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여겨왔기에 별로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의 형님이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이 된 지 5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어 죽은 줄만 알고 지냈더니 재작년 북한에 살아있다고 이산가족 생사의뢰서를 보내왔었다. 그러나하루속히 만날 줄 알았던 이산가족 상봉은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형님이 사시는 북한을 방문해서 무슨소식이나 들을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가보고 싶어 이 행사에 참여한다.
6월 28일장맛비가 내리는 날 김포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인줄 알고 탑승하니 북한의고려항공이다. 탑승하자마자 기내에서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기분이 어쩐지 이상하고 바짝 긴장이 된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평양공항에 착륙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1시간이다. 지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막혀있었던그동안 마음의 거리는 너무 멀고도 멀었다. 내가 이렇게 쉽고 빠르게 건너가볼 수 있으리라고는 이전까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평양공항에 대한첫 느낌은 과연 이곳이 북한의 수도인 국제공항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적막했다. 비행기도 몇 대뿐이고, 그 날 손님은우리밖에 없는 모양이다.
긴장했던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입국 절차를 마치고 마중 나온 버스에 분승하여 숙소인 양각도호텔로 향했다. 양각도호텔은 1995년 완공된 47층의 객실 1001 실의 특급호텔이다. 양각도는 대동강에 있는 섬으로, 섬의 모양이 양의 뿔처럼 생겼다고 양각도라고 불린다고 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평양

외곽은 모내기가 끝난 농촌의 풍경이었다. 저 멀리 삼삼오오 논에서 일하는사람들과, 도로에는 가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보따리 짐을 매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내에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찾았던 것은 바로 매대다. 우리 식으로 하면 정부의 허가를 받고 영업을 하는 노점상이라고할 수 있다. 매대에서는 음료수와 간단한 간식을 팔고 있는 듯했다. 평양의거리 풍경은 차량 통행이 적고, 신호등이 없으며 자전거를 많이 타고 간혹 오토바이도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교통수단은 지하철 궤도전차무궤도전차 시내버스 택시인데 택시는 눈에 띄지 않는다.
평양에 제일 먼저 내린 곳이 만수대다. 만수대는 김일성 동상이 있는 곳이다.
뭐 평양에 방문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주석님(?)께 인사하는 것인가? 북측사람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바로 김일성 동상 참배란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가 3쌍이나 주석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
양각도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다. 김포에서 시둘러 나오느라 아침식사를 대충 했더니 늦은 점심이라 몹시 배가 고프다. 그런데 밥공기에 밥이 너무적어서 배가 안 찬다. 북한에서의 첫 식사라서 아마도 북한주민들이 굶느라고 이렇게 적게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 달라 소리도 못하고 있는데 접대원이 와서 빈 공기를 보고 밥 더 드릴까요? 한다. 미안해서 반공기만 더 주셔요 했더니 큰 그릇에 한 그릇들고 온다.
공식 일정대로 만경대고향집을 향했다. 김일성주석 생가를 보존한 것으로평양 방문에서 북이 꼭 보여 주는 곳이다. 호텔에 오기 전에 김일성 동상 앞에서 안내자는 설명을 하면서 계속 ‘위대한 수령님‘을 말끝마다 붙인다. 평

양시내의 큰 건물에는 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형 사진이나 붉은현수막이나 플래카드가 수없이 많다. 만경대고향집에서 해설하는 사람들은또 얼마나 위대한 수령님을 찾을까! 나는 우리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고 북한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이해할 것 같다. 만경대는 김일성 주석의 생가이며 정치가 베어나 만경대에 오르면 일만 가지 경치를 본다고 만경대라고한다.
평양 시내는 상당히 깨끗해 보였다. 도시 모습도 계획도시답게 잘 정돈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길거리의 사람들 모습도 패 활기차 보였다. 버스에서손을 흔들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든다. 엄마의 손을 잡고걸어가던 한 아이는 내가 탄 버스를 보고 손을 흔들면서 웃는다. 차에서 내리저 평양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렇게 만경대고향집을 둘러보고 우리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으로 향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평양 어린이들의 공연을 보이주는 곳이다. 그곳에서 예체능에 재능 있는 어린 학생들을 집중식으로 교육시키는 곳이다. 건물 모양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품에 안는 형상으로 만들이겼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 앞에 있는 말은 힘차게 달려오는 어린이들링상화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방과 후 체육 과학 예술 등 다양한 기능을 익히고 숙달된 학생들은 공연장에서 발표를 한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열심히습하는 연습실을 견학했다. 정말 아이들이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의 관람에 익숙해서인지 반 친구들은 우리의 방문에 개의치 않고 자기일에만 열중한다. 사진을 찍든지 말든지, 뭔 말을 하든지 말든지 질문을 하던단답형으로 대답만 할 뿐이다. 고사리 손으로 바둑을 두는 모습이 귀엽다.

