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력 - 나를 지키는 가장 똑똑한 까칠함
필로소피랩 지음 / 각주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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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어릴 땐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극외향적 인싸였다. 쉰이 넘어가면서부터였거나 아니면 스물하나, 몸이 불편해진 다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근면 성실하게 그냥 배운 대로 살던 대로 사는 게 정답이라 생각했다. 미처 관계에 떠밀리고 있던 걸 눈치를 채지 못했던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점차 나는 관계가 아주 미숙한 사람이 돼버렸다. 이 책의 제목에 꽤나 두근댔던 이유다.


이 책의 저자는 필로소피랩(Philosophy Lab)이라는 철학을 실험하고 가공하는 콘텐츠 연구소다. 시대를 관통해 온 생각을 오늘의 삶에 쓸 수 있는 도구로 풀어 내는 콘텐츠 연구소라나? 아무튼 이들은 위로보다 '판단의 기준'을, 좋은 말보다 '쓸모 있는 말'을 기준으로 독자가 오늘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전 심리 처방을 한다. <초역 명상록>, <초역 자기신뢰>, <번뇌를 종료합니다>를 펴냈다.




저자는 무례에 앞서 거절이 두려운 이유와 함께 '좋은 사람'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인간의 무리에서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종이라는 진화의 유전자에서 기인한다고 말하면서, 이런 진화의 결과는 무리에서 소외되고 떨어져 나가게 되는 일은 생존과 직결된 일이라고 덧붙인다.


이렇게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은 현대 사회로 이어져 '먹고살아야' 하는 직장을 비롯한 모든 관계에서 '거절'로 인한 무리 이탈을 초래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연결된다는 설명은 꽤나 설득력 있다. 사실, 우리는 웬만하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사는 게 속 편하지 않은가.


읽다 보면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한데 하다. "왜 나는 늘 호구가 되지"라거나 "호의를 베풀다가 손해만 보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보통의 사람이 혹 할만한 내용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거절을 배워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주아주 다행스럽게도 저자는 이런 문제의 원인을 '내'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에서 찾는다. 예를 들면, 호의로 한 번 들어준 부탁이 다음 부탁의 기준선이 되고, 상대는 당신의 배려에 감사하는 대신 '어디까지 요구해도 되는지'를 학습하는 구조를 만든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지 않은가, 호의를 이용하는 구조라니.


저자는 호구·민폐·빌런·전략적 무례력자, 네 가지 유형으로 자가 진단을 돕고, 거절이 왜 어려운지에 대한 메커니즘을 뇌과학과 심리학을 동원해 설명한다. 이를 통해 독자 스스로 주제 파악을 하게 하고 적재적소에 써먹을 수 있는 실전 대응법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선을 긋고, 갑자기 똑똑한 까칠함을 탑재한 독자와 손절한 이들의 상실감을 다독일 방법도 제시한다. 은근 호구나 거절이 어려운 이들에겐 꽤나 실용적이겠다.


"라면 한 젓가락만 주실래요?"


점심시간, 사발면을 먹으려고만 하면 옆에서 '한 입만'을 거드는 직원이 있다. 물론 친하지도, 그러고 싶지도 않다. 아예 뜯지도 않은 게 있을 때는 하나 주고 말았는데 또 그러니 단칼에 거절했다.


"다른 건 몰라도 먹던 거는 안 준다."라고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거절하는 순간 식사 분위기는 싸해졌다. 순간 '내가 너무 야박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른 척 씩씩하게 후루룩거렸다.


뭐, 라면 한 젓가락에 그럴 거까지 있나 싶을지 몰라도, 나는 타인과 친함의 밀도를 높이는데 꽤나 시간이 걸리는 타입이라서 누군가 친한 척 밀고 들어오는 태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게다가 내 쪽에서 먼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런데 이 직원이 그런 사람이었고, 망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어서 결국 소화제를 먹어야 했다. 저자는 이런 무레에 대처하는 힘을 무례력이라 부르자고 제안하는데 손이 달아오를 정도로 박수 치며 공감했다. 나는 거절하는 데도 근육을 키워야 하는 인간관계가 정말 어렵다.


