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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김보리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3월
평점 :
한 권의 책으로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함께 했다. 울다가 웃다가 미소 짓다가 다시금 멈추지 않는 울음과 함께 이 글을 쓰고 있다. 다행이다 싶다. 가족들은 각자의 또 다른 공간으로 떠나 오롯이 나만의 공간으로 허락된 집에서 맘껏 울 수 있어서 말이다.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 그리고 빨개진 눈과 눈시울을 숨기지 않아도 되어서, 소진할 때까지 다 쏟아내었다. 안 그래도 '울보'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가족이라도 이런 모습은 부끄럽다.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김보리 지음/푸른향기/여행에세이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의 첫 문장이다. 김보리 작가는 여러 가지 【유배의 변】을 늘어놓았다. 습관이 나빠서, 입체가 되고 싶어서, 사랑과 전쟁을 끝내고 싶어서, 남편 잘못 키운 죄로, 오순 잔치로, 지원 세력이 든든해서 유배를 간다는 그녀의 글들이 묵직하게 치고 들어왔다. '느슨한 연대' 외로움보다는 고독함으로, 허전함보다는 고즈넉함으로 내면을 단련하고 채우며, 각자 몫만큼의 행복을 누리며 살다가 이따금 한 번씩 다 같이 모여 행복하자고. 따로 또 같이. 담담한 문장에 담긴 마음이 자신을 다독이는 응원 같았다.
슬픔과 자책이 묻어나는 프롤로그와 유배의 변을 읽으면서 여행을 '유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궁금해하며 나름 추측해 보면서 홀로 떠난 제주도 여행기 - 유배 일기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1일 - 어서 와, 유배는 처음이지?
여행 가기 전날 남편과 크게 싸우고 와 불편했던 마음을 뒤로하고 계획한 대로 노는 것을 우선시하는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마음이 놀아야 한다. 방랑해야 한다. 감정이 요동쳐야 한다. 자유로워야 한다.
덜먹고 잘 놀고 살짝 취하는 여행이 시작된다."
완벽한 계획 대신 몇 가지의 규칙만을 세운 채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꾸려가는 여행은 자유롭고 여유로웠다. 최소한의 경비로 떠난 여행이기에 맛집, 맛 카페를 찾지 않고 하루 3만 원 내의 숙소를 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먹는 즐거움을 버리고 '남의 살'을 먹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제주도 여행 30일 식사 대부분을 '김막' = 김밥과 막걸리로 해결하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걷고 걷고 또 걷는 여행이었다.
홀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는 지금의 '나'로서는 생소한 여행이다. 아직은 아이들이 품 안에 있기에 주로 가족여행을 다니고 시댁, 친정 대소사에 계획하는 대규모 총출동 가족여행을 최근에 다녀왔다. 결혼하고 나만을 위한 여행은 동네 지인들과 당일치기로 떠난 강원도 버스투어가 유일무이한 듯하다. 그 여행 후 지인들과 '여행계'라는 명목으로 적은 돈을 매달 모으고 있지만, 여행보다는 식도락에 탕진하고 있는 실정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일조를 하기는 했지만, '엄마', '아내'라는 신분의 우리들이 자유롭고 홀가분한 여행을 떠난다는 건 아직까지는 많은 제약이 따르는 일이다.
이 틀 안에서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는 안타깝지만 부럽고 설레는 시간이다. '유배'로 떠난 시간이었지만 이를 통해 자신 속에 가라앉은 슬픔과 죄책감을 비어낼 수 있었다. 죽어버린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로 채워 넣는 시간이었으리라. 덕분에 책의 마지막에서 선량하고 한량하고 명랑한 글꾼인 김보리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불량주부라 칭했지만 시작부터 초지일관 따뜻하고 다정하며 배려심 넘치고 사랑스러운 본연의 모습을 글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서 가슴이 아렸다. 다시 예전처럼 명랑한 예의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신을 칭찬해달라신다. 지치지 않은 만큼 명랑한 예의를 기대해 본다. 김보리 작가님, 글이 좋아서 이렇게 또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응원하고 칭찬합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섬, 제주도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으로 제주도를 찾고 있으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제주도는 성황이었다. 근래 '한 달 살기', '올레길 걷기'로 제주도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해외 하늘길이 닫힌 후, 제주도는 더 많이 노출되고 소비되었다. 많은 먹거리와 관광지, 올레길이 소개되었다. 웃고 떠들고 감탄하는 영상으로 간접적으로 감정 소비된 제주도를 나는 쉽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를 통해 제주도를 다시 만났다. 책으로 만난 제주도는 영상으로 만난 제주도와는 다르게 천천히 다가오지만 더 친근하고 정감 있다. 저자가 걷는 그 길과 그 시선 따라 보고 상상하고 떠올려야 눈앞에 펼쳐진다. 시간을 들인 만큼 마음이 더 간다. 그래서 저자가 들르는 곳에 마음이 가 '살아보고 싶다'라고 하는 게 공감이 간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겁게.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조금은 깊이 있게 누리고 담는다."
