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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괴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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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가 시도한 것 중 하나는,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영웅적으로 그리기를 거부하고 철저히 ‘불쾌한 것’ 으로 묘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신작 장편소설 <결괴> 2권 책 뒷표지에 실린 작가의 말이다. 책을 펼쳐보면 과연 작가의 노력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쾌하다. 메인 사건은 끔찍하고 그로 인해 촉발된 파문은 추잡하다. 소설은 메인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사회 외적 현상을 스케치하는 한편 피해자의 가족-특히 형인 다카시를 중심으로- 사건 관계자들의 내면을 길게 묘사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사적 대화(내면)과 매스미디어에 스크랩된 군상들의 표정(외면)이 하나로 합쳐져 ‘혼네-다테마에’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렇게 포착된 인간의 면모란 지극히 불쾌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불쾌한 것은 굳이 다른 글씨체로 표시되는 ‘악마’도, 그의 범행이나 범행성명문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폭력이 불쾌한 것이라는 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이겠는가.
  이 소설의 특이성은 소설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겉핥기’다. 이 소설의 주인공 다카시는 가가 세상을 향해 ‘마음껏 아는 척’ 할 수 있도록 설정된 캐릭터이다. 그가 늘어놓는 아주, 아주 긴- 도대체 왜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 대사들은 온통 교양철학서적을 복사해서 붙인 듯한 말들 투성이다. 그는 그저 ‘다른 이들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 진짜 나의 가치를 규명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이가 행복한 것이 좋다는 건 당연한 일일까?’ 라는 단순한 말을 하기 위해 온갖 철학자들을 ‘어설프게’ 끌어들인다. 동생 료스케의 살해범으로 몰린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해석도 매우 지적으로 비비 꼬아 놨다.
  내가 특히 역겹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이 다카시의 일장논설만 시작되면 그의 대상들에게 꼭 ‘다카시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이라는 표현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다카시의 말을 이해 못한다면 그건 그가 뻔한 잡식들을 쓸데없이 늘어놔서 도대체 본론이 언제 나오는지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다카시의 이 장황한 인식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국내에서 진행된 작가 인터뷰 (http://www.people21.co.kr/sub_read.html?uid=13731&section=sc3) 를 보면 그의 의도가 소개되어 있다.

  “새로운 현실을 문학으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에도 시대의 살인 사건과 오늘의 살인사건은 다르죠. 이야기가 뻗어 나가는 층이 늘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문학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며 '결괴'를 썼습니다."

"지금 이 순간 사회에 호소하고 싶은 주제를 써보고 싶었다"는 작가는 '자아를 발현할 수 없는 현실에 체념한 젊은이들'과 '인터넷의 발달' 속 나타나는 '타인의 압도적인 다양성'에 주목했다.

"소설 속에서는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타깃이 아니라,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대상이에요. 악마라는 사람은 죽을만큼 노력해 '행복'을 쟁취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 제발 작가가 다카시를 문제아로 지정하고 쓴 것이길 빈다. 작가의 사건일지 드래그 복사 붙이기 같은 각계 인사 반응, 다카시의 장광설이 정말 현실을 재포착하는 데 유효했나? 나는 회의적이다. 겉핥기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지만 작가가 글을 대충 썼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아주 ‘성실하게, 진지하게’ 겉핥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게 이 소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작가의 인터뷰나 책  뒷면에 나타나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하면서도 결과물에는 차마 박수를 칠 수 없다. 다카시가 작가의 축약판 캐릭터이고, 작가는 그를 통해 자신이 세상에서 느낀 위협감을 되풀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읽기가 힘들었다. 작가가 ‘일식’을 통해 보여줬던 전문성을 다시 회복하기를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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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이번 달에는 기대되는 작품들이 굉장히 많았다. 특히 사회 문제를 재조명한 작품들이 많아서 흥미로웠음. 저저번 달에는 독특한 사건에 휘말린 노인들(암살이나 납치사건 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이 여러 권 나왔는데 이번 달에는 사회 문제와의 접목이 속속 보인다.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지은이) | 성귀수 (옮긴이) | 은행나무 | 2013-10-16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 정확히 말하면 로빈슨 크루소의 반대칭 소설. 

