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
이자혜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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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표지의 책,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

아이디어가 톡톡 튀는 표지부터 시선을 집중시킨다.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이자혜 만화/중앙북스



순수한 눈망울로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는 한 청년과 그 기도에 답하여 다채로운 음식을 주시는 다정한 손이 그려져 있는 표지를 벗기면, 헉;;;

표지 속 밝고 뽀얀 한밀알 -> 여기저기 기운 옷을 입은 궁색한 한밀알

포동포동한 고양이 -> 돈이 없어 굶주린 영혼

다채로운 음식 -> 컵라면과 삼각김밥

극명한 대비가  와닿는다. 역시 만화가라 표현력이 남다르구나 싶었다.






이제 직장인이 된 사회 초년생인 한밀알. 그녀는 대학 때문에 혼자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돈이 없어서 친구도 남자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직장인이 될 때까지 지탱해 준 건 덕질이었다. 그녀는 애니메이션 <도봉 히스테리아>에 입덕하여 다른 팬들의 연성을 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커플을 응원한다. 면접 대기 시에도 연성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면접을 봤으니 덕질의 정도는 상상불가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이렇게 덕질과 취업 준비만이 전부였던 그녀가 직장인이 되면서 다른 청년처럼 일반적인 고민을 털어놓는다.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데이팅 앱을 통해 만남을 가져보기도 하고, 재테크로 남들이 다 하는 주식에 투자해 보기도 한다. 비슷한 연령대인데 결혼한 이들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고, 전문가 포스를 뽐내는 직장 동료들을 보면서 멋진 어른이 된 자기를 상상한다.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왔던 한밀알이 경제적 자립을 하게 되면서 타인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직장 동료들 그리고 같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SNS 지인 '미지근'(전작 미지의 세계 등장인물) 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청일점인 조이삭 팀장은 한밀알 사원을 티 나지 않게 배려해 주고 챙겨준다. 은근한 연애 기류가 감지되기도 한다.

음식과 잘 어우러진 주변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직장 생활, 취미 생활, 연애 생활 등이 그려지는 데 밀알의 덕질이 압권이다. 애니메이션 연성에 폭 빠져 상상의 나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낄낄거리는 그녀, 미지근와 만나서 덕토크에 진심인 그녀, 그 순간 그녀의 표정들이 살아있다. 마이너 감성이 진하게 전해져온다.

 

밀알의 열두 끼. 맛있는 음식을 매개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들이 그려진다. 다양한 음식들이 소개되는데 다 처음 접하는 음식인 밀알의 생생한 후기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고 솟구치는 식욕은 덤이다.



너무나 사실적이고 식욕 돋우는 음식 그림은 영롱한 자태로 우리를 유혹한다. 맛있는 음식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치유와 행복의 힘은 거부할 수 없다.

'식구',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을 뜻하는 이 단어에 담긴 의미를 되돌아본다. 우리네 삶에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행위는 그만큼 중요하다. 매번 도시락을 싸오는 밀알을 데리고 나가 맛있는 태국 음식을 사주는 상사, 색다른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덕질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온라인 지인, 집에서 연말 파티를 열어 회사 사람들을 초대하는 팀장, 모두 밀알에게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들을 통해 하나하나 배우가며 밀알은 성장하고 있다.




20대 평범한 청년이 경험하고 고민할 만한 현실적인 부분들이 매 에피소드마다 등장한다. 하지만 중요하고 무겁게 다뤄지지 않아서 식도락 만화라는 큰 틀을 깨지 않는다. 밀알의 양식을 주는 손길은 미식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맛있는 음식들을 통해 삶의 다채로운 맛을 느끼고, 관계를 확장해가면서 인생의 선배들이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조언을 참고하여 천천히 자신이 생각하는, 되고자 하는 어른상을 찾아가고 있다. 지금은 맛있는 음식만 사주면 좋다고 어디든 따라가는 철부지 그녀여서 염려스럽고 걱정이 되지만, 조 팀장 말처럼 "아무튼… 밀알 씨, 화이팅이다."




