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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에는 온기가 필요해 - 정신건강 간호사의 좌충우돌 유방암 극복기
박민선 지음 / 미다스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작가 프로필을 보다가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삶이 느닷없이 바뀌어 버린 사람. 그래서 왁자지껄 수다스럽던 이가 동굴 같은 방으로 들어앉게 된 처지가. 나와 같았다.
작가처럼 유방암은 아니었지만 유도 선수가 목이 부러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런 생채기처럼 장애로 뚜렷하게 남았다. 아픈 날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나와 똑같았다.
이 책은 정신건강 간호사인 박민선이 유방암 환자로 고통을 건너는 과정의 기록이다.
뻔하지만 난 이 병을 이렇게 버티고 이겨냈어,라는 에세이일 줄 알았다. 근데 아니다. 자기계발서다. 그는 맨땅에 헤딩하던 초짜 간호사 시절부터 화려(?) 했던 연애사와 시월드를 거치며 삶이 어떤 식으로든 가치를 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음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를 솔직 담백하게 적는다.
맞다. 잊고 있었지만 나 역시 퇴사 후에 내가 일이 얼마나 고팠는지 깨달았었다. 그저 관계에 지쳐 있다고 핑계를 대며 도망칠 생각만 하다가 정작 내게 일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떠나고 나니 나 혼자 스스로를 볶고 있었다. 지친 건 일이 아니라 마음이었는데 얼마든지 다독일 수 있었던 상태라는 걸 알았다. 턱밑까지 몰아쳐 숨을 쉴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가까이에선 결코 볼 수 없던 것들이 떠나고 나서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적잖이 공감됐다.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삶에 끌려가는 건 아닐까,라는.
"'오늘'은 선물이었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늘'이 소중해졌다." 67쪽
유방암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온 그가 아침에 눈을 떠, '오늘'이 선물이었음을 깨닫는 시간이 내겐 왜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환자실과 병동을 오가며 손가락 하나 딸싹하지 못한 채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채로 숨만 쉬다가 어느 날 영화처럼 손가락이 들썩였을 때 모두들 기적이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런 기적을 보여 주려면 치아가 부서질 만큼 힘을 짜내야 고작 꿈틀하는 하는 일이 선물처럼 여겨지지 않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나는 죽음이 매 순간 '끊고 싶은' 영역의 것이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처지는 그마저도 좌절감으로 태풍처럼 몰아쳤다.
그렇게 35년을 견뎌낸 지금도 불편하게 삐꺽거리는 몸뚱이는 여전하지만 '몸에 난 상처보다 마음에 상처를 더 크게 만드는 법'이란 것쯤은 알게 됐으므로 처음부터 내겐 선물이 아니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96쪽
아무튼 힘든 치료를 버텨오며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과정이 제목처럼 훈훈한 온기가 훅하고 끼쳤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어떻게든 이겨내고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과정이 담백해서 나 역시 담백하게 따라가게 된다.
이 책은 간호사가 아닌 유방암 환자로 지내야 했던 5년간 고통이 일상적이었던 찐한 투병과 그 속에서 깨달은 일상의 소중함을 솔직·담백하게 일기처럼 기록하는데 지나간 상처에 매몰되거나 미화돼서 극복의 서사로 끌고 나가지 않으면서 제목처럼 아픔에는 누구라도 적당한 온기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독자가 위로를 하는 게 아닌 받는다.
딱히 크고 길게 아파보지 않은 이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아프고 난 후 사람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라는 이야기에 "다치고 나서 사람 됐다"라고 뼈 때리던 친구의 말이 생각나서 한참을 그 문장에서 멈춰있었다.
다들 웃는데 나는 웃을 수 없었던 그 소리는 한참을 괴롭혔었다. 그로부터 이미 30년이 넘은 이야기여서 당시 느낌은 옅어졌지만 아마 짧았던 21년이 부정 당한 느낌이었으려나.

175쪽
이 순간에도 투병 중에 있거나 그 과정을 건넜거나 혹은 잘 모른다 해도 삶에서 느닷없이 아픔을 맞닥뜨리는 일이 견뎌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과 공감을 준다.
보통의 일상이 특별해지는 마법 같은 책이다. 무엇보다 따뜻하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