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건 페미니스트인 Y에게

장춘익

페미니스트를 보면 짜증 난다는 사람이 많지. 문제는 남자만 그런게 아니라 여자들도 그렇다는 것이 아마 상당히 당혹스러울 거야.
페미니스트는 일종의 적대국의 국민인 것 같아. 어떤 사람이 적대국의 국민으로 분류되면 상대는 그에게서 그 사람의 개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속성만 확인하면 되지. 그런 사람의 경우엔 이름을 부르지 않아. 집합명사로 표시하고 ‘그런 부류의 또 하나‘로 취급하면 되지. 굳이 이름을 부를 때는 대개 확인 사살이 필요할 때뿐이야. 보통은 성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여자를 보면, ‘또 하나의악악거리는, 짜증 나는 페미니스트로군‘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안타깝지만, 의외일 수는 없어. 장구하게

유지되어 온 권력과 문화에 도전하는데 어찌 개인의 이름이 불리기를 바랄 수 있겠어? 또 창검을 빼 들고 무시무시하게 달려들기보다는 작은 칼로 여기저기를 들쑤시는데, 짜증 나지 않겠어? 그리고 오래 가는 항의는 아무튼 짜증 나는 거야. 내가 잘 돌보고 싶은 아이도 자꾸 울면 짜증 나는데(의학상의 이상증세로 끊임없이 우는 아이를 평소 아이들에 애정이 많은 여성에게 폐쇄된 공간에서 돌보도록 하니까, 3일 정도 지나서 살해 충동을 느끼더라는 결과를 낸 실험도 있었지), 별로 동의해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자꾸 하면 정말 짜증이 안 나겠어?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런 반응에 대해 존중심을 가지라는 것은물론 아니야. 사람들의 짜증 내는 반응을 자꾸 접하면,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과도 자주 다투게 되면,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초라하게느껴질 수 있을 텐데, 그때 어쩌겠느냐는 이야기를 하자는 거야.
반복되는 항의가 사람을 초라하게 느끼도록 만든다는 것은 분명한것 같아. 항의는 내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같은 항의가 오래 반복된다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결핍의 상태에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항의 기간이 길어지면 저쪽은 짜증 나고 이쪽은 초라하고 비참한 거야.
이런 느낌은 인지상정이야. 인지상정이라고 하지만, 일단 그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너무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기 때문에, 어떤 대비를 해야 돼. 설마 네가 "불만은 나의 힘"
이라면서, 대립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역시 역사적소명의식이 너를 뒷받침하는 가장 큰 힘이겠지. 그러나 나는 그 이

야기는 접어두고 싶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좀 더 개인적인 문제야. 감히 조언자 역할을 해도 된다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네가 세상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새로운것을 흡수하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다는 것이야. 뿌리에서 흡수하는것보다 많은 수분을 방출하는 식물은 고사한다. 대기의 온도가 높을수록 더 많은 수분을 빨아들여야 하지. 항의할 줄 알아야 하지만,
나중에 자신이 쿨 것도 있어야 한다. 세상에 애정과 호기심을 가지고, 네 지식과 정서의 저장고를 듬뿍 채워두어라. 페미니즘이네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 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것이야. 페미니즘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너의 기쁨을 찾는다고 해서 항의의 진실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란다. 오히려 너의 기쁨과 생동성만큼 너의 주장에 전반적인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것도 없단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내놓거나 혹은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에 다른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도록 해라. 그렇게 하려면 너에게 어떤 즐거움이 있어야 한단다. 종교 수행자가 괴로운 표정만 짓고 있으면 사람들이 호기심을가질 수 있겠니? 다 버리고도 잔잔한 미소를 짓는 그런 ‘다름‘에 비로소 사람들이 압도되는 것이지. 페미니스트면서 나름대로 멋지고행복하게 살아라.

P.S. 내가 이 글을 쓸 때가 한여름이다. 네가 해충박멸에 너무 진을빼지 말고 익종보호에 더 힘쓰기를 바란다. 그게 더 현명한 농법이다. 아, 내 이름의 ‘익‘ 자는 다른 ‘익‘ 자이니 나를 보호할 필요는없단다. 
그리고 너를 어쨌건 페미니스트‘라고 부른 것은 네가 페미니스트라는 명칭을 반쯤 불편한 심정으로, 그러나 피하지는 않겠다는 심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였다.


장춘익 교수는 2000년대 초반 개인 홈페이지 ‘날개통신‘을 운영했다. 학생들과의 다양한 대회를 위해 운명된 이 개인 홈페이지에 그는 종종 에세이를 연재했고, 많은 학생 독자들이 그 에세이를 읽었다. 이 글은 2003년 게재되어, 당시 여러 한림대 동아리와 커뮤니티에 공유되었다.

평등에 대한 논쟁은 (・・・) 그동안 페미니스트 저작들에서 평등-차이논쟁으로 언급되어 왔으며 (...) 해결하기가 더욱 어렵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 여성들이 남성과 똑같아지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 아니면 남성들과 차이가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다. ()

만일 여성들이 남성과 평등하다고 주장한다면, 여성들은 어떤 남성과 평등하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 평등을 주장해야 하는가? 여성들은 기호의 평등을 주장해야 하는가? 
그리고 만일 여성들이 차이를 인정하고자 한다면, 그러면 이런 차이들은 자연적, 생물학적인 차이인가, 아니면 특별한 사회적, 경제적 조건의 결과의 차이인가? 이러한 것들은 평등- 차이 논쟁이 불러일으키는 많은 문제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그리고 이런 논쟁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완전한 사회적, 정치적 시민권에서 여성을 배제하는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왔다는 사실이다. (...)

 그렇다면 성차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페미니스트들은 역사적으로 남녀 간의 자연적 차이가 가정되어 온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이러한 차이가 상이한 사회와 문명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방식을 분석해왔다. (...)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섹스의 사회적 구성을강조할 필요성 때문에 젠더라는 용어를 거부해 왔다. (...) 예를 들어,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s)는 섹스는 사회적 구성물들일 뿐이며 남성들과 여성들을 분리하는 것은 자연 또는 인간 생물학에 어떠한 근거도 두고 있지 않은 사회적 권력관계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

