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빛을 느끼기 위해서그림자가 필요하듯, 빈 공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물체가 필요하다. 역으로 추론해 보면, 물체가 만들어지면 동시에 빈 공간도 부산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건축 행위는 일차적으로는 물체를 만드는 것이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 다. 단순히 물체만 만드는 것은 조각이다. 건축이 조각과 다른 점은 건축은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물체를 만드는 행위라는 점이다. 인간은 건축물이라는 물체를 만들고 그 물체가 만든 빈 공간을 인간이 사용한다. 빈 공간을 프레임하기 위한 물체를 만드는 일은 엄청나게 큰 에너지와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아야하고, 크게는 사회적 동의가 있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빈 공간이 구축되는 형식과 모양을 보면 만든 사람의 생각과 문화를 비추어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공간을 분석하고 이해하면 사람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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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죄책감이 평범하고 오래된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죄책감과 사랑을 본능적으로 하나로 엮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이것이 삶임을 깨닫는 데도 긴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모두 나이 들수록 삶이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니라 더 쉬워진다는 신화를 믿으며 자라는데(그리고 이것은 진짜 신화일 뿐이다), 나이 드는 부모의 모습만큼 그 믿음이 사실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것은 많지 않다. 실제로는 우리가 나이 들수록 잃은 것이 많아진다. 점점 더 크고 버거운 과제가 나타난다. 실수를 되돌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부모의 죽음을 생각해보는 일이 겁나는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끝나면, 우리의 순수의 시대 중 후반부의 한 단계도 끝난다. 그분들이 언제까지나 거기 계시진 않을 것이다. 우리 삶이 더 간단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P123

그야 정확히 말하자면 다행스럽다기보다는 마음이 좀 가볍다는 기분, 한시름 덜었다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병은 사람을 망가뜨렸고, 잔인했고, 지켜보기 참혹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병으로 죽을 때는 애도 과정의 상당 부분이 기억과 안도라는 기묘한 순환으로 전환되는 듯싶다. 당신이 이따금 그 참혹함을 떠올렸다가는 이내 그 일이 끝난 것이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라고느끼는 것이다. 꼭 다 끝났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 이미지에 몸서리치고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지워버리려고 애쓰는 것이랄 수 있다. - P126

그렇긴 하지만, 상실은 우리에게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지금까지 여덟 달 동안아버지가 여전히 곁에 계시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품고 지냈던 것같다. 아버지가 장기 휴가를 가신 거라고, 아니면 어디 멀리 요양하러 가신 거라고 느꼈고, 그런 감정은 지금 황동 상자에 담겨서 아버지 서재에 놓여 있는 아버지 뼛가루에 내가 막연히 집착했다는 사실로 드러났다. 나는 뼛가루를 내 집으로 가져가서 뭐랄까 보살펴드리고 싶었는데, 그 바람은 아버지가 아직 여기 계시고, 아직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아직 내 행동을 알고 계시다는 느낌과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없다. 크리스마스에 갓난이 조카의 기저귀를 가는 언니를 서서 지켜볼 때 나를 휩쓸고 간 감정이 그것이었던 것 같다. 같은 방, 전혀 다른 이야기. 아홉 달 전에는 슬픔의 장소였던 곳이 지금은 기쁨과 새 시작의 장소였다. 그러니 그때 본 아기의 모습은 내게 연속성을 일깨워주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무력함이 아기의 무력함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버지를돌보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볼 것이다. 아버지는 갔지만, 아기는 여기 있다.
언니는 기저귀를 다 간 뒤 아기를 포대기로 감싸고 울음을 달랬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울었다. 앞으로 펼쳐질 생을 눈앞에둔 작은 아기를 위하여, 그리고 그제야 내가 정말로 떠나셨다고 느낀 아버지를 위하여. - P127