35쪽


"존중은 구걸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그어 둔 경계의 선명함만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45쪽


인간관계에서 '결계'가 아닌 '경계'라는 의미를 확인시키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타인이 무례하게 선을 넘나드는 꼴을 묵인하는 것보다는 영리한 까칠함이 낫겠다 싶은데, 저자는 그런 독자의 처방을 위해 무례력 검사를 제안한다.


질문은 평소 겪고 있거나 충분히 겪을만한 일들에 대해 묻는데, 검사의 실상은 뜨악,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략적인 무례력자이길 바랐지만, 호구와 민폐 그 어디쯤 위치한 거 같다. 저자는 내게 우울감을 선사했다.


뭐, 빌런이 아닌 게 어디냐는 찰나의 생각이 스치긴 했는데 이마저도 읽고 나니 빌런이 아니라는 건 내 착각일 수도 있겠다. 게다가 저자가 지적하는 악의 없는 선의에 시시때때로 당하다 보니 그의 진단을 그냥 넘기기 어려워 꾹꾹 눌러 읽게 된다.


다름 아니라 몸이 불편해진 이후 민폐형들에게 자주 노출되는 편이다. 거리에선 말도 없이 휠체어를 훅,하고 밀어준다든지, 식당에 들어서면 묻지도 않고 의자부터 치워버린다든지(의자로 옮겨 앉는 게 좋은 사람도 있다.) 같은 선의로 포장된 배려는 일방적으로 자행되는 폭력처럼 느껴져 힘든 적이 꾀나 많았는데 저자의 이런 날 선 지적이 은근 위로가 된다.




"악의 없는 무지가 만드는 가장 이기적인 영향력인 셈이다." 87쪽


이 책이 관계에 취약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은 단순하게 무례함에 대한 성격 분류만 해놓은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런 유형에 대해 대처법을 알려준다는 데 있다. 무례한 사람에게 받은 상처에 대한 처방전으로 충분하다.


"무례력의 출발점은 거절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 패를 함부로 펼쳐 보이지 않는 것, 바로 평정심이다." 113쪽


또, 저자는 유명 침대 홍보 문구처럼 관계에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 "평정심"이라 강조하는데, 도박판에서 패를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 것이 승패의 지름길이라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관계에서 자꾸 밀려나고 스스로 피로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던 것은 아닐까 깨달았다. 조금만 친절하고 다정한 상대에게는 프로펠러 돌아가듯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며 좋아하는 리트리버 성향이 되니 내가 패를 숨길 수가 있을까.


155쪽, 158쪽


개인적으로 이 책이 관통하는 메시지는 참는 게 능사가 아니고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아닌가 싶다. 무조건 까칠해지라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다정함을 지속할 수 있는 경계를 지켜내는 게 중요하다는 조언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성인으로 충분하고 현대를 사는 동안에는 손해만 보는 사람은 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눈물 나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관계에 허덕이는 사람이라면 강추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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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7월
강익빈 지음 / 좋은땅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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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처럼 뜨거웠던 적이 있던가. 그래서 연달아 여름에 빠진다. 시는, 특히 사랑은 열병으로 11월에도 온몸이 불덩이로 만드는 마법이 있다. 나는 이 여름, 사랑으로 뜨거울 수 있을까, 했다. 사랑이므로.


시인에 대한 소개가 빈약하다. 아니 베일에 싸인 건가? 어쨌든 첫 시집 <어제 했던 말>을 썼다. 기성작가처럼 등단이나 수상 등 이력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시를 마주하는 태도를 만든다.




후룩, 읽히지 않고 툭툭 끊어지는 투박함이 있다. 야스리로 갈고 갈아서 매끄럽게 다듬은 듯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좀 삐죽 나온 것도 손으로 만져보며 조심스럽게 읽게 된다.