  이 소설 소식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경향신문의 문화면 기사(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252131085&code=960205)였다. 


  우리는 우리가 체득한 규칙과 습관을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연 사회라는 울타리가 사라졌을 때 우리가 규정하는 '인간성'은 얼마나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로빈슨 크루소>는 문명의 편에 서서 답한다. 한 인간이 자그마한 생태계 하나를 자신의 영지로 가꿔가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문명 외의 편에 서서 가상의 답안지를 만들어 본다면? 프랑수아 가르드의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흥미로운 주인공과 관찰자를 내세움으로써 또 다른 답을 제시한다. 다른 답을 제시한다는 건 다른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질문과 마주하게 될까?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은이) | 문학동네 | 2013-10-30




눈을 잡아 끄는 제목. 여장 노숙인이라는 기괴한 소재. 황정은이라는 이름이 주는 기대감. 


폭력, 그 폭력보다 더 폭력적인 무심함을 다룬다는 책 설명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황정은의 단편밖에 읽지 못했지만 작가가 작품 안의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던 게 잊혀지지 않음. 두번째 장편이라는 이 작품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갈까 궁금하다. 











조공원정대

배상민 (지은이) | 자음과모음(이룸) | 2013-10-25



잘난 것 없는 청촌들의 속절없이 웃기고 대책 업싱 울리는 이야기 - 는 사실 지금까지 여러 젊은 작가들에게서 다뤄진 소재다. 사실상 어지간한 루저 문학들이 모두 갑갑한 청춘들의 이야기를 마지못해 터지는 웃음으로 버무린 소설들 아니었나. 요즘 이십대 얼굴에 고정된 삐딱착잡한 미소는 그야말로 '왜사냐건 웃지요'의 집약판이라 할 수 있지 않을지.

이 소설이 그런 청춘 자화상 중 두드러지는 것은 그 배경이 'IMF'와 모기지론 사태 등으로 매우 구체적이라는 사실이다. 현 상태를 치밀하고 이색적이고 소름 돋게 또 유쾌하게 그려낸 작품이야 많지만 그 원인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건 별로 보지 못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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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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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없고 아무 행동도 없이, 그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가 침묵 속에 앉아 있는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무리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 위화, 제7일, 227p -

 


증오어리지 않은 비판. 모두를 감싸 안으면서 왜곡하지도 않는 포용력. 매일 황당한 사건들이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보도되는 요즘 이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시선이다. 알량한 위안도 눈먼 분노도 현대인들의 피로와 절망을 해소해주지는 못하기에.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날카로움과 유머, 온기를 두루 갖추고 현실을 직시한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비평가 신형철은 소설을 '희망의 근거를 어설프게 늘어놓는 아마추어의 소설, 어떠한 타협도 없이 절망의 정의로움을 완강하게 고수하는 프로의 소설, 그리고 절망의 끝에서 기어이 희망의 가능성을 설득해내고야 마는 대가의 소설' 세가지로 분류했다. 위화의 [제7일]은 저 세번째 소설의 조건을 독특한 설정으로 충족시키는 작품이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반드시 겪어야 하는 관문 죽음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 죽은 이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위화만의 방식. 따뜻한 회색 세계 -

 

나는 그간 기록이란 '살아있는 자들의, 살아있는 자들에 의한,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기록을 남기는 것은 '살아있는 필자'이며 읽는 것은 '살아있는 독자'다. 게다가 이 글을 쓴 나와 읽은 당신이 모두 죽는다 해도 기록만은 계속 살아남는다. 우리가 '인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갱신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기록의 이 '불사성' 덕분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소설은 '당대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삶'을 포착해내는데 공헌해 왔다. 우리가 소설 책장을 펴드는 건 '아직 모르는 다른 이들의 삶을 맛보고 싶어 하기' 때문 아닐까.

