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볼딘 동물원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3
송섬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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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어느 순간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 인사를 나눈 날, 더는 연락하지 않게 된 날, 상대의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날. 이별에는 분명한 순간이 있는 듯하지만 함께한 시간이 삶에서 빠져나가는 시각까지 정할 수는 없다. 떠난 사람은 기억 속에서 몇 번이고 되돌아오고, 오래전의 관계는 이후에 맺는 관계에도 조금씩 스며든다. 헤어진 뒤에도 관계는 삶의 다른 곳으로 흘러가며 모습을 바꾼다.

『멜볼딘 동물원』의 수진과 연서는 멜볼딘여고에서 만나 가까워졌다가 헤어지고, 16년이 지나 우연히 재회한다. 그동안 각자 다른 삶을 살았지만 비슷한 농도의 불행을 지나온 두 사람은 오래 비워둔 시간을 메우듯 여러 곳을 함께 여행한다. 그러나 연서는 다시 수진의 곁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10년 뒤, 이번에는 연서의 딸 표은이 수진을 찾아온다. 한 사람의 부재가 두 사람에게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 수진이 다시 만난 연서와 표은이 잃어버린 연서는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되찾은 친구였던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떠나버린 엄마였다. 한 인간은 관계의 수만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그중 어느 하나만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진과 표은의 만남에는 연서를 기억한다는 공통점만큼이나 서로가 알지 못했던 연서를 마주해야 하는 낯섦이 있다. 상대의 기억을 통해 자신이 알던 사람의 바깥을 발견하는 일은 때로 그 사람을 다시 이해하는 과정이 된다.

이 소설이 이별을 다루는 방식도 그와 닮았다. 관계가 끝난 뒤 남는 것을 미련이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만 정리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은 그 사람을 바라보던 방식, 그 곁에서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 이후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마음에도 남아 있다. 관계는 지속되거나 단절되는 두 가지 상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헤어진 뒤에는 헤어진 사람끼리의 시간이 있다. 더는 함께하지 않으면서도 한때 함께했다는 사실을 품고 살아가는 시간들.

그런 의미에서 수진과 연서가 서로에게 쓰기로 한 ‘부치지 않는 편지’는 이 작품의 관계를 닮아 있다. 편지는 본래 누군가에게 가기 위해 쓰이지만, 두 사람은 처음부터 보내지 않기로 약속한다. 모두 한 번쯤 부치지 않을, 혹은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써본 적이 있지 않을까. 마음속으로든 편지지 위로든. 그 순간의 편지는 무엇을 위해 적히고 무엇을 위해 보내지지 않았던가.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말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답장이 도착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상대의 반응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과 뒤늦게 알아버린 감정, 관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문장으로 확인한다. 마음속에 있을 때 감정은 현재의 자신과 뒤섞여 있지만, 문장이 되는 순간 그것은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된다. 쓰는 사람은 과거의 자신에게서 조금 떨어져 그때의 마음을 읽고, 이미 지나간 관계에 현재의 언어로 다시 의미를 부여한다. 기억할 수밖에 없는 과거와 새롭게 살아야 하는 현재 사이에서 글쓰기는 두 시간을 이어주는 행위가 되는 셈이다. 편지는 상대에게 도착하지 않더라도 쓰는 사람에게 먼저 도착한다. 지나간 관계를 되살릴 수는 없어도 그 관계를 지나온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다시 읽어볼 수 있다.

그래서 『멜볼딘 동물원』에서 이별은 이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출발점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연서가 없는 자리에서 수진과 표은이 만나듯, 이미 끝난 관계는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후의 삶에 참여한다. 과거를 없애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받은 것까지 지닌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 새로운 사랑과 관계는 완전히 비어 있는 자리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통과한 채 서로에게 도착한다.