2015년 5월 창원에서 만난 문형배 판사.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도, 문학도, 역사도, 사회도, 심리도, 예술도 다 들어 있다. 채현국 선생의 인터뷰를 보니 남은인생을 어떻게 살까 생각이 많아진다.
이런 왕성한 책읽기를 눈여겨 보던진주문고 여태훈 사장이 2019년 3월7일 그를 초청해 ‘문학 속 재판‘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당시 문형배 부산고법 수석부장판사는자신이 책을 많이 읽는 이유에 대해 "무지, 무경험, 무소신 등 3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판사로 살아온 그의 궤적이 그냥머리 좋고 공부 잘한 여느 판사와 달랐던 것은 이처럼 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채우려 노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앞서 김장하선생이 "내가 배운 게 없으니 책이라도 읽을 수밖에"라고 대답한 것과 상통한다.
그동안 언론은 그가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했다는 이유로 ‘진보성향의 판사‘라고 많이 보도했지만, 내가 볼 때 그는 진보·보수를 떠나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김장하 선생의 삶이 그러했듯이 편향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에겐 상식과 합리마저 진보좌파로 보였던 것이다.
그가 2011년 2월 창원지법 진주지원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하동 출신으로 진주 대아고등학교를 나온 그가 진주를 비롯한 서부

♡♡♡참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문형배 판사의 눈물로 시작된 행사는 모든 사람의 행복한 웃음으로마무리됐다.
문재판관은 경남권에서 오랫동안 판사로 재직했고, 나도 기자로서 그를 주목한 기간이 길었다. 앞에서도 잠시 등장했던 그 김훤주기자가 법원 출입을 할 때 그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썼고, 나에게도 많은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형배에 대한 이야기를 좀 길게쓰는 걸 양해해주길 바란다. 그만큼 오래 봐 왔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그의 이력을 나열하려는 건 아니다. 그가 살아온 이력과 주요 판결은 이미 위키백과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그걸 참고하면 된다.
내가 보기에 문 재판관은 태도나 말투, 자세 등에서 느껴지는 풍모가 김장하 선생과 많이 닮았다. 늘 책을 가까이하고 자신의 부족함을채우려 하는 모습도 같다. 다만 그는 선생과 달리 읽은 책에 대한 짧은 독후감을 블로그(https://favor15.tistory.com)에 올리는데, 2006년부터 지금까지 쓴 독후감이 1330여 편에 이른다. 헌법재판관이 된 후에도매월 4~5권의 책을 읽고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 2015년 5월 그를만나 저녁식사를 한 후 『풍운아 채현국』을 선물했는데, 며칠 후 이 책독후감도 올라왔다. 그의 독후감은 개괄발췌 -소감으로 구성되는데,
다음은 마지막 소감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자서전, 전기를 좋아한다. 그 속에 모든 장르가 다 들어 있다고

스른 그가 말을 이었다.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이 있다면... (다시 청중 박수 있다면, 그 말씀을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 강동욱 경남문화예술회관 관장이 나왔다. "선생님은 진주오광대 복원과 진주탈춤한마당, 진주민예총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셨고, 극단현장에도전세금 3000만 원을 선뜻 내주셔서 지금의 현상아트홀이 있게 됐습니다."
문판사와 강관장이 말한 ‘선생님‘은 김장하(75)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진주 남성당한약방 대표 한약업사이기도 하다.
16일 오후 7시 경남과학기술대 백주년기념관 아트홀에는 김장하 이사장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거나 평소 그를 흠모해오던 사람들 120여 명이알음알음으로 모였다. 사전에 전혀 공개되지 않은 모임이었다. 이날은 김장하이사장의 생일이었다.
행사를 준비해온 홍창신 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되돌아보면 우리는 한 번도 그분에게 제대로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다. 더 늦기 전에 그이와따뜻한 시간을 갖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 이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워낙 그 어른이 낯을 드러내거나 공치사를 싫어하시는 분이라 미리 알게 되면 못하게 할 게 뻔해서 비밀리에 자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날 참석자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은밀히연락을 받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 시각 김장하 이사장은 전혀 이 행사를 모른 채 가족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식사 후 사전에 주최측과 말을 맞춘 아들이 "좋은 공연이 있다"며 행사장