 

그런데 위화의 이번 소설은 아주 달랐다. 이 소설은 죽은 자에 의한, 죽은 자들을 위한 소설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한' 소설인 것이다.


[제7일]의 화자는 불운한 화재폭발 사고로 사망한 한 남자다. 그는 죽은 지 첫날, 짙은 물안개가 퍼져 있는 세계를 거닐어 스스로 화장터로 향한다. 팔에는 스스로를 애도하기 위한 검은 완장을 찬 채다. 남자에게는 그를 애도해 줄 친지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남자의 삶은 기이하고도 평범하고 서글프면서도 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는 묵묵히 살아낸 인생을 죽어서야 천천히 회고한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나에 대해서는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다'라는 말을 사극에서 듣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후세의 역사가가 아니라 망자가 된 그 자신 아닐까. 이 소설에서 단 하나의 접점 화장터 빈의관을 사이에 두고 이승과 저승은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된다. 이러한 분리가 오히려 이승에서의 자신을 투명하게 보게 해주는 렌즈 역할을 하는 건 아닐까.


주인공은 저승의 물안개 속을 헤매며 자신과 주변인들을 돌아본다. 그 추적의 끝에는 어김없이 죽음이 있다. 사람의 삶을 쫓는 것은 곧 죽음을 쫓는 것이다.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주인공 주변 사람들이 연달아 죽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빈번한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명징한 이승의 태양 아래 묻어두고 망각해 버리는 것일 게다. 우리는 희끄무레한 저승세계에 가서야 나를 비롯해 내 주변에 망자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걸 똑똑히 알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작가는 독자들이 당혹스러움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저승 세계를 돌아본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 망자들에게는 더 이상 급할 것이 없다. 제대로 묘지에 묻히든 묻히지 못하든 그들 모두에게는 영원이 주어졌으니까. 독자는 주인공의 걸음을 따라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조금씩 저승의 경계를 넘는다.


마치 맑은 물이 가득 든 유리컵 안에 먹물 한 방울이 떨어져 흩어지듯 풀려나가는 이야기. 이미 죽은 자들이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과거형이다. 주인공 양페이를 버리고 떠난 아내 리칭, 양페이의 양아버지와 젖을 물려준 이웃집 부인, 그의 이웃에 살던 젊고 가난한 커플들의 이야기도 모두 지난 일일 뿐이다. 양페이는 죽고 나서야 그들과 해후하여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 그의 인생의 이야기는 그가 죽고 나서야 온전히 완성될 수 있었다.

 

 

- 이 소설에는 죽은 자들이 잔뜩 나온다. 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야 한다. -

 


이 이야기에 굵직한 사건들은 등장인물들에게는 모두 지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쫓듯 책을 읽어 내려간다.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살아 생전 겪었던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 겪고 있는 현실이니까.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들 말이다.


기이하게도 이 소설의 사자들은 모두 '머물 곳'을 잃은 자들이다. 이 작품의 이승과 저승을 관통하는 법칙은 딱 하나. '거처'에 대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강제 철거 해프닝과 저승의 묘지 과시가 겹친다. 이 소설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갈 곳을 잃고 떠밀려' 죽은 자들이다. 자살하듯 폭발에 휘말린 주인공부터 태어나자마자 의료폐기물로 버려진 스물일곱명의 아기까지. 모두 다.

 

현실에서 제대로 된 거처를 보장받지 못한 자들 대부분이 죽어서도 안식할 땅을 얻지 못했다. 아무도 그들을 제대로 염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철거되고 부실공사로 무너지는 건물들 안에 깔리는 사람들. 그들의 죽음은 무너져 내리는 현대 사회에 묻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제대로 묻히지 못한 혼들이 구천을 떠돈다. 자신이 왜 죽었는지조차 제대로 모른 채, 마지막 단장도 하지 못한 채. 저승의 검은 비와 흰 진눈개비 사이로 나타났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우리는 환한 대낮에 좀 더 '편히 잘 살기 위해' 죽은 이들을 모르는 채 한다. 알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승에서는 다르다. 거기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담담히 말할 수 있다. 비로소 알려지는 것이다.


