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 있게 사정하라
가브리엘르 블레어 지음, 성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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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하는 모든 이들이 임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임신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후 파생될 수 있는 결과 중 하나인 ‘임신’에 대해 원치 않을 때 선택될 수 있는/있을 ‘임신중단’에 대해 우리 사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여성’에게만 주목해왔다. 이 책은 ‘원치 않는 임신’을 만든 ‘남성’에게 더 주목하고, 책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한다. 너무나 당연해야 한 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당연하지 않아서 너무 많은 고통과 문제가 만들어졌던 것에 대해 ‘사정’의 ‘책임’에 대해, “책임감 있게 사정하라”고. 남성만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하고, 향유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도 그렇다. 그런데 왜 한쪽만 피임을, 그것도 더 위험하고나 부작용이 큰 방식을 감당하고 임신 위험으로 불안해야 하는가. 남성이 피임을 하고(일단 제일 쉬운 콘돔!!), 함께 선택하고 논의한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이 무책임의 결과로 고통받거나 힘든 이들의 경험이 줄어들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지난 연애들을 생각해보았다. 동성 파트너를 제외하고 사정하며 정자를 내보낼 수 있었던 이성 파트너들과의 섹스에서 언제나 반드시 콘돔이 기본전제가 된 것만은 아니었단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과거형인데도 아찔해진다. 그때의 나는 운이 좋았다. 다행이었다, 고 말해야할까.. 그럼 누군가는 운이 좋지 않아서, 불행이어서 원치 않는 임신이나 임신중단을 경험하는 걸까? 나도 누군가도 이런 방식의 회오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책임감 있는 사정이다.

덧: 이 책의 저자는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이 책이 시스젠더 이성애자의 관점이란 것을 밝혔다. LGBTQIA+ 경험을 지워내거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저는 결국 시스젠더 이성애자로서 성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위해 시스젠더 이성애자의 관점에서 주장을 펼치기로 했”다고, 권력관계나 책임에 대해 나누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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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안의 맛
김의경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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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택한 책이었다. 두리안을 처음 먹었을 때의 그 묘한 맛. 친구들이 불호일 때, 나에게 호였던 신기한 두리안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소설은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들이었고, 나는 이 속에서 나를 보고, 내 친구를 보고 동생을 보고 엄마를 보곤 했다.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동생은 잘 읽혔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소설은 잘 읽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내용들이 좀 힘들었다고. 이어 책을 읽으며 동생의 말을 금방 이해하게 되었다. 지리멸렬한 삶의 이야기들을 누가 반기고 웃으며 맞이할까 싶기도 하여서. 그러나 나는 그런 삶의 이야기가 좋다. 그건 실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밑줄 그은 글귀는 “수현과 우정을 나누면서 나는 단순히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치유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문장이다. 나는 이 소설집이 그러해서 좋았다. 징글징글한 삶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견디는데 우리가 갖는 관계, 우리가 맺는 관계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중요하게 다뤄주어서.

<두리안의 맛>, 김의경 소설,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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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거당한 집 - 제4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최수진 지음 / 사계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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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맨 첫 장을 읽고 잠시 책을 덮었던 것은 밀려오는 기억때문이었다.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점거에 잠입하여 취재하는 기자가 화자인 이 소설의 첫 장에는 ‘최루액’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명백한 국가폭력을 의미한다. 소설 속에서 아시아문화전당을 점거한 시위대를 쫓아내기 위해 ‘최루액’을 이용했다. 점거하는 자들의 이유에 대해 아무리 생각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이것은 앞으로도 존재해야할 방식인가? 하물며 이 소설은 약 10년뒤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점인데도 말이다.

2015년 5월 1일 노동절로 머릿 속은 돌아간다. 경찰은 시민들의 행진을 막고 차벽을 만들고 캡사이신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시민들에게 뿌렸다. 세월호 사건 1년이 지나 유가족들과 함께 진상규명을 하던 저녁밤이 그렇게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날 경찰들과 대치하던 시민들이 경찰의 공격으로 밀리면 뒤에 있던 사람들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내가 앞에 섰을 때, 나는 경찰 대오 안으로 밀려들어가 넘어졌다. 그 잠시의 시간동안 나는 경찰들의 방패를 막던 ‘밖’에서 방패 ‘안’으로 경계지어졌고, 익명의 경찰들에게 온몸을 맞았다. 내가 아무리 당신들과 대치하는 것이라고 해도 이렇게 나를 짓밟을 권리나 이유는 대체 어디서 오는가. 발로 걷어차이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뜯기고 많은 욕설을 듣고 쫓겨나 울면서 걸었고 친구들을 만나 다시 부둥켜 안고 울었고 물대표를 맞으며 울었다.