송섬은 이러한 관계의 시간을 장소에도 겹쳐놓는다. 멜볼딘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여러 여행지를 지나 동물원으로 향하고, 시간이 흐른 뒤 또 다른 관계가 다시 동물원을 찾아간다. 같은 종류의 장소를 찾아간다고 과거의 시간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곳을 찾는 사람도, 함께 걷는 사람도 달라져 있다. 장소는 지나간 시간을 복원하는 대신 무엇이 사라졌고 무엇이 남았는지를 함께 보여준다. 그래서 폐장한 동물원이라는 공간은 이 소설의 이별과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동물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동물들이 살았던 시간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빈 우리는 부재의 모습인 동시에 한때 누군가 그곳에 있었다는 흔적이 된다. 관계 역시 헤어졌다는 사실만으로 함께했던 시간이 삶에서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다만 이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어떤 관계는 다시 이어지고, 어떤 관계는 한쪽의 기억에서만 계속된다. 또 어떤 관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건너가 새로운 만남의 일부가 된다. 『멜볼딘 동물원』은 그 변화들을 바라보며 이별 이후에도 사람 사이에는 시간이 계속 흐른다는 사실을 그린다. 지나간 관계를 지우지도,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지도 않은 채 자신의 삶 안에 둘 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이다. 어쩌면 부치지 않는 편지도 그래서 필요한 것일 테다. 상대에게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했던 자신을 데리고 다음 삶으로 가기 위해서. 이별은 두 사람이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 순간에 시작되지만, 관계의 의미까지 그날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와 헤어진 뒤에도 우리는 그 관계에서 받은 것들을 지닌 채 또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삶에는 떠난 사람과 아직 곁에 있는 사람,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의 시간이 조금씩 겹쳐진다.

✏️도서출판 은행나무로부터 은행잎 4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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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판박이
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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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신분에는 신분증이 없다. 지구에서 태어났다는 기억도, 가족도, 직업도 그것을 완벽하게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인간임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은 채 인간으로 살아간다. 너무 당연해서 증거조차 필요 없었던 사실. 아베 고보는 바로 그런 것들을 골라 의심의 대상으로 만든다.

『인간 판박이』에서 세계를 뒤엎는 데 필요한 것은 화성인의 출연조차 아니다. “나는 화성인입니다.” 한 남자가 그렇게 말하면 된다. 라디오 프로그램 「안녕하세요 화성인」의 각본가인 ‘나’에게 그 말은 처음부터 판정의 대상이다. 사실인가 망상인가, 인간인가 화성인인가. 판정하는 쪽과 판정받는 쪽의 위치도 명확하다. 그러나 다나카 이치로는 자신의 정체를 입증하는 대신 화자에게 증명을 요구한다. 당신은 무슨 근거로 자신이 지구인이라고 믿습니까. 그 한 번의 반문으로 재판정되어야 할 존재는 화성인에서 인간으로 바뀐다.

여기서 아베 고보는 정체성을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춰진 어떤 진실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체성을 성립시키는 외부의 조건들을 차례로 노출한다. 출생과 기억, 이름과 직업, 가족과 소속. ‘나’를 설명하기 위해 꺼내놓는 것들은 정작 나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이 거의 없다. 사회가 승인하고 타인이 확인해준 표지들을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며 살아왔을 뿐이다. 존재한다는 감각과 자신이 누구라는 확신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간격이 있다.

그래서 다나카의 궤변은 우스우면서도 위험하다. 자신을 화성인이라고 믿는 지구인 미치광이와, 자신을 화성인이라고 믿는 지구인 미치광이라고 믿는 화성인. 문장은 꼬리를 물고 증식하고, 정상과 광기 사이에 세워놓았던 구분은 언어의 반복 속에서 효력을 잃는다. 이 소설의 미로에는 복잡한 통로나 막다른 골목이 없다. 문장 하나가 다음 문장을 낳고, 논리가 논리를 복제하면서 출구를 없앤다. 아베 고보는 사람을 방에 가두는 대신 사고의 형식 안에 가둔다.