저 모노톤 저승세계가 따뜻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담담한 폭로 덕분이다. 망자들은 언제 썩어 흐트러질지 모르는 몸을 잃고 대신 영원을 얻었다. 영원한 안식과 영원한 방랑. 어쨌든 '영원'이란 모든 싸울 이유를 무화시킨다. 은원과 득실이란 다 시간과 얽힌 일 아닌가. 시간이라는 물레가 영영 멈춰버린 이상, 남는 것은 썩은 살에서 뼈를 발라내듯 남겨진 진실뿐이다. 어느 장지에도 묻히지 못한 자들이 뼈만 앙상하게 남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진실들끼리는 서로를 해하지 않는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침묵을 공유할 뿐이다.

 


우리는 조금 더 오래 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한다. 이제는 진시황처럼 대놓고 불노장생을 말하지는 않지만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승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려 애쓴다. 또 그와 함께 피안의 세계에 대해 온갖 상상을 펼친다. 사후 세계만큼 인간이 상상력을 집요하게 발휘시킨 소재가 있을까.


위화의 [제7일]은 최근 읽었던 어떤 이야기보다도 더 위안이 되는 저승 세계 이야기였다. 그가 다루는 것이 모두 억울한 죽음, 고통스러운 죽음인데도 그러했다. 우리가 예로부터 가장 불길하게 여겼던 '구천을 떠도는 혼들'이 주인공인데도 이 소설은 아름답다. 죽은 그들은 더 이상 가엾지 않다. 가엾지 않기 때문에 증오하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흘러가는 강과 심장 모양 잎사귀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연인의 희생으로 영원한 안식을 얻은 처녀의 장례식 길을 진심으로 배웅할 수 있다. 우리가 죽어 남길 뼈와 혼이, 우리가 마지막 남기는 것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죽는 것도 그리 끔찍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렇게 처참한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세상인데도 무가치하지는 않다. - 나는 이 책을 읽고 이런 위안을 꾹꾹 곱씹었다. 인간의 추함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간의 손을 이렇게 따스하게 맞잡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대가 아닐까. 부디 우리 모두가 이 온기를 유지할 수 있기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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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오늘의 일본문학 12
아사이 료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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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위터 유저라면 누구나 한번쯤 공감해 봤을 말이 있다.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라고.  영국 유명 축구 감독 말이라나. 굳이 유명인들의 트위터 망언 사례를 떠올릴 것도 없다. 짬짬 시간 날 때는 물론 해야 할 일도 미뤄놓고 한참 스마트폰을 터치하다보면 하루에도 열두번쌕 내가 이게 뭔 짓인가 싶으니까. 그리고 그 말을 또 트윗하고 있지.