다음 책이 나온다면 식당 점원으로 자주 등장하는 남자의 이야기도 들려주시면 좋겠다. 의미심장한 표정과 눈빛에 무언가 터질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서운하기까지 했다.

 

음식에 홀리고 다양한 캐릭터들에 끌리고 그중 특히 귀엽고 순수해서 무장해제시키는 밀알에 빠져든다. 너무 평범하고 단순한 청년, 한밀알이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지 상상하며 기다려봐야겠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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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닥거리는 가슴 고래책빵 동시집 23
윤동미 지음, 손정민 그림 / 고래책빵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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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기분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책이 바로 동시집이다.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콩닥거리는 가슴을 펼쳤다. 짧은 동시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재미나고 엉뚱하기도 하고 깜짝 놀라게도 한다. 윤동미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재미나구나 싶어 부러운 마음이 책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쌓인다.





1부 과속방지턱

2부 먼저 온 손님

3부 흔들흔들

4부 콩닥콩닥

이렇게 4부로 이루어졌다.

 

 

1부. 과속방지턱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 소재이다. 돼지 저금통, 바나나, 식탁의자, 막대사탕, 과속방지턱, 배달 오토바이, 옹기종기, 공기청정기, 뻐꾸기시계, 곰인형 등이다.

그중 기억에 남는 시는 <담쟁이>와 <갈대가 갈 때>이다. 계속 뻗어나가는 담쟁이를 탐험가와 연관 지어 풀어낸 시가 인상 깊다. 그리고 한껏 뽐내던 갈대가 부러지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는 신신당부를 한다.

 

갈대,

가더라도

내년에 꼭 와!

- 갈대가 갈 때 中




2부. 먼저 온 손님에는 자연을 관찰하는 시인 특유의 색다른 시선이 담겨있다.

잘라낸 무 머리를 버리지 않아서 만난 무꽃에 대한 감상을 아름답게 그려낸 '무 머리', 바닥에 떨어진 솔잎에서 할아버지 탈모를 떠올린 '탈모', 인간의 시선에 의해 달리 불리는 다소 이상한 '고양이는 고양이'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송아지를 키우는 모습을 보고는 어르신처럼 섬긴다고 표현한 '송아지 어르신' 시들을 읽다 보면 허투루 보지 않고 찬찬히 살피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2부 마지막 동시인 <공부> 속 '나'는 꼭 개구지고 유쾌하고 자신만만한 울 아들 같다. 의리, 유머, 운동, 친구, 외모까지 완벽한 아주 멋진 놈인데 공부에 발목을 잡히다니… 안타깝다. '다 잘할 수는 없잖아.' 하다가도 공부 고 녀석 포기하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동시, <공부>이다.

 

 

3부. 흔들흔들에서는 변화를 잡아내고 있다. 계절의 변화, 씨앗의 생장, 감기 바이러스로 고생하는 가족 그리고 아이스크림케이크 녹지 않게 생일 축하하고 먹는, 어려운 과제를 순수하고 진솔한 동시로 표현했다.

 

 

4부. 콩닥콩닥에서는 마음을 읽는 시들이 가득하다. 나의 마음, 너의 마음, 우리네 마음이 가득 담긴 따뜻하고 다정한 사랑 넘치는 시들이다. 읽다 보면 어떻게 알았지? 싶을 만큼 마음이 통하고 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닿아 빙그레 웃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잘 알지>, <엄마는 늘 그래>

둘 다 엄마에 대한 시이다. 하지만 내용은 정반대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상냥한 아이인 나와 자신에게 짜증 내는 엄마에게 화가 난 나가 등장한다. 의젓한 것 같다가도 어린아이 모습 그대로인 '나'가 사랑스럽다. 서운한 마음 가득한 '나'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 건 엄마이기 때문이리라.

