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소설가, 시인, 화가, 독일 뷔르템베르크 칼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1891년 마울브론수도원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7개월 만에 시인이 되기 위해 도망쳤고 시계 공장과 서점 등에서 일하며 글을 써 나간다. 1898년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들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04년 페터 카멘친트로 문학적 성공을 거두면서 전업 작가가 된다. 이후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청춘은 아름다워라」 등을 발표했다.
헤세는 1914년 일차대전이 일어났을 때 전쟁 포로를 위한 책과 잡지를 발표하며 독일의 애국적인 전쟁문학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 이 일로 여러 작가들과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19년에 스위스로 이주한 그는 ‘데미안」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이차대전 중에는 헤세의 작품 다수가 독일에서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어 유통되지 못했다가 종전 뒤인 1946년부터 다시 판매되었고, 이 해에 노벨 문학상과 괴테상을 수상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스위스에서 살며 활동했고, 1962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헤세는 음악 예술에 대한 애정이 특별히 깊었고, 그의 문화 세계에는 ‘악보 없는 음악‘이라 불릴 정도로 깊게 음악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는 이러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그가 일평생 음악에 대해 쓴 글을 묶어낸 책이다. 각각의 글은 별자리처럼 아름다운 형태를 완성하는 한편, 헤세의 문학에 은은하게 일렁이는 음악의 그림자를 또렷한 시적 형체로 드러내준다.
음악
또다시 연주회장 소박한 구석 자리에 앉아 있다. 내 뒤로아무도 앉을 수 없어 좋아하는 자리다. 다시 잡다한 소리가 나직이 들려오고, 관객으로 가득한 실내의 풍성한 빛은 나를 향해 부드럽고도 유쾌하게 반짝인다. 연주를 기다리는 동안 프로그램 책자를 읽으면서 감미로운 긴장을느낀다. 이제 곧 지휘자가 지휘봉을 두드리며 이 긴장을최고조로 끌어올릴 것이며, 곧이어 오케스트라가 물오른첫 울림으로 이 긴장을 한껏 분출하고 해소할 것이다. 오케스트라 화음은 7월 한여름 밤 곤충들의 춤처럼 고음에맞춰 유혹적으로 윙윙대려나? 호른들과 함께 밝고 기쁜소리로 시작하려나? 숨죽인 저음을 내며 둔탁하고 숨 막히듯 호흡하려나? 알 수 없지. 나는 오늘 나를 기다리는음악을 알지 못한 채 추측과 탐색의 예감으로, 어땠으면하는 바람과 설렘으로, 아주 근사하리라는 확신으로 가득한 상태다. 넓고 하얀 홀 앞쪽에 대형이 갖추어졌다. 키 큰 더블베
이스들은 반듯하게 서서 기린 같은 목을 가만가만 흔든다. 첼리스트들은 고심하듯 얌전하게 자기 악기의 현 위로 몸을 숙인다. 튜닝은 거의 끝났다. 클라리넷 하나가 마지막 점검을 하며 내는 소리가 득의양양 흥분한 듯하다. 바야흐로 매혹적인 순간이다. 지금 지휘자는 검은색 복장으로 꼿꼿이 서 있고, 홀의 조명은 일순 숙연히 꺼졌다. 보이지 않는 램프가 지휘대 위를 강렬히 비추는 가운데, 하얀 총보가 유령처럼 빛난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고마운 지휘자, 그가 지휘봉을 두드리고는 양팔을 펼치더니 금방이라도 몰아칠 태세로 팽팽히 긴장해 비스듬히 서있다. 고개를 뒤로 젖힌다. 그 눈의 야전 사령관 같은 번쩍임이 뒷모습에서까지 감지된다. 그가 양손을 날개 끝자락처럼 움직인다. 그러자 홀과 세상과 내 심장은 금세 짧고 날렵한 바이올린 파도에 뒤덮인다. 대중도 연주회장도지휘자도 오케스트라도 사라지고 없다. 온 세상이 사라져가라앉았다. 내 오감 앞에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되기 위해. 지금 기대에 찬 우리에게 작고 볼품없는 세계를, 신빙성 없고 억지로 궁리해낸 거짓 세계를 지어주려 드는 음악가에게 화 있을지니! 하지만 아니다. 거장이 연주하는 중이다. 그는 카오스의공허와 침몰 상태에서 파도 하나를 일으킨다. 크고 힘 있는 몸짓으로, 파도 위로 비랑 하나가 서 있다. 삭막한 섬,