  명확한 목적도 맥락도 없다. 그런 잡담을 한없이 되풀이 생산할 뿐 아니라 남이 올려놓은 잡담을 내려 보느라 몇 시간을 보낸다. 세상에 이렇게 쓸데없는 일이 또 있을까? 트위터는 정말 인생의 낭비인 게 분명하다. 인간이라면 어느 세대,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했을 법한 낭비 말이다. 오로지 발화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하루 몇 시간을 투자한다. 식욕 성욕 배설욕 수면욕 따위가 인간의 생존과 관계된 것이라면, 발화욕은 그야말로 인간이 사는 보람,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게, 널리, 적은 비용으로 편하게 이야기를 가공하고 전파할 수 있을까. 인간의 많은 발명품은 이 수다욕구를 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매체의 발전에 따라 우리의 발화 방식도 끊임없이 변했고, 그와 맞물려 사상과 사회 역시 변화했다.
 그리고 현대 국경을 초월한 최고의 잡담 창고는 누가 뭐라 해도 SNS일 것이다. 거기서 오가는 정보의 대부분은 아무 쓸데없는 잡담, 평범한 일반인들의 일상 단편이다. 어떤 의미있는 주제로 토론이 오간다 해도 SNS의 특성 - 즉 짧은 잡담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 가지 정보도 공적인 것이 없다. 누구나 언제든 끼어들 수 있고 자신만의 맥락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배출할 수 있다. 그야말로 1세기 전에는 불가능했던 대화 방식. -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방식의 변화 자체로도 재미있는 수다를 떨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되 별로 의미는 없는, 그래서 별 거부감 없이 공감 추천을 올려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아사이 료의 신작 소설 [누구] 는 딱 그런 이야기이다. 트위터에서 열심히 인생을 낭비하는 20대 여섯 명을 등장시키고 이들이 트위터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보여준다. 이 소설의 인물들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건 트위터 멘션 캡쳐, 중반 줄거리는 그 인물들 중 한 명의 시점에서 밋밋하게 전개된다. 이 소설의 소재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소설의 메인 퀘스트인 '취업'은 현대 도시에 사는 20대는 모두 실시간 플레이 중인 네버엔딩 과업이다. 게다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도 매우 공감할 만하다. 얄팍한 트위터 안에서 허세부리지 말고 진짜 자신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자고. 건실하고 좋은 주제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있지 않았다. 주인공들이 너무나 평범해서? 별다른 기승전결이 없는 일상의 전개라서? 주인공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아니다. 이 작품이 제게 떨어진 조명을 한껏 살려내지 못한 것은 제 소재와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이다. 강철스프링곱슬머리를 데려다 조선시대 비녀를 꽂으려는 시도같달까.
  이 작품은 '트위터'라는 소재를 거의 살려내지 못했다. 잘 쓴 소설이었지만 무난한 소설이었다. 무엇보다도 소설은 트위터의 속도감과 자발적 참여를 끌어낼 수 없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낯선 일본인 여섯 명의 트위터를 강제 팔로 당한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그 멘션들 안에서 내 마음대로 맥락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면 좀 더 흥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엄연한 화자=주인공이 존재한다. 사건의 흐름은 이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순서에 맞추어 진행된다. 즉 이 트위터 멘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소설의 고정 화자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이러니 습관적으로 트위터 새로고침하듯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또 하나 문제는 이 소설의 구성상 작가의 메시지가 트위터 멘션과는 상관없이 전달된다는 데 있다. 이 소설에서 트위터는 거의 작은 일기장으로만 쓰인다. 기이할만큼 소통 기능은 보이지 않는다. 화자가 다른 인물들의 계정을 스토킹 하기만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본의 트윗 사용 방식이 이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전자라고 해도 주인공 외 인물들마저 트윗을 통한 소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건 문제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다른 인물의 트윗에 대한 감상을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직접 구두로 전달한다. 한 번 전달 할 때마다 한 인물의 설교조 연설이 길게 이어진다. 꼭 반 학급회의 시간에 임원이 일어나서 발표를 하듯 말이다. 그런 연설이 있은 후 대상 캐릭터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것도 간접적으로만 나올 뿐이다. 트위터는 여기서도 완전히 빠져 있다. 