 

딱, 한 번이라는 말속에

한 번이 아니라는 말이

딱, 숨어 있지

- 딱 속에 숨은 딱 中




깜찍하고 귀여운 그림들이 시선을 붙잡는다. 짧은 동시에 담긴 메시지를 재기 있게 표현해 줘서 읽는 재미에 보는 재미까지 더했다.

<먼저 온 손님>의 멧돼지 도둑을 깜찍하게 묘사해서 화를 낼 수 없다. 주머니가 터진 줄도 모르고 열심히 가는 멧돼지에게 누가 뭐라고 할 수가 있을까. 신이 나 올라간 입꼬리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면 오히려 위로해 주고 싶어진다.

 

윤동미 시인의 짧은 동시 안에는 큰 세계가 담겨있다. 35년이나 함께 한, 시골집의 커다란 라일락 나무를 더 넓은 곳으로 보내주고 그 자리에 어린 라일락 나무를 심으면서 엄마 나무처럼 아름드리가 될 35년이 담겨있다. 그 시골집에서 콩을 고르느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할머니가 담겨 있다. 공부에 시험에 추욱 처진 어깨를 펼 수 있도록 보석 같은 날 동그라미 치며 일 년 계획을 세우는 우리가 있다. 숨어 웅크리고 울었지만 힘차게 날아가는 용기가, 희망이, 결심이 담겨 있다.

 

 

<콩닥거리는 가슴>은 본다는 게 단지 눈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이 담겨야 한다는 걸 알게 해주는 동시집이다. 호기심과 관심으로 세상을 보고 받아들이고 들려주는 그의 동시는 단조롭지 않고 생생하다. 통찰력으로 불어넣은 '독창성'이 우리에게 즐거움과 감사함과 놀라움을 선사한다.

 

"우리 깨어났어요."

- 착한 씨앗 中

 

<고래책빵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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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의 형제 1 -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 이리의 형제 1
허교범 지음, 산사 그림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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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고개 탐정과 마술사>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허교범 작가가 신작과 함께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이리의 형제』 1.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 

가제본으로 미리 만나본 이 소설은 외롭고 슬픈 그래서 고통스러운 판타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이리의 형제/1.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허교범 글/산사 그림/창비



본격적인 내용이 펼쳐지기 전에 우리는 의미심장한 성경 구절부터 만나게 된다.

고난의 대명사 '욥'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욥기 중 한 대목이다.



선한 부자였던 욥이 고난을 겪게 되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내뱉는 말이다. 고통받는 자신을 외롭고 슬픈 동물로 회자되는 이리와 타조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허교범 작가는 이를 차용하여 신작 제목을 붙였다.  『이리의 형제』 

 

이리! 요즘에는 '늑대'로 불리는 동물인 '이리'는 떼를 지어 다니며 결속력이 강한 동물이다. 달과 연관 지은 이야기들이 많은 동물로 이번 이야기 역시 달의 변화와 힘이 중요하다. 신비롭고 오묘한 힘의 원천, 달이 등장하는 소설답게 전설, 설화,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구미호, 구울, 늑대 인간, 흡혈귀같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소환하여 판타지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친숙한 소재인데도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스토리텔러로서의 허교범을 만날 수 있는 즐겁고 놀라움 가득한 시간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인 노단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강한 존재만이 살아남는 종족 특성과는 다르게 유일한 핏줄인 그를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10년이 넘도록 병원에서 수명을 연장시켰고, 열두 살이 된 그에게 '하유랑시'를 사냥터로 주고는 떠났다.

 

 

늘 아래 난히 사스러운 도, 하유랑시입니다.

 

 

홀로 남은 노단,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 주어진 큰 임무는 도시를 장악해 인간의 힘을 흡수하여 살아남는 것이다. 실패하면 죽음뿐. 종족 중 높은 자리에 위치하는 아버지의 도움은 지금까지로 충분하다. 존경하고 두려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서 자기 두발로 꼿꼿하게 서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꼿꼿하게 걸어나가는 것만이 선택지이다. 저주를 받았다느니 운명을 벗어난다느니 하면서 다른 떠돌이처럼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노단의 눈에 들어온 한 인간, 그를 부하로 삼는 것부터 시작이다.



