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죽이기 -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을 내 인생에서 확실하게 쫓아내는 법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김세나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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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부정적 어감의 제목에 호기심이 일었다. 게다가 '자신의 예민함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무례한 것'이라는 띠지 문구에 일면식도 없는 작가에게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저나 배르벨 바르데츠키는 독일 출신의 심리학자이자 관계 심리 전문가로 오랫동안 상담 현장에서 관계 상처와 나르시시즘을 연구해 오면서 나르시시스트와 얽힌 관계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왜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지에 대해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분석한다. <따귀 맞은 영혼>,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를 썼다.




이 책은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에서 개미지옥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빠져들기만 하는 '심리적 지옥'에 관한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겉으로는 당당한 척하지만 지독한 열등감과 공허함으로 관계를 망치는 심리를 지적한다.


저자는 나르시시즘, 그러니까 자기애가 '극강의 이기적인 인간'처럼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현대에서 이 감정이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감에 대한 방어기제'이고, 이는 타인으로부터의 상처를 차단하는 보호장치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 그런 자기애로 무장한 무례한 상사나 동료에게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문득, 정문정 작가의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 생각났다. 좀 짜릿했던 기억이 있다.


그나저나 저자의 나르시시즘의 정의를 보다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점에서는 자기애라기보단 오히려 사이코패스에 가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 조금 혼란스럽기도 하다.


15쪽


한데 나르시시즘을 심리학적을 설명하는 부분의 번역이 방지턱처럼 덜컥거렸다. 뭐, 단어 하나에 집착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당사자에겐 '인'과 '자'의 괴리는 엄청 커서 18쪽의 '경계성 성격 장애자'가 아니라 '경계성 성격 장애인'으로 번역했으면 하는 감수성이 아쉽다.


결국 저자는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라 관계를 무너뜨리는 정서적 폭력임을 명확히 제시하고 그들과의 심리적 거리 두기, 관계의 주도권을 되찾는 방법 등을 조언하는데, 일상 속 교묘하게 타인의 감정에 빨대를 꽂고 자신의 공허를 채우는 그들의 작동 방식을 시원하게 해부한다.


특히 가족이나 연인, 직장 상사와 동료 등 은근 가까운 관계에서 작동되는 지배에 가까운 가스라이팅의 메커니즘이나 왜 그들에게 기가 빨리는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서, 직장을 포함한 인간관계에서 자기중심적 감정 발산으로 인한 관계 뒤틀림 주범으로 나르시시즘을 꼽는다.


덧붙여 직장 선후배 또는 동료 사이에서 무수하게 터져 나오는 상식 밖의 감정들을 다루면서, 모욕적이거나 여성 비하 등 어딘가 숨겨진 발작 버튼을 잘 알아두는 것이 이런 인간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지 않는다고 공감되는 사례를 곱씹게 된다.


137쪽



한편, 저자는 이런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건강하게 반응하는 방법을 '자기 확신'에 의한 자의식형, 경탄형, 두려움형, 투쟁형, 거부·고집형, 체념형의 여섯 가지 반응으로 설명하면서 결국 제일 중요한 해결책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한다.


"공감은 평화로운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데 꼭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강하면 상대방과 전혀 거리를 두지 못하도록 만들어 함께 괴로움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수 있다. 이런 경우, 공감 능력이 큰 사람은 타인의 감정 들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250쪽


즉, 나르시시즘적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결핍을 알아내고, 보완하고 현명한 교류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잘 보호해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이 책은 자극적인 제목과 달리 매우 정교하고 학술적인 이론을 포함한 통찰을 전한다.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않고, 관계의 힘듦을 개인의 예민함이나 자책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애로 포장한 나르시시트들의 병적인 문제로 지적하면서 그동안 무너진 관계의 경계를 다시 세우는 데 실질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상처 주는 사람을 이해하는 동시에, 더 이상 상처받는 자리에 머물지 않기 위한 책이다. 관계에서 쪼그라들거나 피로감에 쪄들어 있던 사람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만이 당신을 구할 수 있다"라고 말해주는 나침반 같은 책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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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눈부시게 홀로 설, 그대에게 - 체스터필드가 전하는 품격 있는 삶의 태도에 관하여
필립 체스터필드 지음, 문서연 편역 / 한가한오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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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복잡하게만 느껴질 때 저를 다시 붙잡아 준 것은 대단한 해법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기본에 가까운 아주 단 순한 태도였습니다. 동료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단정한 옷차림, 타인을 배려하는 말투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5쪽


이 책은 체스터 필드의 편지를 읽으며 수많은 공감을 했었다는 편역자가 두 아들에게 삼키기만 했던 말들이었다는 말에 내 아들이 생각났다. 고3이지만 마치 오늘만 사는 초3처럼 게임에만 열중하는 삶의 태도를 추구하는 아들이라서.


