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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필 - 들어 세운 붓
주진 지음 / 고즈넉 / 2014년 5월
평점 :
최근 들어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요즘 읽은 소설들이 하나같이 재미가 없다는, 당췌 140~60페이지를 넘기는 책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재미가 없다고 한 책 중에는 다른 사람들은 극찬을 하는 책들도, 또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은 책들도 있었는데…… 때문에 한 이웃은 저에게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 게 아니겠냐”는 말을 했습니다. 흠, 듣고 보니 그렇더군요. 소설만 평균 하루에 한 권씩 읽어치우니, 흐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요즘엔 소설 '1/3권씩'이지만. 게다가 요즘 들어 재미난 책들 제목을 훑어보면 죄다 고전이었으니. 하여, 내 탓이다, 다 내가 잘못이다 생각하며 한숨 쉬며 “이런 변소를 궁휼히 여겨 이웃에게 또 한 권 추천 선물 받은” 직필이란 소설을 들었는데……我 我, 내 탓이 아니었어!
주진의 직필
작년에 개봉한 영화 <관상>은 김종서와 세조의 이야기입니다. 한 관상꾼이 김종서와 세조 사이에 껴서 고생하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세조의 캐릭터는 물론이거니와 관상꾼으로 등장한 송강호 씨의 찰진 연기가 너무나 좋았죠. 물론 후반부의 약점은 좀 있었지만서도 <관상>은 분명 웰메이드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첫 부분이자 마지막 부분에 묘한 게 나옵니다. '수수께끼의 악한' 한명회가 공포에 질린 부분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상당히 흥미롭게 봤었습니다. "흐음, 그래서 한명회는 어떻게 어떻게 살아서 저렇게 ‘죽을 위기’에 도달하게 된 거야……?"라고 궁금해 했었으나 귀찮으니 자료는 무시했었건만, 그 의문이 아주 묘한 방법으로 풀렸습니다. 바로 오늘 읽은 소설 『직필』 안에 그 뒷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때는 성종 15년, 여기 한 사내가 있습니다. 이 사내는 기억을 잃었습니다. 어쩌다 기억을 잃었는지, 자기가 본래 무엇을 하던 인간인지 알 수 없었던 사내는, 자신을 돌봐준 노모와 ‘이정’이라는 수수께끼의 사내가 만류하는 것도 무시하고 한양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 사내를 아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사내는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데 왜 이리 이 사내를 아는 사람은 많을까. 게다가 이 사내의 평판은 상당히 ‘끔찍’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이 사내가 ‘가졌을지도 모를’ 어떠한 문서입니다. 그 문서의 이름은 사초, 실록의 초본입니다. 게다가 이 사내가 ‘가졌을지도 모를’ 문제의 사초에는 ‘이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 무언가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사내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가며, 더불어 자신의 목숨줄이 될지도 모를 사초를 찾아갑니다. 그 사초 안에는 사내와, 이 나라의 왕과, 그 왕의 목줄을 쥐고 있는 한명회, 그리고 적인지 자신의 편인지 알 수 없는 사내 이정이 연관되어 있었으니…….
역모,
사초,
신하의 도리,
이깟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이 종이쪼가리를 태워버리고 멀리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 살자고
말했다.
일이 잠잠해지면 어머니 무덤에 정식으로 제를 올리고,
끊어졌던 부부의 연을 다시 잇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소박하게 살자고.
(145)
어찌 보면 빤할 수 있는 스토리라인입니다. 최근 일본에서 방영중인 MOZU 역시 이런 식의 줄거리입니다. MOZU 역시 ‘한 기억을 잃은 사내가 잃어버린 IC칩을 찾아 헤맨다’는 식의 줄거리를 갖고 있죠. 아니, 이런 줄거리는 한두 군데서 쓰이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줄거리는 ‘재미나게 구현하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온갖 이야기 속에서 다 쓰인 뼈대이니까요. 그런데 이 소설 『직필』은 감탄할 만한 필력으로 이 이야기를 너무나 새롭게 써냅니다. 감각적인 문장,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개, 그리고 반전에 반전을 잇는 스토리라인까지……오랜만에 정말이지, 재미나게 봤습니다. 我, 我! 이 말이 어찌나 입 밖으로 자주 나오던지! 대체 얼마만에 한달음에 다 읽은 소설이란 말인가!
형님도 이런 생각하지 않았수?
내가 이상한 거요?
그런 생각도 들었수.
만약 그 날,
순서에 따라 내가 그 자리에 올랐더라면,
하나뿐인 내 동생은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287)
본래는 이 뒤로 뭔가 훨씬 더 길게 붙일 예정이었는데, 관두겠습니다. 그래도 한 마디만 더 붙이자면 제가 요 몇 년 사이 본 소설들 중 단연 최고에 손꼽힌다는 정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누쿠이 도쿠로의 '미소 짓는 사람'에 비견할 만큼 재밌었다는 사실을 밝혀 보죠.
저는 이런 소설을 재밌다고 말하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실지,
매우 궁금하네요.
꼬리 :
뒷표지의 홍보문안이 마음에 안 들어서 -_-
내 맘대로 줄거리 홍보 문안을 만들어봤다.
월산대군이 역모를 했다?
성종 11년, 수렴첨정을 끝내고 친정에 들어간 성종의 앞에 역모의 위험이 닥친다! 월산대군의 역모, 성종의 치세, 그리고 한명회의 운명까지... ... 그 모든 것은 한 장의 사초, 실록의 '초본'에 있었으니.
지금 그 사초를 가진 수수께끼의 사나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진과 함께 보는 리뷰 : http://cameraian.blog.me/220009700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