온전히 여름이라 말할 수 있을 때가 오면

너에게 달려가 하고 싶은 말

너의 7월에 내가 살고 싶다.

71쪽, 너의 7월 중


시인은 '완전한 여름'을 꿈꾸고 그런 계절이 오면 그리워하던 이에게 서둘러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는다. 가장 뜨거웠던 여름을 어떻게든 붙잡아두려 애쓰고, 한편으로는 각자의 삶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이별을 감각적인 언어로 그려낸다.


88쪽

190쪽


시인이 굳이 '여름'이 아니라 '7월'이라고 했을까. 계절은 흘러가지만 기억에 새겨 넣을 수 있도록 특정한 의미를 살려내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공식처럼 뻔한 사랑과 이별일지도 모르지만 뜨거운 여름, 그중에서도 7월이 갖는 짧고 격렬한 계절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선명하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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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판사, 나쁜 판사
류기인 지음 / 펜타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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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소년심판>, <참교육>이 한동안 뜨거웠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아서 보지 않았다. 관심은 있지만 아이들의 촉법 범죄와 학교폭력을 자극적으로 시청자에게 '사이다'로만 각인시키는 게 달갑지 않았다.


아이들의 비행을 눈에 담지 못할 정도로 극악무도하게 만들고, 해결한다면서 또 다른 폭력이 난무한다. 시청자는 폭력으로 제압되는 비행 청소년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대리만족이랄까…. 그 안에 아이들은 없고 애초에 범죄자만 있는 것 같아 예고편만으로도 아주 불편해지던 드라마였다.


이 책은 그런 아이들을 다루는(?) 소년법정 판사의 이야기다.


사법연수원 29기 출신의 류기인 판사는 처음부터 법원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실무 경력을 쌓은 뒤 판사로 임용됐다. 그런 이력이 사건 기록 너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태도의 밑바탕이 됐다. 2020년에는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장을 거쳐 2022년 2월부터는 전국에서 소년보호사건이 가장 많이 몰리는 창원지방법원 소년부 부장판사를 맡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판결문 한 장만으로는 아이의 삶을 바꿀 수 없다는 지론으로, 판사와 국선보조인, 법원 직원 등 이른바 어른과 보호 처분을 받은 소년과 1 대 1로 짝을 이루어 함께 걷는 '걷기학교'를 직접 만들어 운영한다.




저자는 '선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늘 벌어진 비행이 내일 더 큰 비행으로 자라나지 않게 막아보려는 마지막 시도"라고. 법의 한계를 교묘히 이용하는 아이들의 현실은 방관 혹은 포기한 부모, 혹시 모를 불똥을 피하려는 학교와 교사 사이에서 아이들의 비행은 끝도 없이 치솟고 결국 인생이 추락하고 나서야 멈추는 게 보통 아닐까.


57쪽


이런 아이들의 보호 처분이 10단계나 있다는 것도, 판사가 아이들이 법정을 나선 후 있어야 할 환경까지 두루 살핀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이 책은 저자가 소년부에서 보낸 5년의 기록이다. 가급적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애썼던 초창기 마음과는 달리 법정에서 재차 마주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마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냉정한 선처', 때로는 소년원에 보내는 무거운 처분이야말로 벼랑 끝으로 치닫는 아이의 삶을 멈춰 세우는 진짜 선처일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아이를 쉽게 포기하지 않되, 잘못을 가볍게 넘기지도 않는다.' 신념을 세운다.


이와 관련해 판결 이후 달라져 가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소년원에서 제빵을 배우던 한 아이의 편지부터 학교폭력 피해를 겪고도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의 또래를 위해 모아둔 용돈 200만 원을 선뜻 내놓은 열다섯 살 아이의 사연까지 곳곳에서 마음을 흔드는 아이들을 만난다.


좋아하는 만화책을 읽는 것 마냥 정신없이 빠져 읽다가 픽, 하고 웃었다. 이 양반이 아무리 판사라지만 세상 물정을 이리도 모르다니. 술을 사다 달라는 중학생에게 꼰대 노릇한 이야기는 순간 이 양반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싶었다. 요즘 아이들 무서운 걸 모르다니. 아슬아슬한 판사다.