게다가 "언젠가 어른들은 사라질 테지만 그들의 지혜는 오래 남을 것"이라는 문장 또한 격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역시 삶은 태도다.


이 책의 원저자 필립 체스터필드는 18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자신이 경험하며 쌓은 사회적 관계와 인간의 품격, 교양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남겼다. 삶의 정답지를 들이미는 것처럼 "이렇게 살아라" 하며 아들에게 보내는 단순한 훈계가 아닌 현실적인 조언은 오늘날까지 널리 읽힌다.


그리고 원저자의 깊이 있는 통찰을 펼치는 편역자 문서연은 고전을 현대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고 있으며, 탁월한 감각을 지닌 편집자이자 작가다.




이 책은 약 280여 년 전 쓰인 아들을 향한 부정을 담은 편지를 바탕으로 하지만, 현대 사회의 고민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빠르고 쉽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개인의 역량은 스펙이 아닌 태도에서 나온다'라는 메시지를 담는다.


인간관계에서 존중과 경청의 중요성,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중심을 지키는 법, 성급한 성공보다 긴 호흡의 품격 있는 삶 그리고 감정과 태도를 다루는 성숙한 자세를 편역자의 친절한 문장으로 격려 받는다.


"공부가 잠시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여행자의 피로처럼 받아들이거라." 38쪽

"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생의 차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기억하거라." 39쪽


75쪽


"읽는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가려내고 판단하는 일이다." 140쪽

"이성은 비록 완벽하지 않지만, 우리가 가진 안내자 중에 가장 신뢰할 만한 나침반이다." 488쪽


이 책은 어쩌면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마음이 소란할 때 자연스럽게 집어 들게 될지도. 읽을 때마다 그 울림이 다르다.


만약 지금 인생의 과도기에서 방황하거나, 인간관계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든든한 위로가 될지 모른다. 뭐 사회 초년생이라면 조력자일 수도 있어서 성공의 의미를 새기게 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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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정원
아야세 마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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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확실한 내 편이라고 믿은 품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경험이 있다." 32쪽


아직은 고작 <매끈하게 움푹한 곳>을 읽었을 뿐이지만 그 어느 책보다 감각적이라는 느낌이 좀 들어 설렌다. 벌거벗은 모에카가 누아르에 감겨 있는 모습이 아니라 사랑을 고민하고 검열하는 마음이 그랬다.


분명 '누구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랑하고, 거기다 확실하게 믿는 사람에게 미끄러져 떨어지는 일이…. 나는 아버지였으려나. 대형 병원 구석진 한쪽, 어두컴컴한 복도 끝에 비교적 다른 창보다 큼지막한 창으로 어둠이 빛처럼 쏟아지는 새벽, 아버지는 이제 그만 치료를 포기하자고 했었다. 아마 조금 눈물이 났던가.


일본 치바현 출신으로, 2010년 <꽃에 눈멀다>로 R-18 문학상을 수상한 아야세 마루는 소설가로 꾸준히 주목받으며, 2016년 <이윽고 바다에 닿다>로 제38회 노마문예신인상 후보, 2017년 <치자나무>가 제158회 나오키상 후보작, 국제 문예지 <그란타>가 차세대 일본 문학의 주목할 작가로 알려졌다.





장례와 신발과 망자와 축하 케이크로 연결되는 이 조금은 기괴한 연결이 이상하게 감각을 자극하며, <230밀리미터의 축복>은 그렇게 시작되는데, 문득 아마미 루루코처럼 '어딘지 연약해 보이고 행복이 흐릿한'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라고 생각했다.


덩달아 학창 시절의 기억을 더듬거려도 도무지 찾아낼 수 없는 얼굴이라서 신기루 같았다. 그나저나 아내 메이코에게 받은 상처(?)를 되돌려주다가 결국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면 인간은 오히려 웃게 되는" 것을 깨닫는 것 역시 예사롭지 않고.