장한다. (제인 프리드먼, 「페미니즘 29~46쪽)보통 불리한 처지는 차이를 통해 정당화되었다.
차이에 차별을 연결 짓는다.
전략차이는 없다. 혹은 별로 없다 - 최소주의차이는 있다. 심지어 장점이다. 최대주의차이는 있더라도 중요하지 않다.
차이는 정말 있는가?
차이의 성격은 무엇인가?
차이는 자연적 차이(생물학적 차이) 인가, 사회문화적 차이인가?
Sex: male - femaleGender: masculine - feminineGender 개념의 유래, 장점- 남성성/여성성이 사회, 문화적 구성물이라면 달리 될 수도 있다.
Sex/Gender의 이분법의 약점Sex를 생물학적인 것으로 고정, 섹스도 젠더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Sex란 사실 (a,b,c,d, x) (a,b,c,d,...y) 인데 특정한 요소를 집어내어 그것이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장춘익 메모, 2011.03.10)프리드먼은 평등과 차이를 둘러싼 복잡한 페미니즘 이론적 논쟁의맥락을 부각하고자 한다. 그에 반해 장춘익의 교안은 문제적 경험,
즉 생물학적 성차에 사회문화적 차별을 결부시키고 차별을 자연적으로 조건화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억압적데올로기 효과가 나타난다는 문제적 경험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문제적 상황을 해소할 페미니스트의 전략을 두 가지로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등과 차이를 여성(주의)의 본질적 실존 조건으로 해석해내기보다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재생산되는 성차별을 해소하는 전략의 문제, 즉 페미니즘이 가부장사회의 여성차별에 맞서고 그 위계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두 가지 대응 방식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이론을 인식된 ‘문제‘ 경험과 그것을 해소할 ‘답‘으로재구성하는 이런 방식은, 이론적 지식을 전달해야 할 완결된 정보가아니라 그 지식을 탄생시킨 원래의 경험적 문제 상황에 대해 묻고 답을 찾는 사유의 과정으로 되돌리는, 실천적 맥락으로의 재의미화라고 할 수 있다. 문제적 경험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실천적 맥락으로의 사유의 재의미화‘는 사실 좁은 의미의 덱스트 해석뿐 아니라 젠더화된 세계의 현실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젠더 문해력 (gender literacy)‘
의 획득에 필수적이다. 사회문화적 젠더 상징기제들은 개인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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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여겨왔기에 별로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의 형님이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이 된 지 5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어 죽은 줄만 알고 지냈더니 재작년 북한에 살아있다고 이산가족 생사의뢰서를 보내왔었다. 그러나하루속히 만날 줄 알았던 이산가족 상봉은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형님이 사시는 북한을 방문해서 무슨소식이나 들을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가보고 싶어 이 행사에 참여한다.
6월 28일장맛비가 내리는 날 김포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인줄 알고 탑승하니 북한의고려항공이다. 탑승하자마자 기내에서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기분이 어쩐지 이상하고 바짝 긴장이 된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평양공항에 착륙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1시간이다. 지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막혀있었던그동안 마음의 거리는 너무 멀고도 멀었다. 내가 이렇게 쉽고 빠르게 건너가볼 수 있으리라고는 이전까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평양공항에 대한첫 느낌은 과연 이곳이 북한의 수도인 국제공항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적막했다. 비행기도 몇 대뿐이고, 그 날 손님은우리밖에 없는 모양이다.
긴장했던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입국 절차를 마치고 마중 나온 버스에 분승하여 숙소인 양각도호텔로 향했다. 양각도호텔은 1995년 완공된 47층의 객실 1001 실의 특급호텔이다. 양각도는 대동강에 있는 섬으로, 섬의 모양이 양의 뿔처럼 생겼다고 양각도라고 불린다고 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평양

외곽은 모내기가 끝난 농촌의 풍경이었다. 저 멀리 삼삼오오 논에서 일하는사람들과, 도로에는 가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보따리 짐을 매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내에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찾았던 것은 바로 매대다. 우리 식으로 하면 정부의 허가를 받고 영업을 하는 노점상이라고할 수 있다. 매대에서는 음료수와 간단한 간식을 팔고 있는 듯했다. 평양의거리 풍경은 차량 통행이 적고, 신호등이 없으며 자전거를 많이 타고 간혹 오토바이도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교통수단은 지하철 궤도전차무궤도전차 시내버스 택시인데 택시는 눈에 띄지 않는다.
평양에 제일 먼저 내린 곳이 만수대다. 만수대는 김일성 동상이 있는 곳이다.
뭐 평양에 방문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주석님(?)께 인사하는 것인가? 북측사람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바로 김일성 동상 참배란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가 3쌍이나 주석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
양각도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다. 김포에서 시둘러 나오느라 아침식사를 대충 했더니 늦은 점심이라 몹시 배가 고프다. 그런데 밥공기에 밥이 너무적어서 배가 안 찬다. 북한에서의 첫 식사라서 아마도 북한주민들이 굶느라고 이렇게 적게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 달라 소리도 못하고 있는데 접대원이 와서 빈 공기를 보고 밥 더 드릴까요? 한다. 미안해서 반공기만 더 주셔요 했더니 큰 그릇에 한 그릇들고 온다.
공식 일정대로 만경대고향집을 향했다. 김일성주석 생가를 보존한 것으로평양 방문에서 북이 꼭 보여 주는 곳이다. 호텔에 오기 전에 김일성 동상 앞에서 안내자는 설명을 하면서 계속 ‘위대한 수령님‘을 말끝마다 붙인다. 평

양시내의 큰 건물에는 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형 사진이나 붉은현수막이나 플래카드가 수없이 많다. 만경대고향집에서 해설하는 사람들은또 얼마나 위대한 수령님을 찾을까! 나는 우리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고 북한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이해할 것 같다. 만경대는 김일성 주석의 생가이며 정치가 베어나 만경대에 오르면 일만 가지 경치를 본다고 만경대라고한다.
평양 시내는 상당히 깨끗해 보였다. 도시 모습도 계획도시답게 잘 정돈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길거리의 사람들 모습도 패 활기차 보였다. 버스에서손을 흔들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든다. 엄마의 손을 잡고걸어가던 한 아이는 내가 탄 버스를 보고 손을 흔들면서 웃는다. 차에서 내리저 평양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렇게 만경대고향집을 둘러보고 우리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으로 향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평양 어린이들의 공연을 보이주는 곳이다. 그곳에서 예체능에 재능 있는 어린 학생들을 집중식으로 교육시키는 곳이다. 건물 모양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품에 안는 형상으로 만들이겼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 앞에 있는 말은 힘차게 달려오는 어린이들링상화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방과 후 체육 과학 예술 등 다양한 기능을 익히고 숙달된 학생들은 공연장에서 발표를 한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열심히습하는 연습실을 견학했다. 정말 아이들이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의 관람에 익숙해서인지 반 친구들은 우리의 방문에 개의치 않고 자기일에만 열중한다. 사진을 찍든지 말든지, 뭔 말을 하든지 말든지 질문을 하던단답형으로 대답만 할 뿐이다. 고사리 손으로 바둑을 두는 모습이 귀엽다.

2015년 5월 창원에서 만난 문형배 판사.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도, 문학도, 역사도, 사회도, 심리도, 예술도 다 들어 있다. 채현국 선생의 인터뷰를 보니 남은인생을 어떻게 살까 생각이 많아진다.
이런 왕성한 책읽기를 눈여겨 보던진주문고 여태훈 사장이 2019년 3월7일 그를 초청해 ‘문학 속 재판‘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당시 문형배 부산고법 수석부장판사는자신이 책을 많이 읽는 이유에 대해 "무지, 무경험, 무소신 등 3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판사로 살아온 그의 궤적이 그냥머리 좋고 공부 잘한 여느 판사와 달랐던 것은 이처럼 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채우려 노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앞서 김장하선생이 "내가 배운 게 없으니 책이라도 읽을 수밖에"라고 대답한 것과 상통한다.
그동안 언론은 그가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했다는 이유로 ‘진보성향의 판사‘라고 많이 보도했지만, 내가 볼 때 그는 진보·보수를 떠나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김장하 선생의 삶이 그러했듯이 편향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에겐 상식과 합리마저 진보좌파로 보였던 것이다.
그가 2011년 2월 창원지법 진주지원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하동 출신으로 진주 대아고등학교를 나온 그가 진주를 비롯한 서부

