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의 형제 1 -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 이리의 형제 1
허교범 지음, 산사 그림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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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고개 탐정과 마술사>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허교범 작가가 신작과 함께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이리의 형제』 1.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 

가제본으로 미리 만나본 이 소설은 외롭고 슬픈 그래서 고통스러운 판타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이리의 형제/1.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허교범 글/산사 그림/창비



본격적인 내용이 펼쳐지기 전에 우리는 의미심장한 성경 구절부터 만나게 된다.

고난의 대명사 '욥'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욥기 중 한 대목이다.



선한 부자였던 욥이 고난을 겪게 되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내뱉는 말이다. 고통받는 자신을 외롭고 슬픈 동물로 회자되는 이리와 타조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허교범 작가는 이를 차용하여 신작 제목을 붙였다.  『이리의 형제』 

 

이리! 요즘에는 '늑대'로 불리는 동물인 '이리'는 떼를 지어 다니며 결속력이 강한 동물이다. 달과 연관 지은 이야기들이 많은 동물로 이번 이야기 역시 달의 변화와 힘이 중요하다. 신비롭고 오묘한 힘의 원천, 달이 등장하는 소설답게 전설, 설화,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구미호, 구울, 늑대 인간, 흡혈귀같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소환하여 판타지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친숙한 소재인데도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스토리텔러로서의 허교범을 만날 수 있는 즐겁고 놀라움 가득한 시간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인 노단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강한 존재만이 살아남는 종족 특성과는 다르게 유일한 핏줄인 그를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10년이 넘도록 병원에서 수명을 연장시켰고, 열두 살이 된 그에게 '하유랑시'를 사냥터로 주고는 떠났다.

 

 

늘 아래 난히 사스러운 도, 하유랑시입니다.

 

 

홀로 남은 노단,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 주어진 큰 임무는 도시를 장악해 인간의 힘을 흡수하여 살아남는 것이다. 실패하면 죽음뿐. 종족 중 높은 자리에 위치하는 아버지의 도움은 지금까지로 충분하다. 존경하고 두려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서 자기 두발로 꼿꼿하게 서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꼿꼿하게 걸어나가는 것만이 선택지이다. 저주를 받았다느니 운명을 벗어난다느니 하면서 다른 떠돌이처럼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노단의 눈에 들어온 한 인간, 그를 부하로 삼는 것부터 시작이다.



"첫 번째 부하는 반드시 강한 자여야 하는 건가요?

약하고 패배자 같은 인간을 고르면 안 되는 건가요?"

 

 

노단의 본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큰 임무를 시작하는 순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병원에서 살아남으면서 수없이 곱씹었던 질문과 고민 그리고 상처를 드러내며 극복하고자 한다. 노단은 운명에 순종하면서 아버지처럼 강한 존재로 살아남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 그가 선택한 첫 번째 부하, 연준은 그에게 힘이 되어줄 것인가?

 

 

먹이에는 한 방울, 부하에는 두 방울,

마음이 급하면 세 방울, 네 방울은 영원한 추방


 

 

『이리의 형제』 대서사시가 시작된 1권 -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 - 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등장과 그와 엮이는 인간 그리고 배경이 되는 하유랑시를 소개하고 있다. 도시를 장악하고자 하는 노단과 그가 선택한 부하와 먹이가 될 인간 그리고 이를 막고자 하는 노단과 같은 존재인 유랑이 주축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노단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떠돌이 삶을 선택한 '유랑'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자신이 선택한 하유랑시가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떠돌이 삶을 선택한 유랑에게 허락된 짧은 삶을 조용하고 안정적으로 보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내 남은 생을 망치려고 하고 있어."

 


유랑이 노단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를 막아내려고 준비하는 동안, 노단도 유랑의 존재를 감지한다.

 


"나는 네가 감히 여기 내 영토에 숨어 있다는 걸 알아.

널 찾아낼 거다. 그리고 없애 버릴 거야.

 


이제는 노단과 유랑은 대결을 피할 수 없다. 도망치고 싶지 않은 유랑은 애써 두려움을 떨쳐내면서 노단의 주변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노단이 선택한 첫 번째 부하 연준에게. 그리고 연준에게 노단이 감춘 비밀을 알려준다. 연준은 유랑의 말에 고민이 깊어진다. 과연 그의 선택은 무엇일지 그리고 그 선택이 가져올 결말은 어떻게 될지 긴장되는 전개가 펼쳐진다. 생존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이 예고되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의구심이 불씨가 되어 인간 세상을 활활 타오르게 할 『이리의 형제』

 


"너는 나를 섬겨라."

"너에게 힘을 줄게. 이건 시작일 뿐이야."


