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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원이 되고 싶어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품절
마성의 도윤도 스스로의 설명대로 회문 구조의 이름을 가진 도윤도는 꼭 그 이름대로 회전문 같은 남자다. 입덕하면 탈덕문 열리고 탈덕하면 재입덕. 이 마성을 어쩌면 좋아. 그러면 뭐해 마음을 조각 내서 적선하듯 주변에 건네 사람을 옭아매는,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스포일드 차일드일 뿐인데. 도윤도뿐 아니라 이 소설의 남자들은 죄다 스포일드 차일드다. 열등감 덩어리 자립의 의지라곤 전혀 없이 환승해 가며 누군가의 등골을 빨아먹는 나의 아버지, 도박과 공금 횡령 끝에 백골로 돌아온 태리의 아버지, 두집살림을 하며 가정을 방치하는 도윤도의 아버지.
이런 응석받이들은 놀랍게도 근면성실하고 생활력 강한 이들의 선택을 받아 스포일드 차일드 생활을 중년이 되도록 이어간다. 왜 성실하고 모난 데 없는 사람들이 이 못난이들에게 코가 꿰이는 걸까 미라아줌마는 시청 다니는 공무원 김이 아니라 소규모 건설업체를 경영하는 강을, ‘나‘의 엄마는 선자리에서 만난 의사가 아니라 음악감상실에서 질질 짜기나 하는 ‘나‘의 아버지를 택하냔 말이다. 모험, 낭만, 호기심 이게 사람을 잡지 아주.
도윤도는 다니라는 sky반은 안 다니고 연애의 정석 밀땅이란 무엇인가 심화반이라도 수강했는지 같이 있을 땐 다 줄 것처럼, 곁을 안 줄 땐 누구보다 차갑게를 제대로 구사한다. 이러니 해리가 정신을 못 차리고 끌려가지. 이게 되게 뻔한 수법인데도 눈뜨고 코베이듯이 당한다. 이런 사람 조심해야지 하면서도 당하는 거야.
크래타섬의 거짓말쟁이 딜레마. ‘크래타 섬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다.‘라고 외치는 크래타섬 사람이 있다면 저 말은 거짓말인가 참말인가, 저 사람은 거짓말쟁이인가 아닌가 이런 패러독스가 있다는데 내가 보기엔 이건 패러독스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냥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면 안 되는 거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땐 그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게 중요하지 않다. 저렇게 사람 헷갈리게 말을 하는 사람은 그 목적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 자체에 있을 때가 많다.
도윤도도 마찬가지다. 그 다정과 냉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해리를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목적이라는 게 중요하다. 이 사람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한다. 나를 조종하려고 한다. 이것만큼 불길한 시그널이 없는데 이것만큼 매혹적인 것도 없다. 성실한 해리는 도윤도라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지만 애초에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해결이 된다? 도윤도를 해결해서 톰 리들과 볼드모트의 실체를 다 알아버린다? 그럼 해리는 더이상 도윤도에게 어떤 매력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응석받이 취급하고 떼어내려 애쓰게 되겠지 마치 태리를 대하는 것처럼.
이 소설은 종으로는 스포일드 차일드에게 쪽쪽 빨리는 성실한 인간 군상의 반복이면서 횡으로는 도윤도-해리, 해리-태리의 애증과 폭력, 용서의 반복이기도 하다. 그냥 반복이면 별 재미가 없었을텐데 일방적으로 조종하는 인간-조종 당하는 인간의 관계였던 도윤도-해리와는 달리 태리는 해리의 무시와 모멸을 주는 행동에도 한결같이 자기다움을 잃지 않는다. 꿉꿉한 비밀과 뒷말을 지고 사는 도윤도와 해리 달리 태리는 얼핏 보면 내면 세계가 없나 싶을 정도로 투명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게 태리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강할 수 있을까. 지속적이고 강도 높은 신체적 심리적 학교폭력, 어지러운 가정사, 시원치 않은 성적 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 D시의 중고등학생이 이걸 수년간 견뎌낸다? 태리는 신입니다.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돼. 이게 된다고? 강태란 강태리 남매는 신입니다.
태리가 해리에게 필리핀에 가자고 제안하는 대목에선 혹시 미라아줌마랑 태리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나 의심했다. 어쩌다 보니 그런 류의 실화를 많이 접하기도 했고 소설 속 ‘나‘의 서술에만 의지해서 태리를 이해하다 보니 태리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안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서스펜스 최고조 상태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순간은 태리가 캐나다에서 간호사를 하고 있다는 대목이었다. 해리에게 제안했던 그대로 태리는 필리핀에서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캐나다에 가서 간호사가 됐다. 태리가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밝혀질 때도 무척 놀랐지만 간호사가 됐다는 것엔 비할 바가 안 된다. 반전이다 반전. 내가 신뢰하고 있던 서술자가 실은 너무 제한적이고 편협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라는 한계를 폭로해 버리는 반전이었다. ‘나‘가 스포일드 차일드로 지목했던 태리는 스포일드 차일드가 아니었다. 도윤도가 스포일드 차일드고 태리는 너무 멀쩡하고 강인한 인간이었다. 학교폭력을 당하는 자신을 방관하고 오히려 동조하고 결국 호수에 떠밀어 버린 형에게 다시 만남을 청할 수 있는 강인한 인간 제대로 된 인간 자기 삶에서 도망치지 않는 인간
얼마 전에 태국 드라마 I told sunset about you를 봤다. 오에우는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숨기지 않고 당당한 바스가 아닌 사람들 시선 때문에 오에우와의 사랑을 감추고 제멋대로 굴고 저밖에 모르는 떼를 선택한다. 누가 봐도 바스가 정답이고 떼는 오답인데 오에우는 떼를 선택한다. 사실 선택한다는 건 잘못된 표현이고 떼가 어떤 인간이든 상관 없이 오에우는 떼를 사랑하고 바스를 사랑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냥 그뿐이다. 해리가 윤도를 선택한 게 아니고 윤도니까, 윤도여야만 하니까 윤도인 것처럼. 그러니까 결국 왜 스포일드 차일드를 사랑하는가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그냥 열병을 앓듯 사랑하는 것뿐이다. 의미도 이유도 없다. 그렇게 오답을 선택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정답을 선택한 사람의 이야기를 누가 읽고 싶어하겠어. 그건 재미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