78쪽

191쪽


이 책은 각 이야기 속 인물들의 극적인 사건을 다루지는 않는다. 오랜 연인 사이에 생겨난 거리감, 가까웠던 사람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선가 변질되고 있다는 예감 같은 그런 내밀하고 미묘한 균열을 감각적인 순간을 포착한다.


기억의 달팽이라든가 손가락에 반한 다거나 하는 판타지 같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에서도 꽤 많은 내용과 부분이 감각적이라 읽는 내내 기분이 조금 달떴다.


이 책은 사랑, 불안, 집착, 갈망, 이별의 기척, 관계의 흔들림을 통해 이 책은 분명 읽으면 읽을수록 끝을 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감각적이다.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이야기로 책장을 덮는 순간엔 곁에 있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그런 책이다. 재밌는 건, <매그놀리아 남편>의 이쿠토 이야기는 왠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떠올랐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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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광고 카피 도감
오하림 지음 / 서교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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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인다는 것은 알고 싶어진다는 뜻이고 알고 싶다는 것은 좋아하게 될 확률이 큰마음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신경 쓰이게 됐다는 것은 좋아한다의 입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복잡한 사랑의 메커니즘을 이렇게 쉬운 글로 정리하다니요." 15쪽


리빙하우스의 카피를 감탄에 마지않는 저자 오하림은 TBWA, 무신사, 29CM의 카피라이터로 일했으며, '내가 광고 회사 힘들다 그랬잖아', '도보마포', '일본광고' 계정을 만들고 운영하는 기획자다.


이 책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잊지 않기 위해 모아두고 싶고, 모아놓고 보면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그가 모은 9,000개의 광고 카피 중 68개의 카피를 추렸다.




JR큐슈 철도의 "사랑이라든지, 용기라든지, 보이지 않는 것도 함께 타고 있다."처럼 어느 것 하나 마음 흔들지 않은 게 없어 그대로 카피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다.


89쪽


이 책은 일본 광고에 쓰인 인상적인 카피들을 모아, 그 문장에 저자의 기억과 맥락을 조미료처럼 뿌렸다. 그저 단순한 번역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시대의 정서와 소비자의 감각이 저자의 절제된 감정을 통해 읽는 순간 공감하게 된다. 마치 한 줄의 예술을 넘어 마법 같은 느낌을 주는 카피의 세계를 고스란히 느끼게 된달까.


114쪽


그리고 이런 기막히고 코 막히는 카피도 그렇지만 '추신으로 쓸 말을 아껴 둔다'라는 둥 여기저기 첨가되는 저자의 감성 한 스푼은 기어코 온몸 감각 세포가 팡팡 터트리고 만다.


142쪽

168쪽

198쪽

292쪽


온기가 스민 편지를 쓰고 싶었던 일본우정그룹이나 적당한 애정을 과도하게 느끼게 된 힐데모어라든지 잠든 연애 세포를 깨우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도쿄 스카이트리나 게다가 당장이라도 코트로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슬램덩크의 지고 싶지 않은 마음처럼 시공간을 넘어 잃어버리고 살았던 감정 폭발을 경험한다.


"언젠가는 회사라는 납작한 일반 명사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동사로 저를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1쪽


납작한 일반 명사, 살아 움직이는 동사 같은 기막힌 표현에 어딘가 깊은 곳이 꿈틀댔다. 별 이야기 아닐 수 있지만 소개할 납작한 회사도 없는 백수라서 더 그랬을지도.


"과거를 좇는 일이나 스스로에게 쓴소리하는 것을 낭만으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때로는 현실을 회피하거나, 성장의 방향을 잃어버린 채 머물러 있는 감상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다만 저는 여전히 나의 결핍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부족함이 있다는 건, 여전히 더 나아가고 싶다는 의지의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무언가에 대한 열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사람은 결핍조차 그렇기 때문에 결핍을 느끼는 순간 부끄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270쪽


위스키 바, 카미야의 이야기에서 괜히 울컥했다. 나는, 무언가를 끝까지 사랑했던 기억은 없지만 저자에겐 카피가 그러했음이 오롯이 전해져서 그랬다. 카피를 이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이 책은 '잘 쓴 문장'으로 억지로 설득한다기보다 '덜어 냄'의 공감이 돋보이는지 이해하게 만든다. 화려한 수식어 없이도 본질을 꿰뚫는 한 줄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감각의 아카이브 같아서 카피라이터나 기획자뿐 아니라, 문장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장하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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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비단구두
염정숙 지음 / 좋은땅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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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랍고 값비싼 느낌의 비단 보다 봄날이란 단어에 눈길이 먼저 닿았다. 캔이 부른 <내 생에 봄날은>도 생각나고 내 인생에 봄날은 있었던가 싶어서.