이 책은 사회적 재난을 겪은 사회 속 시민들의 특히 예술 작업, 기록 작업으로서 작동하는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다. 10년 후의 시간이 현재 시점은 소설은 경주의 원전사고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데, 과연 이 설정은 우리가 소설 속 허구라도만 치부할 수 있을까. 작가와 같이 나 역시 빗나가고 말았으면 하는 이 재난의 설정은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불안의 가능성이 있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담는 소설을 만나 반가웠고 슬펐다.

그리고 그 재난과 다른 재난, 사건, 폭력들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있다. 나는 소설 속 금일이 사망된 것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금일을 비롯해 두 명의 여성을 더 살해한 남성’이 ‘하필 금일을 죽인 데 어떤 의도도 없었다는‘ 그 말 자체가 의도라고 생각하고 이유라고 생각한다. 아무렇지 않게 사회정치적 소수자에게 향해지는 재난, 사건, 폭력들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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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 - 죽어가는 행성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살기
에코페미니즘 연구센터 달과나무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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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행성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살기’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달과나무의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는 15인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의 고민과 사유가 담겨 있다. 에코페미니즘에 대해 그리 깊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의 불편이 있던 나에게 에코페미니즘을 다룬 한국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의 글을 만나는 일, 특히나 퀴어와 트랜스 등 다양하게 확장되어가는 에코페미니즘 사유를 만나는 일은 즐겁고 반가운 일이었다.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지구를 떠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지 않겠다는 연대이며, 어떻게 다시 살 만한 장소로 지구를 만들어갈 것인지 고민하겠다는 다짐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우리의 지구 삶이 파국으로 향하고 있다면 그 파국을 어떻게 더 나은 방식으로 만들어갈 것인가를 놓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할 에코페미니스트들의 글을 읽으며 작고 작은 나도 그 전환적 사유를 함께하고, 보탤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기후위기 시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해야할 보편적 문제로서 사유하기 위해 저자들은 에코페미니즘을 다정하게 건넨다.

이 지구를 구성하는 주요한 행위자로서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종, 동식물, 공기, 물 등을 인식하게 되면 인간은 얼마나 겸손해져야 하는 존재인지 저자 김현미는 기후위기 시대 필요한 ‘애도’라는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생태적 슬픔이라는 정동은 수치와 희망을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이다.’(22) 잘 되고 있다는 희망으로서가 아니라 의미 있는 좋은 것을 위해 애쓰는 의미로서 우리는 희망을 지니고, 희망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기에 ‘젠더•인종•생물종 간 정의를 바탕으 로 인간•비인간 생명체의 요구, 이해, 욕망, 취약성, 희망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서로 응답하고 관계 맺고자 고민하는 정치’인 ‘재거주 정치’에 대해 제안하는 것이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 그리고 바로 지금!

그런 의미에서 저자 정은아의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사유는 나로 하여금 에코페미니즘 사유에 조금 더 발 내딛을 수 있게 해주었다. 동등함과 포함됨이 가능성으로서 사유되는 ‘정의로운 전환’은 일부분의 문제를 넘어 교차성과 상호연결성의 혁명적인 상상력을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노동운동뿐 아니라 환경운동과 생태운동도 적지 않은 부분 가부장적 남성중심성의 문제를 지니고 있었기에 젠더 정의를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재사유되는 ‘정의로운 전환’은 말만이 아니라 정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모두를 위한 전환으로서 가능할 수 있을 수 있겠다 싶어서 저자의 글이 반가웠다. 더 많은 부분, 더 넓은 부분 그리고 더 깊게 에코페미니즘과 교집합을 만들고 고민을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먹고, 자고, 숨쉬는 순환 과정 속에서 다층적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이들과 어떻게 함께 잘 살 수 있는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213)는 에코페미니스트들과 지난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다가서고, 함께 고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것은 미안함도 존재했지만, 더 크게 기쁨으로 존재했다. ‘우리가 더 많은 일자리와 임금과 노동시간 대신, 서로를 돌보는 삶을 선택하면 좋겠다. 성장과 채굴, 착취 대신 호혜와 돌봄, 사랑을 선택하면 좋겠다. 좀더 오래 서로의 곁에 머물 수 있도록’(69)이란 책 속 문장을 마음에 담아두고, 어제보다 조금 더 함께 고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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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V양 사건 초단편 그림소설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고정순 그림, 홍한별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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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이 이야기는 런던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다.”라고 썼으나, 글쎄 오늘날에도 어쩌면 이질적이지 않은 일이지 않을까.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죽음을 실험적으로 기술한 작품인 <불가사의한 V양 사건>은 비혼 여성, 고립 여성 청년들이 늘어나는 지금 사회에서도 어쩌면 낯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무관심 속에서 희미해지고 지워진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룬 소설에 고정순 작가의 그림이 너무 어우러지고 좋다. 이 그림과 소설은 어우러지면서 동시에 각각의 작품들로 존재한다. 이 다른 표현의 예술을 같은 자리에서 만나 반갑다. 지워지기 쉬운 존재들을 호명하는 시간이었다.

<불가사의한 V양 사건>, 버지니아 울프x고정순, 아름드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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