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담 스미스는 자본이 스스로 증식한다는 걸, 그래서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는 걸 몰랐던 걸까.
2. 맬서스가 야멸찬 학자이긴 했지만 자본주의의 맹점을 꿰뚫어 보았다.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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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스미스는 ‘공급 부족-가격 상승-생산 확대(자본 투입)-공급 확대-가격 하락-생산 축소(자본 이동)-공급 부족’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늘 잘 작동하진 않았다. 한 번 가동한 공장을 멈추거나 생산을 축소하는 건 어마어마한 손실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자본가는 공장을 풀가동하길 원하고 이에 따른 과잉 공급은 피하기 어렵다. 설령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할 때도 ‘시간’이 걸린다. 위 과정은 물 흐르듯 이루어지지 않고 각 단계가 넘어가는 시점은 지연되는데 이는 과잉 공급으로 인한 판매량 감소, 임금 체불, 실업 등의 고통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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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담 스미스와 맬서스는 의도와 결과가 반대로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으로 인한 경제 활동이 경제를 활성화한다고 주장한다. 맬서스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시장에 개입해도 나쁜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2. 아담 스미스는 수요와 공급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절된다고 설명한다. 맬서스는 노동자의 가격(임금)이 수요와 공급(노동인구 수) 법칙에 따라 조절될 것이며 따라서 임금은 최저임금 언저리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반복. 호황과 불황의 반복. 멜서스는 이걸 설명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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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 스스로 ‘정상, 평균, 보통’이라 여기는 대한민국 부모에게 던지는 불편한 메시지
오찬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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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책이다. 내 속이 다 까발려져 버린 것 같고, 한편으로는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싶다.

내가 가진 '자신감'의 총량을 100이라고 한다면 그 중 90 이상은 입시와 취업의 경험이 만들어줬다. 나는 집안도 별볼일 없고 인물도 없고 친구도 별로 없다. 더불어 어린 시절 지속적인 가정 폭력에 노출되었고, 부모로부터 특별히 삶의 교훈을 얻지 못했고 교우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심지어 운동도 못한다. 내가 잘한 건 두 가진데 하나는 주제 파악이고 다른 하나는 순위고사이다. 대단치는 않지만 입시와 취업에서 내가 가진 사회적 환경에서 기대되는 바에 비해서는 나름의 성취를 이뤘고 이 성취는 내가 가진 자신감의 근원이 됐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 나도 남들만큼은 할 수 있다' 나는 순위 경쟁 제도의 수혜자인 셈이다.

책의 저자는 평범한 사람들이 존엄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든다. 사회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정치를 통해 공정하다고 믿는 방식으로 분배를 해야 한다. 그럼 사회적으로 더 기여를 하는, 혹은 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혹은 그렇다고 뭇사람들이 믿는 이들에게 더 많은 자원을 분배하는 것이 공정하다.

저자의 말대로 모두의 처지가 개선되어야 하고, 열악한 처지에 놓인 나머지 목숨마저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훗날 지금보다 사회구성원 모두의 처지가 전반적으로 개선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차등은 존재할 것이다. 이때에도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은 처지의 사람을 동경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지금 사회랑 달라진 게 뭐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너무 불편한 이유는 '내가 순위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성과를 거둔 사람이라서 이렇게 편협한 생각을 갖게 된 게 아닐까'하는 검열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회학 책을 읽고 저자의 의견에 반대를 표하기는 나로서는 무척 불편하다. 왠지 내가 '개념 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남들이 그렇게 흉볼까봐 두렵기도 하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자의 전작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읽고 나서는 '요즘 대학생들 참 쯧쯧쯧' 하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사실 이미 나는 그 절박한 경쟁 상태를 벗어났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책은 결혼과 육아, 교육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몹시 불편하다. 게다가 나는 요즘 내 경험에 기초해서 학생들을 경쟁의 승리자가 되라고 내몰고 있는 중이다. 또 나중에 육아를 시작하면 반드시 강남키즈로 키우겠노라 다짐도 했다. 내가 받지 못한 가정에서의 지원을 팍팍 해줘서 꼭 서울대에 보내겠다는 뭐 그런 생각. 뭐, 일종의 한풀이다.

