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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그린
데이비드 미첼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생은 끝나지 않기에 이야기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얼마쯤은 완벽하지 못한 이야기 속에서 현재를 살아내기에 벅차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독특한지, 나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입 안에서 굴리고 쪽쪽 빨아먹고 있는 엿이 얼마나 달콤한지는 엿을 다 먹은 후 입안에 감도는 들쩍지근한 맛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창 엿을 먹을 때는 이나 손가락에 끈적끈적 달라붙는 엿을 처치하느라 정신이 없지 않은가.
데이비드 미첼의 소설 <블랙스완그린>은 막 고아내 굳힌 엿을 똑 똑 끊어 먹는 맛이 나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80년대의 영국 우스터셔 주의 촌마을 블랙스완그린, 주인공은 작가의 자전적 인물인 열세살 소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지금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책표지 안쪽은 현실과 떨어진 또 하나의 세계고, 그 안에서 소년은 지금 열세 살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내가 이 책의 첫장을 펼쳐 드는 순간 주인공 제이슨 테일러는 다시 열세 살의 1월, 블랙스완그린의 호숫가로 돌아갈 것이다.
1980년대 영국의 TV 프로그램과 상품, 광고, 유명한 배우와 가수들의 이름들 - 쉴 새 없이 언급되는 이 소도구들은 한 소년의 생생한 시선에 잡히면서 독특한 색을 얻는다. 나는 영국 사회에 대해 잘 모르고, 80년대에 대한 지식은 더욱 파편적이다. 나 자신이 80년대 중반에 만들어졌으니까. 뭐. 하지만 이 아이의 선명한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도 얼마든지 열세 살로 돌아가 이 아이와 대화를 트고 놀 수 있을 것 같다. 소년이 쓰는 단어, 그가 묘사하는 자그마한 촌마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이상 어른인 척 젠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읽는 내내 이 작가는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건지 놀랐다. 대체 뇌 속에 어떤 우물을 파 놓으면 이런 문장과 단락 연결이 끊임없이 나오나. 이 책을 처음 잡았을 때에는 정말 이렇게 떠올리기만 해도 침 고이는 소설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표지는 어쩐지 미스테리 소설틱하고 두께는 엄청 두꺼운데다 '자전적'이라잖아! 작가에게 가장 '이야기화'하기 어려운 게 아마 자신의 유년기 일상일 것이다. 자전적이란 말을 굳이 붙이는 순간 이미 나는 기대를 반 덜어 버린다. 그 단어에는 '이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에 이미 콩깍지가 씌여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 어린 시절 얘기를 할 때는 팔이 안으로 굽게 마련 아닌가.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대개 재미가 없지.' 라는 수식이 딸려 있다. 물론 정말 훌륭한 자전적 이야기도 많지만, '자전적'이라는 표시를 보는 순간 나는 이미 그렇게 해석을 해버리는 것이다. 조건반사적인 편견인데, 지금까지 고칠 마음이 별로 없었다. - 자전적인 이야기는 소재는 다 떨어진 작가나 쓰는 거지.
내 건방진 생각대로 데이비드 미첼이 할 이야기가 떨어져서 이 소설을 쓴 거라면 대체 이전의 그의 소설은 얼마나 꿀맛이었다는 걸까. 첫번째 챕터를 다 읽어갈 때에는 이 소설이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이 아까워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에는 이 책이 끝났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울고 싶어졌다.
1980년대, 시골, 있을 건 다 있으면서도 어딘가 하나씩 어긋나고 불안한 중산층 10대의 성장기를 우리나라에서 쓴다면 이렇게 재미있게 쓸 수 있을까. 아마도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널리 알려진 소설 중에서는 제일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새의 선물>을 읽으며 이 소설만큼 몰입하지는 못했지만.(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13살 현재 진행형을 고수하지만, 새의 선물은 앞뒤에 어른이 된 내가 과거 회상에 빠져들었다 나오는 장치가 있다. 별로 효과적이지는 않은 장치다.) 어쨌든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얻은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세가지를 추리라면 내가 너무 편협했다는 깨달음, 앞으로 얼마나 더 재미있는 책을 많이 접하게 될까 하는 흥분, <블랙스완그린> 꼽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