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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8월
평점 :
저는 고등학교 때 일 년정도 연극반 활동을 했었습니다. 어렸을 때 일본 만화 '유리가면'을 너무 감명깊게 읽고 나서 연극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때문에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연극반에 들어가기로 생각하였고, 마침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가 연극반에 들어갔다는 말에 수줍게(수줍었던 거야, 그거) "저기, 나도... ..."라고 말하며 연극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시작한 연극반 활동은 굉장히 힘이 들었지만. 다른 의미로 굉장했습니다. 이런 세상도 존재했구나, 다른 아이들은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같은 묘한 깨달음을 얻었달까요. 또,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괴담입니다. 제가 속한 연극반에만 내려오는 괴담. 저희가 연극을 했을 때엔 딱히 분장실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시청각실서 연극을 하고 나면 근처 과학실에서 분장을 지우곤 했었는데요, 그 곳에 옛날에 귀신이 나왔었다는 겁니다. 사연인즉하니,
몇 명의 연극반 아이들이 연극이 끝나고 분장을 지웁니다. 과학실서 세수를 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아아, 어떤 게으름뱅이가 아직도 분장을 다 못 지웠나? 의아해하며 묻습니다.
"어서 나와, 뭐해! 문 잠근댔어!"
"응, 걱정말고 가! 나 다 씻고 문 잠그고 갈게!"
일상적인 대화를 끝내고 아이들은 친구를 혼자 두고 과학실을 나옵니다.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무슨 일이 있겠어? 라고 생각하여 1층까지 내려옵니다. 현관을 나서 기다리던 선배나 후배들과 합류합니다. "자, 가자! 뒷풀이다!" "떡볶이가 우릴 기다린다!" 하며 가려다가 마지막에 나온 아이가 "앗, 아직 안 나온 사람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네가 마지막이야.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요. 아까 분명 과학실에서 누가 얼굴을 닦고 있었는데요?"
아이는 의아해 하며 고개를 듭니다. 5층 꼭대기, 과학실을 바라봅니다. 불이 꺼져 있습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흐릿한 그림자조차 없고, 아이는 놀랍니다.
그렇다면 방금 전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누구지?
... ... 모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갑니다.
또 다른 괴담은 직접 겪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연습을 끝내고 계단을 내려갑니다. 황혼이 질 무렵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둘렀습니다. 다들 학원이다 뭐다 바빴으니까요. 그리하여 3층 계단의 모퉁이를 돌아 내려가는데 왠 시커먼 사람이 계단 중간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놀라서 비명을 지릅니다.
"왜 그래?"
앞서 가던 선배들이 의아하다는 듯 묻습니다.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이상합니다. 층계참에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갓을 쓰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그곳에 앉아 있었는데요.
"어서 와, 빨리!"
선배들의 말에 약간 얼굴이 굳어 내려갑니다.
"이상하다 거기 분명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
그러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따라 말합니다.
"나도 봤어...!"
"나도, 나도!"
우리는 놀라 서로를 바라봅니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너도 봤어? 너도 봤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입니다.
도대체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그 외에도 갑자기 열린 커튼, 자살한 여고생이 보인다는 옥상, 중학교에서 일어난 분신사바 악령퇴치 소동, 우리의 주변은 늘 불가사의한 일들 투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연극 연습을 했고, 우정을 다졌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괴담이 필요합니다
괴이 +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어른이 되고 나서는 이런 괴담을 겪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머리가 굵어져서인가 봅니다. 때문에 우리는 괴담을 보려고 영화관도 가고, 도서관도 갑니다. 저 역시 이 책, '괴이'와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를 도서관서 먼저 만났더랬습니다. 첫 만남은... ... 끝내줬습니다.