  이렇게 소설 구조에서부터 트위터라는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재미있는 시도를 할 기회를 잃어 버렸다. 소설에 나오는 발화도구는 트위터에 화상 통화 등 최첨단인데 그걸 다루는 소설은 전형에서 안주해 버린 것이다. 전형이 나쁠 것은 없지만, 소재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썼다면 안주했다고 표현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이 외에도 대체 왜 이 소설의 인물들은 지인 뒷담화용 부계정을 돌리면서 트위터 잠금 기능을 쓰지 않는 것인지,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주인공이 왜 잠금기능을 쓰지 않는지는 다른 인물의 추측이 붙긴 했다. 하지만 왜 다른 인물들도 잠금기능을 쓰지 않는 것인가?) 넘어가자.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만약 트위터의 기능을 살려서 좀 더 '멘션 대화'를 잘 보여주는 작가가 폭로하려 했던 주인공의 이중적 모습도 더 잘 들어났을지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글쎄. 주인공보다는 주인공의 부계정 트위터를 일부러 찾아내 면박주는 리카 쪽이 더 괴팍해 보인다. 뭣보다도 리카는 그걸 일부러 폭로해서 몇장에 걸쳐 설교를 할 입장도 아니었다. 주인공이 계속 열등감을 느끼며 이상화하던 고타로도 아니고 사랑하던 미즈키도 아니었으니까. 리카는 주인공에게 관찰자인척 허세를 부리는 걸 그만두라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굳이 트위터를 하지 않더라도 항상 관찰자 아닌가. 주인공이 품고 있는 열등감과 허세는 물론 짜증스럽다. 작가의 의되대로 아주 익숙하고 평범한 찌질함이다. 주인공의 그런 마인드가 답답하고 지루해서 초반부에는 이 소설을 읽기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 안에서 이렇게 주제를 공공연히 내비칠 만큼 주인공이 문제적인 모습을 보였나? 던져진 문제들은 얼만큼 무르 익었나? 그 부분에 대해선 회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내가 작가의 주제의식에 공감하고 주인공에게 내 자신을 꽤 발견했는데도)

 

  그래서 이 소설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내 생각 한줄 요약:

 

'좋아요. 좋은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트잉여가 죄인가요?'

 

 

  SNS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의 '잡담' 방식을 결정할 것이고, 우리가 이야기를 소비하는 방식도 그에 맞게 변해 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를 이용해 새로운 이야기를 풀려고 고심하는 이야기꾼들이 세계 도처에 많을 것이다. 과연 소설은 어디까지 SNS를 흡수할 수 있을까. SNS는 소설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까. 소재와 주제와 글맛이 착착 붙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나오길.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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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출간작 중 찔러 보고 싶은 것들.

 

 

 

 

  1.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

 

제임스 써버 씀. 김지연 옮김. 뗀데데로.

  표지 부터 눈에 쓱 들어온 책. 처음 접하는 작가이지만 저 일러스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든다. 게다가 작가가 제 2의 마크 트웨인이라는 평을 듣는 단편 대가라니, 과연 실제 책을 펼쳐 보면 어떨지. 기대하는 것은 유머러스함과 시니컬함, 거기에 살짝 잉여로움을 덧 쒸운 바삭한 에피타이저같은 글.

 

 

 

 

 

 

2. 아직은 신이 아니야

 

듀나 씀. 창비.

 

 가벼운 듯, 별 것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다는 듯. 설정 무게에 눌리지 않고 능청스레 술술 풀어가는 글. - 듀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받았던 감상이다. 더욱이 연작이라니 작가의 센스가 더 빛을 발하지 않을까 기대됨. sf야말로 현실에서 발생하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들을 기탄없이 던질 수 있는 장르라고 믿고 있고, 이 소설도 그런 즐거움을 주길 바란다. 추리소설부터 동화까지 다양한 형식의 이야기가 어떻게 한 권 안에 묶일지도 궁금하다. 이 책을 펼칠 때는 잘 만든 화환 환 다발을 드는 기분 아닐지.

 

 

 

 

 

 

3. 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

 

이혜경 씀. 문학동네.

 

 

  '젊음을 기어코 앗아가려는 세계에 맞서 이를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청춘의 이야기'만 있다고 한다면, 이 소설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어둡고 가파른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기'라는 배경만 있었어도 큰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둘을 엮어낸다고 하니 퍼뜩 돌아보게 된다. 이야기 서슬이 파랗게 살아나는 느낌이랄까. 작가가 부디 이야기를 잘 조여주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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