애도는 얼마 뒤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정말이다. 내 어머니는 지난 4월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하고 11일 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올여름을 대부분 얼빠진 상태로 보냈다. 멍했다. 얼떨떨했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따금 극심한 공황에빠졌다.
"좀 어때? 좀 괜찮아졌어?" 사람들이 이렇게 물으면, 나는 십중팔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다.
"엉망이야."
"끔찍해."
"아니. 더 나빠졌어. 더 안 좋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들이지만, 대개의 사람은 이런 대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맨처음 알게 되는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이것,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문화는 죽음을 끔찍하게 지독하게잘못 다룬다. 상을 당한 사람에게 주는 휴가는 보통 사흘. 그 후에도 6주쯤은 사람들이 당신을 조심조심 대하고,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대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당신에게 공식적으로 주어진 애도 기간은 끝난다. 이후에는 사무실에서 멍하니 앉아 있거나 하루에 세 번씩 빨개진 눈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이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다시 정상적으로 행동하고정상적으로 느껴야 할 듯한 압박이 든다.
나는 이게 싫다. 가끔은 길 가는 사람들을 잡아 세우고 말하고싶다. "우리 부모님이 죽었다고요. 부모님이 알겠어요?" 너무 많은걸 억누르고 삼켜야 한다. "정말 우울해요." 몇 주 전에 내가 남자동료에게 이렇게 말하자, 그는 멍청히 나를 보면서 말했다. "왜요?" 그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놀란 기색이 있었다. 우울해요? 왜? 나는그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 - P130

그럴 줄은 알았지만, 결국 이렇게 집 이야기를 쓰는 날이 오고말았다. 부모님 집에서 세간을 빼내고, 가족의 38년 역사에 다름없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서 추려내고, 그럼으로써 상실의 또 하나의 의례를 마무리하는 날이.
으윽. 나는 줄곧 이 일이 두려웠다. 작업 자체도 두려웠고 그작업에 대해 글을 쓰는 행위도 두려웠다.
지난 3년 동안 내 글을 꼬박꼬박 읽은 독자라면 알 텐데, 나는상실에 대해서 아주 많이 썼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1992년 4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1993년 4월), 오빠와 언니와 내가 부모님 없이 맞은 첫 크리스마스에 대해서(1993년 12월), 아버지의 뼛가루를 묻은 일에 대해서(1994년 5월), 어머니의 뼛가루를 묻은 일에대해서(1994년 5월), 이런 상실을 받아들이고 삶을 살아나가는 길고 구불구불한 과정에 대해서. 치유의 과정에 대해서.
그런 글을 쓰는 것은 그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건을 기록하는 행위, 내게 벌어진 일과 그에 대한 내 감정을 세부적으로 적어서 활자로 고정해두는 행위가 내게는 늘 유용했다. 그것은 꽃을 책에 끼워서 압화로 간직하는 일, 혹은 추억의 기념품을 특별한상자에 보관하는 일과도 좀 비슷하다. 일단 세부를 보존해두면,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을 덜고서 다른 일로 삶을 채우며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집 전체를 비우는 것은 다른 얘기다. 그것은 세부를 상자에 꽉꽉 담아서 쓰레기장으로 실어 보냄으로써 말 그대로 그것을 없애버리는 일이다. 이 과정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아프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이 싫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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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이러한 에너지 흐름의 과정 중에서 생명이 만들어 낸 2차 부산물이다. 둥그런 행성의 모양, 자전축의 기울어짐, 자전과 공전, 쏟아지는 태양 에너지는 지역마다 다른 ‘지리‘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지리적 배경은 각기 다른 ‘기후‘를 만든다. 각기 다른 기후는 각기다른 ‘환경적 제약‘을 만든다. 이런 환경의 제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인간 지능의 노력이 ‘건축물‘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난다. 비가와서 지붕을 만들었고, 추우니까 벽으로 방을 만들고 온돌을 만들었다. 건축은 기후가 주는 문제에 대한 인간의 물리적 해결책이다.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가 더워지면서 건조해졌기 때문에 물을 구하기 힘들어졌다. 물을 구하기 위해서 물가에 모여 살다 보니 인구밀도가 높아져 주변에 있는 사냥감과 열매로는 많은 인구가 살기에 부족했다. 인간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시대가가지고 있던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 제약 들 속에서 환경적 제약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문화가 되었고 그 문화의 물리적 결정체가 바로 건축물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건축 공간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의 유전적 계보를 살펴보려고 한다. - P7