"첫 번째 부하는 반드시 강한 자여야 하는 건가요?

약하고 패배자 같은 인간을 고르면 안 되는 건가요?"

 

 

노단의 본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큰 임무를 시작하는 순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병원에서 살아남으면서 수없이 곱씹었던 질문과 고민 그리고 상처를 드러내며 극복하고자 한다. 노단은 운명에 순종하면서 아버지처럼 강한 존재로 살아남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 그가 선택한 첫 번째 부하, 연준은 그에게 힘이 되어줄 것인가?

 

 

먹이에는 한 방울, 부하에는 두 방울,

마음이 급하면 세 방울, 네 방울은 영원한 추방


 

 

『이리의 형제』 대서사시가 시작된 1권 -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 - 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등장과 그와 엮이는 인간 그리고 배경이 되는 하유랑시를 소개하고 있다. 도시를 장악하고자 하는 노단과 그가 선택한 부하와 먹이가 될 인간 그리고 이를 막고자 하는 노단과 같은 존재인 유랑이 주축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노단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떠돌이 삶을 선택한 '유랑'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자신이 선택한 하유랑시가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떠돌이 삶을 선택한 유랑에게 허락된 짧은 삶을 조용하고 안정적으로 보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내 남은 생을 망치려고 하고 있어."

 


유랑이 노단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를 막아내려고 준비하는 동안, 노단도 유랑의 존재를 감지한다.

 


"나는 네가 감히 여기 내 영토에 숨어 있다는 걸 알아.

널 찾아낼 거다. 그리고 없애 버릴 거야.

 


이제는 노단과 유랑은 대결을 피할 수 없다. 도망치고 싶지 않은 유랑은 애써 두려움을 떨쳐내면서 노단의 주변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노단이 선택한 첫 번째 부하 연준에게. 그리고 연준에게 노단이 감춘 비밀을 알려준다. 연준은 유랑의 말에 고민이 깊어진다. 과연 그의 선택은 무엇일지 그리고 그 선택이 가져올 결말은 어떻게 될지 긴장되는 전개가 펼쳐진다. 생존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이 예고되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의구심이 불씨가 되어 인간 세상을 활활 타오르게 할 『이리의 형제』

 


"너는 나를 섬겨라."

"너에게 힘을 줄게. 이건 시작일 뿐이야."


 

지치고 나약한 틈을 파고드는 노단의 말. 자신은 결코 유혹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만만한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 지으면서도 매력적인 '힘'에 대한 욕망이 아가리를 크게 벌려 우리를 집어삼키는 장면이 떠올라 소름이 돋는다.

 


휘두를 기회가 없는 힘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선택된 특별한 존재, 연준은 노단에 대한 두려움과 힘에 대한 동경에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힘이 생기자 사람을 해치는 것이라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쁘지 않을 것 같게 느끼는 연준이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갓난아이기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만큼 온화했다. 온화함 속에 태초부터 전해지는 악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맹수가 사냥할 때 먹잇감을 노려보는 눈, 칼날을 칠해 놓은 듯한 눈, 눈매는 타오를 듯했으나 눈동자에서 나오는 시선은 바늘처럼 차가운 눈 그렇게 뜨거움과 차가움이 섞이지 않고 공존하는 눈이었다.

 

명령을 내리는 자. 노단의 종족에 대한 묘사가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그들이 부리는 힘의 크기가 놀라웠다. 그 무서운 힘 앞에 선 인간은 따르느냐 거부하느냐 고민할 수밖에 없다. 따르는 이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거부하는 이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거꾸로 사냥한다. 이를 단순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까?