세계의 심연이 내려다보이는 위태로운 피난처가. 그리고벼랑 위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 사람이. 무한 속에 고독하게. 그의 심장박동은 혼을 불어넣는 탄식과 함께 무심한황야에 울려 퍼진다. 이 사람 내면에 세계의 의미가 숨 쉬고 있고, 형체 없는 무한이 그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가 고독한 목소리로 텅 빈 광야에 대고 물으니, 그 물음이 사막에 마법을 걸어 형체와 질서와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여기 한 사람이 서 있다. 거장이기는 하나 격심히 동요한 상태로 회의하며 심연 앞에. 목소리에는 전율이 실려 있다. 하지만 보라, 세계가 그 사람을 향해 울린다. 선율은 창조되지 않은 것 안으로 콸콸 흘러들어가고, 형식은 카오스를 뚫고 안착하며, 감정은 무궁한 공간에 반향한다. 예술의 기적이 벌어진다. 천지가 다시 한번 창조되고 있다. 목소리들은 고독한 질문에 답한다. 시선들은 헤매는 눈을향해 빛난다. 황무지로부터 설렘과 사랑의 가능성이 몽롱하게 비치며 솟아난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은 젊은 의식의 여명 속에 의욕에 찬 대지를 움켜쥔다. 자부심이, 환희에 찬 깊은 감격이 그의 안에 만발한다. 그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지배하며 사랑을 선포한다. 침묵이 감돈다. 1악장이 끝났다. 또다시 우리는 그를 듣는다. 그 존재와 영혼 속에 우리가 스며 있나니. 천지는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투쟁이 일어난다. 고난이
닥쳐온다. 시련이 돋아난다. 그는 서서 우리 심장이 떨릴만큼 탄식하고 있다. 그는 응답받지 못한 사랑으로 괴로위하며, 깨달음으로 인해 지독한 고립을 겪고 있다. 음악은 신음을 토해내며 고통을 헤집고, 호른 하나가 최후의궁지에 빠진 듯 처량하게 울린다. 첼로는 부끄러움으로울고 있다. 많은 악기가 어우러진 울림으로부터 비애감이오싹하게 엉겨든다. 활기도 희망도 없이. 이제 선율이 격랑의 밤으로부터 피어오른다. 지나간 행복의 기억이. 하늘의 낯선 성좌처럼 슬프도록 서늘하게. 하지만 마지막 악장, 혼탁함 속에서 위로의 금빛 실을잣는다. 오, 오보에가 솟아올라 원 없이 울다 가라앉는 저모습! 투쟁은 해소되어 투명한 아름다움이 되고, 볼썽사납게 탁하던 것들은 녹아내려 돌연 조용히 환하게 빛나고, 고통은 몹시 무안해하며 구원의 미소 속에 숨어버린다. 절망은 숙명에 대한 깨달음으로 온화하게 변모하고, 환희와 질서는 고양되어 한층 전도양양한 모습으로 귀환한다. 잊힌 매력과 아름다움이 자태를 드러내 새로운 윤무로 어우러진다. 만물이, 역경과 환희가 하나 되어 위대한 합창을 이루며 높이 더 높이 자라난다. 하늘이 열린다. 축복의 신들은 인간의 갈망이 몰려 올라오는 모습을 위로하듯 굽어본다. 천지는 자리를 잡아 안정되고 평화를 이루어 감미로운 한순간 둥실 떠 있다. 여섯 마디에 걸쳐,