인간 사회에 계층이 만들어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다음, 기원전 500년을 전후해서 유라시아 대륙의 오래된 지역인 그리스, 인도, 중국에서위대한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피타고라스, 플라톤, 석가모니, 노자, 공자 등이 그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사람들의 ‘생각의 특성‘이지리와 기후에 의해서 결정됐다는 점이다. 강수량의 조건은 농업의 품종을 결정한다. 세계의 문화 권역은 크게 벼농사 지역과 밀 농사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연강수량 1천 밀리미터‘다.
연강수량이 1천 밀리미터 이상이면 벼농사, 1천 밀리미터 이하면 밀 농사를 짓는다. 그런데 이 두 품종은 농사법이 다르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서 하는 벼농사는 홍수나 가뭄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물을 다스리는치수 사업이 필요했다. 벼농사에는 저수지와 보를 만들거나 물길을 만드는 토목 공사가 필요한 것이다. 반면 밀 농사를 할 때에는 개인이 씨를 뿌리며 다니면 되고 치수를 위한 대형 토목 공사도 필요 없다. 노동방식 면에서 벼농사는 여러 명이 힘을 합쳐서 하는 방식이고, 밀 농사는 개인적으로 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벼농사 지역의 사람들은 집단의식이 강하고, 밀 농사 지역은 개인주의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의 차이는 알파벳과 한자 같은 문자나, 체스와 바둑 같은 게임 문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강수량이라는 기후적 차이는 건축 디자인의 차이도 만들었다. 강수량은 땅의 단단한 정도를 결정한다. 비가 적게 오는 서양의 땅은 단단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돌이나 벽돌 같은무겁지만 단단한 건축 재료를 이용해서 벽으로 지붕을 받치는 ‘벽 중심‘의 건축을 했다. 반면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인 동양은 장마철에 땅이 물러지기 때문에 무거운 재료로 만든 벽은 쓰러진다. 따라서 가벼운 건축 재료인 나무를 사용하였고, 자연스럽게 나무 기둥으로 지붕을 받치는 ‘기둥 중심‘의 건축을 하게 되었다. - P9

잉여 농산물은 사회 계층을 만들었고, 나누어진 사회 계층은 잉여 시간을 만들었으며, 잉여 시간은 문화를 만들었다. 문화는 다시 기후적 제약의 차이에 의해서 서로 다른 유전적 특성을 만들었다. 1차적으로 문명의 생각이 창조되면서 발생한 서로 다른 생각들이 만나고 충돌하고융합하면서 2차적인 창조가 만들어졌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고 융합하려면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 모여서 살아야 한다. 도시는그런 환경을 제공해 준다. 도시는 문명 발전의 ‘필요조건‘이다. 최초의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는 도시가 형성되면서 생겨났다.
인구 5천~5만 명 정도의 최초 도시 ‘우루크‘부터 인구 100만 명의 도시로마까지 거대한 인구가 모여 있는 도시들은 생각들의 충돌과 융합을만들어 내고 창조의 터전이 되었다. 도시는 창조의 플랫폼이었다.  - P10