♡♡♡참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문형배 판사의 눈물로 시작된 행사는 모든 사람의 행복한 웃음으로마무리됐다.
문재판관은 경남권에서 오랫동안 판사로 재직했고, 나도 기자로서 그를 주목한 기간이 길었다. 앞에서도 잠시 등장했던 그 김훤주기자가 법원 출입을 할 때 그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썼고, 나에게도 많은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형배에 대한 이야기를 좀 길게쓰는 걸 양해해주길 바란다. 그만큼 오래 봐 왔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그의 이력을 나열하려는 건 아니다. 그가 살아온 이력과 주요 판결은 이미 위키백과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그걸 참고하면 된다.
내가 보기에 문 재판관은 태도나 말투, 자세 등에서 느껴지는 풍모가 김장하 선생과 많이 닮았다. 늘 책을 가까이하고 자신의 부족함을채우려 하는 모습도 같다. 다만 그는 선생과 달리 읽은 책에 대한 짧은 독후감을 블로그(https://favor15.tistory.com)에 올리는데, 2006년부터 지금까지 쓴 독후감이 1330여 편에 이른다. 헌법재판관이 된 후에도매월 4~5권의 책을 읽고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 2015년 5월 그를만나 저녁식사를 한 후 『풍운아 채현국』을 선물했는데, 며칠 후 이 책독후감도 올라왔다. 그의 독후감은 개괄발췌 -소감으로 구성되는데,
다음은 마지막 소감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자서전, 전기를 좋아한다. 그 속에 모든 장르가 다 들어 있다고

스른 그가 말을 이었다.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이 있다면... (다시 청중 박수 있다면, 그 말씀을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 강동욱 경남문화예술회관 관장이 나왔다. "선생님은 진주오광대 복원과 진주탈춤한마당, 진주민예총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셨고, 극단현장에도전세금 3000만 원을 선뜻 내주셔서 지금의 현상아트홀이 있게 됐습니다."
문판사와 강관장이 말한 ‘선생님‘은 김장하(75)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진주 남성당한약방 대표 한약업사이기도 하다.
16일 오후 7시 경남과학기술대 백주년기념관 아트홀에는 김장하 이사장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거나 평소 그를 흠모해오던 사람들 120여 명이알음알음으로 모였다. 사전에 전혀 공개되지 않은 모임이었다. 이날은 김장하이사장의 생일이었다.
행사를 준비해온 홍창신 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되돌아보면 우리는 한 번도 그분에게 제대로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다. 더 늦기 전에 그이와따뜻한 시간을 갖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 이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워낙 그 어른이 낯을 드러내거나 공치사를 싫어하시는 분이라 미리 알게 되면 못하게 할 게 뻔해서 비밀리에 자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날 참석자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은밀히연락을 받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 시각 김장하 이사장은 전혀 이 행사를 모른 채 가족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식사 후 사전에 주최측과 말을 맞춘 아들이 "좋은 공연이 있다"며 행사장

으로 아버지를 이끌었다.
오후 8시 20분 김 이사장이 가족과 함께 행사장에 들어서자 큰 박수가 쏟아졌다. 무대 앞 벽에는 ‘김장하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적힌 펼침막이 내리왔다. 이어 생일축하 케이크가 나왔고, 참석자들은 국가를 합창했다.
영상으로 ‘선생님이 살아온 길‘을 관람한 참석자들은 노래패 맥박과 큰들의축하공연과 전지원 양의 판소리 등을 함께 즐겼다.
이어 사회자인 윤성효 오마이뉴스 기자가 김 이사장에게 인사말을 청했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선생님, 고맙습니다"며 허리 숙여인사했다. 무대 옆쪽에 있던 사람들은 큰절을 올렸다.
"아직도 얼떨떨하다"고 말문을 연 김 이사장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아직도 부끄러운 게 많다"며 "앞으로남은 세월은 정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놀이패 큰들과 함께 노래 <만남>을 합창하면서 행사를 마무리했다. 큰들 단원들은 노래가 진행되는 동안 스케치북에 쓴 여러 카드를 대목마다 펼쳐 보였다.
"선생님이 걸어오신 그 길, 저희도 따라 걷겠습니다."
"돈은 모아두면 똥이 된다."
"똥이 거름 되어 꽃이 피었습니다."
"여기 진주에 꽃이 피었습니다."
"진주사람 웃음꽃이 피었어요."
"선생님이 계셔 든든합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십시오."

경남의 재판을 관할하는 사법기관장으로 돌아왔으니 금의환향還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부임 후 김장하 선생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도 블로그에 올렸는데, 삶을 바꾼 만남』(정민지음, 문학동네)이라는 책 독후감 마지막 소감 부분에 이렇게 썼다.
나에게도 이런 스승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김장하 선생을 만난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선생의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다. 그분은 나에게 대학교까지장학금을 주셨지만 내가 받은 것은 가르침이었다. (・・・중략...) 진주지원장으로 부임했으니 식사 한번 대접하겠다고 하여도 공직자와 식사하는 게 불편하다며 거절하는 분. 내 삶이 헛되지 않다면 그 이유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즉 김장하 선생은 비록 자신의 장학생이더라도 직접 해당 지역사법권을 관할하는 자리에 있는 동안 사적 만남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문형배 재판관은 결국 진주지원장 임무를 마치고 진주를 떠날 때에야 겨우 밥 한 그릇을 대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선순환이 되면 공동체가 아름다워진다‘라는 블로그 글 아래에추기로 올라와 있다.
2012년 2월 인사발령이 나서 진주를 떠나기 전 식사 한 번 대접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님은 또 거절하였습니다. 언제 다시 뵙겠느냐고 식사 한白居

◆헌법재판소재판관후보자 문형배(...전략) 저는 1965년 경남 하동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태어났습니다. 낡은 교복과 교과서일망정 물려받을 친척이 있어 중학교를졸업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있었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업사로서 번 돈으로 명신고등학교를 건립하여 경상남도에 기증하였고 수백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진주오광대복원사업, 경상대학교 남명관 건립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하여 불합리한 차별을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갚아라‘고 하신 신생의 말씀을 서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법관의 길을 걸어온 지난 27년 동안 저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한민국헌법의 숭고한 의지가 우리 사회에서 올바로 관철되는 길을 찾는 데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선생의 가르침대로 제가 우리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길이라 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제가 헌법재판관에 임명되더라도 지금까지 간직해 온 저의 조심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것이기에, 널리 해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우리 명신과 인연을 맺은 모든 분들의 앞날에 더 많은 성공과 결실이 있기를 기원드리면서 이만 떠나는 인사말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1991년 8월 17일학교법인 남성학숙 이사장 김장하

퇴임 인사말 중 우선 그가 학교를 설립한 이유와 헌납의 이유는 이문장에 압축돼 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 사업이 되었던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전후로 해서 본 명신고등학교는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

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말이다. 그 다음에 보다 현실적인 국가 기증이유가 나오는데, 개인의 능력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제가 계속 이학교를 움켜쥐고, 지원을 나름대로 해 나간다 하더라도 저의 생전이나 또는 사후에 저와 또는 저를 둘러싼 제반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말이다.
즉,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어 왔지만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법.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거나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 여태전 (1961~) 전 상주중학교 교장이 2022년 2월 4일김장하 선생에게 세배를 드리고 난 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있다.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가 "명신고 이사장으로 계속 계시면서 훌륭한 선생님들 든든한 윤이 되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어찌 그리 쉽게 공립으로 전환해버렸습니까?"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그때만 해도 한약방으로 돈도 많이 벌어 학교에 큰 도움이되었을지 몰라도, 나중에 나이들이 그럴 형편이 못되면 괜히 사사로운 욕심이 생길까 두려웠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못난 사학 이사장이 되어 선생님들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려 들 거고, 그렇게 되면 처음 내가 학교를 세우려고 했던 첫마음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던 거요. 교육이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사업을 하려면다른 일로 해야지, 학교를 갖고 사업하는 마음으로 하면 큰일 나는니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그냥 국가가 맡아 달라고 내어놓은 겁니다.*

해둔게 있었다. 길지만 기록차원에서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글은 북한에 대해 객관적이면서도 때로는 비판적으로, 또는 동포에대한 애정어린 시선으로 4박 5일간 보고 들은 것들을 담담히 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 잘 쓴 글이다.

