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학원에 다니셨어요. 그걸 배워 나중엔 천리안에서 웹페이지도 만들었죠."
김주완, "그렇더라고요. 저도 에이치티엠엘(html)을 막 배워 홈페이지를 만들어보려던 시절 검색을 했더니 김장하 선생님 홈페이지가나오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때 첫 화면 사진이 촉석루와 남강이었는데, 그 남강 물이 찰랑찰랑하게 인터넷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렇게 돼 있더라고요."
홍창신, "젊은 사람들 기죽이는 일을 많이 했지. 게다가 나중엔 포토샵도 배우려고 했어요. 다행히 거기까진 안 하셨지만, 그것까지 매웠다면 우리는 완전 야코가 죽었지."

그랬다. 1990년대 중반 무렵이면 언론사도 원고지에 펜으로 기사를 쓰는 시대에서 노트북으로 타이핑하여 송고하는 시대로 막 전환하던 때였다. 내가 30대 초입이던 시절이었는데, 40~50대 선배 기자들은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해?"라면서 컴퓨터에 강한거부반응을 보였다.
그 무렵 50대였던 김장하 선생은 스스로 컴퓨터 학원 문을 두드렸다. 수강생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고 했다. 3개월 과정이었는데, "마지막엔 혼자 남더라"고 회고했다. 포토샵도 학원까지 가진 않았지만실제 공부를 한 듯 남성당한약방 응접실 책장에 1999년 출간된 『포토샵5 무작정 따라하기』(길벗)라는 책이 꽂혀 있었다. 

이를 보면 그는늘 새로운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이었고, 항상 공부하는사람인 듯했다.

박선생처럼 내 사상을 돌리려고(웃음) 선물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강민아, "하하. 선생님 개그 코드가 있으시다. 확실히."
개그 이야기가 나오니 홍창신 전 이사장이 한마디 보탰다.

"김장하 선생님 어록 중에 인상적인 게 하나 있는데, 형평 80주년(2003년)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인도에서도 불가촉천민(달리트) 대표로 왔었고 일본의 부락 해방연구소에서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진주성 안에 있는 박물관 세미나실에서 인사말을 하는데 첫 마디가 뭐였나 하면요."
"?...?...?"

"여러분은 지금 진주성에 무혈입성하셨습니다."(일동 웃음)
알다시피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던 전쟁터였다. 일본 사람들 앞에서 뼈 있는 유머였던 것이다.

홍창신 전 이사장은 이후 페이스북을 통해 김장하 선생의 유머 한토막을 소개하기도 했다.
"얼마 전 저녁을 먹고 노래방 얘기가 나왔는데 선생이 물었다.
 ‘빌게이츠가 노랠 어떻게 부르는지 앎 ?‘ 
‘......?‘ ‘마이크로 쏘푸트하게‘(모두 웃음)"

2022년 남성당한약방 문을 닫고 마침내 김장하 선생이 은퇴하자그를 좋아하는 40·50대 후배들이 월 1회 선생과 등산모임을 추진했다. 이른바 ‘불백산행‘이다. 
폐업을 앞둔 어느 날 "곧 백수가 되시겠네요?" 하는 질문을 받은 선생이 "불백이라고 하데? 불러줘야 나가는 백수라고..."라고 대답한 데에서 따온 이름이다. 

영은재 

기영은처사 김해 김공께서는 처음에 철성(고성)의 부련동 영천강 위에 사시다가 만년에 사천의 니구산 아래에 있는 노천 위에 집을 정하셨다. 조용히 살고싶어 마음 속으로 찾던 마을의 이름이 공자님의 고향과 비슷하니 이 또한 우연스럽지 않았다. 거기서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닦으며 여든 살까지 사셨다. 
세상을 떠나신 지 스물세 해가 된 임신년에 그분의 손자 장하가 여러 친척들과 의논하여 사시던 집터에 재실을 짓고 그 집이름을 영은재라 하고는나에게 그 기문을 청했다. 나는 이제 너무 늙고 병들어 글 지어 달라는 부탁을 사절하고 있었지만 장하와는 깊은 친분이 있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에

그 행장을 살펴 이 글을 짓는다.