으로 아버지를 이끌었다.
오후 8시 20분 김 이사장이 가족과 함께 행사장에 들어서자 큰 박수가 쏟아졌다. 무대 앞 벽에는 ‘김장하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적힌 펼침막이 내리왔다. 이어 생일축하 케이크가 나왔고, 참석자들은 국가를 합창했다.
영상으로 ‘선생님이 살아온 길‘을 관람한 참석자들은 노래패 맥박과 큰들의축하공연과 전지원 양의 판소리 등을 함께 즐겼다.
이어 사회자인 윤성효 오마이뉴스 기자가 김 이사장에게 인사말을 청했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선생님, 고맙습니다"며 허리 숙여인사했다. 무대 옆쪽에 있던 사람들은 큰절을 올렸다.
"아직도 얼떨떨하다"고 말문을 연 김 이사장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아직도 부끄러운 게 많다"며 "앞으로남은 세월은 정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놀이패 큰들과 함께 노래 <만남>을 합창하면서 행사를 마무리했다. 큰들 단원들은 노래가 진행되는 동안 스케치북에 쓴 여러 카드를 대목마다 펼쳐 보였다.
"선생님이 걸어오신 그 길, 저희도 따라 걷겠습니다."
"돈은 모아두면 똥이 된다."
"똥이 거름 되어 꽃이 피었습니다."
"여기 진주에 꽃이 피었습니다."
"진주사람 웃음꽃이 피었어요."
"선생님이 계셔 든든합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십시오."

경남의 재판을 관할하는 사법기관장으로 돌아왔으니 금의환향還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부임 후 김장하 선생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도 블로그에 올렸는데, 삶을 바꾼 만남』(정민지음, 문학동네)이라는 책 독후감 마지막 소감 부분에 이렇게 썼다.
나에게도 이런 스승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김장하 선생을 만난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선생의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다. 그분은 나에게 대학교까지장학금을 주셨지만 내가 받은 것은 가르침이었다. (・・・중략...) 진주지원장으로 부임했으니 식사 한번 대접하겠다고 하여도 공직자와 식사하는 게 불편하다며 거절하는 분. 내 삶이 헛되지 않다면 그 이유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즉 김장하 선생은 비록 자신의 장학생이더라도 직접 해당 지역사법권을 관할하는 자리에 있는 동안 사적 만남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문형배 재판관은 결국 진주지원장 임무를 마치고 진주를 떠날 때에야 겨우 밥 한 그릇을 대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선순환이 되면 공동체가 아름다워진다‘라는 블로그 글 아래에추기로 올라와 있다.
2012년 2월 인사발령이 나서 진주를 떠나기 전 식사 한 번 대접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님은 또 거절하였습니다. 언제 다시 뵙겠느냐고 식사 한白居

◆헌법재판소재판관후보자 문형배(...전략) 저는 1965년 경남 하동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태어났습니다. 낡은 교복과 교과서일망정 물려받을 친척이 있어 중학교를졸업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있었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업사로서 번 돈으로 명신고등학교를 건립하여 경상남도에 기증하였고 수백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진주오광대복원사업, 경상대학교 남명관 건립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하여 불합리한 차별을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갚아라‘고 하신 신생의 말씀을 서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법관의 길을 걸어온 지난 27년 동안 저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한민국헌법의 숭고한 의지가 우리 사회에서 올바로 관철되는 길을 찾는 데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선생의 가르침대로 제가 우리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길이라 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제가 헌법재판관에 임명되더라도 지금까지 간직해 온 저의 조심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것이기에, 널리 해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우리 명신과 인연을 맺은 모든 분들의 앞날에 더 많은 성공과 결실이 있기를 기원드리면서 이만 떠나는 인사말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1991년 8월 17일학교법인 남성학숙 이사장 김장하