김장하의 북한 방문기

나의 북한 방문은 어렵사리 이루어졌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성사되지 않다가 이번에는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에서 평양 참관 행사에 참여하였다.
나는 6.25전쟁을 겪은 세대이고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평소 북한은 전정을 좋아하는 무서운 나라라는 인식이 들어 우리겨레이면서도 무서운 존재

로 여겨왔기에 별로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의 형님이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이 된 지 5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어 죽은 줄만 알고 지냈더니 재작년 북한에 살아있다고 이산가족 생사의뢰서를 보내왔었다. 그러나하루속히 만날 줄 알았던 이산가족 상봉은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형님이 사시는 북한을 방문해서 무슨소식이나 들을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가보고 싶어 이 행사에 참여한다.
6월 28일장맛비가 내리는 날 김포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인줄 알고 탑승하니 북한의고려항공이다. 탑승하자마자 기내에서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기분이 어쩐지 이상하고 바짝 긴장이 된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평양공항에 착륙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1시간이다. 지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막혀있었던그동안 마음의 거리는 너무 멀고도 멀었다. 내가 이렇게 쉽고 빠르게 건너가볼 수 있으리라고는 이전까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평양공항에 대한첫 느낌은 과연 이곳이 북한의 수도인 국제공항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적막했다. 비행기도 몇 대뿐이고, 그 날 손님은우리밖에 없는 모양이다.
긴장했던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입국 절차를 마치고 마중 나온 버스에 분승하여 숙소인 양각도호텔로 향했다. 양각도호텔은 1995년 완공된 47층의 객실 1001실의 특급호텔이다. 양각도는 대동강에 있는 섬으로, 섬의 모양이 양의 뿔처럼 생겼다고 양각도라고 불린다고 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평양

외곽은 모내기가 끝난 농촌의 풍경이었다. 저 멀리 삼삼오오 논에서 일하는사람들과, 도로에는 가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보따리 짐을 매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내에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찾았던 것은 바로 매대다. 우리 식으로 하면 정부의 허가를 받고 영업을 하는 노점상이라고할 수 있다. 매대에서는 음료수와 간단한 간식을 팔고 있는 듯했다. 평양의거리 풍경은 차량 통행이 적고, 신호등이 없으며 자전거를 많이 타고 간혹 오토바이도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교통수단은 지하철 궤도전차무궤도전차 시내버스 택시인데 택시는 눈에 띄지 않는다.
평양에 제일 먼저 내린 곳이 만수대다. 만수대는 김일성동상이 있는 곳이다.
뒤 평양에 방문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주석님(?)께 인사하는 것인가? 북측사람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바로 김일성 동상 참배란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가 3쌍이나 주석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
양각도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다. 김포에서 서둘러 나오느라 아침식사를 대충 했더니 늦은 점심이라 몹시 배가 고프다. 그런데 밥공기에 밥이 너무적어서 배가 안 찬다. 북한에서의 첫 식사라서 아마도 북한주민들이 굶느라고 이렇게 적게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 달라 소리도 못하고 있는데 접대원이 와시 빈 공기를 보고 밥 더 드릴까요? 한다. 미안해서 반공기만 더 주셔요 했더니 큰 그릇에 한 그릇 들고 온다.
공식 일정대로 만경대고향집을 향했다. 김일성주석 생가를 보존한 것으로평양 방문에서 북이 꼭 보여 주는 곳이다. 호텔에 오기 전에 김일성 동상 앞에서 안내자는 실명을 하면서 계속 ‘위대한 수령님‘을 말끝마다 붙인다. 평

양시내의 큰 건물에는 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형 사진이나 붉은현수막이나 플래카드가 수없이 많다. 만경대고향집에서 해설하는 사람들은또 얼마나 ‘위대한 수령님을 찾을까! 나는 우리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고 북한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이해할 것 같다. 만경대는 김일성 주석의 생가이며 정치가 빼어나 만경대에 오르면 일만 가지 경치를 본다고 만경대라고한다.
평양 시내는 상당히 깨끗해 보였다. 도시 모습도 계획도시답게 잘 정돈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길거리의 사람들 모습도 돼 활기차 보였다. 버스에서손을 흔들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든다. 엄마의 손을 잡고걸어가던 한 아이는 내가 탄 버스를 보고 손을 흔들면서 웃는다. 차에서 내리저 평양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렇게 만경대고향집을 둘러보고 우리는 반경대학생소년궁전으로 향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평양 어린이들의 공연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곳에서 예체능에 재능 있는 어린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교육시키는 곳이다. 건물 모양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품에 안는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 앞에 있는 말은 힘차게 달려오는 어린이들을상화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방과 후 체육 과학 예술 등 다양한 기능을 익히고 숙달된 학생들은 공연장에서 발표를 한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열심히습하는 연습실을 견학했다. 정말 아이들이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의 관람에 익숙해서인지 예쁜 친구들은 우리의 방문에 개의치 않고 자기일에만 열중한다. 사진을 찍든지 말든지 뭔 말을 하든지 말든지 질문을 하던단답형으로 대답만 할 뿐이다. 고사리 손으로 바둑을 두는 모습이 귀엽다

연습실을 관람한 후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날 그곳에는 총린 학생들도 와 있었다. 그 학생들과 우리 일행으로 공연장은 꽉 들어찼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공연이 시작됐다. 독창 중창 춤 국악 등 그들의 공연에 감탄을 연발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들은 아이들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단지 기술자일뿐 창의력이 풍부한 예술가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북측의 교육이나 남측의 교육이나 창의력을 키워주는 교육은 아니다. 남과 북이 세계 어떤 민족과 국가보다 교육열이 높다 하지만, 교육 내용을 보면 지금남과 북에서는 창의력이 부족한 기술자들만 양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평양방문의 첫날 일정도 끝났다. 다음날 백두산 관람 일정을 기대하면서6월 29일아침 7시에 평양공항을 고려항공으로 출발하여 1시간 만인 8시에 양강도 삼지연 비행장에 도착하여 대기한 버스로 백두산으로 향함. 삼지연은 1500고지의 백두고원(개마고원)으로 광활한 평지에 수목이 울창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밀림지대를 도로를 뚫어 2시간을 달려도 평지인 밀림이다. 해발2000m 이상 오르니 지리산과 한라산을 볼 때와는 딴판으로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산등성이를 보고 놀랐다. 백두산은 해발고도약 2000m가수목한계선이 되어 이보다 높은 지대는 짧은 여름철에 풀만자라는 산악 툰드라 지대에 속해 주빙하 지대이다. 천지 주변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가장 더운 달인 7월에도 눈이 남아 있고, 땅속 0.8~1m 깊이 이하에영구동토층이 있어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
삼지연을 출발한 지 3시간만인 11시에 백두산 향도역에 도착하여 걸어서 상

군봉으로 오르다. 2750m 아~ 백두산!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민족의 영산 그러나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이 보이지 않으니 산이 높은지 낮은지 구분이 안된다. 천지의 속살을 쉽게 내보이지도 않는다.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 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山)·신산(山)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 · 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동백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로 인식했다. 백두산은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 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핵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안개 걷히기를 무려 40분이나 기다려서야 기다린 보람으로 안개가 걷힌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일시에 짝거린다. 이제야천지가 발 아래 파랗게 보이고 주변의 웅장한 바위산이 보이고 시야가 멀리보이면서 백두산의 높이를 대략이나마 가늠해 보기도 한다. 언제 다시 옮기

