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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엇이 책이 되는가 - 글이 책이 되기까지, 작가의 길로 안내하는 책 쓰기 수업
임승수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11월
평점 :

어딘가 모르게 이름이 눈에 익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를 읽었더랬다. 아마 '생계형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말에 혹해서였을 것이다. 찾아보니 "뒤통수 한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다"라는 소감도 덧붙여 블로그 서평도 남겼던 인상적인 작가였다. 갑자기 이스트도 없이 부푸는 빵처럼 기대감이 거대하게 부풀었다.
서울대학교 공대 석사 출신의 A4 한 장을 채우지 못하는 글치였다는 묘한 이력의 소유자.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고 삶의 가치를 사회주의로 노선을 정하고, 20년째 철저한 자본시장에서 사회주의를 앞세워 전업 작가로 자본을 획득하는 그가 그동안의 내공을 이 책에 쏟았다. 이 외에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오십에 읽는 자본론>, <글쓰기 클리닉> 등 다 수의 책을 썼다.

프롤로그부터 뜨끔했다. 그 많다는 책을 쓰려는 사람 중에 나도 숟가락 얹고 있는 데다, '한두 편의 좋은 문장만으로는 책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 몇 줄 쓰고 캬~ 소릴 내며 자뻑이 일상이라서.
하편 숙연해지기도 했는데 작가 덕분에 생전 하지 않던 '왜 쓰려 하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한다. 진짜 나는 왜 쓰려는 거지? 뭘 쓰려는 거지? 나는 내 삶을 풀어내 글 쓰고 강의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INFJ라던데… 은근 관종인가? 어쨌든 운 좋게 로또에 1등 당첨이 되더라도 그런 명품의 삶을 살고 싶다. 작가처럼.
"책을 쓰는 일은 결국, '나의 무엇이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행위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쓰자. 누군가 나의 글을 읽고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거나, 위로를 받거나, 기분 좋게 웃었다면, 그 순간 글은 가장 정확한 방식으로 '쓸모'를 증명한 셈이다." 39쪽
하, 나는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려나. 쓰고 싶은 열망은 가득하지만 쓸만한 깜냥이 없다는 이 거센 열패감에 무릎이 꺾인다.
와, 씨! 소름 돋았다. 작가가 자본론을 읽고 인간이든 노동이든 경제든 뭐든 '가치'를 깨달았다는데, 나는 이 책을 읽고 '오만함'을 깨달았다. 물론 작가가 선거 유세에서 느꼈다는 감각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21년을 비장애인으로 살다 이후 34년을 장애인으로 살면서 편견과 차별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아주 후진 사회 인식을 바꿔 보자고 강의를 다니고 글을 끼적 거린 '주제'가 가당치 않은 일이었겠다는 생각이 막 터져 버린 화산처럼 뜨겁고 메슥거리는 감각들이 솟구쳤다. 그래서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작가는 아무나 될 수 없다고 했던가, 그 진리를 마주해버린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익숙한 틀로 본다. 당연하다고 믿어온 것들, 늘 그래 왔던 방식, 동일한 감정의 패턴." 104쪽
사람들은 개성을 이야기하면서 굳이 남들과 다른 무엇인가를 찾으려 애썼던 거구나,를 깨닫는다. 자신이 기진 고유한 틀이 다름의 환상을 빚어냈던 이유라면 이미 굳어버린 나만의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아주 지난한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또, 글쓰기는 변비와 같아서 아무리 힘들어도 힘주는 만큼 나오게 되어 있다는 작가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음과 동시에 그동안 수없이 찾아 읽었던 글쓰기 책과 교본과는 확실히 다르다. 세포 속 극소량으로 묻어있는 글쓰기 세포를 흔들어 깨운달까. 얼굴이 싯뻘개질 만큼 막혔던 것이 뽕 하고 빠져나올 때처럼 짜릿하다.

131쪽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와 챗지피티의 문답인데, 작가라는 본질에 담긴 심층적인 내용이 적잖이 놀랍다.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낼 수 없다는 작가의 단호함도 그렇고 챗지피티가 가져올 서브작가의 수준도 기대된다. 감각과 감정의 차이는 결국 기계에겐 넘사벽일지 모른다는 뿌듯함도 있다. 은하철도 999에서 기계 인간이 되고 팠던 철이를 바라보던 메텔의 안타까움이 스쳤다.

166쪽
“작가는 독자 없이도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독자가 있을 때 비로소 그 글은 살아 있는 무언가가 된다. 글은 독자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267쪽
글을 쓴다고 깝치면서도 수준은 일기(물론 작가는 일기도 보여 주려 쓴다고 했지만) 정도라서 어딘가 내놓으면 안 될 수준이란 것을 종종 자각한다. 그럴 때면 타조처럼 구멍에 머릴 박고 숨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잘 쓸까’보다는 ‘무엇을 왜 쓸까‘를 조금은 고민하는 편이라서 작가의 글이 꽤 많이 위안이 됐다.
체대를 다니며 과할 만큼 건강하던 사지가 뜬금없는 사고로 전신마비를 겪으며 삐걱대고 이족보행이 불가하게 됐다. 한데 '다른' 생각과 모양새에 지독히 차별적인 나라에서 살다 보니 나름 할 말이 많아졌다. 모래가 입안에 가득 든 것처럼 까실 거리지만 인내해야만 했던 시간을 농밀한 언어로 풀어내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은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와 목적, 기획, 계약 등 출판에 관련한 내용을 틀에 박힌 형식이 아닌 '작가로 살기'를 선택할 때의 벌어질 수 있는 작가의 경험담을 토대로 재치 있는 필력이 더해져 글쓰기 초행길을 걷는 사람에게 손전등이 아니라 야구장에서나 봄직한 거대하고 밝은 서치라이트를 비춰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33년 차 방송작가가 전율을 느꼈다는 말에 격하게 동의한다.

186쪽
많은 글쓰기 책처럼 이상적인 조언만 하는 게 아니라 '왜 쓰는가', '내 글이 누구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 같은 태도의 문제를 짚어 주는 게 인상적이다. 거기에 책이 만들어지는 꽤 실무적인 과정까지 다루면서 투고나 출판 계약할 때 유용한 꿀팁을 알려주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작가에게는 미안하지만, 널리 널리 알리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 정도고 아무도 모르게 혼자 읽고 싶은 마음이다. 단언컨대,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눈알에 힘주고 궁서체로 꾹꾹 읽은 글쓰기 책 중에 단연 탑이다. 두고두고 간직하겠다. 이 책만큼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하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