 

지치고 나약한 틈을 파고드는 노단의 말. 자신은 결코 유혹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만만한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 지으면서도 매력적인 '힘'에 대한 욕망이 아가리를 크게 벌려 우리를 집어삼키는 장면이 떠올라 소름이 돋는다.

 


휘두를 기회가 없는 힘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선택된 특별한 존재, 연준은 노단에 대한 두려움과 힘에 대한 동경에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힘이 생기자 사람을 해치는 것이라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쁘지 않을 것 같게 느끼는 연준이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갓난아이기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만큼 온화했다. 온화함 속에 태초부터 전해지는 악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맹수가 사냥할 때 먹잇감을 노려보는 눈, 칼날을 칠해 놓은 듯한 눈, 눈매는 타오를 듯했으나 눈동자에서 나오는 시선은 바늘처럼 차가운 눈 그렇게 뜨거움과 차가움이 섞이지 않고 공존하는 눈이었다.

 

명령을 내리는 자. 노단의 종족에 대한 묘사가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그들이 부리는 힘의 크기가 놀라웠다. 그 무서운 힘 앞에 선 인간은 따르느냐 거부하느냐 고민할 수밖에 없다. 따르는 이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거부하는 이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거꾸로 사냥한다. 이를 단순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까?

 


무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배척되었던 노단이 자신의 생존을 위한 도시, 하유랑시에서 선택한 첫 번째 부하가 패배자같이 비를 맞으며 외롭게 걸어가던 연준이었고, 먹이를 연준이 가장 싫어하는 인간인 영식으로 정했다. 타인에게 무심하지 않고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노단을 인간의 시선으로 괴물이라 칭하는 게 정당한가? 고민이 깊어졌다.

'힘'에 대한 경외는 본성일 것일까? 그렇다면 이를 따른 것은 당연하고 정당한 것일까? 순순히 인정하기에는 가슴이 찌릿찌릿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편치 않은 무언가가 있다.



"아닌, 그건 네가 힘든 원인이 아니다.

성적이란 건 결국 종이에 적힌 숫자인데 

종이도 숫자도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 없어.

그 숫자를 가지고 널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야 힘들 수 있는 거야."

 

본질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노단. 초등고학년 대상의 어린이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담고 있는 소재와 주제, 내용이 범상치 않은 『이리의 형제』는 쉽게 결론을 내리거나 남의 생각을 자신의 의견이라 섣불리 믿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사고력과 판단력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를 일차원적인 관점에서 인식하지 말고, 본질이 무엇인지 들여다 보는 것을 권하고 있다.

 



이리의 형제 1.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허교범 글/산사 그림/창비



처절한 결말로 1권이 끝났다. 매듭지어지지 않은 마무리는 충족되지 않은 갈증을 키우고 있다. 선과 악, 힘과 자유 그리고 생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담긴 『이리의 형제』 1.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 끝나지 않은 노단과 유랑 그리고 인간의 대결이 무한한 상상력으로 펼쳐질 신호탄이 우리 앞에서 터졌다! 허교범 작가가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독자에게 아량을 베풀어 속히 속편을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날 하유랑시는 처음으로 노단을 품은 채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누구도 이날을 특별한 날로 기억하지 않았다. 나중에 악에 동참하는 이들, 희생당하는 이들, 알고도 침묵을 지키는 이들, 맞서 싸우는 이들, 그리고 아직 하유랑시라는 무대에 오지 못한 이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24쪽)

 

<창비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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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베스트셀러 반올림 55
엘자 드베르누아 지음, 김주경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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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베스트셀러/엘자 드베르누아 지음/바람의아이들



분홍빛 고운 표지에 두 소녀가 서로 몸을 돌린 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 있다. 붉은 머리의 소녀는 고개를 한껏 치켜든 채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금발의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상반되는 모습에 두 소녀 사이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천재 소녀 작가의 소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거짓과 질투, 배신

 

열세 살 단짝 친구 '알리시아'와 '클레망스'는 매주 수요일마다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다.

책 읽기의 즐거움을 공유했던 어린 시절을 거쳐 지금은 함께 글을 쓰며 작가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바캉스를 맞아 두 달을 서로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아이들은 각자 공들여 다듬은 멋진 작품을 써보기로 약속한다.

드디어 9월이 되어 다시 만난 알리시아와 클레망스.

알리시아는 놀라운 소식을 클레망스에게 전한다.