"아이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조금은 덜 무거웠으면 좋겠다." 113쪽


아이들과 걷기 학교와 평산 책방을 통해 기적 같은 변화를 보이는 이야기에 마음이 찡했다. 저자가 말하는 집이 꼭 가정이 아니라도 그곳만이 주는 따뜻함이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는 온기가 가득했으면 하는 소망도 함께.


아이들 이야기와 함께 결코 자랑할 수 없는 전국 1위의 업무량을 털어놓는데 그의 영혼도 함께 털리는 고단함이 활자에 고스란히 담겨서 이래도 되나 싶다. 봐야 할 환자가 밀려드니 어쩔 수 없다는 의사의 1분 진료 컷과 별반 다르지 않은가. 그나저나 의사들은 입만 열면 업무량이 과중해 죽겠다고 볼멘소리를 해대면서 의사를 늘리자고 하면 왜 죽기 살기로 반대를 하는 걸까? 법조인도 그러나?


136쪽


"법대 위에서 사건의 시작과 끝을 모두 마주하는 판사의 역할은 그 분노를 기계적으로 집행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소년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당장의 응징을 넘어, 이 아이가 다시는 다른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지 않는 평범한 이웃으로 자라나도록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지 고민하는 데 있다." 181쪽


그리고 인공지능이 고도화되면서 사라질 직업에 늘 빠지지 않는 직업이 판사인데, 한 사람의 인생이 결판나는 판결이 아이에 대한 이해와 진심 없이 과연 판례라는 데이터로만 결정돼도 되는가라는 질문이 뇌리에 길게 남는다.


이 책이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건네는 것은 판결은 제목처럼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를 무조건 봐주는 것이 착한 판결도 아니고, 무겁게 처분하는 것도 나쁜 판결도 아니라는 것. 또 비행의 길로 내몰린 아이들 뒤에는 대개 방치하거나 억압한 어른들이 있으며, 진짜 선의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잘못 앞에서 눈 감지 않는, 심판보다 동행이 먼저라는 것을 담는다.


읽으면서 다행이다 싶은 것 하나는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인간과 재판 거래하는 모 판사나, 정치적 욕망 가득한 모 대법원장 같은 판사만 있는 건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된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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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안부 - 쉽게 미워하고 오래 사랑하는 계절에게
백가희 지음 / 클랩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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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처서가 지났다. 그제야 도착한 여름 책을 들고 이 책을 왜 신청했더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제목을 보고 여름은 안부를 묻기 좋은 계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유가 생각났다.


백가희 작가는 <당신이 빛이라면>, <간격의 미>, <너의 계절>, <누군가는 사랑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이토록 사랑스러운 삶과 연애하기>까지, 데뷔 이후 사랑과 이별, 관계라는 주제로 꾸준히 글을 써오고 있으며, 케이팝부터 수영, 야구까지 좋아하는 것에서 얻은 인생의 통찰, 완주를 풀어내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뜨거웠던 모든 시절 혹은 모든 것들이 여름이었다"라는 그의 말에 괜히 내게도 뜨거웠던 것들이 있었나, 하며 기억을 헤집어 보기 시작했다. 까무잡잡하게 변색된 두툼한 어깨를 다 드러내는 민소매를 입고 시종일관 뛰어다니길 좋아했던 여름, 송골송골 맺히는 것보다 흘러내릴 정도의 땀을 좋아했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뜨겁게 달궈진 여름을 좋아하고 사랑을 예찬하는 이의 글치고는 꽤 침잠하게 한다. 뭐, 사랑이 애틋이나 달달 그런 감각만 존재하는 건 이닐지 몰라도 그의 사랑은 반음 내린 것 같으면서도 마구 서글프지도 않아서 애매하달까.


