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폴은 지금 두렵다. 시몽은 너무나 젊지만 자신은점점 더 늙어 갈 것이고, 언젠가 시몽은 자신에게서 어떤 매력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면 로제는 지금처럼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자신을 외롭게 만들지라도 그는 항상 낡은 가구처럼 자기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경험적으로 폴은 너무나 잘 알고있지 않은가, 로제는 한눈을 팔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떠날 사람은 아니라는 걸. 더군다나 로제도 자신과 비슷하게 늙어갈 것이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제의 바람기도 사그라들지 않을까. 그렇지만 시몽은 로제와는 전혀 다르다. 아직 삶의 절정에 이르지 않은 젊고 매력적인 연하의 남자였기 때문이다. 과연시몽은 그의 삶의 절정에서도 여전히 폼을 사랑할 수 있을지. 그렇다. 폴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미래의 불확실성이었던 것이다.
영원히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지금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익숙한 삶을 떠나 시몽을 선택하면 잠시 행복하겠지만 머지않아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로제를 선택하면 지금은 불행할 수 있지만 버려질 위험은 별로 없다. 그녀는 사랑의 위힘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소심했던 것이다. 불안한 사랑보다는 불행한 안정에 손을 들어 준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스피노자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소심함(timor)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P463

 그렇지만 미래란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미래는 나 자신과 타자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면서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스로 미래의 모습을 합리적으로 예측할지라도, 타자는 우리의 예측이상으로 움직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예측 자체를 무화시킬 수 있다. 그러니 바라는 대로 되었다고 해도 혹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원인을 완전히 우리 자신에게만 돌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지나치게 대담한 사람에게는 소심함이 필요하고, 반대로 불필요하게 소심한 사람에게는 대담함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야만이 미래에대해 균형 잡힌 시선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소심함과 대담함의 중도, 혹은 중용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소심한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하나의 행동 강령을 추천하고 싶다. ‘아님 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것이다. 소심함을 극복하려면 그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님 말고!‘라는 쿨한 자세를 갖는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실천하는 것마저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소심한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조금씩 갖추게 될 것이다. - P468

치욕(pudor)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수치심(verecundia)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심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ㅡ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치욕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한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강자에게 아부하고 약자에게는 군림할 때, 혹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느라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을 수 있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치욕에 몸을 떨기 마련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치욕‘은 슬픈 감정인 셈이다. 인간이라면 누가 이런 슬픈 감정을 기꺼이 감당하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치욕을 가급적 피하려고 한다. 인간이란 기쁨은 가급적 유지하려 하고 슬픔은 멀리하려는 존재이니까. 그래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중요한 것이다. 수치심은 앞으로 치욕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나 소심함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치욕과 수치심을 구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치욕은 슬픈 감정이지만, 수치심은 그런 슬픈 감정이 들지 않도록 하려는 원동력이니까. 그러니까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에게는 치욕을 멀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법이니까. - P491

함무라비 법전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잘해 주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그만큼 위해를 가해야 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거꾸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은 함부로 대하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비위를 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일단 함무라비 법전을 관철시키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노예 도덕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만 한다. 강한 자에게 핍박을 받는 약자가 어떻게 강자에게 자신이 당한것을 되돌려줄 수 있다는 말인가, 복수를 시행할 힘조차 없는데, 이럴 때 예수의 속삭임이 우리의 나약함을 정당화하며 찾아온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갚는 것은 정말로 성스럽고 위대한 일이야." 이런 속삭임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마치 자신에게 원수를 갚을 수도 있고 갚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는 양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약자가 복수를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강자에게 복수할 수조차 없는 존재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잊지 말자. 사랑이든 복수든 그것은 오직 자유로운 자, 혹은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약자는 원수를 용서할 자격조차 없다. 강자가 되었을 때에만 약자는 원수를 용서할 자격을 갖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해악을 당했지만 복수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면, 아주 천천히 힘을 키워서 강해져야 한다. 5년이든 10년이든 치욕을 잊지 말고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 마침내 해악을 가한 사람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게 되는 날, 우리는 진정 결정할 수 있다. 계획대로 복수를 추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용서할 수도 있다. - P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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