 


무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배척되었던 노단이 자신의 생존을 위한 도시, 하유랑시에서 선택한 첫 번째 부하가 패배자같이 비를 맞으며 외롭게 걸어가던 연준이었고, 먹이를 연준이 가장 싫어하는 인간인 영식으로 정했다. 타인에게 무심하지 않고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노단을 인간의 시선으로 괴물이라 칭하는 게 정당한가? 고민이 깊어졌다.

'힘'에 대한 경외는 본성일 것일까? 그렇다면 이를 따른 것은 당연하고 정당한 것일까? 순순히 인정하기에는 가슴이 찌릿찌릿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편치 않은 무언가가 있다.



"아닌, 그건 네가 힘든 원인이 아니다.

성적이란 건 결국 종이에 적힌 숫자인데 

종이도 숫자도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 없어.

그 숫자를 가지고 널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야 힘들 수 있는 거야."

 

본질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노단. 초등고학년 대상의 어린이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담고 있는 소재와 주제, 내용이 범상치 않은 『이리의 형제』는 쉽게 결론을 내리거나 남의 생각을 자신의 의견이라 섣불리 믿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사고력과 판단력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를 일차원적인 관점에서 인식하지 말고, 본질이 무엇인지 들여다 보는 것을 권하고 있다.

 



이리의 형제 1.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허교범 글/산사 그림/창비



처절한 결말로 1권이 끝났다. 매듭지어지지 않은 마무리는 충족되지 않은 갈증을 키우고 있다. 선과 악, 힘과 자유 그리고 생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담긴 『이리의 형제』 1.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 끝나지 않은 노단과 유랑 그리고 인간의 대결이 무한한 상상력으로 펼쳐질 신호탄이 우리 앞에서 터졌다! 허교범 작가가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독자에게 아량을 베풀어 속히 속편을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날 하유랑시는 처음으로 노단을 품은 채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누구도 이날을 특별한 날로 기억하지 않았다. 나중에 악에 동참하는 이들, 희생당하는 이들, 알고도 침묵을 지키는 이들, 맞서 싸우는 이들, 그리고 아직 하유랑시라는 무대에 오지 못한 이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24쪽)

 

<창비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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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베스트셀러 반올림 55
엘자 드베르누아 지음, 김주경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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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베스트셀러/엘자 드베르누아 지음/바람의아이들



분홍빛 고운 표지에 두 소녀가 서로 몸을 돌린 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 있다. 붉은 머리의 소녀는 고개를 한껏 치켜든 채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금발의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상반되는 모습에 두 소녀 사이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천재 소녀 작가의 소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거짓과 질투, 배신

 

열세 살 단짝 친구 '알리시아'와 '클레망스'는 매주 수요일마다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다.

책 읽기의 즐거움을 공유했던 어린 시절을 거쳐 지금은 함께 글을 쓰며 작가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바캉스를 맞아 두 달을 서로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아이들은 각자 공들여 다듬은 멋진 작품을 써보기로 약속한다.

드디어 9월이 되어 다시 만난 알리시아와 클레망스.

알리시아는 놀라운 소식을 클레망스에게 전한다.





이 소설은 알리시아의 시점과 클레망스의 시점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시간이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두 소녀의 심리를 현실적인 문체로 잘 묘사하고 있어서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단짝 친구였던 두 소녀의 사이를 멀어지게 된 계기가 베스트셀러가 될 대작 원고라는 점도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클레망스는 유명 작가를 꿈꾸는 소녀였기에 타임머신이라는 다소 황당한 설명에도 <지옥의 사람들> 원고의 출처를 의심하지 않았다. 설마?라는 의심도 흡입력 강한 작품에 빠져들어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알리시아가 할 수 있다면 나라고 못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클레망스가 겪는 심리 변화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래로 간 시간여행에서 '마르티유'라는 소녀가 지은 베스트셀러 <지옥의 사람들>을 가지고 온 알리시아가 자신이 마르티유인 척하며 책을 출판하려 한다는 계획을 들려주며, 원고가 든 USB를 건네며 읽어보라고 권한다. 클레망스는 책 내용에 흠뻑 빠져 중독되고 말았다. '마르티유'의 재능에 감복한다. 그리고 알리시아가 하려는 행동이 얼마나 부당한 지를 생각하게 된다. 알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지다가 알리시아의 계획을 자기가 실행으로 옮기게 된다. 치사하고 비겁한 행동을 하려 한 알리시아를 혐오했으면서 말이다. '내로남불'(아시타비)이라 했던가.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우리의 양면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믿었던 친구에게 큰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여러 번 기회를 주고 자신의 실력으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은 알리시아의 행보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유일한 가족인 아빠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배신에 대해 싸울 수 있도록 용기를 준 클로비스를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다.