이 소설은 알리시아의 시점과 클레망스의 시점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시간이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두 소녀의 심리를 현실적인 문체로 잘 묘사하고 있어서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단짝 친구였던 두 소녀의 사이를 멀어지게 된 계기가 베스트셀러가 될 대작 원고라는 점도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클레망스는 유명 작가를 꿈꾸는 소녀였기에 타임머신이라는 다소 황당한 설명에도 <지옥의 사람들> 원고의 출처를 의심하지 않았다. 설마?라는 의심도 흡입력 강한 작품에 빠져들어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알리시아가 할 수 있다면 나라고 못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클레망스가 겪는 심리 변화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래로 간 시간여행에서 '마르티유'라는 소녀가 지은 베스트셀러 <지옥의 사람들>을 가지고 온 알리시아가 자신이 마르티유인 척하며 책을 출판하려 한다는 계획을 들려주며, 원고가 든 USB를 건네며 읽어보라고 권한다. 클레망스는 책 내용에 흠뻑 빠져 중독되고 말았다. '마르티유'의 재능에 감복한다. 그리고 알리시아가 하려는 행동이 얼마나 부당한 지를 생각하게 된다. 알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지다가 알리시아의 계획을 자기가 실행으로 옮기게 된다. 치사하고 비겁한 행동을 하려 한 알리시아를 혐오했으면서 말이다. '내로남불'(아시타비)이라 했던가.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우리의 양면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믿었던 친구에게 큰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여러 번 기회를 주고 자신의 실력으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은 알리시아의 행보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유일한 가족인 아빠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배신에 대해 싸울 수 있도록 용기를 준 클로비스를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다.

 

알리시아와 클레망스의 질투 그리고 배신이 펼쳐지는 가운데 중재하는 역할로 등장한 베릴 마시노 편집장은 실망스러웠다. 어른으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편집장으로서 알리시아의 상처보다는 클레망스의 잘못된 선택을 옹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특히 알리시아에게 '대작자'를 제안할 때는 너무나 화가 났다. 클레망스가 한 행동이 실수라 하더라도 잘못된 선택이었기에 책임은 그 아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인데 알리시아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끔찍한 우를 범했다. 프랑스어 선생님이나 베릴 마시노 편집장 등 어른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태도는 비겁했고 다분히 현실적이어서 못마땅했다.

 

그 애의 대답에 따라서 『잘못된 선택』을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겠어!

 

이제 단짝이었던 둘만의 작은 유년기는 어느새 끝나버렸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시간이다. 큰 성장통을 겪은 알리시아와 클레망스는 훌쩍 큰 모습이다.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 있는 유혹의 순간,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짊어져야 할지 질문을 던지는 『우리의 베스트셀러』였다.

* 소설 중간에 대한민국 소녀팬 '박희영'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출판본이어서 그런 건지 원래 그런 건지 원작이 궁금해졌다.

 

<바람의아이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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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김보리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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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으로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함께 했다. 울다가 웃다가 미소 짓다가 다시금 멈추지 않는 울음과 함께 이 글을 쓰고 있다. 다행이다 싶다. 가족들은 각자의 또 다른 공간으로 떠나 오롯이 나만의 공간으로 허락된 집에서 맘껏 울 수 있어서 말이다.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 그리고 빨개진 눈과 눈시울을 숨기지 않아도 되어서, 소진할 때까지 다 쏟아내었다. 안 그래도 '울보'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가족이라도 이런 모습은 부끄럽다.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김보리 지음/푸른향기/여행에세이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의 첫 문장이다. 김보리 작가는 여러 가지 【유배의 변】을 늘어놓았다. 습관이 나빠서, 입체가 되고 싶어서, 사랑과 전쟁을 끝내고 싶어서, 남편 잘못 키운 죄로, 오순 잔치로, 지원 세력이 든든해서 유배를 간다는 그녀의 글들이 묵직하게 치고 들어왔다. '느슨한 연대' 외로움보다는 고독함으로, 허전함보다는 고즈넉함으로 내면을 단련하고 채우며, 각자 몫만큼의 행복을 누리며 살다가 이따금 한 번씩 다 같이 모여 행복하자고. 따로 또 같이. 담담한 문장에 담긴 마음이 자신을 다독이는 응원 같았다.

 

슬픔과 자책이 묻어나는 프롤로그와 유배의 변을 읽으면서 여행을 '유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궁금해하며 나름 추측해 보면서 홀로 떠난 제주도 여행기 - 유배 일기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1일 - 어서 와, 유배는 처음이지?

여행 가기 전날 남편과 크게 싸우고 와 불편했던 마음을 뒤로하고 계획한 대로 노는 것을 우선시하는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마음이 놀아야 한다. 방랑해야 한다. 감정이 요동쳐야 한다. 자유로워야 한다.

덜먹고 잘 놀고 살짝 취하는 여행이 시작된다."