퇴임 인사말 중 우선 그가 학교를 설립한 이유와 헌납의 이유는 이문장에 압축돼 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 사업이 되었던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전후로 해서 본 명신고등학교는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

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말이다. 그 다음에 보다 현실적인 국가 기증이유가 나오는데, 개인의 능력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제가 계속 이학교를 움켜쥐고, 지원을 나름대로 해 나간다 하더라도 저의 생전이나 또는 사후에 저와 또는 저를 둘러싼 제반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말이다.
즉,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어 왔지만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법.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거나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 여태전 (1961~) 전 상주중학교 교장이 2022년 2월 4일김장하 선생에게 세배를 드리고 난 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있다.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가 "명신고 이사장으로 계속 계시면서 훌륭한 선생님들 든든한 윤이 되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어찌 그리 쉽게 공립으로 전환해버렸습니까?"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그때만 해도 한약방으로 돈도 많이 벌어 학교에 큰 도움이되었을지 몰라도, 나중에 나이들이 그럴 형편이 못되면 괜히 사사로운 욕심이 생길까 두려웠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못난 사학 이사장이 되어 선생님들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려 들 거고, 그렇게 되면 처음 내가 학교를 세우려고 했던 첫마음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던 거요. 교육이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사업을 하려면다른 일로 해야지, 학교를 갖고 사업하는 마음으로 하면 큰일 나는니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그냥 국가가 맡아 달라고 내어놓은 겁니다.*

해둔게 있었다. 길지만 기록차원에서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글은 북한에 대해 객관적이면서도 때로는 비판적으로, 또는 동포에대한 애정어린 시선으로 4박 5일간 보고 들은 것들을 담담히 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 잘 쓴 글이다.

김장하의 북한 방문기

나의 북한 방문은 어렵사리 이루어졌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성사되지 않다가 이번에는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에서 평양 참관 행사에 참여하였다.
나는 6.25전쟁을 겪은 세대이고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평소 북한은 전정을 좋아하는 무서운 나라라는 인식이 들어 우리겨레이면서도 무서운 존재

로 여겨왔기에 별로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의 형님이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이 된 지 5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어 죽은 줄만 알고 지냈더니 재작년 북한에 살아있다고 이산가족 생사의뢰서를 보내왔었다. 그러나하루속히 만날 줄 알았던 이산가족 상봉은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형님이 사시는 북한을 방문해서 무슨소식이나 들을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가보고 싶어 이 행사에 참여한다.
6월 28일장맛비가 내리는 날 김포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인줄 알고 탑승하니 북한의고려항공이다. 탑승하자마자 기내에서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기분이 어쩐지 이상하고 바짝 긴장이 된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평양공항에 착륙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1시간이다. 지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막혀있었던그동안 마음의 거리는 너무 멀고도 멀었다. 내가 이렇게 쉽고 빠르게 건너가볼 수 있으리라고는 이전까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평양공항에 대한첫 느낌은 과연 이곳이 북한의 수도인 국제공항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적막했다. 비행기도 몇 대뿐이고, 그 날 손님은우리밖에 없는 모양이다.
긴장했던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입국 절차를 마치고 마중 나온 버스에 분승하여 숙소인 양각도호텔로 향했다. 양각도호텔은 1995년 완공된 47층의 객실 1001실의 특급호텔이다. 양각도는 대동강에 있는 섬으로, 섬의 모양이 양의 뿔처럼 생겼다고 양각도라고 불린다고 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평양

외곽은 모내기가 끝난 농촌의 풍경이었다. 저 멀리 삼삼오오 논에서 일하는사람들과, 도로에는 가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보따리 짐을 매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내에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찾았던 것은 바로 매대다. 우리 식으로 하면 정부의 허가를 받고 영업을 하는 노점상이라고할 수 있다. 매대에서는 음료수와 간단한 간식을 팔고 있는 듯했다. 평양의거리 풍경은 차량 통행이 적고, 신호등이 없으며 자전거를 많이 타고 간혹 오토바이도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교통수단은 지하철 궤도전차무궤도전차 시내버스 택시인데 택시는 눈에 띄지 않는다.
평양에 제일 먼저 내린 곳이 만수대다. 만수대는 김일성동상이 있는 곳이다.
뒤 평양에 방문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주석님(?)께 인사하는 것인가? 북측사람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바로 김일성 동상 참배란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가 3쌍이나 주석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
양각도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다. 김포에서 서둘러 나오느라 아침식사를 대충 했더니 늦은 점심이라 몹시 배가 고프다. 그런데 밥공기에 밥이 너무적어서 배가 안 찬다. 북한에서의 첫 식사라서 아마도 북한주민들이 굶느라고 이렇게 적게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 달라 소리도 못하고 있는데 접대원이 와시 빈 공기를 보고 밥 더 드릴까요? 한다. 미안해서 반공기만 더 주셔요 했더니 큰 그릇에 한 그릇 들고 온다.
공식 일정대로 만경대고향집을 향했다. 김일성주석 생가를 보존한 것으로평양 방문에서 북이 꼭 보여 주는 곳이다. 호텔에 오기 전에 김일성 동상 앞에서 안내자는 실명을 하면서 계속 ‘위대한 수령님‘을 말끝마다 붙인다. 평

