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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ㅣ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
- 슈테판 츠바이크 / 남기철 / 이숲에올빼미 / 2011.11.01
- 이제는 우리의 삶을 부정할 필요가 없어졌잖아. 우리는 우리가 파괴할 자격이 없는 어떤 것을 파괴하려고 했던 거야. … 한 줌의 돈만 있으면 내 안에서 아직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들을 밖으로 펼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실현될 수 없는, 내가 지금 꺾어버린 이 나뭇가지처럼 시들어가고 있는, 단지 꺾어버렸기 때문에 시들어가고 있는 것들 말이야. 내 안에서 더 자랄 수도 있는 어떤 것들……
-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 – 425~426p
전쟁이 오스트리아를 덮쳤다. 음식도 돈도 한줄기 미소도, 모든 것이 모자라 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영영 지워지지 않는 그늘이 드리웠다. 숨 막히는 전시 사회, 뼛골까지 삭은 채 시골 우체국에서 시들어가던 여자가 있다. 육 년 동안이나 전쟁터를 떠돌았으나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 남자가 있다. 둘은 대화를 섞자마자 서로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무엇을 박탈당했는지 이해한다. 출구 없는 세계, 계속 그들을 메마르게 하는 가난, 앙상한 두 손 쥔 채 분노에 떨다 죽어야 한다는 무력감, 서로 묶여 있는 굴레가 같다는 걸 안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위로할 힘마저 고갈된 그들이 자살을 결심했을 때 마지막으로 남자가 제안한다. 여자가 관리하고 있는 돈으로 그들이 박탈당한 것을 되찾지 않겠냐고. 남자가 횡령을 제의하고 여자가 동의하는 그 순간, 이야기가 멈춘다. 원고가 끝나 버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는 두말할 것 없이 미완의 작품이다. 소설은 두 남녀가 마침내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 아무 예고 없이 단절된다. 내용 역시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지 못한 채 불균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는 보잘것없는 우체국 직원 크리스티네가 뜻밖의 호화 호텔 휴가를 누리며 겪게 되는 변신과 몰락을 절반 넘게 다룬다. 딱 일주일, 크리스티네의 단 꿈이 이어진 것은 그녀 인생 28년 중 일주일 뿐이었다. 그동안 여자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천국의 문 안에 들어선다. 너무도 쉽게, 옷 한 벌을 갈아입은 것만으로. 스위스 호텔에서의 여름은 아름다웠다. 원할 때면 언제든 쏟아지는 고급 의상과 장신구, 풍족한 식사와 신사들의 관심. 그곳에서 무책임하고 갑작스럽게 쫓겨났을 때 여자는 처음으로 자신이 전쟁 때문에 무엇을 빼앗겼는지 자각한다.
독자들은 이 소설의 제목을 보고 흔히 이 호텔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끝날 거로 생각할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특기, 풍부하면서도 입체적이고 드라마틱한 인물 심리 묘사는 이 소설에서도 매 페이지마다 살아있다. 즉 크리스티네의 폭발적 상승과 하락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인 소설이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려한 호텔 생활 뒤로, 작가는 다시 길게 크리스티네의 절망을 그린다.
그녀는 자신에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들, 그것들과 자신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에 분노한다. 그 영원히 마르지 않는 황금 분수는 터무니없는 공상에 불과한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허름한 우체국 사무실 벽을 원망하게 되는 것은 그녀의 잘못일까? 그저 허영심이라는 열기에 애꿎은 가슴을 태우는 것은 가련한 우체국 직원의 착오일 뿐일까?