약도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하산길에 오르다.
내가 알기로는 압록강이나 두만강은 천지에서 풀이 넘쳐흘리 폭포를 이루어강의 기원이 되는 줄 알았더니 산정에서 천지는 500m나 밑에 있어서 물이넘칠 수 없고 천지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거울을 이루고 골짜기로 모이면서압록강이나 두만강의 기원이 된다. 천지에서 물이 흐르는 곳은 만주로 흐르는 송화강을 이루어 흐른다. 예정보다 늦은 오후 7시에 삼지만 비행장을 출발 평양공항에 8시에 도착하다.
6월30일오늘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능을 참관한다. 왕능은 평양에서 25km지점에 있으며 고구려는 동명왕을 수호신으로 여겨 수도를 옮길 때마다 (졸본국내성 평양) 옮겨 왔고 장수왕 때 평양으로 이장을 했다고 한 이북은 강성대국의 표본을 고구려에서 찾으려고 동명왕능을 개척하고 숭앙하고 있다. 일제때 도굴되어 유물은 거의 없으며, 무덤 뒤로 신하들의 무덤도 배총으로 남아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왕능 앞 왼쪽에는 성공사寺)가 있으며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 함.
점심은 저 유명한 옥류관에서 냉면을 맛보았다.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비우접대원 아가씨가 빙그레 웃으며 한 그릇 더 할래요? 해서 한 그릇 더 먹었다. 이름난 냉면이라서 그런지 맛있었다. 한 그릇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유로라고 한다. 우리 논으로 5500원이니 북한 주민이 사 먹기엔 부담스러울 것같다. 옥류관은 내동강 기슭 옥류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며, 3개의 건물로이어져 있으며 좌석 수는 1500석이며 하루에 팔리는 냉면 숫자는 1만 그릇

군봉으로 오르다. 2750m 아~ 백두산!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민족의 영산 그러나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이 보이지 않으니 산이 높은지 낮은지 구분이 안된다. 천지의 속살을 쉽게 내보이지도 않는다.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 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 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인식했다. 백두산은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石)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 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 (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안개 걷히기를 무려 40분이나 기다려야 기다린 보람으로 안개가 걷힌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일시에 째깍거린다. 이제야천지가 발 아래 파랗게 보이고 주변의 웅장한 바위산이 보이고 시야가 멀리보이면서 백두산의 높이를 대략이나마 가늠해 보기도 한다. 언제 다시 옮기

약도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하산길에 오르다.
내가 알기로는 압록강이나 두만강은 천지에서 물이 넘쳐흘러 폭포를 이루어강의 기원이 되는 줄 알았더니 산정에서 천지는 500m나 밑에 있어서 물이넘칠 수 없고 천지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개울을 이루고 골짜기로 모이면서압록강이나 두만강의 기원이 된다. 천지에서 물이 흐르는 곳은 만주로 흐르는 송화강을 이루어 흐른다. 예정보다 늦은 오후 7시에 삼지연 비행장을 출발 평양공항에 8시에 도착하다.
6월 30일오늘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능을 참관한다. 왕능은 평양에서 25km지점에 있으며 고구려는 동명왕을 수호신으로 여겨 수도를 옮길 때마다 (졸본 국내성 평양) 옮겨 왔고 장수왕 때 평양으로 이장을 했다고 함. 이북은 강성대국의 표본을 고구려에서 찾으려고 동명왕능을 개축하고 숭앙하고 있다. 일제때 도굴되어 유물은 거의 없으며, 무덤 뒤로 신하들의 무덤도 배총으로 남아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 왕능 앞 왼쪽에는 정릉사陵寺)가 있으며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 함.
점심은 저 유명한 옥류관에서 냉면을 맛보았다.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비우니 접대원 아가씨가 빙그레 웃으며 한 그릇 더 할래요? 해서 한 그릇 더 먹었다. 이름난 냉면이라서 그런지 맛있었다. 한 그릇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4유로라고 한다. 우리 돈으로 5500원이니 북한 주민이 사 먹기엔 부담스러울 것같다. 옥류관은 대동강 기슭 옥류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며, 3개의 건물로이어져 있으며 좌석 수는 1500석이며 하루에 팔리는 냉면 숫자는 1만 그릇

이라니 어안이 벙벙하다.
오후에는 대동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대동강을 돌아본다. 양각도 능라도를오르내리며 모란봉 을밀대는 먼눈으로 구경하다. 대동강에 설치한 2개의 거대한 분수는 지상 150m 까지 물줄기를 쏘아 올리고, 강에는 보트 놀이하는사람들이 수없이 나와 여유를 즐기며, 낚시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와 한가로운 풍경이다. 일요일도 아닌데...
7월 1일오늘은 평양에서 150km 지점에 있는 묘향산을 관람한다. 묘향산에는 국제친선전람관을 참관하다. 이 전람관은 김 주석과 김 위원장이 외국의 국가원수나 친지들에게서 받은 선물을 한 데 모아 보관 전시하는 곳이다. 산의 지하를 파서 웅장한 대리석 건축물에 약 30만 점에 달하는 국보급 보물들이 보관된 곳으로 전쟁이나 폭격에도 견딜 견고한 전시장이었다. 수많은 전시실을모두 관람하려면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점심은 향산호텔에서 맛있게 먹고오후는 보현사 관람이다.
묘향산의 주봉인 비로봉은 1909m이며 기묘한 봉우리들과 기암절벽 깊은계곡, 기운차게 떨어지는 폭포수, 봄철의 꽃향기와 여름철의 짙은 녹음 가을의 눈부신 단풍 겨울의 설경 거기에 갖가지 새소리까지 어울려 뛰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서산대사께서 전국의 명산을 다 돌아보시고 금강산은 빼어나되 웅장하지 못하고(秀而不壯) 지리산은 웅장하되 빼어나지 못하며而不秀) 묘향산이 금강산의 빼어남과 지리산의 웅장함을 두루 갖췄다(亦秀)라고 하신 명산이라 한번 꼭 와보고 싶은 산이었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상

붕의 등산은 가보지 못하고 보현사를 들러본다. 보현사는 고려 때 창건한 절인데 이북에서 비교적 잘 보존된 사찰이다. 국보도 여러 점 있고 특히 서산대사가 수많은 제자들과 숭병을 이끌고 임진왜란의 국란에 뛰어들어 많은 전공을 세우고 말년에 보현사에서 생을 마치셨다. 제자들이 어찌 불제자로서사람을 죽이는 전쟁에 참여합니까? 라고 묻자 일사다생(一死多生)이면 즉한사람을 죽이고 여러 사람을 살린다면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승병을 모으셨단다.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오고가는 청천강은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답다. 자연환경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 그 옛날 살수에서 수나라 군사를 무찌르던 을지문덕장군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듯. 그러나 낚시하는 주민들의 한가로움이 풍경화를 보는 듯 어울린다.
저녁에는 북측의 민화협에서 환송연회를 베풀다. 연회 후에는 내일은 헤어진다며 평양 체류 중에 3호차에 타고 며칠을 같이 여행하였다고 단합대회를 하자고 한다. 47층 회전식 스카이라운지에서 모였다. 각자 소개를 하는 자리에서내 차례에 진주에서 왔으며, 형님이 북한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이라고 말하고평양에 살고 있을 것 같은데 아무 소식도 못 듣고 돌아가게 되어 마음이 무겁다고 말하자, 모두 안타까워하면서 분단의 아픔을 위로하면서 같이 동행했던김원중 가수는 즉석에서 노래를 2곡이나 불러 이별의 아픔을 달래준다.
이번 북한 방문은 그동안 궁금했던 북한의 실상을 접하기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농촌의 실상을 볼 기회가 없었고, 평양 주민들과의 접촉은 거의 불가능이었다. 그들이 보여 주는 것 외에는 볼 수가 없다. 만나는 상대는 안내원, 접대원 해설강사 그리고 호텔 종업원 정도이다. 그래서 북한 방문기를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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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열쇠말로 여는 문학 이야기 2 - 역사 세 가지 열쇠말로 여는 문학 이야기 2
전국국어교사모임 지음, 강양희 외 엮음 / 해냄에듀(단행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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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작가와, 작가가 살아가는 사회와 역사를 떠날 수 없다.
그래서 ‘역사‘편 열쇠말로
각 작품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고 작품과 독자를 성큼 키워주는
즐거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틀의 독서,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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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연결되고 만 것, 내가 ‘갸(덕용이 삼촌)‘가 되어 버린 것,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내가 ‘가‘가 될 수밖에 없던 사정에 대해 이해하게 됩니다.
할머니에게 있어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할머니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외면한 ‘갸(덕용이 삼촌)‘였다고 말이죠. 이제는 사라져 버린‘가를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계속 반복했다고요.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저는 위로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는 다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우위에 있고 가치 있는 행위라고 봅니다. 우리의 전통 중에도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을 위로하는 ‘씻김굿‘이 수백 년을 이어 오고 있는 게 그 증거가 아닐까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위로가 필요합니다.
국가나 종교의 존재 이유 중 가장 큰 것도, 어쩌면 이러한 위로가 아닐까요? 그것은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로 발전해 가기 위해 반드시거쳐야 할 과정인 거죠. 만약 현실에서 할 수 없다면 초현실 세계에서라도, 아니면 ‘식스센스‘ 같은 초현실적인 방법으로라도요.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 한을 푸는 ‘해원‘ 의식이여러 문학 작품 속에 녹아 있는 게 우연만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이작품이 추구하는 ‘해원‘이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 소설, 윤흥길의「장마」가 그렇습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미신이라 할 수 있는 외