 

알리시아와 클레망스의 질투 그리고 배신이 펼쳐지는 가운데 중재하는 역할로 등장한 베릴 마시노 편집장은 실망스러웠다. 어른으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편집장으로서 알리시아의 상처보다는 클레망스의 잘못된 선택을 옹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특히 알리시아에게 '대작자'를 제안할 때는 너무나 화가 났다. 클레망스가 한 행동이 실수라 하더라도 잘못된 선택이었기에 책임은 그 아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인데 알리시아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끔찍한 우를 범했다. 프랑스어 선생님이나 베릴 마시노 편집장 등 어른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태도는 비겁했고 다분히 현실적이어서 못마땅했다.

 

그 애의 대답에 따라서 『잘못된 선택』을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겠어!

 

이제 단짝이었던 둘만의 작은 유년기는 어느새 끝나버렸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시간이다. 큰 성장통을 겪은 알리시아와 클레망스는 훌쩍 큰 모습이다.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 있는 유혹의 순간,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짊어져야 할지 질문을 던지는 『우리의 베스트셀러』였다.

* 소설 중간에 대한민국 소녀팬 '박희영'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출판본이어서 그런 건지 원래 그런 건지 원작이 궁금해졌다.

 

<바람의아이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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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김보리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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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으로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함께 했다. 울다가 웃다가 미소 짓다가 다시금 멈추지 않는 울음과 함께 이 글을 쓰고 있다. 다행이다 싶다. 가족들은 각자의 또 다른 공간으로 떠나 오롯이 나만의 공간으로 허락된 집에서 맘껏 울 수 있어서 말이다.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 그리고 빨개진 눈과 눈시울을 숨기지 않아도 되어서, 소진할 때까지 다 쏟아내었다. 안 그래도 '울보'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가족이라도 이런 모습은 부끄럽다.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김보리 지음/푸른향기/여행에세이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의 첫 문장이다. 김보리 작가는 여러 가지 【유배의 변】을 늘어놓았다. 습관이 나빠서, 입체가 되고 싶어서, 사랑과 전쟁을 끝내고 싶어서, 남편 잘못 키운 죄로, 오순 잔치로, 지원 세력이 든든해서 유배를 간다는 그녀의 글들이 묵직하게 치고 들어왔다. '느슨한 연대' 외로움보다는 고독함으로, 허전함보다는 고즈넉함으로 내면을 단련하고 채우며, 각자 몫만큼의 행복을 누리며 살다가 이따금 한 번씩 다 같이 모여 행복하자고. 따로 또 같이. 담담한 문장에 담긴 마음이 자신을 다독이는 응원 같았다.

 

슬픔과 자책이 묻어나는 프롤로그와 유배의 변을 읽으면서 여행을 '유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궁금해하며 나름 추측해 보면서 홀로 떠난 제주도 여행기 - 유배 일기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1일 - 어서 와, 유배는 처음이지?

여행 가기 전날 남편과 크게 싸우고 와 불편했던 마음을 뒤로하고 계획한 대로 노는 것을 우선시하는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마음이 놀아야 한다. 방랑해야 한다. 감정이 요동쳐야 한다. 자유로워야 한다.