아름다운 경관을 뽐내는 제주도에 또 다른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바로 '제주 방언'이다. 이 책 안에서 지역명이나 버스정류장명으로 접한 단어들이 너무 예뻐서 마음을 뺏겼다.
다랑쉬오름. 모슬포. 오시록헌(아늑한) 농로. 오조리, 사려니숲. 아끈(작다), 뒷빌레, 답다니, 검은여 바다, 곤을
육지와 왕래가 잦지 않았던 시절부터 독자적으로 형성된 제주어는 우리에게 생소한 언어이다. 같은 나라인데도 생경한 이 단어들이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입안에서 혀를 굴려 내뱉기까지 음미하게 되고 그 뜻을 알 수 없어 답답하기보다는 설렌다. 그 아름다운 단어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유배 일기를 통해 작가의 오늘과 과거를 만났다. 그리고 나의 시간이 겹쳐졌다.
너무 일찍 떠나보낸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애틋했고 그리움 가득이었다. 희생으로 아버지와 오 남매를 끌어안은 엄마에 대한 사랑은 넘쳐흘러 책을 읽는 나 또한 촉촉이 적셨다. 지금 내 나이보다 더 젊은 나이로 떠나신 아빠가 생각나 눈물이 났고, 더더 젊은 나이로 삼 남매를 홀로 키워내신 울 엄마가 가엾고 애처롭고 고마워서 사무쳤다. 겹쳐진 시간이 자꾸 눈물이 나게 했다. 그래도 사랑이 남아 힘을 북돋는다.
유배의 근원이었던 친구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이 묵직해졌다. 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한번 틀어져 버린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금이 가버린 마음을 다시금 잇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회복할 수조차 없이 친구를 떠나버린 황망함을 어찌 다스릴 수 있을까? 알면서도 외면했다는 죄책감은 곪은 상처가 되었다. 부디 시간이 상처는 옅어지게 하고, 친구와의 추억은 더 진하고 향기롭게 만들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제주도의 자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불량주부는 기운을 차렸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거문오름을 씩씩하게 걸어 올랐다.
오름 하나에 풍경 하나를 새겼다.
바굼지오름에서 내려다본 손바닥만 한 청보리밭의 거센 물결을,
아부오름에서 숨어 노래하던 팝페라 아저씨의 청아한 목소리를,
새별오름 억새의 마른 춤을,
따라비오름의 가는 나무 한 그루를 기억하고 있다.
오름을 수없이 올랐지만 분화구 안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귀한 인연이 인도한 세상을 다 모른 척해도 좋을 만한 곳, 분화구 한복판에서 연두와 고요를 누렸다.
오름 오르듯 살았으면 좋았을걸.
낮은 오름 하나 오르듯, 그리 살면 된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세상 모든 일이 한라산이고 백두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축돼서 살았다. 오르지 못할 산, 넘지 못할 산일 거라고 짐작하며 회피로 일관했다. 얕은 둔덕 하나하나를 오르고 넘다 보면 튼튼한 다리도 생기고 멀리 보는 눈도 생기고 기세도 생긴다. 오름 오르듯, 한 오름, 한 오름, 잘 쳐내며 살았어야 했다. 살아야 한다.
이제는, 다시 오름, 다 오름, 삶에 좀 더 오름. 때로는 악착같이 때로는 한량하게, 오름 또 오름. (120쪽)
주변을 챙기지 못할까 봐, 혹은 너무 챙겨서 내가 사라질까 봐 근심하던 과거는 훌훌 털어버리고, 나하고만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생활을 즐겼다. 안팎으로 여유를 주었다. 그렇게 자신을 보듬아주는 귀한 여행이었다. '여행'이라는 특권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도전, 스치는 인연 그리고 사랑하는 책과 함께 한 시간들이 그녀를 단단하게 해주었다.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덕분에 제주도를 더 세심하고 자세히 알게 되었다. 알게 된 만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한 두려움, 거부감도 줄어들었다. 김보리 작가의 여행 시그니처인 김밥과 막걸리, 그리고 초록 치마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글 속에서 부러워하기도 하고 기막혀하기도 한 반응들이 다 내 마음이었는데 다 읽으니 홀로 떠나 마음 따라 흘러가는 여행을 해보고 싶어졌다. 김보리 작가가 전해준 제주도의 일상을 참고하여 나만의 제주도 여행기 아니 유배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알려준 책방, 오름, 숙소 등 다양한 정보 덕분에 든든하다. 그녀의 도전이 새로운 도전의 씨앗이 되어주었다. 심고 물을 주고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을 쐬주면서 싹 틔울 날을 기다려보련다. 덕분에 잘 웃고 잘 울고 잘 깨닫는 다정한 시간을 가졌다.
<푸른향기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