완벽한 계획 대신 몇 가지의 규칙만을 세운 채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꾸려가는 여행은 자유롭고 여유로웠다. 최소한의 경비로 떠난 여행이기에 맛집, 맛 카페를 찾지 않고 하루 3만 원 내의 숙소를 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먹는 즐거움을 버리고 '남의 살'을 먹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제주도 여행 30일 식사 대부분을 '김막' = 김밥과 막걸리로 해결하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걷고 걷고 또 걷는 여행이었다.

홀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는 지금의 '나'로서는 생소한 여행이다. 아직은 아이들이 품 안에 있기에 주로 가족여행을 다니고 시댁, 친정 대소사에 계획하는 대규모 총출동 가족여행을 최근에 다녀왔다. 결혼하고 나만을 위한 여행은 동네 지인들과 당일치기로 떠난 강원도 버스투어가 유일무이한 듯하다. 그 여행 후 지인들과 '여행계'라는 명목으로 적은 돈을 매달 모으고 있지만, 여행보다는 식도락에 탕진하고 있는 실정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일조를 하기는 했지만, '엄마', '아내'라는 신분의 우리들이 자유롭고 홀가분한 여행을 떠난다는 건 아직까지는 많은 제약이 따르는 일이다.

이 틀 안에서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는 안타깝지만 부럽고 설레는 시간이다. '유배'로 떠난 시간이었지만 이를 통해 자신 속에 가라앉은 슬픔과 죄책감을 비어낼 수 있었다. 죽어버린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로 채워 넣는 시간이었으리라. 덕분에 책의 마지막에서 선량하고 한량하고 명랑한 글꾼인 김보리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불량주부라 칭했지만 시작부터 초지일관 따뜻하고 다정하며 배려심 넘치고 사랑스러운 본연의 모습을 글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서 가슴이 아렸다. 다시 예전처럼 명랑한 예의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신을 칭찬해달라신다. 지치지 않은 만큼 명랑한 예의를 기대해 본다. 김보리 작가님, 글이 좋아서 이렇게 또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응원하고 칭찬합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섬, 제주도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으로 제주도를 찾고 있으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제주도는 성황이었다. 근래 '한 달 살기', '올레길 걷기'로 제주도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해외 하늘길이 닫힌 후, 제주도는 더 많이 노출되고 소비되었다. 많은 먹거리와 관광지, 올레길이 소개되었다. 웃고 떠들고 감탄하는 영상으로 간접적으로 감정 소비된 제주도를 나는 쉽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를 통해 제주도를 다시 만났다. 책으로 만난 제주도는 영상으로 만난 제주도와는 다르게 천천히 다가오지만 더 친근하고 정감 있다. 저자가 걷는 그 길과 그 시선 따라 보고 상상하고 떠올려야 눈앞에 펼쳐진다. 시간을 들인 만큼 마음이 더 간다. 그래서 저자가 들르는 곳에 마음이 가 '살아보고 싶다'라고 하는 게 공감이 간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겁게.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조금은 깊이 있게 누리고 담는다."





아름다운 경관을 뽐내는 제주도에 또 다른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바로 '제주 방언'이다. 이 책 안에서 지역명이나 버스정류장명으로 접한 단어들이 너무 예뻐서 마음을 뺏겼다.

다랑쉬오름. 모슬포. 오시록헌(아늑한) 농로. 오조리, 사려니숲. 아끈(작다), 뒷빌레, 답다니, 검은여 바다, 곤을


육지와 왕래가 잦지 않았던 시절부터 독자적으로 형성된 제주어는 우리에게 생소한 언어이다. 같은 나라인데도 생경한 이 단어들이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입안에서 혀를 굴려 내뱉기까지 음미하게 되고 그 뜻을 알 수 없어 답답하기보다는 설렌다. 그 아름다운 단어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유배 일기를 통해 작가의 오늘과 과거를 만났다. 그리고 나의 시간이 겹쳐졌다.

너무 일찍 떠나보낸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애틋했고 그리움 가득이었다. 희생으로 아버지와 오 남매를 끌어안은 엄마에 대한 사랑은 넘쳐흘러 책을 읽는 나 또한 촉촉이 적셨다. 지금 내 나이보다 더 젊은 나이로 떠나신 아빠가 생각나 눈물이 났고, 더더 젊은 나이로 삼 남매를 홀로 키워내신 울 엄마가 가엾고 애처롭고 고마워서 사무쳤다. 겹쳐진 시간이 자꾸 눈물이 나게 했다. 그래도 사랑이 남아 힘을 북돋는다.

