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건 페미니스트인 Y에게
장춘익
페미니스트를 보면 짜증 난다는 사람이 많지. 문제는 남자만 그런게 아니라 여자들도 그렇다는 것이 아마 상당히 당혹스러울 거야. 페미니스트는 일종의 적대국의 국민인 것 같아. 어떤 사람이 적대국의 국민으로 분류되면 상대는 그에게서 그 사람의 개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속성만 확인하면 되지. 그런 사람의 경우엔 이름을 부르지 않아. 집합명사로 표시하고 ‘그런 부류의 또 하나‘로 취급하면 되지. 굳이 이름을 부를 때는 대개 확인 사살이 필요할 때뿐이야. 보통은 성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여자를 보면, ‘또 하나의악악거리는, 짜증 나는 페미니스트로군‘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안타깝지만, 의외일 수는 없어. 장구하게
유지되어 온 권력과 문화에 도전하는데 어찌 개인의 이름이 불리기를 바랄 수 있겠어? 또 창검을 빼 들고 무시무시하게 달려들기보다는 작은 칼로 여기저기를 들쑤시는데, 짜증 나지 않겠어? 그리고 오래 가는 항의는 아무튼 짜증 나는 거야. 내가 잘 돌보고 싶은 아이도 자꾸 울면 짜증 나는데(의학상의 이상증세로 끊임없이 우는 아이를 평소 아이들에 애정이 많은 여성에게 폐쇄된 공간에서 돌보도록 하니까, 3일 정도 지나서 살해 충동을 느끼더라는 결과를 낸 실험도 있었지), 별로 동의해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자꾸 하면 정말 짜증이 안 나겠어?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런 반응에 대해 존중심을 가지라는 것은물론 아니야. 사람들의 짜증 내는 반응을 자꾸 접하면,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과도 자주 다투게 되면,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초라하게느껴질 수 있을 텐데, 그때 어쩌겠느냐는 이야기를 하자는 거야. 반복되는 항의가 사람을 초라하게 느끼도록 만든다는 것은 분명한것 같아. 항의는 내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같은 항의가 오래 반복된다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결핍의 상태에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항의 기간이 길어지면 저쪽은 짜증 나고 이쪽은 초라하고 비참한 거야. 이런 느낌은 인지상정이야. 인지상정이라고 하지만, 일단 그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너무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기 때문에, 어떤 대비를 해야 돼. 설마 네가 "불만은 나의 힘" 이라면서, 대립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역시 역사적소명의식이 너를 뒷받침하는 가장 큰 힘이겠지. 그러나 나는 그 이
야기는 접어두고 싶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좀 더 개인적인 문제야. 감히 조언자 역할을 해도 된다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네가 세상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새로운것을 흡수하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다는 것이야. 뿌리에서 흡수하는것보다 많은 수분을 방출하는 식물은 고사한다. 대기의 온도가 높을수록 더 많은 수분을 빨아들여야 하지. 항의할 줄 알아야 하지만, 나중에 자신이 쿨 것도 있어야 한다. 세상에 애정과 호기심을 가지고, 네 지식과 정서의 저장고를 듬뿍 채워두어라. 페미니즘이네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 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것이야. 페미니즘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너의 기쁨을 찾는다고 해서 항의의 진실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란다. 오히려 너의 기쁨과 생동성만큼 너의 주장에 전반적인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것도 없단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내놓거나 혹은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에 다른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도록 해라. 그렇게 하려면 너에게 어떤 즐거움이 있어야 한단다. 종교 수행자가 괴로운 표정만 짓고 있으면 사람들이 호기심을가질 수 있겠니? 다 버리고도 잔잔한 미소를 짓는 그런 ‘다름‘에 비로소 사람들이 압도되는 것이지. 페미니스트면서 나름대로 멋지고행복하게 살아라.
P.S. 내가 이 글을 쓸 때가 한여름이다. 네가 해충박멸에 너무 진을빼지 말고 익종보호에 더 힘쓰기를 바란다. 그게 더 현명한 농법이다. 아, 내 이름의 ‘익‘ 자는 다른 ‘익‘ 자이니 나를 보호할 필요는없단다. 그리고 너를 어쨌건 페미니스트‘라고 부른 것은 네가 페미니스트라는 명칭을 반쯤 불편한 심정으로, 그러나 피하지는 않겠다는 심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였다.