이분의 선조는 가락국의 빛나는 겨레로서 십이대조 되시는 유계 선생께서조정암 선생과 도의로 사귀신 탓에 기묘사화록에 올리게 되었다. 이 뒤로 그후손들은 대대로 맑고 높은 절개를 지키며 살았는데, 이분의 호가 영은인 것도 바로 그런 뜻이다.
대저 이분은 타고난 인품이 여느 사람과 다르고 모습도 늠름하셨을 뿐 아니라. 생각하시는 바가 넓고 깊었다. 일찍이 경사와 제자백가를 통달하시고 결들여 의약과 음양과 지리에까지 세밀히 공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지극한 효도로써 부모를 모셨으니 가히 하늘의 밝음에 통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바가 있었다.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정성을 다해 조상을 모시고 가산을 기울여 여러 선조늘 산소를 다듬어 남의 이목에 빛나게 했다. 향교의 책임을 맡았을 때에는 남전의 여씨향약을 세워 다달이 고을의 풍속을 바로잡아 가도록 강론하였으며, 아들과 손자를 가르치심에 자애와 엄격을 아울러 다함으로써 뒷날 반드시 몸을 세우고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일찍이 ‘사람은 마땅히 올바른 것에 마음을 두어야지 재물에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하셨더니 이분이 돌아가신 뒤 상하가 한약업을 직업으로 하되 올바름으로 재물을 쌓아 수백억을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세워서는 나라에 바쳤다. 그리고는 천만영새가 골고루 그 혜택을 입게 하고 자신은 터럭만큼의 이익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온 고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크게 칭송하였으나 장하는 ‘우리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 저의 뜻에서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고

늘 말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이분을 더욱 우러러 마지 않았다.

옛날에 손목자가 이 세상에 썩지 않는 것 세 가지를 이야기하면서 첫째는덕행이요. 둘째는 사업이요 셋째는 문장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이분의 덕행과 사업이 진실로 천고에 썩지 않을 것이니 이 재실을 짓는 것이 어찌 헛된일일까 보냐! 앞으로 이 재실에 오르고 이 재실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분이 평소에 지니셨던 모습과 정신을 우리리 사모하여 본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자손만세토록 제사를 모시는 곳일 뿐 아니라 또한 때묻고 더러워진 세상의 길을 깨끗이 씻을 수 있게 할 것이다. 아아, 말하기는 참으로 쉬운지고!
임신년 백로절에 분성 허형은 쓰다

할아버지의 호 ‘영은(潁隱)‘은 ‘영천강(江)에 숨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영천강은 고성군에서 발원해 진주시 문산읍을 거쳐 금산면속사리에서 남강과 합류한다. 이 기문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원래 고성 사람이었는데, 만년에 사천으로 이주했다.

또한 ‘세상을 떠나신 지 스물세 해가 되는 임신년(1992년)‘이라 했으니 역으로 계산해보면 1969년 또는 1970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보인다. 그때는 손자 장하가 만 25~26세, 사천 석거리에서 한약방을 연지 6~7년째 되는 해였다.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했다‘는데, ‘경사(史)‘는 경서(經)와 사서, ‘제자(諸)‘란 여러 학자, ‘백가(百家)‘란 수많은 학파를 뜻하는 말이니 그만큼 한학을 두루 깊이 공부한 분이었다는 말이다. 또한 의학과 음양, 지리까지 공부했다는 말도 나오는데, 내가 어느 자리에서 김장하 선생에게 "할아버지는 어떤

이렇게 영은재 가문만으로 성에 차지 않아 할아버지 묘소의 비문(무)을 찾아봤다. 그런데 아뿔싸! 비문 또한 전부 한문으로 되어있는데, 내 짧은 한자 실력으론 번역이 아예 불가했다. 한자를 좀 읽는것과 한문을 해석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결국 서예가이기도 한 이곤정(1961)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그가 다시 소개해준 사람이 허형 선생의 아들 허만수 봉림서당 훈장이었다. 이 무슨 우연인가? 히 훈장은 흔쾌히 번역을 해주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정원(元)공은 자(字)가 태규)이고 자호를 영은이라하였다.
아버지 김반장과 어머니 신앙심씨 사이에 고종 기후, 1883년)이출생하였다.
공은 체격이 크고, 기량 사람이 가진 마음과 생각의 깊이)이 크고 깊었다. 부모를 섬김에 숨어든의 명령을 좇아 마듭하여 이김이 없었고, 형제간에 매우 우애가 있었다.
부친의 병환에 근심이 얼굴에 나타나고 약이 약물과 음식물을 이슬러 이는 말)를 반드시 손수조리하고 여서 님에게 맡기지 아니하였다. 조상을 당함에 가슴을 지고 뛰면서 슬픔을 다하고, 여러 절차를 한 자가家)를 준수하여 시행하였다.
부친의 상복을 마치고 날마다 어머니를 곁에 모시고, 때때로 보고 들은 것을말씀드리면 그 이야기 듣기를 기뻐하셨다. 외출하다가 특이한 맛있는 것을