양시내의 큰 건물에는 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형 사진이나 붉은현수막이나 플래카드가 수없이 많다. 만경대고향집에서 해설하는 사람들은또 얼마나 ‘위대한 수령님을 찾을까! 나는 우리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고 북한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이해할 것 같다. 만경대는 김일성 주석의 생가이며 정치가 빼어나 만경대에 오르면 일만 가지 경치를 본다고 만경대라고한다.
평양 시내는 상당히 깨끗해 보였다. 도시 모습도 계획도시답게 잘 정돈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길거리의 사람들 모습도 돼 활기차 보였다. 버스에서손을 흔들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든다. 엄마의 손을 잡고걸어가던 한 아이는 내가 탄 버스를 보고 손을 흔들면서 웃는다. 차에서 내리저 평양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렇게 만경대고향집을 둘러보고 우리는 반경대학생소년궁전으로 향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평양 어린이들의 공연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곳에서 예체능에 재능 있는 어린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교육시키는 곳이다. 건물 모양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품에 안는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 앞에 있는 말은 힘차게 달려오는 어린이들을상화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방과 후 체육 과학 예술 등 다양한 기능을 익히고 숙달된 학생들은 공연장에서 발표를 한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열심히습하는 연습실을 견학했다. 정말 아이들이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의 관람에 익숙해서인지 예쁜 친구들은 우리의 방문에 개의치 않고 자기일에만 열중한다. 사진을 찍든지 말든지 뭔 말을 하든지 말든지 질문을 하던단답형으로 대답만 할 뿐이다. 고사리 손으로 바둑을 두는 모습이 귀엽다

연습실을 관람한 후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날 그곳에는 총린 학생들도 와 있었다. 그 학생들과 우리 일행으로 공연장은 꽉 들어찼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공연이 시작됐다. 독창 중창 춤 국악 등 그들의 공연에 감탄을 연발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들은 아이들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단지 기술자일뿐 창의력이 풍부한 예술가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북측의 교육이나 남측의 교육이나 창의력을 키워주는 교육은 아니다. 남과 북이 세계 어떤 민족과 국가보다 교육열이 높다 하지만, 교육 내용을 보면 지금남과 북에서는 창의력이 부족한 기술자들만 양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평양방문의 첫날 일정도 끝났다. 다음날 백두산 관람 일정을 기대하면서6월 29일아침 7시에 평양공항을 고려항공으로 출발하여 1시간 만인 8시에 양강도 삼지연 비행장에 도착하여 대기한 버스로 백두산으로 향함. 삼지연은 1500고지의 백두고원(개마고원)으로 광활한 평지에 수목이 울창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밀림지대를 도로를 뚫어 2시간을 달려도 평지인 밀림이다. 해발2000m 이상 오르니 지리산과 한라산을 볼 때와는 딴판으로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산등성이를 보고 놀랐다. 백두산은 해발고도약 2000m가수목한계선이 되어 이보다 높은 지대는 짧은 여름철에 풀만자라는 산악 툰드라 지대에 속해 주빙하 지대이다. 천지 주변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가장 더운 달인 7월에도 눈이 남아 있고, 땅속 0.8~1m 깊이 이하에영구동토층이 있어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
삼지연을 출발한 지 3시간만인 11시에 백두산 향도역에 도착하여 걸어서 상