유배의 근원이었던 친구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이 묵직해졌다. 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한번 틀어져 버린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금이 가버린 마음을 다시금 잇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회복할 수조차 없이 친구를 떠나버린 황망함을 어찌 다스릴 수 있을까? 알면서도 외면했다는 죄책감은 곪은 상처가 되었다. 부디 시간이 상처는 옅어지게 하고, 친구와의 추억은 더 진하고 향기롭게 만들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제주도의 자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불량주부는 기운을 차렸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거문오름을 씩씩하게 걸어 올랐다.

오름 하나에 풍경 하나를 새겼다.

바굼지오름에서 내려다본 손바닥만 한 청보리밭의 거센 물결을,

아부오름에서 숨어 노래하던 팝페라 아저씨의 청아한 목소리를,

새별오름 억새의 마른 춤을,

따라비오름의 가는 나무 한 그루를 기억하고 있다.

오름을 수없이 올랐지만 분화구 안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귀한 인연이 인도한 세상을 다 모른 척해도 좋을 만한 곳, 분화구 한복판에서 연두와 고요를 누렸다.

 


오름 오르듯 살았으면 좋았을걸.

낮은 오름 하나 오르듯, 그리 살면 된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세상 모든 일이 한라산이고 백두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축돼서 살았다. 오르지 못할 산, 넘지 못할 산일 거라고 짐작하며 회피로 일관했다. 얕은 둔덕 하나하나를 오르고 넘다 보면 튼튼한 다리도 생기고 멀리 보는 눈도 생기고 기세도 생긴다. 오름 오르듯, 한 오름, 한 오름, 잘 쳐내며 살았어야 했다. 살아야 한다.

이제는, 다시 오름, 다 오름, 삶에 좀 더 오름. 때로는 악착같이 때로는 한량하게, 오름 또 오름. (120쪽)





주변을 챙기지 못할까 봐, 혹은 너무 챙겨서 내가 사라질까 봐 근심하던 과거는 훌훌 털어버리고, 나하고만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생활을 즐겼다. 안팎으로 여유를 주었다. 그렇게 자신을 보듬아주는 귀한 여행이었다. '여행'이라는 특권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도전, 스치는 인연 그리고 사랑하는 책과 함께 한 시간들이 그녀를 단단하게 해주었다.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덕분에 제주도를 더 세심하고 자세히 알게 되었다. 알게 된 만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한 두려움, 거부감도 줄어들었다. 김보리 작가의 여행 시그니처인 김밥과 막걸리, 그리고 초록 치마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글 속에서 부러워하기도 하고 기막혀하기도 한 반응들이 다 내 마음이었는데 다 읽으니 홀로 떠나 마음 따라 흘러가는 여행을 해보고 싶어졌다. 김보리 작가가 전해준 제주도의 일상을 참고하여 나만의 제주도 여행기 아니 유배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알려준 책방, 오름, 숙소 등 다양한 정보 덕분에 든든하다. 그녀의 도전이 새로운 도전의 씨앗이 되어주었다. 심고 물을 주고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을 쐬주면서 싹 틔울 날을 기다려보련다. 덕분에 잘 웃고 잘 울고 잘 깨닫는 다정한 시간을 가졌다.

 

<푸른향기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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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베이킹 - 심란한 날에도 기쁜 날에도 빵을 굽자 딴딴 시리즈 5
송은정 지음 / 인디고(글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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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란한 날에도 기쁜 날에도 빵을 굽자

부제를 달고 도착한 송은정 작가의 『비건 베이킹』


비건 베이킹/송은정 지음/인디고(글담) 딴딴 시리즈 05



'비건' 기후 위기의 지구를 위한 화두로 떠오른 채식에 대해 관심이 있어 실천하고 싶지만 싶지 않다. 완전한 채식이 아닌 유연한 채식의 세계를 기웃거리고 있는 주변인으로서 비건 베이킹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이었다. 비건 베이킹의 세계를 구경하고 싶어 읽기 시작한 이 책은 비건 베이킹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좋아하고 사랑을 키워가는 송은정 작가의 목소리였다. 진솔한 삶의 메시지를 비건 베이킹 카테고리로 풀어내고 있는 다정한 에세이다.