그런 그녀 앞에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열아홉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인생의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절을 전쟁에 상납했다. 그 보상으로 그가 받은 것은 국적마저 불명확한 비정규직 인생. 육 년 동안 어린 시절의 꿈도, 생계 유지 수단도 잃은 그에게 남은 건 분노와 수치심뿐이다. 소설 후반부 절반은 그들이 가까워지는 과정과 그에 따른 관계 진전을 메인 스토리로 끌고 간다. 가난한 두 연인의 보잘것없는 연애사이니만큼, 앞쪽의 바쿠스 연회장을 연상시키는 부분과는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변화는 이야기 방식에서 발견된다. 앞 전반부에서 작가는 크리스티네의 스팩터클한 변신을 카메라에 담듯 묘사했고, 크리스티네의 심리 여과 없이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주로 남주인공 페르디난트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즉 페르디난트의 긴 연설, 한탄, 분노에 넘치는 웅변으로 주제 '전쟁에 의해 영영 박탈당한 세대의 괴로움'이 전달되는 것이다.
- 아니야. 프란츠. 내가 자네를 비난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알고 있어. –중략- 자네가 선량한 친구라는 것을 잘 알아.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잘못된 점이자 어리석었던 점이야. 우리는 너무 착하고, 의심할 줄도 몰랐어. 그래서 우리는 이용만 당했지.
하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앞으로 절대 안 속을 거야. 내가 아직 사지가 멀쩡하고 목발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으니 행복한 것 아니냐는 따위의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숨 쉴 수 있고 먹을거리 있으면 충분하지 않으냐는 이야기, 그 정도면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에 설득 당하지도 않을 거야.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신도, 국가도, 삶의 의미라는 것도 믿지 않아. 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야. 그런 권리를 찾지 못하는 한, 세상이 내 인생을 빼앗아 갔고 나를 속였다고 생각할 거야.
- 본문 318p
페르디난트의 감정상태에 대한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크리스티네의 섬세한 감정 묘사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야기 전달 방식이 페르디난트라는 한 인물의 등장으로 확 바뀌어버리는 것은 완성도 측면에서 볼 때 그리 매끄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크리스티네는 ‘특유의 내성적이고 의존적인 성격 탓인지’ 분명 페르디난트의 말에 동의하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공감을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그를 감싸줄 뿐이다. 중반까지 휘몰아치는 감정의 파고를 드러내며 더없이 매력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춤추던 크리스티네의 존재감이 확 줄어들어 버리는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이 균형감을 갖추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 크리스티네의 호텔 유희 부분이 한층 줄어들거나 페르디난트의 등장이 훨씬 빨랐어야 했다.
또한, 주제 심화 차원에서도 이러한 페르디난트의 난입은 문제를 노출한다. 전쟁에 직접 참가해서 손가락 불구까지 된 페르디난트의 문제의식과 후방에서 가난에 찌든 나날을 보내다 한 차례 화려한 휴가로 충격을 받은 크리스티네의 그것은 절대 같은 층위일 수는 없다. 물론 그 둘을 가두고 있는 거대한 굴레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둘은 ‘이 모든 것이 전쟁 때문이며, 그들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것 또한 전쟁뿐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 둘의 분노가 과연 같은 종류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당장 둘은 상황의 급박함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게다가 페르디난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사회상과 크리스티네가 바라는 회복된 삶의 질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앞쪽에서 섬세하게 묘사되었던 크리스티네가 이런 차이를 무시한 채 덮어놓고 그와 나는 같다고 공감을 표하는 것은 그다지 그녀답지 않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주제 ‘전쟁 이후 피폐해진 젊은이들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성급한 진행인 듯 보인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불완전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는 독자를 도취경으로 이끄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읽는 이의 심장을 움켜쥐고 깊이 끌어당기는 힘이 소설 전체에 작용한다. 아무 전조도 없이, 그것도 가장 중요한 순간 이야기가 끊겼는데도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상은 흔들리지 않는다.