개인적으로 세상을 시크하게 바라보는 시선, 과하지 않게 슬픔이 묻어나거나 반음 정도 내려선 감각을 가진 문장을 좋아하는데 이 작가의 문장도 그랬다.


이 책은 어쩌면 감정이 쉽게 도드라지는 계절, '여름'을 관통하는 44편의 산문이 담겼다. 무언가를 오래 미워하다 보면, 정작 왜 미워했는지조차 잊게 된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그에게 여름은 오랫동안 그런 대상이었다. '미움', '나', '당신', '안부'를 주제로 감정,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계절을 관통한다.


작가는 영화 <소공녀>의 미소를 보면서 "저렇게 살면 좋을까 싶다가도 이내 알게 된다. 저렇게 살고 싶어 하는 나를."이라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데 또 그런 작가를 보며 나는 작가를 투영한다.


저렇게,라는 삶의 태도에 대해 작가가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보통 한심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는 건 느낄 수수 있어서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겠다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한다. 나 역시 '저렇게' 사는 미소가 자유롭고 뭔가 자기를 위할 줄 아는 사람 같달까. 대부분이 결핍으로 채워진 삶에서 위스키 대신 집을 포기할 수 있는 깡다구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닐 테니.


"어떤 용기는 자신의 안에서보다 남들의 말 사이에서 더 결속 력을 다지고 단단해질 때도 있으니까요. 물론 내부에서 잘 다져진 용기의 밑동을 가진 채로 말입니다." 91쪽


작가가 사람 간에 배려는 자신의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라며, 단정적으로 희망을 포기하는 선택을 했다며 타인 삶에 관심이 없어진 시대를 아파한다. 나아가 누군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비관에는 염세를 토핑 하듯 뿌리는데, 그런 작가의 심정을 확인하는 사회조사 지표가 있다.


<대인 신뢰도>라는 것인데 관계에서 타인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지표다. 예를 들면, 길에서 위험에 빠진 자신을 타인이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과연 결과는 어떨까? 조사 결과는 열 명 중 네 명은 못 믿고 산다. 심지어 코로나 시기에는 절반 이상은 사람을 못 믿고 살았다. 그래서 <당신을 믿는다>는 감정이 좀 다르게 읽혔다.


"여름에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조금 더 쉽게 다음 계절로 흘러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름답고 충만한 사랑의 틈에서, 여름의 곁에서 잘 머무시길 바랍니다. 쉽지 않을지라도 그럼에도 미워하는 마음 없이 여름과 사랑을 택한 당신을 응원합니다." 180쪽


184쪽


요즘 유명 장애인 유튜버의 행동을 두고 갑론을박 시끄럽다. 한 마디 보태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는데 작가가 "자유가 아무런 말이나 내뱉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라길래, 참기로 했다. 개인 사이의 문제에서 장애가 있다는 것이 무조건 약자의 조건이 아니라는 생각이어서, 이번처럼 개인의 이익을 공공의 이익인 것처럼 포장되는 게 참 불편하다.


200쪽


이 책은 '여름' 자체보다, 그 계절을 통해 작가는 '사랑'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그저 따뜻하고 좋은 감정만으로 그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사랑은 불편하고 수고스럽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기꺼이 시간을 들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작가의 '안부'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관계가 끝나거나 멀어진 뒤에도 그 사람의 시간을 계속 궁금해하는 마음이나 미움보다 끝내 사랑을 선택하려는 태도다.


일상의 느슨함과 한없이 따뜻한 시선 그리고 살짝 내려앉은 톤의 문체가 어우러져 읽는 내내 느긋한 심박수가 됐다. 마치 그의 말랑이들의 배를 연신 긁어대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하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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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애와 다시 읽는 고전 ㅣ 나의 두 번째 교과서 시즌3
나민애 지음, EBS 제작팀 기획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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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여기저기에서 등장해 문학을 걸쭉한 입담으로 풀어내며 시청자를 홀리는 그를 보았다. 마치 시장 약장수 같달까? 문학이 이렇게 높은 텐션으로 홀려지는 것도 신기했는데, 그가 나태주 시인의 딸이라는 걸 알고는 더 그랬다.