장춘익 교수는 2000년대 초반 개인 홈페이지 ‘날개통신‘을 운영했다. 학생들과의 다양한 대회를 위해 운명된 이 개인 홈페이지에 그는 종종 에세이를 연재했고, 많은 학생 독자들이 그 에세이를 읽었다. 이 글은 2003년 게재되어, 당시 여러 한림대 동아리와 커뮤니티에 공유되었다.
평등에 대한 논쟁은 (・・・) 그동안 페미니스트 저작들에서 평등-차이논쟁으로 언급되어 왔으며 (...) 해결하기가 더욱 어렵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 여성들이 남성과 똑같아지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 아니면 남성들과 차이가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다. ()
만일 여성들이 남성과 평등하다고 주장한다면, 여성들은 어떤 남성과 평등하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 평등을 주장해야 하는가? 여성들은 기호의 평등을 주장해야 하는가? 그리고 만일 여성들이 차이를 인정하고자 한다면, 그러면 이런 차이들은 자연적, 생물학적인 차이인가, 아니면 특별한 사회적, 경제적 조건의 결과의 차이인가? 이러한 것들은 평등- 차이 논쟁이 불러일으키는 많은 문제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그리고 이런 논쟁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완전한 사회적, 정치적 시민권에서 여성을 배제하는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왔다는 사실이다. (...)
그렇다면 성차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페미니스트들은 역사적으로 남녀 간의 자연적 차이가 가정되어 온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이러한 차이가 상이한 사회와 문명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방식을 분석해왔다. (...)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섹스의 사회적 구성을강조할 필요성 때문에 젠더라는 용어를 거부해 왔다. (...) 예를 들어,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s)는 섹스는 사회적 구성물들일 뿐이며 남성들과 여성들을 분리하는 것은 자연 또는 인간 생물학에 어떠한 근거도 두고 있지 않은 사회적 권력관계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
장한다. (제인 프리드먼, 「페미니즘 29~46쪽)보통 불리한 처지는 차이를 통해 정당화되었다. 차이에 차별을 연결 짓는다. 전략차이는 없다. 혹은 별로 없다 - 최소주의차이는 있다. 심지어 장점이다. 최대주의차이는 있더라도 중요하지 않다. 차이는 정말 있는가? 차이의 성격은 무엇인가? 차이는 자연적 차이(생물학적 차이) 인가, 사회문화적 차이인가? Sex: male - femaleGender: masculine - feminineGender 개념의 유래, 장점- 남성성/여성성이 사회, 문화적 구성물이라면 달리 될 수도 있다. Sex/Gender의 이분법의 약점Sex를 생물학적인 것으로 고정, 섹스도 젠더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Sex란 사실 (a,b,c,d, x) (a,b,c,d,...y) 인데 특정한 요소를 집어내어 그것이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장춘익 메모, 2011.03.10)프리드먼은 평등과 차이를 둘러싼 복잡한 페미니즘 이론적 논쟁의맥락을 부각하고자 한다. 그에 반해 장춘익의 교안은 문제적 경험, 즉 생물학적 성차에 사회문화적 차별을 결부시키고 차별을 자연적으로 조건화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억압적데올로기 효과가 나타난다는 문제적 경험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문제적 상황을 해소할 페미니스트의 전략을 두 가지로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등과 차이를 여성(주의)의 본질적 실존 조건으로 해석해내기보다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재생산되는 성차별을 해소하는 전략의 문제, 즉 페미니즘이 가부장사회의 여성차별에 맞서고 그 위계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두 가지 대응 방식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이론을 인식된 ‘문제‘ 경험과 그것을 해소할 ‘답‘으로재구성하는 이런 방식은, 이론적 지식을 전달해야 할 완결된 정보가아니라 그 지식을 탄생시킨 원래의 경험적 문제 상황에 대해 묻고 답을 찾는 사유의 과정으로 되돌리는, 실천적 맥락으로의 재의미화라고 할 수 있다. 문제적 경험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실천적 맥락으로의 사유의 재의미화‘는 사실 좁은 의미의 덱스트 해석뿐 아니라 젠더화된 세계의 현실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젠더 문해력 (gender literacy)‘ 의 획득에 필수적이다. 사회문화적 젠더 상징기제들은 개인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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