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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구 - 그때 우릴 미치게 했던 야구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김대환 옮김 / 잇북(Itbook) / 2010년 7월
평점 :
시시때때로 야구소설을 찾아 읽습니다. 특히 야구경기 그 자체가 나오면 입맛을 다시며 “오오!”하며 보는 편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취미는 오래 전 만화 <터치>라던가, <H2>, <4번타자 왕종훈> 등을 읽을 때부터 꾸준히 쌓아온 것이 아닐까 싶은데, 설마 이제는 야구소설도 모은다고 나설 줄이야. 저도 몰랐네요. 그리하여 가장 최근 읽었던 야구소설은 『야구감독』이었습니다. 『나는 감독이다』라는 제목으로 재간행 되기도 했었는데, 저는 예전 버전으로 읽었네요.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야구감독이 주인공인 소설입니다. 대단한 야구감독이 만년 꼴찌 팀을 맡아 대단한 팀으로 키운다는 내용으로, 일본 야구소설의 초시라고 들었는데 역시나, 초시란 말이 붙을 만큼 재미난 책이었습니다. 감탄감탄. 그 후로는 손에 잡히는 야구소설이 없었다가 최근 일본드라마 중 야구드라마를 발견했죠. 무려 <루즈벨트 게임>과 <약해도 이길 수 있습니다> 두 편입니다. <루즈벨트 게임>의 경우 2분기 개념작으로 우뚝 섰습니다. 원작자가 바로 『한자와 나오키』의 이케이도 준이기에, 또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의 제작진이 그대로 이 드라마를 만들기 때문일까요, 굉장한 흡입력입니다. 현재 방영중인 또 다른 이케이도 준 원작 드라마 <하나사키 마이가 가만 있지 않아!>보다 훨씬 재미나네요(이것도 괜찮긴 한데 아직까진 2% 부족합니다). 이 모든 작품들을 쭉 훑던 사이 우연히 발견한 책이 바로 시게마츠 기요시의 『열구』입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에 미쳤습니까? 시게마츠 기요시의 『열구』 그때 우릴 미치게 했던 야구
여러분은 시게마츠 기요시를 아시는지.
시게마츠 기요시의 가장 최근 작품은 아마도 『십자가』입니다. 이 작품은 무려 왕따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고 분노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일주일동안 방에 틀어박혀 완성한 작품입니다. 시게마츠 기요시가 집중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죠. 저희 집에도 이 책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손에 잡고 보며 “아, 시게마츠 기요시는 여전하구나.”하고 중얼거렸었습니다. 이 여전하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그의 천재성이요, 두 번째 의미는 그의 작품이 ‘어떤 소재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그 주제는 반드시 가족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 책 『열구』 역시 그러합니다. 정말이지 “아, 시게마츠 기요시다!”라는 생각이 드는 색다른 야구소설입니다.
야구소설……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저는 일단 야구시합이 나온다, 박진감 넘치는 게임과 선수들의 고뇌가 나온다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작가가 누구냐에 따라 야구소설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띱니다. 미스터리로 야구를 풀어낸 시마다 소지의 『최후의 일구』라던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제치고 아마존 1위에 등극했던 채드 하바크의 『수비의 기술』을 생각하면 야구소설이 이토록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깨닫게 됩니다. 이 소설 『열구』는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두 개의 소설과는 또 다른 이야기로 우리 앞을 찾아옵니다. 가족, 그의 인생의 화두를 통해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말투로.
이 소설 속 주인공 ‘나’는 도쿄에서 출판사에 근무했던 서른여덟 살의 남자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어떤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남자는 고향에서 모교인 스오고, 이른바 ‘슈코’에서 에이스투수였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있던 해, 슈코는 코시엔에 가기 직전 시합에서 떨어졌었죠. 아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전설적인 남자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 남자는 고향 스오에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슈코는 더더욱 피합니다. 때문에 딸을 데리고 와서도 뭔가 은둔형 외톨이처럼 집안에 처박히고 아무것도 안 하려는, 이른바 니트족 같은 삶을 사려고 하는데... ... 이 사나이의 곁에 잊고 있었던 열구熱球, 뜨거운 공이 돌아옵니다.