나의 행동 덕분에 ‘나‘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촌의 한과, 아들을 향한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슴 속에 묻어 둔 채 지옥을 살던 할머니의 상처까지도 다 씻겨 나가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해원‘인 것이고,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에서 할머니가 천길 가슴속에 꾹꾹 눌러둔 말을꺼낸 것도, 이러한 ‘해원‘의 일종일 거라 봅니다. 그것이 할머니의 묵은 상처를 어루만졌고, 더 나아가 끔찍하게 삶을 마감한 덕용이 삼촌의 영혼을 위로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반백 년 만에 이루어진 위로인셈이죠. 그 위로 덕분에 ‘나‘도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란 말을 할수 있게 된게 아닐까요? 역사의 상처와 질곡을 헤치며 살아온 전 세대에게 다음 세대가 건네는 위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21세기인 지금 시대에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해,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수많은 삶에 대해,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을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혹은 살아가게 될 사람들에 대해, 이 작품이 공감의 다리가 되길 빌어 봅니다. 그렇게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세상엔 좀 더 온기가 많아질 것입니다.

문학 작품의 바다에서
‘세 가지 열쇠말‘이라는 내비게이션으로창조적인 해석의 물고기를 낚아 봅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기왕 시간들여 애써 읽었다면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고 싶었던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 좋겠지요.
소설을 읽고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이 길어지면 흥미도 떨어지고 주인과손님이 뒤바뀐 듯 느껴져 당혹스럽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청소년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함께 쓴 『세 가지 열쇠말로 여는 문학 이야기』는 확실히 다릅니다. 누구나 즐겨 읽었거나 읽어 볼 만한 소설을 추려내어 그 작품을 해설했습니다.
작품을 해설하는 요령도 간단하면서도 핵심을 정확히 건드렸는데, 한 작품을 세가지 열쇠말로 분석하고 해설했지요. 예를 들면 만세전은 식민지, 무덤, 허무주의라는 열쇠말로, 「조동관 약은똥깐, 실시간 검색어, 풍자라는 열쇠말로 작품을 풀어냈습니다.
처음 가는 길은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찾아가면 훨씬 수월하게 목적지에이를 수 있는 법입니다. 작품의 주제와 상징을 잘 찾아내지 못한다면 세 가지 열쇠말로 여는 문학 이야기를 길잡이로 삼아 보길 바랍니다. 물론, 이 세가지 열쇠말이작품의 숨은 뜻을 다 밝히는 만능열쇠는 아니겠지요.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열쇠말을 스스로 떠올리고 이를 그물 삼아 작품이라는 바다에 던지면 작품의 주제와 상징, 그리고 구성 방식이라는 큰 물고기를 낚아챌 수 있을터입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나중에는 스스로 창조적인 해석을 해내는 독자로 성장하리라 믿습니다.
-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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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학원에 다니셨어요. 그걸 배워 나중엔 천리안에서 웹페이지도 만들었죠."
김주완, "그렇더라고요. 저도 에이치티엠엘(html)을 막 배워 홈페이지를 만들어보려던 시절 검색을 했더니 김장하 선생님 홈페이지가나오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때 첫 화면 사진이 촉석루와 남강이었는데, 그 남강 물이 찰랑찰랑하게 인터넷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렇게 돼 있더라고요."
홍창신, "젊은 사람들 기죽이는 일을 많이 했지. 게다가 나중엔 포토샵도 배우려고 했어요. 다행히 거기까진 안 하셨지만, 그것까지 매웠다면 우리는 완전 야코가 죽었지."

그랬다. 1990년대 중반 무렵이면 언론사도 원고지에 펜으로 기사를 쓰는 시대에서 노트북으로 타이핑하여 송고하는 시대로 막 전환하던 때였다. 내가 30대 초입이던 시절이었는데, 40~50대 선배 기자들은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해?"라면서 컴퓨터에 강한거부반응을 보였다.
그 무렵 50대였던 김장하 선생은 스스로 컴퓨터 학원 문을 두드렸다. 수강생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고 했다. 3개월 과정이었는데, "마지막엔 혼자 남더라"고 회고했다. 포토샵도 학원까지 가진 않았지만실제 공부를 한 듯 남성당한약방 응접실 책장에 1999년 출간된 『포토샵5 무작정 따라하기』(길벗)라는 책이 꽂혀 있었다. 

이를 보면 그는늘 새로운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이었고, 항상 공부하는사람인 듯했다.

박선생처럼 내 사상을 돌리려고(웃음) 선물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강민아, "하하. 선생님 개그 코드가 있으시다. 확실히."
개그 이야기가 나오니 홍창신 전 이사장이 한마디 보탰다.

"김장하 선생님 어록 중에 인상적인 게 하나 있는데, 형평 80주년(2003년)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인도에서도 불가촉천민(달리트) 대표로 왔었고 일본의 부락 해방연구소에서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진주성 안에 있는 박물관 세미나실에서 인사말을 하는데 첫 마디가 뭐였나 하면요."
"?...?...?"

"여러분은 지금 진주성에 무혈입성하셨습니다."(일동 웃음)
알다시피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던 전쟁터였다. 일본 사람들 앞에서 뼈 있는 유머였던 것이다.

홍창신 전 이사장은 이후 페이스북을 통해 김장하 선생의 유머 한토막을 소개하기도 했다.
"얼마 전 저녁을 먹고 노래방 얘기가 나왔는데 선생이 물었다.
 ‘빌게이츠가 노랠 어떻게 부르는지 앎 ?‘ 
‘......?‘ ‘마이크로 쏘푸트하게‘(모두 웃음)"

2022년 남성당한약방 문을 닫고 마침내 김장하 선생이 은퇴하자그를 좋아하는 40·50대 후배들이 월 1회 선생과 등산모임을 추진했다. 이른바 ‘불백산행‘이다. 
폐업을 앞둔 어느 날 "곧 백수가 되시겠네요?" 하는 질문을 받은 선생이 "불백이라고 하데? 불러줘야 나가는 백수라고..."라고 대답한 데에서 따온 이름이다. 

