 사생활과 공간을 가지기를 동경한다. 예를 들면 남동생 진밍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 수 있기를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그를모르는 사람들은 진밍이 사교적이지 않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진밍은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매우 인기가 많았다.
"어머니가 너희들을 ‘자유방임‘ 방침으로 기르는 것은 정말로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종종 말했다. 부모님은 우리의 일에 참견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독자적인 세계를 존중해주었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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