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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 정명공주와 광해군의 정치 기술
박찬영 지음 / 리베르 / 2015년 4월
평점 :
광해군, 인조 VS 정명공주
광해군은 어떤 왕이었을까? 단순히 무도한 폭군이었을까? 기존에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광해군은 친형과 이복동생을 죽이고 대비인 어머니를 폐서인 한 무도한 폭군으로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광해군는 연산군과 더불어 “조(태조, 세조, 정조)”나 “종(세종, 성종)”이 아닌 “군”으로 불리운 임금이었다. 그런데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광해군에 대해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광해군은 연산군과는 달리 폭군도, 암군도, 혼군도 아니었다. 그는 어지러운 시대,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와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와 같은 난세에서 조선을 반석에 세울 수 있었던 탁월한 외교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임금이었다고 한다. 몇 해 전에는 이병헌, 한효주가 열연했던 영화 광해에서 광해군의 이러한 이미지를 어느 정도 보여주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광해군은 온전하게 그 임금의 지위를 다 누리지 못하고 반정파에 의해 폭정을 일삼은 폐륜 군주로 낙인이 찍혀 임금의 지위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이 책은 광해군 시대에 비참한 삶을 살았던, 선조의 정실에게서 태어난 정명 공주와 광해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명공주의 시선으로 본 광해, 16세기 조선이라고 할 수 있다.
1592년 4월 13일 16만 8,000여 왜군이 조선으로 물밀들이 밀려왔다. 4월 29일 믿고 있던 신립의 패전 소식이 도성에 전해지자, 조정은 공포에 휩싸였다. 왜군은 북진을 계속했고, 선조는 더 이상 도성에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된 다음 날 새벽, 선조를 따라 경복궁을 나서 북으로 북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광해군은 원래 왕이 될 수 없었던 왕자였다. 그러나 왕이 되도록 정해진 사람이 또한 광해군이었다(81면). 임진왜란이라는 7년 전쟁이 그에게 세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세자에 책봉되어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를 이끌며 국난을 극복하는데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전란이 평정될 즘 부왕 선조는 정비인 인목대비에게서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생산한다. 이에 광해군은 세자 자리에서 위기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부왕인 선조가 오래 살아서 영창이 보위를 이어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장성하게 되면, 현재 자신의 세자 자리가 위태로울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자신은 폐세자가 되고 영창이 세자가 되어 보위를 이어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광해군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부왕이 선조가 빨리 죽어야만 했다. 그런데 실제로 선조는 죽었다.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조선의 군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조가 죽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아직 적장자인 영창을 생산한 대비가 남아 있었다. 왕이 갑작스럽게 죽을 경우, 비록 세자가 책봉되어 있어도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로부터 왕을 인정한다는 교지를 받아야만 비로소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인목대비는 영창의 생모로 아들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갈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왕위를 자신의 친자인 3살짜리 영창에게 전하느냐? 아니면 장성한 세자 광해군에게 전하느냐?
아무리 대비라도 선왕이 정한 장성한 세자를, 그것도 임진왜란이라는 어마어마한 전란을 극복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세자를 쉽게 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광해군을 따르는 세력들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영창에게 보위를 넘기려면, 세자 광해와 대결을 벌어야 했다. 이기면 살아남지만, 지면, 죽음이었다. 결국 인목대비는 자신의 어린 친자식들을 목숨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광해군에게 왕권을 넘겨준다. 광해군은 그렇게 왕이 되었다. 하지만, 권력이란 그 누구하고도 나눌 수가 없는 것. 영창이 성장하면서 덩달아 광해군은 불안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다음 보위는 마땅히 자신의 아들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세상의 시선은 그렇지가 않았다. 자신이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는 원래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다. 마땅히 영창대군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순리대로라면, 영창이 성장할 때까지만 자신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영창이 정사를 돌 볼 나이가 되면, 마땅히 주공이 그랬던 것처럼 왕의 자리를 원래 주인인 어린 동생에게 돌려 줘야했다.
하지만 이미 권력의 단맛을 본 광해군에게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왕좌를 탐하는 이는 누구라도 역적이었고 죽여야만 했다. 이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어떠했던가? 아무리 원래의 주인이라도 이대로 넘겨 주기엔 너무 억울했을 것이고 아까웠을 것이다. 자신의 피를 이은 자손들만이 대대손손, 자자손손 이 자리에 올라야 했고 또한 오르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광해군은 영창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영창은 살려두면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다음 대가 문제였다.
영창대군, 선조의 정실에게서 난 적장자인 그가 죽은 이유, 죽어야 했던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었다. 왕자라서, 그것도 정실 부인에게서 난 적장자라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선조가 급작스럽게 병사하지 않고 영조 만큼만 살았더라도, 그는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광해 일파는 영창대군이 탄생하자마자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고 어떻게든 처지하려 했다. 이들은 영창대군이 자라는 것을 보고 큰 변을 일으켜 단숨에 없애 버리기 위해 날마다 모의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영창대군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저 모든 일에 꼬투리를 잡아 시비하고 박대했다. 계축일기의 기록이다.
영창대군은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결국 권력 투쟁 속에서 죽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적은 따로 있었다. 광해군 스스로도 선조의 5번째 아들인 정원군의 장자였던 능양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광해군은 그렇게 보위에 있은 지 15년 남짓 만에 자신의 이복동생의 아들인 조카 능양군의 반정에 의해 폐위 되고 말았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들 영창을 죽인 광해가 집권하는 동안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는 서궁에 유폐되어 죽은 사람처럼 숨죽여 살았다. 인조의 반정 명분이 바로 인목대비였다. 광해군과 정명의 대결은 다시 인조와 정명의 또다른 대결로 이어진다. 읽을거리와 볼거리가 풍성한 책이다. 다만 지도나 사진을 좀 크게 실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