인생의 매 중요한 순간마다 그 순간이 지나갈 때까지 성공 여부는 아무도 얼 수 없지 않은가. 뜨겁게 고민하느라 차갑게 식어가던 두 남녀가 성공할지 안 할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총 대신 강탈을 선택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 순간이 그들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그들이 횡령 계획을 진행하든 하지 않든, 모든 일이 잘 풀려 그들이 오래 함께 하든 금방 헤어지든, 성공하든 하지 못하든 그런 차이는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페르디난트가 짠 장문의 계획서대로 모든 것은 장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구성도 불안정하고 줄거리도 끊긴 소설을 끌고 가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든 글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발산하기 위한 무대 장치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아주 훌륭한 확성기다. 그는 페르디난트의 입을 통해 직접 전후 오스트리아 사회의 모순과 도태를 고발한다. 크리스티네와 그녀를 둘러싼 호텔 인물스케치를 통해 제 욕망을 상류층의 나태한 양상을 그린 것은 훗날 페르디난트의 비난 실례가 된다. 작가는 실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 한 쌍을 통해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전체를 상대로 화풀이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화풀이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인물들의 생생함이라는 것이다. 그는 제 매력적인 문투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어조와 행동을 끌어낸다. 그의 묘사로 태어난 인물들은 도자기 사이에서 홀로 피부와 뼈와 피를 나눈 자들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작가는 인물들의 성격과 생각의 변화, 대화의 혼선을 다른 이의 눈과 귀에 확고하게 박아 넣는다. 그는 뻔하고 천박한 욕심들을 단순히 더러운 것 이상으로 채색해낸다. 크리스티네의 허영심도, 페르디난트의 엉뚱한 분노도, 싸구려 호텔에서의 역겹고 초라한 하룻밤마저도 말이다. 그것이 몇 세기 전 섬나라의 실존 여왕이건 가상 설정 속 시골 우체국 여직원이건 츠바이크의 문장을 타고나면 둘 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어느 장르에서건 제 글 속 인물의 심리를 마음껏 펼쳐 보인다. 그의 글에서 긴장감은 인물이 '비밀'을 숨김으로써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모조리, 마음의 흐름까지 그대로 보여주면서 긴장감이 올라간다. 책을 덮고 나면 독자는 나비의 날갯짓을 쫓다 정신 차려보니 화단 한가운데까지 침범한 아이 꼴이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야말로 모든 이야기의 핵심이며 '인간의 감정'만으로 가장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조건에 충실함으로써 츠바이크 소설은 공고한 세계를 구축해 낸다. 자살이나 절도 외에는 '미래'를 얻을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빠른 파멸이냐 조금 더 돌아가는 길이냐 선택의 기로에 선 남녀를 보여준 채 소설은 끝난다. 횡령은 영원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 채' 남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츠바이크의 인물의 생생함은 독자들로 하여금 책장 바깥에서 어른거리는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실재하지 않으나 우리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뒷모습을 쫓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잘 쓰인 소설의 마력 아닐까. 이런 마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록 미완성 작품이라 할지라도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여자가 남자의 시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내밀며 대답한다. - 좋아, 한 번 해보자.
- 본문 461p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될까? 몇만 프랑을 얻는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중요한 건 그들이 박탈당했다고 믿는 것이 정말 그들이 박탈당한 것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전쟁을 통해 정말 박탈당한 것은 무엇을 박탈당했는지 확인할 능력이다. 그들은 외면에 익숙해지고 핍박에 수치심을 자극당하느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열병에 걸린 나머지 환상 속 우물을 향해 고개를 처박는 환자들이나 매한가지 상태다. 크리스티네가 전쟁을 통해 잃은 건 안정감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서민의 일상이다. 스위스 호화 호텔에서의 환락의 밤이 그녀가 박탈당해 못 견딜 것은 아니다. 페르디난트는 너무 모멸을 많이 겪은 나머지 화를 내야 할 상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의 예민한 정신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찔러댄 수치심을 가라앉히지 못해 항상 과민상태에 빠져 있다. 그들은 몇만 프랑을 횡령해서 자신들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무엇을 해야 이 끔찍한 예속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른다. 이 소설의 '열린 결말'이 한없이 씁쓸한 것은 결국 남녀주인공들이 또 다른 수렁으로의 길을 재촉했다는 것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은 어디까지 변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세계에 사는 독자 나는,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탈을 쓴 작가의 열변에 손을 꾹 쥐며 공감한 나는 어디까지 도취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