 

자신의 일상을 야무지게 채워나가는 단단한 이의 에너지가 프롤로그에서부터 뿜어져 나온다. 지구는 여전히 돌고 있고 이 삶이 계속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의 건전한 확신이 희망으로 다가온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동네 지인들과의 티타임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인 아파트에 사시는 이웃인데 아파트 화단에 꽃을 심으셔 가꾸신다고 한다. 그리고 아파트 내 쉴 수 있는 공간에 크렘 브륄레 같은 간식과 차를 준비해놓고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권하고 담소를 나누신단다. 크렘 브륄레라니,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어린 혜원을 위해 엄마가 해주던 바로 그 음식이 아니던가! 톡~ 하고 치면 갈라지는 설탕막이 너무 신기하고 예뻤던 기억이 났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선생님도 환경을 소중히 생각하며 환경을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하고 계시는 지역 활동가이시다. 역시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이 있다며 우리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렇듯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행하는 이웃들이 있다는 자각의 순간이 있고 그러면 절로 행복해지고 따라 하고 싶어진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정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지인, 지인 이야기 속 이웃 그리고 송은정 작가처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신기하게도 『비건 베이킹』 책 속에서도 영화 리틀 포레스트(좋아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타인을 만나는 큰 기쁨, 괜스레 이 책도, 송은정 작가도 더 좋아진다)에서 나온 보늬밤이 나온다. 어렵다기보다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은 더 많이 필요한 보늬밤으로, 밤의 두꺼운 외피를 날리는 소일거리로부터 일종의 유희와 평안, 자유를 맛 봐왔을 지도 모르겠다는 표현에 공감하게 된다. '요리'라는 세계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치유의 시간에 감사한다.

 

짓는 사람, 파는 사람, 먹는 사람으로 이어지는 순환 속에서 대부분 먹는 사람에 속하는 나는 망각하고 산다. 씨앗이 떡잎을 내고 열매를 맺기까지 실재하는 누군가의 땀과 노동이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저자가 마르쉐에서 마주한 얼굴들이 깨닫게 해준 것처럼 나 또한 이 책을 통해 우리 집 식탁에 오르는 음식들의 서사를 되새겨 본다. 오늘의 지구와는 분명히 다를 내일의 지구를 두려워만 말고, 지금 자연과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사하며 현재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하루에 희망을 걸어볼 만하다.

 

유기묘 '옹심이'로 비건 베이킹을 시작하게 된 저자와

'나의 문어 선생님' 다큐멘터리를 보고 문어를 먹지 않게 된 저자의 남편.

이처럼 변화는 일순간에 찾아오는 경우가 잦다. 평소 관심이 있었든 없었든 벼락에 맞은 듯이 전후가 명확히 달라지는 경험을 누구나 한두 번쯤은 하게 된다.

나는 변화의 계기보다는 비건을 지향하는 저자가 주위 사람들에게 권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끌렸다. 채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관한 질문에 대해 상대방의 윤리의식, 가치관을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배려 넘치는 답을 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자신의 답을 정답이라 남에게 강요하지 않지만, 관심을 보이는 타인과는 공유하고 확장하는 현명함이 좋았다. 그래서 송은정 작가가 들려주는 비건 베이킹 이야기들이 더 설득력 있고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온전한 내 것, 확실한 내 것인 기쁨을 느끼게 해준 비건 베이킹으로 송은정 작가는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변화와 내일을 그리고 자신만이 줄 수 있는 친절과 사랑을 완성시켜가고 있었다.

 

책을 덮고 나니,

버리기는 아깝고 쓰기에는 귀찮아 몇 년째 모셔두기만 했던 오븐을 괜스레 꺼내어 보게 되었다.

송은정 저자가 소개해 준 '독일빵고모'님 유튜브 채널을 보고 있다. 도전하는 것부터가 큰 용기지만 빵조카 아니 빵손자라도 돼보고 싶은 지금의 의욕이 나를 달라지게 할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찾고 싶다면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시도를 해보는 용기가 필요할 터이니.

 

송은정 작가는 반려묘 옹심이를 계기로 비건 베이킹을 시도하는 등 '삶을 지속하기 위해 이전과 다르게 사랑해 보기로 했다'라고 말한다. 불현듯 나도 삶을 지속하기 위해 나만의 무언가, 인생에 무해한 썸띵이 궁금해졌다. 춥고 긴 밤을 통과해야 할지라도 아침이 온다는 순전한 사실만으로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나만의 딴짓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글담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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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개주막 기담회 3 케이팩션
오윤희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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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사절단의 사행길에 만난 기이하고도 뭉클한 열하기담

 

지난겨울, 선노미는 조선 땅 너머 청나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연암 박지원과 머나먼 길을 떠난 그가 돌아와 기이하고 괴상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그날을 애타게 기다렸다. 이제 그가 들려주는 기이하고도 뭉클한 이야기들을 들을 시간이다.

 

선노미는 건륭제 70세 생일 축하 사절단으로 청나라로 떠나는 연암 박지원의 시종으로 사행길을 따라나선다. 생애 처음으로 삼개 나루터를 떠나 머나먼 청나라까지 가게 된 선노미는 얼마나 가슴 벅찼을까? 생각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삼개주막 기담회에서 들은 진귀한 기담들이 전해준 교훈과 감동을 떠올리니 기대감이 솟구친다. 더 넓은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들은 기이하고도 괴상한 이야기보따리! 열하기담, 지금부터 시작이다. 