괴이에는 제목처럼 괴이한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묘한 것들이 잔뜩 나옵니다. '꿈속의 자살'에서는 기묘하게 죽은 남녀가, '그림자 감옥'에서는 수수께끼의 망령의 정체가, '이불방'에서는 잘 되는 장사집의 비밀이 밝혀지고, '매화 비가 내리다'에서는 아름다움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야기합니다. '아다치 가의 도깨비'에서는 과연 도깨비란 무엇일까 그 정체를 생각케 하고, '여자의 머리'에서는 귀신도 나름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을비 도깨비'와 '재티'는 사람의 마음 속에 숨은 말 그대로 심마心魔를 들여다 봅니다. 마지막 이야기 '바지락 무덤'은 이 으스스한 이야기를 모두 모아 또 하나의 미스테리를 숙제로 던져 줍니다. 우리는 그 숙제를 받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져 앞장을 넘깁니다. 많은 에피소드들 중 "아앗!"하고 소리를 치며 "이건 설마!"하고 말하게 됩니다. 이 중에서도 저는 특히 '아다치 가의 도깨비'를 좋아합니다. 175페이지에서 6페이지로 넘어가는 내용인데요, 자세히 인용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피하고 피하여 이 문장만 소개하기로 합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늘 등을 맞대고 있단다. 행복과 불행은 앞면과 뒷면 같으니까." p. 176
그밖에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 중 '매화 비가 내리다'는 같은 작가의 작품 '미인'을 떠올리게 하고, '아다치 가의 도깨비'는 최근 발간한 '안주'를 떠올리게 하니, 이 작품을 재미나게 읽었다면 두 단행본도 겪어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괴담에는 '읽다'보다는 '겪다'가 어울립니다, 안 그래요?)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는 괴이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괴이에 말 그대로 괴이한 이야기가 가득하다면,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에는 한 명의 '탐정역'이 등장합니다. 이야기 자체는 기이해 보일 수 있으나 풀이 과정은 인간의 눈높이로 진행됩니다. 한쪽에만 잎이 난다는 '외잎갈대', 밤중에 길을 가는 누군가를 늘 쫓아가는 '배웅하는 등불', 낚시꾼에게 두고 가, 두고 가 라고 속삭이는 요괴가 산다는 '두고 가 해자', '잎이 지지 않는 모밀잣밤나무', 기묘하게 귓가에 울리는 '축제 음악', 거대한 발이 나타난다는 '발 씻는 저택',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꺼지지 않는 사방등'까지, 이 모든 이야기가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귀신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귀신이 아닌 괴담을 듣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한 명의 오캇피키 모시치를 통해서요. 특히 이 중 '두고 가 해자'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습니다. 누군가가 이승의 삶을 모두 산 이후, 남은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살아가는 방식을 '두고 가 해자'는 보여줍니다.
그날 밤과 똑같이 속삭이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가 흔들린다. 어둠이 천천히 해자 위에 피어오르기 시작해 오시즈와 우오타로를 감싼다.
어디에선가 퐁 하고 물이 튀어오르는 소리가 났다.
여보.
오시즈는 가슴에 안은 아이를 살며시 흔들고 미소를 지으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버드나무 가지가 또 살랑살랑 소리를 냈다. 해자의 수면을 건너 온 바람이 오시즈와 우오타로의 뺨을 건드리며 조용히 지나갔다.
p.93
괴담의 존재의의를 생각해 봅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는 하나나 둘 쯤,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겪었던 괴담이 존재했습니다. 깊은 여름 밤, 라디오를 틀면 괴담이 나왔습니다. 독서실에서 워크맨에 이어폰을 꽂고 귀로 괴담을 들으며 수능공부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가 나오면 어둑한 독서실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더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알았습니다. 아아, 너도 지금 나랑 같은 라디오를 듣고 있니? 그러면 우리는 마음이 놓였더랬습니다. 워크맨을 통해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같은 것을 듣는 누군가가 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그저 이곳에 존재한다고 느꼈더랬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괴담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깨닫도록,
이곳에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괴담은 필요합니다.
우리,
얼굴과 얼굴을 맞댑시다.
촛불을 켜고,
괴담을 읽읍시다.
마음 속 깊이 간직한 불안을,
괴담으로 풀어놓읍시다.
아아, 그 괴담. 나도 알아. 어마어마했지, 그렇지?
라고 이야기합시다.
꺄악!
비명을 지르며 가끔 서로를 껴안읍시다. (후후)
이 괴담들을 읽고 나서 관심이 생긴다면 흑백과 안주를 함께 읽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가 나오고 한참 후에 나온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집입니다. 이때의 이야기가 일곱 가지 비밀이었다면, 이번 책은 백물어, 백귀야행입니다. 백 가지 이야기가 쏟아져나옵니다. (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