군봉으로 오르다. 2750m 아~ 백두산!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민족의 영산 그러나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이 보이지 않으니 산이 높은지 낮은지 구분이 안된다. 천지의 속살을 쉽게 내보이지도 않는다.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 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山)·신산(山)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 · 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동백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로 인식했다. 백두산은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 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핵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안개 걷히기를 무려 40분이나 기다려서야 기다린 보람으로 안개가 걷힌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일시에 짝거린다. 이제야천지가 발 아래 파랗게 보이고 주변의 웅장한 바위산이 보이고 시야가 멀리보이면서 백두산의 높이를 대략이나마 가늠해 보기도 한다. 언제 다시 옮기

약도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하산길에 오르다.
내가 알기로는 압록강이나 두만강은 천지에서 풀이 넘쳐흘리 폭포를 이루어강의 기원이 되는 줄 알았더니 산정에서 천지는 500m나 밑에 있어서 물이넘칠 수 없고 천지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거울을 이루고 골짜기로 모이면서압록강이나 두만강의 기원이 된다. 천지에서 물이 흐르는 곳은 만주로 흐르는 송화강을 이루어 흐른다. 예정보다 늦은 오후 7시에 삼지만 비행장을 출발 평양공항에 8시에 도착하다.
6월30일오늘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능을 참관한다. 왕능은 평양에서 25km지점에 있으며 고구려는 동명왕을 수호신으로 여겨 수도를 옮길 때마다 (졸본국내성 평양) 옮겨 왔고 장수왕 때 평양으로 이장을 했다고 한 이북은 강성대국의 표본을 고구려에서 찾으려고 동명왕능을 개척하고 숭앙하고 있다. 일제때 도굴되어 유물은 거의 없으며, 무덤 뒤로 신하들의 무덤도 배총으로 남아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왕능 앞 왼쪽에는 성공사寺)가 있으며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 함.
점심은 저 유명한 옥류관에서 냉면을 맛보았다.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비우접대원 아가씨가 빙그레 웃으며 한 그릇 더 할래요? 해서 한 그릇 더 먹었다. 이름난 냉면이라서 그런지 맛있었다. 한 그릇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유로라고 한다. 우리 논으로 5500원이니 북한 주민이 사 먹기엔 부담스러울 것같다. 옥류관은 내동강 기슭 옥류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며, 3개의 건물로이어져 있으며 좌석 수는 1500석이며 하루에 팔리는 냉면 숫자는 1만 그릇

군봉으로 오르다. 2750m 아~ 백두산!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민족의 영산 그러나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이 보이지 않으니 산이 높은지 낮은지 구분이 안된다. 천지의 속살을 쉽게 내보이지도 않는다.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 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 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인식했다. 백두산은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石)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 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 (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안개 걷히기를 무려 40분이나 기다려야 기다린 보람으로 안개가 걷힌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일시에 째깍거린다. 이제야천지가 발 아래 파랗게 보이고 주변의 웅장한 바위산이 보이고 시야가 멀리보이면서 백두산의 높이를 대략이나마 가늠해 보기도 한다. 언제 다시 옮기

약도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하산길에 오르다.
내가 알기로는 압록강이나 두만강은 천지에서 물이 넘쳐흘러 폭포를 이루어강의 기원이 되는 줄 알았더니 산정에서 천지는 500m나 밑에 있어서 물이넘칠 수 없고 천지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개울을 이루고 골짜기로 모이면서압록강이나 두만강의 기원이 된다. 천지에서 물이 흐르는 곳은 만주로 흐르는 송화강을 이루어 흐른다. 예정보다 늦은 오후 7시에 삼지연 비행장을 출발 평양공항에 8시에 도착하다.
6월 30일오늘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능을 참관한다. 왕능은 평양에서 25km지점에 있으며 고구려는 동명왕을 수호신으로 여겨 수도를 옮길 때마다 (졸본 국내성 평양) 옮겨 왔고 장수왕 때 평양으로 이장을 했다고 함. 이북은 강성대국의 표본을 고구려에서 찾으려고 동명왕능을 개축하고 숭앙하고 있다. 일제때 도굴되어 유물은 거의 없으며, 무덤 뒤로 신하들의 무덤도 배총으로 남아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 왕능 앞 왼쪽에는 정릉사陵寺)가 있으며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 함.
점심은 저 유명한 옥류관에서 냉면을 맛보았다.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비우니 접대원 아가씨가 빙그레 웃으며 한 그릇 더 할래요? 해서 한 그릇 더 먹었다. 이름난 냉면이라서 그런지 맛있었다. 한 그릇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4유로라고 한다. 우리 돈으로 5500원이니 북한 주민이 사 먹기엔 부담스러울 것같다. 옥류관은 대동강 기슭 옥류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며, 3개의 건물로이어져 있으며 좌석 수는 1500석이며 하루에 팔리는 냉면 숫자는 1만 그릇