고난의 연속이었던 결혼 생활을 글로 쓰자니 구원이었다는 작가의 "일생을 헌신했더니 헌신짝이 된 내 삶을 생생하게 마주하는" 중이라는 말이 꽤나 아팠다.


먹먹한 마음으로 조그맣게 보이는 작가의 얼굴을 얼마간 들여다본다. 스물여섯 해의 미혼 생활, 쉰 다섯 해의 결혼 생활, 다시 한 해의 미혼 생활을 버텨내는 중인 여든둘의 엄마 얼굴이 겹쳐졌다. 엄마도 험난하고 고통스러웠던 결혼 생활이었다. 그리고 "살아봐야겠다"라는 작가의 다짐에 읽던 활자가 뿌옇게 흐려졌다.




이 책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우연히 배운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진솔한 고백이 담긴 자전적 산문으로 소설보다 더 영화 같고, 시보다 더 절절한 한 여성의 기록 일지도 모르겠다.


가난과 노동, 자식 뒷바라지로 점철된 시간 속에서 비자발적 '잘림'을 경험하고 헛헛한 마음을 글로 다잡으며, 비로소 자신의 이름과 꿈을 마주하게 되는 걸 보면서 찡하다 울컥하다 감정이 난리 부루스를 친다.


한데 작가의 가족, 그중 남편도 아니고 시아버지와의 추억담이 많이 등장하는 게 뜻밖인데, 솔직히 읽다 보면 시아버지도 그다지 자상한 것 같지 않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보고 자란 게 있으니 남편도 자상하겠거니 싶은데 작가 기억에는 고집 세고 이기적이고 못돼 처먹은 남의 편으로 그려져 좀 웃펐다. 뭐, 남편도 그런데 시어머니야 말해 무엇하랴.


세세한 집안 사정은 모르겠지만 결혼을 앞둔 나이에도 제 손으로 밥 한번 안 해 봤을 정도의 서울 살이었다면, 귀한 딸이고 부족하지 않은 형편으로 짐작된다.


그런 작가가 스물넷에 인제의 첩첩 산골 작은 마을로 납치되듯 와서 하게 된 시집살이에 "내가 이렇게 안 살아 봐서…"라는 고단하고 팍팍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적잖이 재밌다.


53쪽


한편 전지적 며느리 시점의 고발적 내용에는 탄식이 터질 만큼 시월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어찌 며느리가 손 귀한 집의 첫 손주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이렇다 할 준비를 해놓지 않았을까? 고약한 시어머니는 그렇다 쳐도 자상하다는 시아버지는? 그래놓고 시아버지 환갑은 동네잔치를 벌이고 뭄 푼지 얼마 되지 않은 며느리를 혹사 시키는 시월드에서 왜 살지? 란 의구심 들었다. 정녕 그렇다면 홧병이 제대로 쌓여 몸에 사리가 백만 개쯤은 만들어졌겠다 싶어 절로 욕이 나왔다.


그건 그렇고 읽다 보면 홍해삼 사건이나 며느리에게 던지는 질문 200개 등등 곳곳에 등장하는 작가의 성격도 만만치는 않아 보여서 살짝 도토리 키 재기 느낌도 들기도 해서 어쩌면 쿨한 사람이라는 건 본인 착각일지 모르겠다.


123쪽


유려한 문장이나 화려한 수식어로 뽐내기보다는 투박에 가까운 담담한 문장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자식들 양육에 올인하며 악바리처럼 일했던 순간들, 갑작스러운 해고 뒤에 찾아온 상실감,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글쓰기라는 구원까지. 모든 고백이 너무 진솔하고 내 이야기 같아서 몰입하고 읽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일흔 중반에 데뷔한 작가가 펼쳐낸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의 서사를 공감하게 만들고, 열심히 살아온 스스로에게 "애썼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따뜻한 위안을 선사한다. 단순히 노년의 회고록이 아닌 삶의 무게에 눌려 자신의 꿈을 잠시 내려놓은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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