교통수단의 발달이 ‘공간의 압축‘을 만든 것이다. 공간이 압축되자 다른 문화간의 융합이 일어나게 되었고 새로운 문화 변종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자의 지역에서 원시적 집단을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겠지만, ‘말‘이라는 교통수단이 나오면서 공간이 압축되고 국가가 형성되었고 국가 간의 전쟁이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다. 교통수단 발달에 의한 공간의 압축은 전쟁 같은 물리적인 충돌을 유발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가질 경우 소통을 통한 ‘문화의 융합‘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유전 공학적 관점으로 비유해 본다면 다른 문화 간의 교류와 융합은 다른 품종의 교배로 볼 수 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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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하는 내 마음이 상당히 슬프긴 해도, 이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친구 관계에 작별을 고할 때를 아는 것은 계속이어갈 때를 아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나는 호프를 한때잘 작동했던 관계, 저만의 장소와 시간 안에서는 아주 아름답게 작동했던 관계라는 작지만 소중한 범주로 분류하게 될 것 같다. 한줌의 옛 직장 동료들도 이 범주에 속한다.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어깨를 걷고 싸웠던 사람들, 내가 존경하고 동경했던 사람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전쟁터를 떠나고 나서는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 재활원에서 만났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과 내가 공유했던 경험은 너무나 독특하고 특정 맥락에 좌우되는 것이었기에, 그 유대감은 우리가 병원에서 걸어 나오기가 무섭게 거의 즉시 사라졌다.
어쩌면 호프와 나는 서로에게 놀랍게도 앞으로 오랫동안 연락하고지낼지도 모른다. 우리의 우정이 또 다른 종류의 작지만 소중한 범주, 즉 일상적 접촉이나 지리적 근접성이 없어도 살아남는 관계라는 범주로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 가능성이 현실이 될 만큼 우리가 오래 알고 지내진 않았고, 공통의 역사를 충분히 쌓지도 못했다. 그러니 처음에는 상황적 친구였고 그다음에는마음의 친구였던 내 친구 호프는 이제 과거의 친구가 될 것이다.
훗날에도 내가 순수한 애정으로 똑똑히 기억할 친구가. - P71

이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어떤 우정은 반드시 끝나야 하고(술친구가 그런 예다), 어떤 우정은 그저 신상이나 환경의 변화를이겨낼 만큼 역사나 애정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끝난다. 하지만또 어떤 우정들은 훨씬 더 아깝게 죽는다. 질투나 불안이나 함께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마음을 내지 않은 탓에, 내 오래된 여자친구 하나가 별로 훌륭하지도 않았던 자기 남자친구와 헤어진 일을내 부모의 죽음에 비교했을 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두고 봐, 다시는 이 애한테 전화하지 않을 거야. 내가 그 다짐을 완벽하게 지키진 못했지만, 나는 그 비교를 머릿속에서 감정이입의 실패 사례 칸으로분류한 뒤 그 친구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도 처리하지 않고 그냥 손을 뗐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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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릴 보고도 여전히 위컴은 들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그게 궁금하다. 박정희 군사파쇼 시대에, 전두환의 초기에 우리는 들쥐처럼 눈을내리깔고 어깨는 축 늘어뜨린 채 그렇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결단코 더 이상 들쥐일 수는 없게 만든 장본인이야말로 위컴이고 글라이스틴이며 그러그러한 양키들인 것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의 좌절에서, 광주사태에서 드러났던 추악한 그들의 모습이 우리 내부의 자존심에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우리는 부시방한 반대를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들쥐로 고정시키려는 집단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민중을 억누르고 빼앗는 정치군부, 특권적 관료집단이그들이다. 프란츠 파농이 비웃어주었던 검은 피부, 흰 가면과 똑같은 누런 피부, 흰 가면을 쓰고 있는 집단들이다.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자치를 구걸하고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던 반민족세력의 후예인 것이다. 민족의 절대독립을 외치고 실천했던 위대한 애국자와 민중을 배반했던 수치스런 매국노들의 후예이다. 현대판 민족개조론자로서 여전히 "아직 우리는 열등합니다. 제발 너그럽게 봐주십시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꼴불견을 더 이상 봐줄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안 될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 P197

김근태는 이 글에서 이철규 변사사건‘을 언급한다. 1989년 5월 1일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창간호와 관련, 전남지역 합수부의 지명수배를 받아오던 교지 편집위원장 이철규(전자공학과 4년)가 광주시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정국은 타살이냐 실족사냐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정부는 사인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학생들을 대량 검거했다.