삼개주막 기담회3/오윤희 기담소설/고즈넉이엔티



이번에도 6편의 기담이 우리를 찾아왔다. 

▶ 압록강 뱃사공

▶ 돌아온 탕아

▶ 마마신이 찾은 마을

▶ 붉은 비단의 저주

▶ 화피

▶ 낙원

 

 

<압록강 뱃사공>

청나라를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압록강! 그곳에서 만난 뱃사공 주매가 첫 번째 화자이다.

강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두 세계를 이어주는 안내인이지만,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라 느끼는 뱃사공 주매는 자신이 겪은 믿기 힘든 기이한 사연을 털어놓는다. 선노미처럼 태어나 자란 작은 마을에서 뻔히 그려지는 자신의 미래가 갑갑해 벗어나고 싶었던 주매는 압록강을 찾았다. 강 건너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는 그를 설레게 했고, 팍팍하고 단순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자주 찾아 얼굴이 익은 나루터 뱃사공의 제안에 사공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땅거미가 질 무렵 배를 탄 젊은 남녀 한 쌍이 기묘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죽어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구천을 떠도는 영혼, 귀신과 그를 안내하는 저승사자였다. 강을 건네주는 일을 하는 사공과 넋을 인도하는 일을 하는 저승사자, 어찌 보면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귀신도 예전엔 사람이었어요. 우리도 죽으면 귀신이 될지 모르고요."

 

이 세상과 저세상 사이에 낀 넋들이 가야 할 곳으로 안내해주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잊지 못하는 뱃사공 주매의 가슴 시린 뒷이야기가 그가 짊어지고 있는 고통의 무게를 가늠하게 한다. 세월이 흘러 예전과 다시 만나길 바라며 노를 젓어 사라지는 주매의 뒷모습에 찌릿해진다. 모르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고, 이루기 전이기에 꿈꿀 수 있다. 다 알고 나서도 이루고 나서도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싶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 뱃사공 주매의 가슴속 깊은 이야기가 마냥 슬프기만 하지 않아 다행이다 싶다. 

 

<돌아온 탕아>

구련성에 도착해 천막을 치고 노숙을 하던 중, 근처에서 천막을 치고 머무르던 의주 만상 구복이 괴상하고도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인이라 조선과 청나라를 오가며 장사를 하면서 들은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어린 시절 직접 겪은 귀신 이야기이다. 

 

"동생은 정말 성가셔."

 

한 배에서 나온 형제자매라 한들 다 제각기 다른 사람이기에 외모, 성향, 성품이 다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교한다. 그리고 입에 담는다.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되는 일임을 알지도 모른 채. 그 상처가 곪아 누군가가 망가지면 결국에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고치고자 노력해야 했으나 못했던 이의 책임인지, 계속 비교하여 상처를 낸 이의 책임인지. 하지만 책임을 떠나 가족 관계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은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형제자매가 많든 적든 서로에게 큰 힘을 주는 존재가 큰 상처가 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마마신이 찾은 마을>

폐쇄적인 마을에서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일부를 희생시켜도 된다는 집단주의에 빠진 원로들이 벌이는 잔인한 행태가 그려진다. 역병을 피해 오지로 피신 왔던 이들이 정착해 만든 마을이기에 더 철저히 지켜왔던 규칙일지도 모르지만 위험한 발상이다. 원로들에게만 전해져 오던 극악무도한 규칙은 바깥 세상서 죄를 짓고 도망친 목수 용주에 의해 깨지게 된다. 모난 돌이었던 용주는 인간 된 도리를 아는 이였건만 잘못된 선택을 한 춘삼에 의해 가여운 운명을 맞이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용주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서 돌아온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들 하지."

"무서운 건 사람이죠.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저는 실제로 봤으니까요."

 

이 이야기를 들은 연암의 반응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괴짜 선비였기에 더 와닿는 이야기였으리라. 

신분이 정해준 대로 살아야 했던 조선 시절, 신분에 맞지 않은 재주는 오히려 자신을 갉아먹는 화가 될 수 있다. 연암과 벗 경준의 이야기는 조선 시대 신분제가 가져온 한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태어나 보니 서얼이요, 태어나 보니 종이라는 데 얼마나 답답하고 분통할 일인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일이다. 