김장하의 할아버지 김정
만나면 반드시 가슴에 품고 돌아와 어머니께 올렸다.
후일 초상이 나자 또한 앞의 초상과 같이 했다.
공은 일찍 가무 (집안의 일)를 담당하면서 남은 힘으로 독서하여, 경서(經)와 사기(史記)에 거의 넉넉하였고, 의약 음양(陰陽)에도 다 마치고풍수지리(地理)에도 깨달음이 있어서 그 선대의 묘를 많이 옮겼다.
일찍 고성(固)의 문묘 공자를 모신 사당)에 장의(掌儀)를 했는데, 남전여씨 향약(鄕約)으로 퇴폐한 풍속을 장려하고 돈독히 하였으니, 지금까지 그 일을 칭송한다.
문족이 전부터 청한하여 선대를 위한 사업에는 겨를이 많이 없었다. 공이 처음으로 모의를 시작하여 재물을 모으고 부지런히 하여,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갖추며, 종실)을 세우고 재숙(宿)에 밑

천을 대는 일에 거행치 아니함이 없었는데, 공은 이 때문에 자기의 재산을 황페시켜 스스로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집안에 도움을 받는 일이 두시에 이르자, 공이 성을 내어 거절하고, 드디어 권속()을 이끌고 사노천(원)으로 이사하여 여러 해 동안 고생하다가 마침내 풍요롭고 이유를이루었다. 그리하여 만년의 즐거움을 두었으니, 그 경제)에도 넉넉함이 다시 이와 같았다. 매양 사기를 읽다가 왕조(王)의 성씨 바를꾸면서 나라를 잃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일찍 책을 덮고 단식치 아니함이 있있다. 경술(庚戌 1910년 뒤 서울에 가서 고궁(古宮)이 황무한 것을 보고는 슬픈 탄식을 이기지 못하여 시를 지어서 뜻을 나타내었다. 경인1950년)에 북한군이 밤에 집안 뜰에 들어와 방자하게 닭과 돼지를죽이고, 겁탈을 행하려 하니, 공이 천천히 의리로 깨우치게 하므로, 저도 또한알아듣고 귀농했다.
집에 있을 시에는 인자와 언嚴格)을 아울러 베풀며 대제(大)보존하기에 힘썼다.
사람들과 더불어 지진을 경계하기든, 효제공경)으로 하여 부모(父)와 선조(先)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고, 근검으로 생활을 다스리고, 재물에 탐욕 내어 결손을 손상시킴으로 치무)을 초레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 말씀이 그 집안을 크게 했다고 이를만하다.
(중략)경술(1970)12월 21일에 좀하니 향년 82세이다.
한신안풍인 짓고

아들 김병수(水) 쓰고손자 김장하(金) 표석을 세우다

이 비문을 보니 생몰연도가 확실해졌다. 1889년생으로 82세인1970년에 돌아가셨으니 손자 장하의 나이 27세 때였다. 또한 앞의기문에서 ‘향교의 책임을 맡았을 때에는‘이란 문장이 있는데, 비문에는 ‘고성의 문묘에 장의를 했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장의또는 란 향교에서 예식이나 교육을 관장하던 직책이다. 흑시나 하여 고성향교를 통해 역대 장의 명단을 확인해봤으나 아쉽게도 전교() 명단은 남아 있지만, 장의 명단은 남아 있는 게 없다고했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기문과 비문에서 모두 향교의 직책을 맡아 ‘남전 여씨향약‘으로 고을의 풍속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씨향약이 뭔지 찾아보니 11세기 초 중국 북송(北宋) 때, 향촌(村)을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자치적인 규약(規約)으로 ‘좋은 일은서로 권장한다. 잘못은 서로 고쳐준다. 사람을 사귈 때는 서로 예의를지킨다.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는 4가지를 강령으로 했다고한다.(비문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이 호적부와 다르게 나오는데, 이는족보상 이름과 호적상 이름이 달랐기 때문이다.)비문에도 역시 자식과 조카들에게 "근검(勤儉)으로 생활을 다스리고, 재물에 탐욕 내어 겸손을 손상시킴으로 치욕을 초래치 말라"고했다는 말이 나온다. 앞서 기문에서 손자장하에게 가르쳤다는 내용