영은재 

기영은처사 김해 김공께서는 처음에 철성(고성)의 부련동 영천강 위에 사시다가 만년에 사천의 니구산 아래에 있는 노천 위에 집을 정하셨다. 조용히 살고싶어 마음 속으로 찾던 마을의 이름이 공자님의 고향과 비슷하니 이 또한 우연스럽지 않았다. 거기서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닦으며 여든 살까지 사셨다. 
세상을 떠나신 지 스물세 해가 된 임신년에 그분의 손자 장하가 여러 친척들과 의논하여 사시던 집터에 재실을 짓고 그 집이름을 영은재라 하고는나에게 그 기문을 청했다. 나는 이제 너무 늙고 병들어 글 지어 달라는 부탁을 사절하고 있었지만 장하와는 깊은 친분이 있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에

그 행장을 살펴 이 글을 짓는다.

이분의 선조는 가락국의 빛나는 겨레로서 십이대조 되시는 유계 선생께서조정암 선생과 도의로 사귀신 탓에 기묘사화록에 올리게 되었다. 이 뒤로 그후손들은 대대로 맑고 높은 절개를 지키며 살았는데, 이분의 호가 영은인 것도 바로 그런 뜻이다.
대저 이분은 타고난 인품이 여느 사람과 다르고 모습도 늠름하셨을 뿐 아니라. 생각하시는 바가 넓고 깊었다. 일찍이 경사와 제자백가를 통달하시고 결들여 의약과 음양과 지리에까지 세밀히 공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지극한 효도로써 부모를 모셨으니 가히 하늘의 밝음에 통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바가 있었다.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정성을 다해 조상을 모시고 가산을 기울여 여러 선조늘 산소를 다듬어 남의 이목에 빛나게 했다. 향교의 책임을 맡았을 때에는 남전의 여씨향약을 세워 다달이 고을의 풍속을 바로잡아 가도록 강론하였으며, 아들과 손자를 가르치심에 자애와 엄격을 아울러 다함으로써 뒷날 반드시 몸을 세우고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일찍이 ‘사람은 마땅히 올바른 것에 마음을 두어야지 재물에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하셨더니 이분이 돌아가신 뒤 상하가 한약업을 직업으로 하되 올바름으로 재물을 쌓아 수백억을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세워서는 나라에 바쳤다. 그리고는 천만영새가 골고루 그 혜택을 입게 하고 자신은 터럭만큼의 이익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온 고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크게 칭송하였으나 장하는 ‘우리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 저의 뜻에서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고

늘 말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이분을 더욱 우러러 마지 않았다.

옛날에 손목자가 이 세상에 썩지 않는 것 세 가지를 이야기하면서 첫째는덕행이요. 둘째는 사업이요 셋째는 문장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이분의 덕행과 사업이 진실로 천고에 썩지 않을 것이니 이 재실을 짓는 것이 어찌 헛된일일까 보냐! 앞으로 이 재실에 오르고 이 재실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분이 평소에 지니셨던 모습과 정신을 우리리 사모하여 본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자손만세토록 제사를 모시는 곳일 뿐 아니라 또한 때묻고 더러워진 세상의 길을 깨끗이 씻을 수 있게 할 것이다. 아아, 말하기는 참으로 쉬운지고!
임신년 백로절에 분성 허형은 쓰다

할아버지의 호 ‘영은(潁隱)‘은 ‘영천강(江)에 숨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영천강은 고성군에서 발원해 진주시 문산읍을 거쳐 금산면속사리에서 남강과 합류한다. 이 기문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원래 고성 사람이었는데, 만년에 사천으로 이주했다.

또한 ‘세상을 떠나신 지 스물세 해가 되는 임신년(1992년)‘이라 했으니 역으로 계산해보면 1969년 또는 1970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보인다. 그때는 손자 장하가 만 25~26세, 사천 석거리에서 한약방을 연지 6~7년째 되는 해였다.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했다‘는데, ‘경사(史)‘는 경서(經)와 사서, ‘제자(諸)‘란 여러 학자, ‘백가(百家)‘란 수많은 학파를 뜻하는 말이니 그만큼 한학을 두루 깊이 공부한 분이었다는 말이다. 또한 의학과 음양, 지리까지 공부했다는 말도 나오는데, 내가 어느 자리에서 김장하 선생에게 "할아버지는 어떤

이렇게 영은재 가문만으로 성에 차지 않아 할아버지 묘소의 비문(무)을 찾아봤다. 그런데 아뿔싸! 비문 또한 전부 한문으로 되어있는데, 내 짧은 한자 실력으론 번역이 아예 불가했다. 한자를 좀 읽는것과 한문을 해석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결국 서예가이기도 한 이곤정(1961)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그가 다시 소개해준 사람이 허형 선생의 아들 허만수 봉림서당 훈장이었다. 이 무슨 우연인가? 히 훈장은 흔쾌히 번역을 해주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정원(元)공은 자(字)가 태규)이고 자호를 영은이라하였다.
아버지 김반장과 어머니 신앙심씨 사이에 고종 기후, 1883년)이출생하였다.
공은 체격이 크고, 기량 사람이 가진 마음과 생각의 깊이)이 크고 깊었다. 부모를 섬김에 숨어든의 명령을 좇아 마듭하여 이김이 없었고, 형제간에 매우 우애가 있었다.
부친의 병환에 근심이 얼굴에 나타나고 약이 약물과 음식물을 이슬러 이는 말)를 반드시 손수조리하고 여서 님에게 맡기지 아니하였다. 조상을 당함에 가슴을 지고 뛰면서 슬픔을 다하고, 여러 절차를 한 자가家)를 준수하여 시행하였다.
부친의 상복을 마치고 날마다 어머니를 곁에 모시고, 때때로 보고 들은 것을말씀드리면 그 이야기 듣기를 기뻐하셨다. 외출하다가 특이한 맛있는 것을

김장하의 할아버지 김정
만나면 반드시 가슴에 품고 돌아와 어머니께 올렸다.
후일 초상이 나자 또한 앞의 초상과 같이 했다.
공은 일찍 가무 (집안의 일)를 담당하면서 남은 힘으로 독서하여, 경서(經)와 사기(史記)에 거의 넉넉하였고, 의약 음양(陰陽)에도 다 마치고풍수지리(地理)에도 깨달음이 있어서 그 선대의 묘를 많이 옮겼다.
일찍 고성(固)의 문묘 공자를 모신 사당)에 장의(掌儀)를 했는데, 남전여씨 향약(鄕約)으로 퇴폐한 풍속을 장려하고 돈독히 하였으니, 지금까지 그 일을 칭송한다.
문족이 전부터 청한하여 선대를 위한 사업에는 겨를이 많이 없었다. 공이 처음으로 모의를 시작하여 재물을 모으고 부지런히 하여,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갖추며, 종실)을 세우고 재숙(宿)에 밑

