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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전쟁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吊(조)를 쓰는 사람들이 弔(조)를 쓰는 사람들을 죽이고 글자를 없앴다.”(193면) 정말 놀라운 착안이고, 분석이었다. 만약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글자전쟁>이란 작품을 읽는 내내 속으로 ‘한자는 진정 중국이 만든 중국의 문자까?’라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중국의 자전에서는 백두산을 어떻게 읽으라고 되어있지?
“지금 얘기하신 그대로 ‘백두산’이군요. 그런데……”
태민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중국어로 백두산은 ‘백두산’으로 읽는 게 아니라 ‘바이토우샨’이라 읽는 읽는다.
“중국인들이 백두산을 ‘바이토우샨’이라 발음하지만 ‘백두산’이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거 아니에요? 지금 교수님 말씀은.”
“내 얘기가 아니라 중국의 자전에 그렇게 발음기호가 되어 있단 말이네.”
“아니, 어째서 한국말이 그대로 중국 자전의 발음기호가 되어 있는 거죠?”
“어째서 그렇겠나?”
“설마... 한자는 지금의 중국인들이 만든 게 아니라는 뜻입니까?”
“아직 여기에 대해 확고부동한 이론은 없어. 하지만 어떤 글자가 있으면 그 글자는 가장 정확하게 발음하는 사람들과 깊은 관계가 있을 수 밖에.”(291면)
주지하다시피 동아시아에 속해 있는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싱가포르 등의 국가들은 모두가 다 한자문화권이다. 비록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쓰는 말이 다르지만, 한자라는 공통된 문자를 통해 언어가 아닌 문자로 서로 의사를 주고받으며 소통할 수 있다.
한자는 뜻글자로 이루어진 문자이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한자를 문자로 쓰는 국가들의 경우, 그 나라의 말을 몰라도 한자로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 즉 글로 쓰는 필담으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공통 문자가 바로 한자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실로 오랜 세월 한자로 우리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 세종대왕 대에 한글이 창제 되었어도 한자의 힘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을 정도로 막강했다.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한자를 사용한 민족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자를 애지중지 여겼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복잡한 한자의 원 글자인 번체자(繁體字)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정작 한자의 나라라고 하는 중국은 한자(번체자)가 복잡하고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간체자(簡體字)라고 하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와는 사뭇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과연 이렇게 줄이고, 약자로 쓰면서 과연 한자를 자기네 문자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지금 중국에서는 번체자를 모르는 중국인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중국을 한자의 종주국으로 알고 있고, 살아왔으며 또 한순간도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진명 작가는 한자가 중국만의 문자가 아니었고, 또 한자를 처음 만든 나라 또한 중국이 아니었다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글자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중국인, 중국 한나라 때의 문사들이 모르는 글자가 있다. 백제, 신라, 고구려, 옥저, 동예의 문사들은 다 아는 글자인데,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의 문사들이 모르는 글자가 있다니, 吊와 弔에서 시작된 고구려와 중국 한나라 사이의 글자전쟁은 재상 을파소에 의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 글자가 바로 답(沓)자이다. 논을 뜻하는 답(沓).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소설 속의 주인공 태민은 수십억, 수백억을 벌어들일 수 있는 무기중개상이다. 실패를 모르고 항상 승승장구하던 그는 무기중개와 관련해서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구속 직전에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달아나게 된다. 어렵게 중국으로 탈출한 태민은 그곳에서 북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재산을 빼앗은 남한을 위협할 계획을 세운다. 이 와중에 태민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에 자신이 직접 별명을 붙인 킬리만자로라는 사람에게 접근 하여 그를 이용하려고 하는 중에 뜻하지 않게 그와 관련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킬리만자로는 태민에게 usb를 전하고는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실 태민이 접근하고자 한 킬리만자로는 북한 공작원이 아닌 남한의 소설가 전준우였고 전준우가 태민에게 건넌 유에비 속에는 전준우가 집필 중인 소설이 들어있었는데, 소설의 내용이 중국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태민은 망설이다. 전준우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의 죽음을 밝히는 과정에서 전준우가 남긴 소설을 읽다가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고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글자전쟁의 한 가운데로 말려들어 가게 되는데...
소설은 고구려시대와 현대를 오가며, 대단히 숨가쁘게 전개된다. “큰 활을 진 아이와 풍장(風葬)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나무 위에 걸쳐 두거나 바위에 눕혀두었다. 이를 풍장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땅에 묻어 썩히는 것 보다는 더 온전하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풍장(風葬)이 소년이 활을 들고 나간 사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시체를 내다버리긴 하지만 어제까지도 같이 지내던 가족이라 활을 들고 나가 부모의 시체를 지킨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129면)
활을 들고 나간 아이는 짐승이 행여나 부모의 시체를 훼손하는 게 가슴 아파 활을 들고 나가 지켰던 것인데. 여기에서 ‘조문하다’란 뜻의 ‘弔’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吊’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이 글자는 풍장과 관계가 있는 ‘弔’와 달리 매장과 관련이 있는 글자이다. 이처럼 <글자전쟁> 속에는 吊와 弔를 둘러싼 글자전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풍장과 매장 문화의 대립과 원시 부족과 문명의 충돌이 함께 있었다.
글자, 한자는 어떻게, 어떤 원리로 만들어진 것인가? 소설 속에서 고구려의 국상인 을파소는 없어진 글자의 찾아내기 위해 편장에게 글자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다. 그러자 편안은 을파소의 말에 깜짝 놀라며, ‘사람이 어찌 글자를 만들어내겠습니까? 글자란 수천 년, 수만 년 세월을 두고 흘러온 것인데 어떻게 모르는 글자를 단번에 만들어내겠습니까?’라고 반문하니, 을파소는 ‘글자가 만들어지는 원리는 그렇게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라고 하며, 편장과 함께 없어진 글자를 복원하게 되는데...
무기중개상 태민은 500억이라는 무기거래 후 발생하게 될 엄청난 커미션을 포기하고 글자전쟁의 비밀을 간직한 채 죽어간 소설가 전준우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중국 학자들과의 글자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손에 넣자마자 이틀에 걸쳐 정독을 했고, 완독을 했다. 먹고 자고 싸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직 글자전쟁을 읽고, 생각하는데 시간을 다 보냈다. 실로 오랜만에 정신을 집중하여 읽을 수 있는 정말 대단히 흥미롭고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중언부언 하지만, 글자전쟁, 이 작품은 매우 훌륭한 작품이었다. 제목만큼이나 정말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새삼 김진명이란 작가의 명성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글자전쟁>을 읽고 났더니, <삼국지>를 읽기 전에 먼저 읽어보라는 <고구려>란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들었다. 조만간에 이 책을 탐독해 보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글자전쟁>을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두 작품 사이에는 뭔가 미묘한 연계성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글자전쟁> 이 작품은 시간이 허락된다면, 원고지에 또박또박 정자체로 정성껏 한번 옮겨 적어보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겨울 긴긴 밤 글자전쟁과 고구려 시리즈로 밤을 지새보는 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