덜먹고 잘 놀고 살짝 취하는 여행이 시작된다."


완벽한 계획 대신 몇 가지의 규칙만을 세운 채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꾸려가는 여행은 자유롭고 여유로웠다. 최소한의 경비로 떠난 여행이기에 맛집, 맛 카페를 찾지 않고 하루 3만 원 내의 숙소를 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먹는 즐거움을 버리고 '남의 살'을 먹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제주도 여행 30일 식사 대부분을 '김막' = 김밥과 막걸리로 해결하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걷고 걷고 또 걷는 여행이었다.

홀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는 지금의 '나'로서는 생소한 여행이다. 아직은 아이들이 품 안에 있기에 주로 가족여행을 다니고 시댁, 친정 대소사에 계획하는 대규모 총출동 가족여행을 최근에 다녀왔다. 결혼하고 나만을 위한 여행은 동네 지인들과 당일치기로 떠난 강원도 버스투어가 유일무이한 듯하다. 그 여행 후 지인들과 '여행계'라는 명목으로 적은 돈을 매달 모으고 있지만, 여행보다는 식도락에 탕진하고 있는 실정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일조를 하기는 했지만, '엄마', '아내'라는 신분의 우리들이 자유롭고 홀가분한 여행을 떠난다는 건 아직까지는 많은 제약이 따르는 일이다.

이 틀 안에서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는 안타깝지만 부럽고 설레는 시간이다. '유배'로 떠난 시간이었지만 이를 통해 자신 속에 가라앉은 슬픔과 죄책감을 비어낼 수 있었다. 죽어버린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로 채워 넣는 시간이었으리라. 덕분에 책의 마지막에서 선량하고 한량하고 명랑한 글꾼인 김보리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불량주부라 칭했지만 시작부터 초지일관 따뜻하고 다정하며 배려심 넘치고 사랑스러운 본연의 모습을 글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서 가슴이 아렸다. 다시 예전처럼 명랑한 예의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신을 칭찬해달라신다. 지치지 않은 만큼 명랑한 예의를 기대해 본다. 김보리 작가님, 글이 좋아서 이렇게 또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응원하고 칭찬합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섬, 제주도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으로 제주도를 찾고 있으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제주도는 성황이었다. 근래 '한 달 살기', '올레길 걷기'로 제주도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해외 하늘길이 닫힌 후, 제주도는 더 많이 노출되고 소비되었다. 많은 먹거리와 관광지, 올레길이 소개되었다. 웃고 떠들고 감탄하는 영상으로 간접적으로 감정 소비된 제주도를 나는 쉽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를 통해 제주도를 다시 만났다. 책으로 만난 제주도는 영상으로 만난 제주도와는 다르게 천천히 다가오지만 더 친근하고 정감 있다. 저자가 걷는 그 길과 그 시선 따라 보고 상상하고 떠올려야 눈앞에 펼쳐진다. 시간을 들인 만큼 마음이 더 간다. 그래서 저자가 들르는 곳에 마음이 가 '살아보고 싶다'라고 하는 게 공감이 간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겁게.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조금은 깊이 있게 누리고 담는다."





아름다운 경관을 뽐내는 제주도에 또 다른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바로 '제주 방언'이다. 이 책 안에서 지역명이나 버스정류장명으로 접한 단어들이 너무 예뻐서 마음을 뺏겼다.

다랑쉬오름. 모슬포. 오시록헌(아늑한) 농로. 오조리, 사려니숲. 아끈(작다), 뒷빌레, 답다니, 검은여 바다, 곤을


육지와 왕래가 잦지 않았던 시절부터 독자적으로 형성된 제주어는 우리에게 생소한 언어이다. 같은 나라인데도 생경한 이 단어들이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입안에서 혀를 굴려 내뱉기까지 음미하게 되고 그 뜻을 알 수 없어 답답하기보다는 설렌다. 그 아름다운 단어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유배 일기를 통해 작가의 오늘과 과거를 만났다. 그리고 나의 시간이 겹쳐졌다.