것을 권유했지만, 시험을 치게 되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명신고 교지 《명신> 창간호 인터뷰에 당시 상황을 술회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주위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1962년 그러니까 내가 18살 때 일이었어요. 아버님(할아버지의 오기)에게서 소개받은 친구분 밑에서 약방 일을 돕다보니 어느 정도 한약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도 했고요. 
그러던 어느 날, 한약사 시험이라고 일종의 한약업 면허증 시험이 있었어요. 무척 망설였지요. 어린 나이에 한약사시험을 치르면 남들이 비웃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반대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했지요. 욕 얻어먹더라도 일단 시험이나 치르고 난 뒤에 얻어먹자는 배짱으로 시험을 치른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미성년자에게는 자격증을 발급하지 않는규정 때문에 6개월을 더 기다려 1963년 1월 16일 그의 주민등록상생일에 맞춰 한약종상 허가증을 받게 되었다. 미성년자가 자격시험에 합격한 일은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는데, 이것이 김장하가 자신의운명을 바꾸는 첫 번째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이후 한약종상 시험은 한동안 없었고 13년이 지난 1975년에야 있었으니 그때 시험을 치지 않았다면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 시험제도는 당시 무의약촌을 해소하자는 차원의 정책이었던 만큼 약방이나 의원이 없는 지역을 정해 광역시·도 단위로 치러졌다.

"그냥 얌전한 아이였던 기억이 나요. 참 2학년, 3학년 땐가? 장하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 어린 마음에도 참안됐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네요."
최 교수는 "장하가 1944년생이지만 음력으로는 43년생이어서 같은 계미생 양띠이고, 그래서 동갑게도 함께하고 정동초등학교 22회동기 모임도 같이 하고 있다"며 "그때 같이 졸업한 동기가 90명인데,
지금도 모임을 하면 30여 명이 모인다"고 말했다.
말 나온 김에 최관경 교수에 대해서도 좀 기록해두자면, 여러 모로독특한 면모가 있는 분이었다. 이분도 김장하 선생처럼 자가용 승용차를 가져본 적이 없다. 걷는 걸 좋아하고 등산을 즐긴다. 게다가 현직교수 시절이었던 1988년부터 2006년까지 18년간 매일 새벽 신문배달을 했던 이력도 있다. 찾아보니 공교롭게도 내가 재직했던 《경남도민일보》 2003년 8월 23일자에 ‘구두쇠 열전‘이라는 제목으로 최교수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었다.
"환갑이 되어버린 나이에도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데 대해 주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 돈(?) 때문이라고 이상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문배달은 돈이 목적이 아니다. 딸 때문에 우연찮게 시작한 신문배달은 교육자인 나로서 많은 것을 배운다. 신문배달원을 무시하는 사람들로인한 인권, 내 자신에 대한 통제와 전제, 꼭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 다른 사람에 대한 겸손함, 우유배달원·환경미화원 · 경비원 등 모르는 사람 그리고 가족들의 참여로 가족간의 화목 등이다.

특히 교수라는 직업에서 올 수 있는 거만함을 통솔할 수 있어 좋다. 신분을 감추고 또 다른 조그마한 삶을 살면서 그 삶이 지닌 가치를 경험하고 있다.
아내와 함께 하는 신문배달 부수는 140부 정도. 돈으로 치자면 얼마 안 된다.
신문배달 때문에 하루에 10개의 신문을 본다. 정보도 알고 다양한 삶의 방식도 접한다. 이를 통해 알게 된 정보를 학생들과 교류하고 배움에 접목한다."
뿐만 아니다. 여름에도 선풍기나 에어컨을 켜지 않고, 5000원짜리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구두쇠지만 전공서적 등 책 구입비만 한 달에50만 원 선이다. 그리고 구입한 책을 모두 읽고 선물한다. 글은 이렇

자인 김훤주(1963~) 출판국장이 정동초등학교를 찾았다가 거기 세워져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보고 감동받아 페이스북에 올랐다. 그는 지역탐방을 나가면 오래된 학교를 찾아가 이런 길 세세히 살피는 버릇이 있다.

‘사천 정동초교 교정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이렇게 꼼꼼히 만든상을 아직은 본 적이 없네. 장군의 연대기까지 간략하지만 적었다. 거북선 모형과 해전 부조 그림도 있고첨부된 사진을 확대해보니 ‘증 제22회 졸업 김장하 1978.4.28 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댓글로 김훤주 기자와 대화를 나눴다.
"헐. 기증자가 김장하 선생!"

으로 폐지되기까지 진삼선 철도의 선진역이 있었던 마을이며(개에서 사천읍간의 철도는 1953년에 개통하였음) 1963년에는 용남공설시장이 섰던 곳으로 유흥업소도 많았고 경제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1952년 5월 1일에개교한 용남중학교와 1967년 10월 5일 개교한 용남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석거리는 섬거리가 변음되었다고도 하는 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덕석골에서 나는 곡식을 섬에 넣어 쌓아 두던 거리라 하여 섬거리란 이름이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이야기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사천시 용현면사무소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선진리 신기마을에 대한 설명이다. 박대지 (1936~) 용현면 노인회장은 "저기 앞에 신복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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