아아 심란하다. 심란하다. 남의 일에 혀를 차는 건 너무 쉬운데 책에서 막상 내 이야기를 하니 그저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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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는 동물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한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이충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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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동물의 인지'에 관해 다루고 있다. 놀랍게도 동물은 자극에 반응하는 기계일 뿐이라고 천명한 학자 집단이 존재했고, 이런 생각이 상식으로 유통되던 시절이 있었다. 반면 저자인 프란스 드 발은 동물에게 인지 능력과 내면세계가 있음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만한 증거를 다수 제시한다.

침팬지나 까마귀, 코끼리 등 다수의 종이 도구를 사용하고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을 들여다 본다. 또한 사회적 관계를 파악하여 전략적 선택을 할 줄 알고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종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이 종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적절한 테스트를 고안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떤 종이든 자신이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한 충분한 인지를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인간vs동물의 단절을 극복하고 인지의 연속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나에게는 저자의 관점보다 오히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전제가 놀랍게 느껴진다. 동물이 기계라니! 자극-반응 뿐이라니. 그들은 애완 동물을 기른 적도, 동네 고양이와 교감한 적도 없단 말인가. 게다가 흰쥐나 비둘기 실험 결과를 두고 '동물'에게는 인지가 없다고 해석하는 그 교만이라니.

오늘 아침에만 해도 나는 우리 동네 주민의 사랑을 듬뿍 받는 큰 고양이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눴다. 며칠 동안 큰 고양이가 보이지 않아 걱정하던 차였는데 커피숍에 가던 길에 큰 고양이를 마주쳤다. 천천히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던 그는 나와 내 남편을 보고는 약간 방향을 틀어 곧장 우리에게 다가왔다. 남편은 약간 서투르게 큰 고양이에게 먼저 다가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인사를 건넸다. 큰 고양이는 남편을 지나쳐서 나에게 왔다. 꼬리를 바짝 세운 그는 옆구리와 꼬리를 사용해서 내 다리를 훑어내렸다. 나의 남편은 애처롭게 쪼그려 앉아 큰 고양이의 관심을 갈구하고 있었는데 큰 고양이는 남편에게도 너그럽게 인사를 건네고는 자기 길을 갔다.

나와 나의 남편은 큰 고양이에게 먹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주기적으로 먹이를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의 만남은 지역 주민 간의 순수한 유대이다. 나는 큰 고양이를 만났을 때 어떤 직장 동료를 만났을 때보다 순수하게 기쁘다. 고양이 또한 나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유대는 행동주의자들이 고양이를 우리에 가두고 먹이로 유인하여 실험을 진행할 때에는 결코 얻지 못할 감정이다.

큰 고양이를 처음 만난 것은 올해 1월이었다. 그날 나는 이사를 했고 새 집의 관리사무소에 들러 차량을 등록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길에는 눈이 쌓여있었고 큰 고양이는 내가 가야할 길 한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 생각 속의 고양이보다 훨씬 커서 나는 놀라고 말았다. 나는 약간 주춤했지만 곧 내 길을 갔는데 고양이는 몸은 그대로 둔 채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서로 얼굴을 익히고 서로가 서로에게 무해한 존재임을 확인했다. 부담스럽게 굴지 않았고 정중하게 천천히 가까워졌다.

행동주의자들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꼭 행동주의자뿐 아니라 동서양의 많은 철학자들 또한 인간성은 특별한 것이며 인간을 동물과 구분지어 주는 특별함이 있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다른 종과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고양이가 호랑이와 다른 것만큼 당연하다. 그리고 그만큼만 당연하다. 그보다 더 당연하지는 않다.

행동주의자들은 왜 인간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일까. 인간은 다른 종을 멋대로 잡아가두고 죽이고 먹고 입는데 이럴 만한 자격이 인간에게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그래서 죄책감을 다소 덜어보고 싶은 걸까. 우리는 특별하고 다른 종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르니까 잡아 먹을 때 죄책감이 없어도 된다!! 뭐 이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든 궁금증이 있다. 인간은 우주에 지적 존재가 있는지 궁금해 하고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서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려고 시도한다. 인간이 미래의 어느 날 멀고 먼 우주 한 행성에서 바다를 발견했다. 그 바다를 샅샅히 탐사한 결과 고등어떼를 발견했다. 우리는 그 고등어와 의사소통을 시도할 것인가, 잡아다 해부하고 결국엔 먹어치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주에서 어떤 존재를 만나야 '지적인' 것으로 인정을 할까.

인간이 특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안 때문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간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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