개인적으로 습자지 같은 지식뿐이라 지적 허영심이 많다. 그래서 EBS 교양 프로그램을 자주 보는데 그의 강의가 눈에 띈 건 필연적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시간 핑계로 띄엄띄엄 봤다.


이 책의 첫 장을 장식하는 주제, '사랑' 중 단테의 신곡 편을 봤는데 잠깐의 강의로 어마 무시한 내용의 신곡을 정독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핵심이 쏙쏙 귀에 박혔다. 그런데 이 책은 베아트리체와 팡티, 코제트 그리고 퓨리오사, 나우시카로 이어지는 문학의 확장을 보다 보면, 읽고 싶다거나 읽어야겠다는 격한 감정이 동반돼서 겁도 없이 장바구니에 마구 쓸어 넣는 약간의 부작용도 있다.




나민애 교수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모교에서 글쓰기 강의를 맡고 있다. 2007년 <문학사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해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동아일보에 '시가 깃든 삶'을 10여 년간 연재하며 문학을 대중의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 왔고,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치렀다. <책 읽고 글쓰기>, <나민애의 다시 만난 국어>, <단 한 줄만 내 마음에 새긴다고 해도>,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 등이 있다.


53쪽


이 책은 그의 EBS 교양 프로 <나의 두 번째 교과서> 시즌 3 '다시 만난 문학'에서 강의한 시리즈를 역은 책으로 문학을 비롯해 철학, 심리학까지 고전 작품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방송에서 이야기한 내용 그대로 구어체로 옮겨 놓아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데다, 높은 텐션을 소유한 사람답게 중간중간 개인사를 덧붙여 가며 읽는 이로 하여금 재미에 빠져 읽게 만든다.


"만약 제가 작품 세계에 빙의해서 선택권을 갖게 된다 면 차라리 브론스키를 선택할 겁니다. 일단 잘생겼고요.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면 다정한 반려자가 되어 줄 것이고요. 여주인공이 비극적인 선택만 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잘 살 것 같아요." 61쪽


이 책은 사랑, 악당, 추리, 기이한 생명체, SF, 생태, 광인, 전쟁, 인생 등 우리 삶과 맞닿은 열 가지 주제, 33가지 동서양 고전을 소개한다. 각 강의는 작품의 줄거리뿐만 아니라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삶, 나아가 영화·드라마 같은 동시대 대중문화까지 넘나들며 소개하는 작품이 현시대에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지까지 다룬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QR코드로 방송을 다시 보기 할 수 있어 아주 재미와 유익함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교양서다. 방송은 그의 유쾌한 텐션 높은 강의를 들을 수 있어 강추한다.




"읽는 자세가 달라지면 읽히는 메시지도 달라지는 법이다." 93쪽


레이첼 카슨이 DDT를 통해 환경 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면 방구차를 통해 시대를 읽는다. 우스운 얘기지만 <돈키호테>와 <광인 일기>의 '미쳤다'는 의미를 짚어내는 내용을 읽으면서, 운영 중인 블로그 제목이 그런 결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내심 뿌듯했다.


282쪽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물었던 톨스토이나, 삶에서 살 의미를 찾아야 한다던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에서 생각이 참 많아진다. 나는 도대체 무엇으로, 왜 사는 걸까? 질문만 있고 답이 없는 이 기인한 인생도 참 거시기 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삶을 고전과 연결되어 보라고 제안한다. 고전은 수백 년 전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시대가 달라도 인간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하며, 고전 속 인물을 자신의 감각대로 솔직한 감상을 곁들이고 있어 일방적인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 나누는 독서 모임으로 초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꽤 많은 책을 읽는다는 소릴 듣긴 해도 늘 고전에는 허기를 느끼곤 했는데, 그가 도슨트처럼 재밌게 소개하는 33권의 고전으로 조금은 채워졌다. 아마 30% 법칙에 도전해 보지 않을까? 아무튼 추천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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