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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ㅣ 듣는 소설 1
김금희 지음 / 무제 / 2025년 5월
평점 :

어느 인터뷰에서 배우 박정민은 김금희 작가의 문장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가 출판사 무제의 대표란 것도, 김금희 작가도 그 인터뷰를 통해 알았다.
보는 책보다 듣는 책이 먼저 발간된다는 색다른 발상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작가의 문장과 목소리의 주인공 등 온통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먼저' 읽고 싶다는 생각에 주문해 놓고 이런저런 개인사에 묵혀두다 먼저 읽고 뒤이어 들었다.
작가는 2009년 단편소설 <너의 도큐먼트>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산문, 소설, 장편, 중편, 단편, 연작으로 여러 작품과 젊은작가상 대상을 비롯한 아주 많은 상을 수상했지만 나는 <첫 여름, 완주>가 처음이다.
"얼마나 많은 웃음이 이 여름에 깃들어 있을까." 책날개 작가 소개 옆에 그의 필체로 된 사인이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다, 나는 여름을 좋아하는지 이런 여름에 얼마나 웃을 수 있는지 생각한다. 뜨거운 8월에 태어난, 난 여름이 싫다. 땀이 나지 않는 여름은 생명을 위협하니까.
와, 미치겠다. 어린 열매의 이 기멕힌 멘트에 물고 있던 커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못하고 뿜어 내버렸다. 패드 화면에 세계 지도가 흐른다. 제길! 열매에게 쫓아가 귀엽다고 볼따구니를 잡고 늘려 주고 싶을 지경이다.
아, 재밌다. 무조건 재밌다. 아직 사춘기가 오기 전, 한글을 배울 시간이 없던 팔십 세 할아버지에게 열매가 <마스크> 한 편을 통째로 보여 줄(?) 만큼 열의를 보이더니 결국 공채 성우가 되고, 떨리기 시작한 목소리가 결국 종종 나오지 않는 날이 생긴 어느 날까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냥 쫙 펼쳐지는 느낌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상하게도 그냥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30대가 된 열매에게 돈 빌려 증발해 버린 고수미의 이야기가 무척 안타깝고.
"보령에서 올라와 오랫동안, 대학을 졸업하면, 서른이 되면, 경력이 차면, 듬직한 안정으로 나아가리라 믿었지만 이상하게 삶은 매번 흔들렸다. 마치 우는 사람의 어깨처럼." 15쪽
'마치 우는 사람의 어깨처럼'이란 표현에 울컥할 사람이 많겠다, 싶었다. 마치 나처럼. 대학을 졸업해도, 쉰이 한참 넘어가도, 경력을 채울 만큼 채워도 삶은 기어코 나아질 기미가 없다. 당연하지 않은, 아니 당연하면 안 되는 일상이 점점 당연해지는 게 기이해진달까.
'여름 환한 햇살을 배경으로 내리는 빗소리 같은 느낌'이란 지문을 보면서 아, 그런 느낌은 어떤 느낌일까, 상상한다. 후텁지근함이 피부에 내려 붙지만 살짝 시원한 바람기 같은 게 있고 또 그 사이로 따뜻함이 밀려오는 느낌일까?
문득 더위를 먹든 말든 창밖으로 돌아누워 디민 얼굴로 따뜻한 햇살을 정통으로 다 받아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게 또, 할부지와 실없는 대화에서 '얼른 늙고 싶다'라는 말 할 때 열매의 심정이 읽혀 곤란했다. 젊음이 올매나 좋은지 알면서도 시간이 삽시간에 지나버려 늙었으면 하는 마음이, 세상 어디도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지 못해 버둥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그랬다. 그럼에도 그런 모든 것들이 다 헛소리이기를 바랐다.
"그날 밤은 큰 도화지를 척척 접는 것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한 번 접었을 때 손열매는 밤의 교량을 터덜터덜 걷고 있었고 한 번 더 접자 개구리 소리가 왁왁 나는 개천을 마치 하늘을 날듯이 사뿐히 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접었을 때쯤에는 늘 보는 버스 정류장 위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목이 아플 때까지 별을 보고 있다가 손열매는 자기도 모르게 '거기 외계인이라면서요'하고 심상하게 물었다." 101쪽
마치 시간이 공간을 접어내듯 공간을 타고 넘는 열매의 얼굴이 그려져 기분이 막 좋아졌다. 완주의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어지니 말이다. 잘 정돈된 문장 사이로 자꾸 재치 넘치는 문장에 한참을 낄낄 거리게 만든다. 이런 문장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작가도 외계인 아니삼?
당황? 허무? 허구의 세계를 동경하는 창세기 비디오 대여점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완주 매점의 공간의 의미를 알아챘어야 했나? 어쩌면 자작나무 숲속의 어저귀의 공간이었던 공소도?
어저귀 말마따나 삶은 시작과 끝을 어차피 알 수 없으니 동강난 허리통 정도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열매와 수미의 완주는 분명 희망적이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뭐, 그러고 보면 달리는 버스에서 졸 수 있는 열매의 시작으로 끝이 나는 걸 보면 희망일지도.
어쨌든 인간애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작가가 고맙고, 각자의 몫을 온전히 완주하길 바라는 박정민 배우의 끝인사도 뭉클했다. 이제 나는 내 몫의 완주가 무엇일까, 생각한다.
처음에 보는 세상에서 많은 부분 듣는 세상으로 견뎌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획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애와 관련된 이야기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읽고, 듣고 나니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특정한 감각들에 머무르지 않는, 오감이 다 휘몰아치듯 즐거운 독서가 됐다. 듣는 독서의 생생함에 낭독은 쨉이 안 된다. 국립장애인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듣는 책을 볼 수 있다. 꼭 보고 듣고 하시길 추천한다.

국립장애인도서관 홈페이지 https://www.nld.go.kr/

구매해서 완독 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