이철규 형제의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의 광주‘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광주, 항쟁하는 광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를 위해서 그 죽음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플랑크톤이니 과학이니 하면서 우리에게 머뭇거림을 강제해오는 저들의 시꺼먼 의도를 단호히 거부해야 된다. 우리는 일어서야 한다. 수백 수천 명이 감옥에 갈 각오를 하면서 다시 나아가야 한다. 공장과 농촌에서 학교 · 교회 · 절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거리거리에서 광범한 대중집회와 시위를 조직해내야 한다. 특히공장과 농촌에서 또한 거리에서 노동자와 근로농민이 주동이 되어 일어서야 한다.
광주와 이철규 죽음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그 책임자 처벌을 관철시키는 힘은 여기에 있다.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는 투쟁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근원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지배권력의 탐욕과 중오심을 분쇄하는 곳에서만 승리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가. 절대로 가능하다. 누가 감히 가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있겠는가. 전진하고 있는 민주의 저 굳센 발자국 소리가, 우렁찬 함성이저렇게 파도 치고 있지 않은가. - P199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내키지않는 민주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선 패배와 더불어 총선에서도 제2야당으로 밀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제3야당에서 존재감을 잃어가던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공안 분위기를 틈타 야합하면서, 정계는 다시 한 번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1990년 1월 22일 이들 세 사람은 3당 야합을 통해 거대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했다. 6월항쟁으로 어렵게 돌린 역사의 물굽이가 다시 역류하는 반동이었다. 3당 야합은 정치지형의 변화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민주화의 역류와 보수화를 불러왔다.
5공청산은 물 건너가고 부동산 가격 폭등 사태, 물가고, 증시 침체, 토지공개념 후퇴와 금융실명제 보류 등 경제난국이 가속화되었다. 거대 여당으로 변신해 오만불손해진 민자당 정권은 임시국회에서 방송법, 국군조직법, 광주관련법, 추경예산 등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등 일당독재식 국정운영으로 일관했다. - P202

그래 그것은 좌절감이다. 팍팍한 거부의 손길은 마음을 아득하게 하지. 그리고 분노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지. 병준아, 병민아. 사람은 화를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는 것은 경멸받아 마땅한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다만 일정한 절제와 냉정한 판단을 동반하면서 그렇게 해야 하겠지. 그렇게 되면 큰힘이 거기서 솟아나게 마련이란다. 그럴 때 우리 삶 앞에 가로놓여 있는암초와 매복적 기습에 쓰러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란다. 거기에 새로운 창조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는 것이란다.
쓰다 두었다가 며칠 후 다시 펜을 잡게 되었다. 그사이 어저께(27일) 엄마가 내려왔다 갔다. 그 편에 너희들이 흘렸던 눈물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한다. 너희들이 흘렸던 눈물 속에는 슬픔과 절망도 있었겠지만 또한 분노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병민이의 눈물은 분함이었고병준이의 눈물은 가슴 아픔이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들은 너희들이 이미 부딪친 바 있던 어두움이었을 것이라고•••••
여기까지 내려왔던 너희들을 만나보지 못한 것이 가슴 쓰리고 또한 아쉽구나. 하지만 바로 저 담벼락 바깥에 여전히 남아 있을 너희들의 흔적과마음을 느끼고자 하며, 그로써 이 겨울 추위 속에서 가슴에 온기를 품고자 한다. - P212

멀고 험한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배에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등대의 번쩍이는 불빛은 분명히 희망이겠지. 고난과 절망 속에서 한줄기 날카로운 희망일 게다. 그런데 그 희망의 불빛을 지켜주는 등대지기는 여간 외로운 것이 아니란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뚝 떨어져 참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란다.
그렇게 참으면서, 외롭게 살면서도 견뎌낼 수 있는 힘,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란다. 그래서 그만큼 훌륭한 일이지. 그러면 이러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너희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 어두움 속에서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아름답고도 큰 마음에서 오는 것이지.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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