흡족한 완성에 행복해하며, 내적 행복과 완성의 순간! 끝이다. 우리는 여전히 압도된 채 박수갈채를 쏟아내 가벼워지려 한다. 손뼉 치는 몇 분 동안 정신 없는 와중에 깨닫는다.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사람의 힘으로, 우리는 저마다 선명히 알게 된다. 우리가 무언가 위대한 것, 찬란하게 아름다운 것을 체험했음을. 몇몇 ‘전문‘ 음악인들은, 청자가 연주 내내 풍광, 사람, 바다, 뇌우, 시간, 계절 등의 심상이 보인다고 하면 잘못들었다고, 딜레탕트 같은 감상이라고 단언한다. 너무 문외한이어서 곡의 조성조차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는 내게는 심상이 보이는 게 자연스럽고 좋다. 우수한 전문 음악인들도 그렇게 감상하는 것도 이미 보았다. 물론 오늘 연주회 때 모든 청자가 나와 똑같은 심상을 봤어야 하는 건전혀 아니다. 거대한 파도, 고독한 이가 있는 낭떠러지섬, 그 모든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음악은 틀림없이 모든 청자의 가슴에 똑같이 조화로운 성장과 존재의 심상을 불러일으켰을 것만 같다. 생성, 투쟁, 고난, 그리고 마침내 승리의상을산을 잘 오르는 사람이라면 위험이 잔뜩 도사린 긴긴알프스 등정 이미지를 눈앞에 떠올렸으리라. 철학자라면의식의 눈뜸을, 감격스럽고 무르익은 긍정에 이르기까지겪는 성장과 풍랑을 떠올렸으리라, 독실한 이라면 한 구
도하는 영혼이 신으로부터 멀어졌다가 더욱 위대하고 정화된 신에게 돌아가는 길을 떠올렸으리라. 하지만 서로다른 심상을 보았어도 열심히 경청한 이라면 그 누구라도 이 형상이 극적으로 그려낸 만곡을 잘못 들었을 리 없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에서 존재로, 개별적 행복에서 우주의 의지와 화해하기까지 이르는 그 길을. 풍자소설이나 해학소설 혹은 문예란에는 연주회장을 찾는 이들 중 딱하고 유감스러운 유형을 조소한 대목이 더러 나온다. 에로이카>의 장송행진곡이 울리는 동안 유가증권을 생각하는 사업가, 장신구를 보여주고 싶어 브람스 연주회에 가는 부유한 부인, 모차르트의 음악이 울리는 틈에서 혼기 앞둔 딸을 결혼 시장에 데려다 놓은 듯 앉아 있는 어머니, 또 무엇 무엇 하는 누구들.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건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작가들이 그런 장면을 그토록 자주 묘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내내 믿기지않았고 끝내 납득할 수 없었다. 사교 모임에 가듯 혹은 공식 석상에 가듯 연주회에 간다는 것, 다시 말해 심드렁하고 무딘 신경으로, 또는 사욕을 꾀하며 계산속으로 앉아있거나 허영심에 우쭐해하며 앉아 있는 것, 그건 이해할수 있다. 그런 건 인간적이며 웃어줄 만한 일이다. 나자신도, 내가 직접 음악회 날을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
니, 경청할 마음가짐과 좋은 기분으로가 아니라 곤하거나화가 났거나 아프거나 걱정을 잔뜩 안은 채 연주회에 간적이 있다. 그러나 지휘봉이 춤추고 음의 파도가 넘실대기 시작했는데도 베토벤의 교향곡을, 모차르트의 세레나데를, 바흐의 칸타타를 감흥 없이-영혼의 아무 변화 없이, 충격과 도약 없이, 공포나 수치감이나 비탄 없이, 애통함이나 환희의 전율 없이 듣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기교 문제에 대해 나보다이해력이 현저히 덜한 사람은 있기 어렵다. 나는 악보도거의 못 읽으니 말이다! 하지만 위대한 음악가들의 작품을 접한다면 더없이 고귀한 인간의 삶이, 나와 당신과 만인에게 더없이 진지하고 중요한 것이 다루어지고 있다는것을 마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한심한 문외한이라도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음악의 비밀이다. 음악이 그저 우리의 영혼만을 요구한다는 것, 하지만 오롯이 요구한다는 것 말이다. 음악은 지성과 교양을 요구하지 않는다. 음악은 모든 학문과 언어를 넘어 다의적 형상으로, 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항상 자명한 형상으로 인간의 영혼만을 끝없이 표현한다. 위대한 거장일수록 그가 관조하고 체험한 바의 효력과 깊이는 무제한적이다. 또한 순수한 음악적 형식이 완벽할수록 우리 영혼에 끼치는 영향은직접적이다. 거장이 거장 자신의 영혼 상태에 대한 가장