이라니 어안이 벙벙하다.
오후에는 대동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대동강을 돌아본다. 양각도 능라도를오르내리며 모란봉 을밀대는 먼눈으로 구경하다. 대동강에 설치한 2개의 거대한 분수는 지상 150m 까지 물줄기를 쏘아 올리고, 강에는 보트 놀이하는사람들이 수없이 나와 여유를 즐기며, 낚시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와 한가로운 풍경이다. 일요일도 아닌데...
7월 1일오늘은 평양에서 150km 지점에 있는 묘향산을 관람한다. 묘향산에는 국제친선전람관을 참관하다. 이 전람관은 김 주석과 김 위원장이 외국의 국가원수나 친지들에게서 받은 선물을 한 데 모아 보관 전시하는 곳이다. 산의 지하를 파서 웅장한 대리석 건축물에 약 30만 점에 달하는 국보급 보물들이 보관된 곳으로 전쟁이나 폭격에도 견딜 견고한 전시장이었다. 수많은 전시실을모두 관람하려면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점심은 향산호텔에서 맛있게 먹고오후는 보현사 관람이다.
묘향산의 주봉인 비로봉은 1909m이며 기묘한 봉우리들과 기암절벽 깊은계곡, 기운차게 떨어지는 폭포수, 봄철의 꽃향기와 여름철의 짙은 녹음 가을의 눈부신 단풍 겨울의 설경 거기에 갖가지 새소리까지 어울려 뛰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서산대사께서 전국의 명산을 다 돌아보시고 금강산은 빼어나되 웅장하지 못하고(秀而不壯) 지리산은 웅장하되 빼어나지 못하며而不秀) 묘향산이 금강산의 빼어남과 지리산의 웅장함을 두루 갖췄다(亦秀)라고 하신 명산이라 한번 꼭 와보고 싶은 산이었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상

붕의 등산은 가보지 못하고 보현사를 들러본다. 보현사는 고려 때 창건한 절인데 이북에서 비교적 잘 보존된 사찰이다. 국보도 여러 점 있고 특히 서산대사가 수많은 제자들과 숭병을 이끌고 임진왜란의 국란에 뛰어들어 많은 전공을 세우고 말년에 보현사에서 생을 마치셨다. 제자들이 어찌 불제자로서사람을 죽이는 전쟁에 참여합니까? 라고 묻자 일사다생(一死多生)이면 즉한사람을 죽이고 여러 사람을 살린다면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승병을 모으셨단다.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오고가는 청천강은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답다. 자연환경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 그 옛날 살수에서 수나라 군사를 무찌르던 을지문덕장군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듯. 그러나 낚시하는 주민들의 한가로움이 풍경화를 보는 듯 어울린다.
저녁에는 북측의 민화협에서 환송연회를 베풀다. 연회 후에는 내일은 헤어진다며 평양 체류 중에 3호차에 타고 며칠을 같이 여행하였다고 단합대회를 하자고 한다. 47층 회전식 스카이라운지에서 모였다. 각자 소개를 하는 자리에서내 차례에 진주에서 왔으며, 형님이 북한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이라고 말하고평양에 살고 있을 것 같은데 아무 소식도 못 듣고 돌아가게 되어 마음이 무겁다고 말하자, 모두 안타까워하면서 분단의 아픔을 위로하면서 같이 동행했던김원중 가수는 즉석에서 노래를 2곡이나 불러 이별의 아픔을 달래준다.
이번 북한 방문은 그동안 궁금했던 북한의 실상을 접하기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농촌의 실상을 볼 기회가 없었고, 평양 주민들과의 접촉은 거의 불가능이었다. 그들이 보여 주는 것 외에는 볼 수가 없다. 만나는 상대는 안내원, 접대원 해설강사 그리고 호텔 종업원 정도이다. 그래서 북한 방문기를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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