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관계의 파탄에는 이 ‘돌봄 역량‘의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이,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는 거예요. 모르면서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굽니다. 아는 것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을 조심하는 것도 아니라,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문자 그대로 ‘함부로‘대해요. 그러니 관계는 파탄이 나고 사람을 피하지 않을 수 없죠. 제가 리터러시에서 특히 말귀를 강조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말귀가 열려 있어야 돌볼 수가 있고, 또 돌보는 와중에 말을 알아듣는 역량이 커지거든요. - P217

리터러시 교육에서는 그런 짧은 호흡, 내가 당장 뭔가를 해야 될것 같은 시간의 개념을 바꿔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긴 글이라는게 단순히 길이가 길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읽어내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고 자신을 돌아보며 심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긴 글이에요. 이해가 되지 않았던 측면이 드러날 수도 있고,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의 반전이 나올 수도 있죠. 이런 건 긴 글을 끝까지 읽어야 경험할수 있어요. 그런데 소셜미디어에서는 당장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내존재감이 없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돼요. - P246

세 번째 키워드는 ‘반복‘입니다. 독서를 할 때 텍스트 자체의 이해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경험이 동시에 일어나죠. 그런데 책을 처음읽을 때는 텍스트 이해에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어요. 다시 한 번 읽을 때에는 전자에 할당되는 자원이 확 줄어들면서 경험을 두텁게 만드는 데 쓸 수 있는 자원이 확연히 커져요. 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면에서 재차 읽는/보는 행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여정을 약속하죠. 영화 감상이건 독서건 ‘반복‘은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 되는 거예요. 많은 경우 첫 읽기는 저자에게로 가는 길이지만다시 읽기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에요. 여러 사람이 "다시 읽지않았다면 읽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다시 읽기의 이런 속성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이런 측면에서 ‘많이‘보다 ‘반복‘의 힘에 주목하는 리터러시를 상상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 P264

《페다고지》의 입장에서 보면 문해력의 방향이 바뀝니다. 즉 민중이 천문과 인문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아니라 민중을 대하는 지식인들이 그들의 언어에 대해 무지한 것이 되죠. 어쩌면 이 이야기야말로선생님과 제가 이 대담에서 말한 리터러시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리터러시가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이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에요. 문제는 내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교과서적으로 정확하게 말을 하고 글을 쓸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은 두루뭉술하게 말을 하거나 얼버무리기도 하죠. 또 상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많아요. 이럴 때 우리가 그 사람을 비난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말과태도, 분위기의 ‘무늬‘를 읽을 줄 안다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바벨탑이 아니라 다리가 놓이겠죠. - P275

선생님과 제가 말하는 ‘리터러시‘는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역량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마무리의 시작을 리터러시 앞의 ‘삶‘에 대해 감히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삶의 리터러시, 삶을 위한 리터러시란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입니다. ‘옳음‘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삶을 억압하는 리터러시가 아니에요. ‘좋은 삶‘을 생각하도록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 삶의 리터러시입니다. 이런 점에서 리터러시는 모두를 해방하고 자유롭게 하며, 그 자유로운 사람들이 서로서로 다리를 놓으면서 그것이 바로 ‘좋은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각자의 몸, 그리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을줄 알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글과 책이 어떤 시대에 어떤 세대의 사람들에게 몸이었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였으며 몸의 변신 수단이었고 그 사람들의 말이었다면, 지금은 이미지와 유튜브가 몸이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이자 말이며 변신 수단이 된 시대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그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하며, 그 몸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겠죠. 그 변신 수단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몸을 보호하는 법 또한 배우고 존중할 수있어야 합니다. - P277

얼마 전 타계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은 "정의는 정의당한 자들이 아니라 정의한 자들에게 속하는 것이다(Definitions belong to the definers, not the defined)."라는 말을 남겼죠. 리터러시를 논의하는 맥락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현재의 ‘리터러시 생태계의 변동‘을 사유할 때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의 단초가 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누가 리터러시를 정의하는가‘라는 질문이죠. 이는 다시 누가 리터러시의 평가 방식을 정하는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활용되는가, 리터러시는 사회적으로 어떤 차별과 기회를 만들어내는가, 공공성에 기반한 리터러시 생태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같은 질문들로 연결돼요. 그런데 흔히들 ‘디지털네이티브‘라고 불리는 이들은 아직 리터러시를 정의하고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죠. 리터러시를 권력화할 수 있는 단계에 진입하지 못한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이 리터러시에 관련된 정책을 디자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자리에 올랐을 때 리터러시를 어떻게 정의하고 권력화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듯합니다. 그 작업은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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