천을 대는 일에 거행치 아니함이 없었는데, 공은 이 때문에 자기의 재산을 황페시켜 스스로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집안에 도움을 받는 일이 두시에 이르자, 공이 성을 내어 거절하고, 드디어 권속()을 이끌고 사노천(원)으로 이사하여 여러 해 동안 고생하다가 마침내 풍요롭고 이유를이루었다. 그리하여 만년의 즐거움을 두었으니, 그 경제)에도 넉넉함이 다시 이와 같았다. 매양 사기를 읽다가 왕조(王)의 성씨 바를꾸면서 나라를 잃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일찍 책을 덮고 단식치 아니함이 있있다. 경술(庚戌 1910년 뒤 서울에 가서 고궁(古宮)이 황무한 것을 보고는 슬픈 탄식을 이기지 못하여 시를 지어서 뜻을 나타내었다. 경인1950년)에 북한군이 밤에 집안 뜰에 들어와 방자하게 닭과 돼지를죽이고, 겁탈을 행하려 하니, 공이 천천히 의리로 깨우치게 하므로, 저도 또한알아듣고 귀농했다.
집에 있을 시에는 인자와 언嚴格)을 아울러 베풀며 대제(大)보존하기에 힘썼다.
사람들과 더불어 지진을 경계하기든, 효제공경)으로 하여 부모(父)와 선조(先)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고, 근검으로 생활을 다스리고, 재물에 탐욕 내어 결손을 손상시킴으로 치무)을 초레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 말씀이 그 집안을 크게 했다고 이를만하다.
(중략)경술(1970)12월 21일에 좀하니 향년 82세이다.
한신안풍인 짓고

아들 김병수(水) 쓰고손자 김장하(金) 표석을 세우다

이 비문을 보니 생몰연도가 확실해졌다. 1889년생으로 82세인1970년에 돌아가셨으니 손자 장하의 나이 27세 때였다. 또한 앞의기문에서 ‘향교의 책임을 맡았을 때에는‘이란 문장이 있는데, 비문에는 ‘고성의 문묘에 장의를 했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장의또는 란 향교에서 예식이나 교육을 관장하던 직책이다. 흑시나 하여 고성향교를 통해 역대 장의 명단을 확인해봤으나 아쉽게도 전교() 명단은 남아 있지만, 장의 명단은 남아 있는 게 없다고했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기문과 비문에서 모두 향교의 직책을 맡아 ‘남전 여씨향약‘으로 고을의 풍속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씨향약이 뭔지 찾아보니 11세기 초 중국 북송(北宋) 때, 향촌(村)을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자치적인 규약(規約)으로 ‘좋은 일은서로 권장한다. 잘못은 서로 고쳐준다. 사람을 사귈 때는 서로 예의를지킨다.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는 4가지를 강령으로 했다고한다.(비문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이 호적부와 다르게 나오는데, 이는족보상 이름과 호적상 이름이 달랐기 때문이다.)비문에도 역시 자식과 조카들에게 "근검(勤儉)으로 생활을 다스리고, 재물에 탐욕 내어 겸손을 손상시킴으로 치욕을 초래치 말라"고했다는 말이 나온다. 앞서 기문에서 손자장하에게 가르쳤다는 내용

것을 권유했지만, 시험을 치게 되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명신고 교지 《명신> 창간호 인터뷰에 당시 상황을 술회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주위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1962년 그러니까 내가 18살 때 일이었어요. 아버님(할아버지의 오기)에게서 소개받은 친구분 밑에서 약방 일을 돕다보니 어느 정도 한약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도 했고요. 
그러던 어느 날, 한약사 시험이라고 일종의 한약업 면허증 시험이 있었어요. 무척 망설였지요. 어린 나이에 한약사시험을 치르면 남들이 비웃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반대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했지요. 욕 얻어먹더라도 일단 시험이나 치르고 난 뒤에 얻어먹자는 배짱으로 시험을 치른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미성년자에게는 자격증을 발급하지 않는규정 때문에 6개월을 더 기다려 1963년 1월 16일 그의 주민등록상생일에 맞춰 한약종상 허가증을 받게 되었다. 미성년자가 자격시험에 합격한 일은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는데, 이것이 김장하가 자신의운명을 바꾸는 첫 번째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이후 한약종상 시험은 한동안 없었고 13년이 지난 1975년에야 있었으니 그때 시험을 치지 않았다면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 시험제도는 당시 무의약촌을 해소하자는 차원의 정책이었던 만큼 약방이나 의원이 없는 지역을 정해 광역시·도 단위로 치러졌다.

"그냥 얌전한 아이였던 기억이 나요. 참 2학년, 3학년 땐가? 장하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 어린 마음에도 참안됐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네요."
최 교수는 "장하가 1944년생이지만 음력으로는 43년생이어서 같은 계미생 양띠이고, 그래서 동갑게도 함께하고 정동초등학교 22회동기 모임도 같이 하고 있다"며 "그때 같이 졸업한 동기가 90명인데,
지금도 모임을 하면 30여 명이 모인다"고 말했다.
말 나온 김에 최관경 교수에 대해서도 좀 기록해두자면, 여러 모로독특한 면모가 있는 분이었다. 이분도 김장하 선생처럼 자가용 승용차를 가져본 적이 없다. 걷는 걸 좋아하고 등산을 즐긴다. 게다가 현직교수 시절이었던 1988년부터 2006년까지 18년간 매일 새벽 신문배달을 했던 이력도 있다. 찾아보니 공교롭게도 내가 재직했던 《경남도민일보》 2003년 8월 23일자에 ‘구두쇠 열전‘이라는 제목으로 최교수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었다.
"환갑이 되어버린 나이에도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데 대해 주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 돈(?) 때문이라고 이상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문배달은 돈이 목적이 아니다. 딸 때문에 우연찮게 시작한 신문배달은 교육자인 나로서 많은 것을 배운다. 신문배달원을 무시하는 사람들로인한 인권, 내 자신에 대한 통제와 전제, 꼭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 다른 사람에 대한 겸손함, 우유배달원·환경미화원 · 경비원 등 모르는 사람 그리고 가족들의 참여로 가족간의 화목 등이다.

특히 교수라는 직업에서 올 수 있는 거만함을 통솔할 수 있어 좋다. 신분을 감추고 또 다른 조그마한 삶을 살면서 그 삶이 지닌 가치를 경험하고 있다.
아내와 함께 하는 신문배달 부수는 140부 정도. 돈으로 치자면 얼마 안 된다.
신문배달 때문에 하루에 10개의 신문을 본다. 정보도 알고 다양한 삶의 방식도 접한다. 이를 통해 알게 된 정보를 학생들과 교류하고 배움에 접목한다."
뿐만 아니다. 여름에도 선풍기나 에어컨을 켜지 않고, 5000원짜리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구두쇠지만 전공서적 등 책 구입비만 한 달에50만 원 선이다. 그리고 구입한 책을 모두 읽고 선물한다. 글은 이렇

자인 김훤주(1963~) 출판국장이 정동초등학교를 찾았다가 거기 세워져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보고 감동받아 페이스북에 올랐다. 그는 지역탐방을 나가면 오래된 학교를 찾아가 이런 길 세세히 살피는 버릇이 있다.

‘사천 정동초교 교정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이렇게 꼼꼼히 만든상을 아직은 본 적이 없네. 장군의 연대기까지 간략하지만 적었다. 거북선 모형과 해전 부조 그림도 있고첨부된 사진을 확대해보니 ‘증 제22회 졸업 김장하 1978.4.28 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댓글로 김훤주 기자와 대화를 나눴다.
"헐. 기증자가 김장하 선생!"

으로 폐지되기까지 진삼선 철도의 선진역이 있었던 마을이며(개에서 사천읍간의 철도는 1953년에 개통하였음) 1963년에는 용남공설시장이 섰던 곳으로 유흥업소도 많았고 경제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1952년 5월 1일에개교한 용남중학교와 1967년 10월 5일 개교한 용남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석거리는 섬거리가 변음되었다고도 하는 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덕석골에서 나는 곡식을 섬에 넣어 쌓아 두던 거리라 하여 섬거리란 이름이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이야기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사천시 용현면사무소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선진리 신기마을에 대한 설명이다. 박대지 (1936~) 용현면 노인회장은 "저기 앞에 신복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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