강렬하고도 예리한 표현을 추구하건, 자기 자신을 벗어나순수한 미를 꿈꾸건, 그의 작품은 곧장 이해되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것이다. 기교적인 것은 훨씬 나중 이야기다. 베토벤이 어떤 곡에서 바이올린 성부의 핑거링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는지, 베를리오즈가 어디에서 호른을투입하며 이례적으로 대담한 시도를 했는지, 이 대목 저대목의 막강한 효과가 페달 포인트에 기인하는지, 약음기를 낀 첼로의 음색 덕분인지, 또 무엇 무엇 때문인지, 그걸 아는 건 멋진 일이고 유익하다. 하지만 그런 지식은 음악을 향유할 때 없어도 괜찮다. 나는 때에 따라서는 음악가보다 문외한이 음악에 대해더 제대로 더 순수하게 판단한다는 생각까지 한다. 문외한은 듣기 편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연주라고 생각하고 대단한 인상 없이 흘려듣는 반면 정통한 이들은 그 능수능란한 기교에 잔뜩 매료되는 때가 제법 있다. 우리 작가들역시 그런 식으로 순박한 독자에게는 하등의 매력도 없는시문학 작품을 더러 높이 산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진정한 거장의 위대한 작품 치고 전문가에게만 영향력을 발휘하는 작품은 없다. 나아가 우리 문외한들은 부분적으로결함 있는 공연에서조차 아름다운 작품을 깊이 즐길 수있어 참으로 행복하다. 우리는 젖은 눈시울로 일어서며영혼의 터전 구석구석이 진동하고 경고받고 비난받고 정
화되고 화해한 것을 느낀다. 전문가가 템포 문제를 두고논쟁하거나 정확하지 못했던 연주 시작 타이밍 때문에 기쁨을 전부 잃어버린 반면, 물론 그 대신 전문가는 뭘 모르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쾌감을 누린다. 그런가 하면 지식이 있고 없고를 떠나섬세한 귀는 희귀하고도 음악적으로 최고 기량을 발휘하는 것들. 이를테면 아주 귀한 오래된 현악기 사중주단의소리, 진귀한 테너의 달콤한 매력, 비범한 알토의 따뜻한충만함, 이 모든 것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감지한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감각의 예민함 문제이지 교양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감각의 향유 또한 훈련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지휘자의 역량 문제도 유사하다. 가치높은 작품이라면 결과물의 수준은 지휘자 자신의 기술적대가다움만으로 결정되는 게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지닌 인간으로서의 섬세한 감수성, 영혼의 크기, 개인의진지함이 훨씬 결정적이다. 우리 삶에 음악이 없다면! 꼭 연주회에 가야 하는건아니다. 대부분은 한 번의 피아노 소리면, 고마운 휘파람이나 노래나 흥얼거림이면 족하다. 아니면 잊을 수 없는 몇마디를 소리 없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누군가나나 그럭저럭 음악적이라 할 사람에게서 바흐의 성가곡을, <마술피리>나 <피가로의 결혼>의 아리아들을 빼앗고
금지하고 기억으로부터 떼어놓는다면, 우리 같은 사람에게 그것은 몸의 장기 하나를 잃는 것과도 같을 것이며 감각 하나를 반쯤 또는 전부 상실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속수무책일 때, 하늘의 쪽빛과 총총한 별밤이우리에게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할 때, 시인의 책조차 없을 때, 그럴 때 얼마나 자주 기억의 보물 창고에서 슈베르트 가곡 하나, 모차르트 한 소절, 미사곡과 소나타가-우리가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이젠 알 수도 없는 그것들이-울려와 환히 빛나며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우리의 고통스러운 상처 위에 사랑의 약손을 얹어주는가... 아, 우리 삶에 음악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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