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indignatio)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또한 분노에 대해 더 명료하게 말했던 적이 있다. "우리와 유사한 대상에게 불행을 준 사람에 대해 분노한다."고 말이다. 자신과 유사한 대상, 즉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에 그것은 바로 돈 없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돈이 없어 자신의 딸 소냐를 창녀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어느 퇴역 관리, 자신에게 돈을 보내느라 가정교사로 있던 집에서 봉변을 당해도 그만두지 못하는 여동생 두냐, 전당포 노파가 노예처럼 부려먹는 이복여동생 등.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수치심을 정의롭지 못한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로 승화시키게 된다. 자신에게 가해진 수치심이 단지 자신만이 아니라 대부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괴롭히고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수치심의 대상은 정의롭지 않은 대상으로, 그래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악으로 드러나게 된다. 개인적인 악이 공적인 악으로 승화된다고나 할까. - P291
비록 헌 물건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소중한 추억이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면, 라스콜리니코프는 금반지를 들고 전당포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중한 추억이 깃든 물건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개인에게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는 그저 낡은 중고품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대목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느낀 모멸감은 사실 전당포 노파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다. 그가 느낀 수치심의 진정한 원인은 소중한 추억이라는 주관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자본주의 근성,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부여한 가치를 탐욕스러운 노파에게 철저히 부정되었다는 자괴감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직 여리기만 한 그가 수치심의 진정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아내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니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에게 모든 악을 되돌려 버렸던 것이다. - P293
분노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최소한의 연대 의식, 혹은 유대감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홀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 혹은 동료와 함께 있지만 스스로 왕따라고 느끼는 사람에게서 분노의 감정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둑한 길을 홀로 걸어갈 때 힘센 불량배를 만나 무릎까지 꿇려지는 봉변을 당했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불량배에 분노하기보다는 단지 수치심만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나애인이 불량배를 만나 그런 봉변을 당하고 있는 장면에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그 불량배의 만행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 아닌가. 불량배는 한 명이지만그 불량배로부터 해악을 당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사람은 직접 해악을 당하고 있고, 이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은 언제든지 그 불량배로부터 해악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수의 약자를 통제하려면, 소수의 강자가 명심해야 할 철칙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약자에게 해악을 가할 때 같은 약자가 보는 앞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도 언제든지 해악을 입을 수 있다는 판단, 그리고 자기처럼 해악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자각은 극심한 분노와 아울러 조직적인 저항을 낳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권위적인 조직에서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과 유대감을 극히 꺼린다. 반대로 우리가학생회 아니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약자들이 연대하는 조직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타자들이 어떤 해악을 입고있는지 알게 되고, 그렇게 해서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수도 있는 해악을 막기 위해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우리라는 의식이 없다면, 해악을 끼치는 강자에 대한 분노도 발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 P298
불구로 태어난 아이에 대한 적의의 진정한 대상은 어쩌면아내와의 사랑 없는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불구로 태어난 아이는 버드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의 사랑 없는 삶을 계속 살아갈지, 아니면 히미코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지. 불행히도 나약한 버드는 칼날 위에 선 채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한다. 그렇게 버드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불구가 된 아이는 수술을 받게 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의 문제는 사실 뇌헤르니아처럼 심각한 질병이 아니라 단순한 육종으로 확인된다. 버드는 결단에 주저했지만, 아이의 성장, 의사들의 수술, 그리고 주변의 분위기 등이 버드 대신 결정을 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버드는 자의 반 타의 반 수술하는 아기를 위해 자기 피를 제공하기까지 한다. 버드의 장모는 그런 사위가 기특하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버드는 엄청난 활약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체험』을 훌륭한 성장소설이라고, 그리고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이기적인 행복을 버리고 인류애를 기원하는 성숙한 인격으로 변모했다고들 말한다. 과연 이런 평가가 사실일까? 분명 버드가 불구가 된 아이에게 적의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버드가 스스로 적의를 거두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주변의 변화에 따라 적의를 거두는 쪽으로 변했을 뿐이다. 이것이 정말 성장일 수 있을까? 성장이라고 해도 너무나 기이한 성장 아닐까? 그래서 불행에 맞서 도망가지 않고 잘 싸웠다고 말하는 어느 교수의 칭찬에 힘없이 대꾸하던 버드의 말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아뇨, 저는 여러 번 도망치려 했었죠. (……) 하지만 이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전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 사이엔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식으로요."