너무 일찍 떠나보낸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애틋했고 그리움 가득이었다. 희생으로 아버지와 오 남매를 끌어안은 엄마에 대한 사랑은 넘쳐흘러 책을 읽는 나 또한 촉촉이 적셨다. 지금 내 나이보다 더 젊은 나이로 떠나신 아빠가 생각나 눈물이 났고, 더더 젊은 나이로 삼 남매를 홀로 키워내신 울 엄마가 가엾고 애처롭고 고마워서 사무쳤다. 겹쳐진 시간이 자꾸 눈물이 나게 했다. 그래도 사랑이 남아 힘을 북돋는다.

유배의 근원이었던 친구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이 묵직해졌다. 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한번 틀어져 버린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금이 가버린 마음을 다시금 잇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회복할 수조차 없이 친구를 떠나버린 황망함을 어찌 다스릴 수 있을까? 알면서도 외면했다는 죄책감은 곪은 상처가 되었다. 부디 시간이 상처는 옅어지게 하고, 친구와의 추억은 더 진하고 향기롭게 만들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제주도의 자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불량주부는 기운을 차렸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거문오름을 씩씩하게 걸어 올랐다.

오름 하나에 풍경 하나를 새겼다.

바굼지오름에서 내려다본 손바닥만 한 청보리밭의 거센 물결을,

아부오름에서 숨어 노래하던 팝페라 아저씨의 청아한 목소리를,

새별오름 억새의 마른 춤을,

따라비오름의 가는 나무 한 그루를 기억하고 있다.

오름을 수없이 올랐지만 분화구 안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귀한 인연이 인도한 세상을 다 모른 척해도 좋을 만한 곳, 분화구 한복판에서 연두와 고요를 누렸다.

 


오름 오르듯 살았으면 좋았을걸.

낮은 오름 하나 오르듯, 그리 살면 된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세상 모든 일이 한라산이고 백두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축돼서 살았다. 오르지 못할 산, 넘지 못할 산일 거라고 짐작하며 회피로 일관했다. 얕은 둔덕 하나하나를 오르고 넘다 보면 튼튼한 다리도 생기고 멀리 보는 눈도 생기고 기세도 생긴다. 오름 오르듯, 한 오름, 한 오름, 잘 쳐내며 살았어야 했다. 살아야 한다.

이제는, 다시 오름, 다 오름, 삶에 좀 더 오름. 때로는 악착같이 때로는 한량하게, 오름 또 오름. (120쪽)





주변을 챙기지 못할까 봐, 혹은 너무 챙겨서 내가 사라질까 봐 근심하던 과거는 훌훌 털어버리고, 나하고만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생활을 즐겼다. 안팎으로 여유를 주었다. 그렇게 자신을 보듬아주는 귀한 여행이었다. '여행'이라는 특권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도전, 스치는 인연 그리고 사랑하는 책과 함께 한 시간들이 그녀를 단단하게 해주었다.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덕분에 제주도를 더 세심하고 자세히 알게 되었다. 알게 된 만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한 두려움, 거부감도 줄어들었다. 김보리 작가의 여행 시그니처인 김밥과 막걸리, 그리고 초록 치마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글 속에서 부러워하기도 하고 기막혀하기도 한 반응들이 다 내 마음이었는데 다 읽으니 홀로 떠나 마음 따라 흘러가는 여행을 해보고 싶어졌다. 김보리 작가가 전해준 제주도의 일상을 참고하여 나만의 제주도 여행기 아니 유배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알려준 책방, 오름, 숙소 등 다양한 정보 덕분에 든든하다. 그녀의 도전이 새로운 도전의 씨앗이 되어주었다. 심고 물을 주고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을 쐬주면서 싹 틔울 날을 기다려보련다. 덕분에 잘 웃고 잘 울고 잘 깨닫는 다정한 시간을 가졌다.

 

<푸른향기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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