열구. 이 소설의 제목입니다. 더불어 이 남자가 오래 전 손에 쥐고 놓지 않았던 야구공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흔히 우리는 야구공을 가리켜 백구라고 합니다만, 이 소설 속 백구에는 또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슈오고, 슈코에서는 연습용 공에 늘 글자를 적었습니다. 사인펜으로 삐뚤빼뚤하게 적은 그 이름이 바로 열구였습니다. 그리고 이 공이 남자의 손에 들어온 이후 차츰 주변이 변해갑니다. 도쿄식으로 생각하던 남자가 점점 스오를 되찾습니다. 그리고 찾아가는 스오를 통해 남자의 생각은, 가족은, 그리고 일상은 일그러지는 것 같기도, 반대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남자는 갈등합니다. 자신의 삶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그 사이에서 남자는 늘 자신에게 말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이야기는 그런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고작이라는 말이 붙을 수도 있고 벌써라는 말도 붙을 수 있는 서른여덟의 나이의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시게마츠 기요시는 자신의 경험으로 녹아냅니다. 열구, 그 제목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소설 속 나이, 서른여덟과 예전 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써머리 합니다. 서른여덟, 이제 전 2년밖에 남지 않아서 그런가 그 숫자가 새록새록하더군요.
분명 이것도 인생이리라.
우린 대학 동급생이었다. 열여덟 살에 만나 스물다섯 살에 결혼했고, 지금은 서른여덟. 서로 '인생'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 조그 우습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그때는 '청춘'따위의 말을 우쭐대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백퍼센트의 그리움을 담아 멋대로 추억을 미화시켜가면서.
아저씨와 아줌마의 완성이다. 이것도 인생이리라. pp. 9~10
서른여덟 살, 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직 노인네 취급받을 나이도 아니다. 새출발하기에 적당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즈미가 보스턴으로 떠나고, '새출발'은 처음 예정보다 조금 규모가 커져버렸지만, 그래도 '부랴부랴' 도망칠 곳만은 남겨둘 생각이었다. 혹을 달고 고향에 돌아올 생각 따위 해보지도 않았다. p.28
정말 그랬지, 하고 나도 웃는다. 옛날, 고교 시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좀 더 단순하고, 좀 더 이해하기 쉽고, 좀 더 즐거웠다.
우리가 그라운드에서 떠난 그날은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와 어른을 나누는 경계였는지도 모른다. p.57
지금은 거의 남지 않은 여백 곳곳에 20년 전의 우리가 있다. p. 89
맞장구는 치지 않았다. 진노는 그 이상은 푸념하지 않았다. 서른여덟 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년, 서로 다른 삶이 있고,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도 다르다. 그 무게를 비교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우린 이제 그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되었다. p.133
오사무를 도망치게 해주면 되었다. 오사무가 도망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모른 척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대하려고, 가슴속에 벽 하나를 남긴 채 오사무를 맞아들인 셈이 되어 결국 녀석이 도망갈 길을 막고 말았다. 그 무렵엔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정이라 믿었다. 도망가선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30대도 종반에 접어든 지금 난, 진노도 가메야마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알고 있다. 도망가지 않으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겁쟁이나 비겁자라 불려도 도망갈 수밖에 달리 길이 없는 길은 분명히 있다.
우리는 어른이 되고 나서 몇 번을 도망쳐왔을 것이다. 자기는 한 번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우와 대단하시네요, 하고 감탄하고 그 사람과는 절대 친구가 되지 않을 것이다. p.152
나도 쓴웃음을 짓고 공을 움켜쥔다. 직구 그립, 결승전 초구는 무조건 직구로 정해져 있었다. 폭투가 되어도 상관없다. 전력으로 던질 생각이었다. 그날 던졌을 혼신의 직구를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뒤에서 앞으로 휘둘렀다. 운동부족인 어깨가 삐걱거렸다.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는 뜻일까. 20년 만에 공을 잡은 것을 봤다는 뜻일까. 오사무, 넌 어떠니? pp. 78~83
나이를 먹고 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젊음을 잃어가고 있다. 하룻밤 자고 나도 풀리지 않는 피곤이 몸속 깊이 엉겨 붙는다. 마음속은 어떨까. 여든 살까지 산다고 하면 아직 반환점을 돌기도 전인데, 장래의 꿈을 그릴 여지는 이제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든다. p.179
진노는 한숨을 섞어가며 말하고 더 이상은 말이 없었다. 나도 묻지 않는다. 진노에겐 진노의 인생이 있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 있고, 그곳에 내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p.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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