ㅍ정말로 버드가 성장했다면, 그 성장의 핵심은 "현실의 삶을살아낸다는 것은 결국 전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이라는 통찰에 그가 이르렀다는 점일 것이다. 바로 이런 성장의 씁쓸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오에 겐자부로를위대한 작가로 기억하는 이유다. - P315
조롱(irisio)이란 우리가 경멸하는 것이 우리가 미워하는 사물 안에 있다고생각할 때 발생하는 기쁨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조롱은 묘한 감정이다. 그것은 미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들이 미워하는 인간 속에서 그들의 불합리와 위선을 발견하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세키=고양이‘는 겉과 속의 불일치를 가장 경멸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겉과 속이 일치하는 고양이 족을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폄하한다. 고양이보다 못하면서 고양이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런 인간 족속만큼 고약한 존재가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반면 고양이의 장점을 단점이라고 단정하며 으쓱거리는 건 정말 꼴불견이다. 그만큼 소세키는 자신도 한 마리의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간을 미워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본성에서 겉과 속의 불일치를 간파한 다음, ‘고양이소세키‘는 얼마나 기뻤겠는가. 이제 당당히 인간을 조롱할 수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소설이 풍기는 유머감각의 씁쓸함이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양이와 가깝다고 해도 소세키는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 아닌가? 결국 인간에 대한 고양이의 조롱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조롱일 수밖에 없다. 이런 냉소적인 자기 조롱은 얼마나 허무하고 자기 파괴적인가? - P324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과거 불행에 대한 기억과 짝을이루는 감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피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두려움(metus)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정의는 조금 복잡하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의심스러운 대상이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이라는 말이 조금 어렵다. 여기서 미래의 사물과 과거의 사물이 동일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면 어려움은 쉽게 가실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자신을 불행하게 했던 애인이 지금 만난 다른 애인과 같을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과거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슬픔은 새로운 애인과의 미래를 잿빛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과거의 불행이 집요하게도 미래에 다시 반복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서 생기는 슬픔, 즉 두려움은 바로 이렇게 우리 내면에서 탄생하여 우리의 비전을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불행한 과거는과거지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질식할것 같은 무게를 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를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 - P349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향유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가진 것, 즉 건강, 젊음, 직장, 애인 들은 모두 항상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혹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지금 가지고 있는모든 것들은 잠시 내 곁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젊음이니 건강이니 모두 어느 사이엔가 떠날걸 염두에 둔다면, 젊었을 때 그리고 건강할 때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게 될 것이다. 해고되든 내가 떠나든 간에 지금 회사에 영원히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인식한다면, 직장 생활을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애인도 언젠간 떠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애인과의 근사한 키스에 더 몰입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게 있는 어떤 소중한 것에 대하여 그것이 곁에 머물러있으면 행복한 것이지만 그것이 떠나 버린다 할지라도, 그것을 상실로 받아들이지말고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 그러면 안개가 걷히듯어느 사이엔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 P356
그렇지만 진실은그 반대였다. 내가 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 아버지라는 타자로부터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는" 것과 같은 분노를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요조의 행동에서 우리는 내면의 공포가 외면의 수줍음, 항상 타자의 말에 순종적인 공손함으로 드러나는 메커니즘에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이 메커니즘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손함(humanitas)이나 온건함(modestia)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아이, 즉 투정을 부리지 않고 너무나의젓한 아이를 보면 어른들은 미소를 띠며 말하곤 한다. "아이가 정말 공손하네요." 혹은 "참 착하고 순한 아이야." 그렇지만 이걸 아는가? 아이는 그런 평판을 듣기 위해 얼마나 당신의 욕망에 순종하는지를. 그리고 그만큼 아이는 또 얼마나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지를. 스피노자의 말대로 공손함이나 온건함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할때‘의 감정이다. 표면적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들, 혹은 공동체에 대한 구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늘을 보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공손한 아이나 온건한 아이는 타인이 화를 폭발할까 봐 자신의 욕망, 그러니까 자신이 마음에 드는 일과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을 주장하지 않는 것뿐이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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