 

 

<붉은 비단의 저주>

청나라에 갔으니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 이야기가 빠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리도 가슴 저미는 이야기로 마음을 헤집어놓았다. 타국에서도 백성들을 위하는 길을 찾는 강인한 여성인 민회빈 강 씨를 만나 존경스럽고 좋으면서도 허망하게 져버린 가엾은 운명의 결말을 알기에 더 애달팠다. 꼬이고 꼬인 이야기라 찬찬히 풀어나가면서 읽어야 한다. 타국에서조차 백성들의 안위를 챙겼던 의로운 여인이었던 세자빈 강 씨를 허망하게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유언비어와 풍문이었다. 근거 없는 소문은 가벼운 사람의 입을 타고, 바람을 타고 어느 곳이든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덩치를 키워나갔다. 

 

"인간이란 세 치 혀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지……"

 

 

<화피>

드디어 청나라 서생이 직접 들려주는 청나라 표 기담이다.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꿔 끼워 사람을 현혹한다는 요괴, 화피를 만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손자가 들려준다. 화가였던 할아버지 안핑은 어느 날, 밤이 꽤 깊어갈 무렵 화실을 찾아온 젊은 여자의 청으로 그녀의 집에 따라가게 된다. 화폭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여자의 미모에 홀려 불안과 의심을 애써 누르고 따라간 게 화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얼굴을 그려줄 이가 필요해서 화가인 안핑을 유혹해서 집으로 끌어들였으니, 안핑의 운명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눈에 보이는 걸 믿지 마시오."

 

안핑과 같이 붙잡혀 온 아이로, 무거운 봇짐을 짊어진 노파로, 발목을 삔 젊은 여자로, 길가에 쓰러진 노인으로 변신하여 안핑을 현혹하더니 안핑이 넘어오지 않자 안핑의 어머니로 변신하였다. 이토록 지독하게 사람을 속여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요괴 화피를 보고 있자니, 인간이 얼마나 눈에 보이는 걸 쉽게 믿는지 새삼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걸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맘 편한 대로 믿고 싶은 나약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교묘히 파고드는 게 화피였다.

 

 

<낙원>

이번 이야기에서는 청자의 입장이었던 연암 박지원과 선노미가 기이하고도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청나라 황제가 있는 열하에 가기 위해 무리한 일정을 감행하던 중 박지원과 선노미는 급류에 빠져 거센 물살에 휩쓸렸다. 다행히 구조되어 눈먼 자들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마을 사람들 스스로 '낙원'이라 칭하는 이곳은 인간이 탐욕으로 타인에게 어떻게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곳에서 약에 취해 점점 변해가는 연암을 데리고 나오기 위해 선노미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차라리 청나라에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무게에 짓눌려있던 선노미는 연암과 같이 들른 천주당에서 서양 선교사를 만나 고해성사를 하게 된다. 선교사 마티유는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며 선노미를 위로하지만, 그의 귀에는 닿으나 마음에는 닿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선노미는 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와 함께 청나라에 가보지 않겠느냐? 

그곳에서 더 많은 기담을 듣고 기록하거라."

 

연암 박지원 하면 절로 떠오르는 '열하일기'를 잘 활용하여 청나라 기담을 꾸린 

<삼개주막 기담회3>

청나라 성경에 도착하여 숙연한 기색을 내비친 연암과 번잡하고 화려한 광경에 넋이 나가 들뜬 사절단 관리들이 대비되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힘없는 백성들은 갖은 치욕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왕자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선인들도 노예로 함께 끌려왔던 것이다. 나라가 약해 고통받는 백성들을 염려하는 연암의 자세가 응당 지배계층에게 요구되는 당연한 책임이지만 권리와 권세에는 익숙하나 책임과 의무는 외면하는 위정자들이 많기에 한숨과 함께 짧은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시대를 앞서 살아간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열하일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소설 곳곳에 잘 녹아있어서 찾으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번 <삼개주막 기담회3>는 탄탄한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인물이 등장해서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다. 영조와 화평옹주 그리고 정사 박명원의 가슴 아린 사연이 소개되어 눈길을 끈다. 

 

더 넓고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듣고 기록한 <삼개주막 기담회3> 열하기담은 더 믿기 어렵고 놀랍고 기이하고 뭉클하고 애틋한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화자가 연암과 선노미에게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뒷이야기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기담 자체가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본성과 심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서평을 쓰면서 한편 한편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니 팔에 소름이 돋는다. 얼마나 쉽게 생각하고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얼마나 편하게 행동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선노미의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지……

곱디고운 외모 뒤에 감춰진 선량하고 정의롭고 다부진 성품을 지닌 선노미가 디시 우리 곁으로, 삼개주막으로, 연암 박지원 곁으로 돌아올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기약 없는 기다림을 <삼개주막 기담회> 시리즈로 채워본다. 잠 못 이루는 여름밤, 괴짜 선비와 선노미의 활약이 우리를 다독여줄 것이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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