토폴로지는 이 기묘한 언어의 미로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한다. 형태가 달라도 관계와 구조가 보존된다면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는 발상이 인간과 화성인의 구별에 침투하면서 ‘고유함’이라는 말의 기반을 건드린다. 화성인이 인간과 완전히 같다면 무엇으로 화성인을 화성인이라 부를 것인가. 반대로 인간에게만 속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성질은 무엇인가. 이때 제목의 ‘판박이’는 더욱 짓궂어진다. 판박이에는 언제나 먼저 존재하는 원본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과 화성인이 서로를 닮고 어느 쪽에서도 원본의 자격을 찾아낼 수 없다면, 복제되었다고 말할 대상 역시 사라진다. 제목은 인간을 기준으로 화성인을 명명하는 듯하다가 어느새 그 기준 자체를 빼앗는다. 누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 수 없게 된 자리에는 ‘인간’이라는 명칭만 덩그러니 남는다.

이러한 역전은 실화와 우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구인은 실화이고 화성인은 우화라는 구분은 화자가 세계를 이해하는 최초의 문법이다. 다나카는 자신의 우화를 실화로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화자의 실화가 왜 실화인지 따져 묻는다. 이것이 『인간 판박이』의 영리한 방식이다. 거짓을 진실처럼 꾸미는 대신 진실이 누리던 특권을 박탈하는 것. 현실은 하나뿐인 단단한 실체에서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가장 익숙해서 채택된 형태로 내려온다.

아베 고보에게 SF가 필요했던 까닭도 여기에서 읽힌다. 『인간 판박이』에는 우주의 장관도, 외계 문명의 세밀한 묘사도 없다. 오히려 무대는 놀라울 만큼 좁다. 규격화된 단지의 방 몇 개와 두 사람의 대화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좁은 방 안에서 지구 전체의 현실성이 위태로워진다. SF의 규모를 공간으로 측정한다면 작은 소설이지만, 하나의 가설이 침범할 수 있는 현실의 범위로 측정하면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커진다. “저 남자가 정말 화성인이라면.” 아베 고보에게 필요한 SF적 장치는 사실 이것 하나뿐이다. 불가능한 가설을 일상의 한가운데 놓은 뒤 주변의 조건은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익숙한 세계가 그대로 유지될수록 가설의 이물감은 선명해지고, 그것을 제거하려는 논리가 오히려 일상의 토대를 파헤친다. 화성은 멀리 떨어진 행성이면서 현실을 낯설게 보기 위해 마련된 관측 위치가 된다. 우주로 나가지 않고도 지구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아베 고보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감각과도 맞닿는다. 『타인의 얼굴』의 가면, 『모래의 여자』의 구덩이와 모래, 『불타버린 지도』의 도시와 지도. 그의 소설에는 익숙한 세계를 낯선 장소로 변환하는 강력한 장치가 놓여 있다. 장치는 대개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환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일상적인 사물과 공간이다. 『인간 판박이』에서는 그 자리를 언어가 차지한다. 이전 작품의 인물들이 얼굴과 모래와 도시에서 길을 잃었다면, 이곳의 화자는 말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잃는다. 그래서 아베 고보의 문체에는 설명하면서 동시에 설명을 의심하게 만드는 묘한 운동성이 있다. 과학 용어와 궤변, 농담과 진지한 논증이 같은 문장 안에서 뒤섞이고, 독자는 어디까지 웃어야 하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다나카의 말은 황당해서 웃기다가 지나치게 정교해서 섬뜩해진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밀어내려는 순간, ‘말이 안 된다’고 판정했던 기준부터 해명해야 한다. 화자와 함께 논리를 따라가는 동안 독자 역시 어느새 다나카가 만든 규칙으로 사고한다.

소설을 에워싼 단지 역시 이 기묘한 ‘판박이’의 논리를 공간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같은 규격으로 복제된 집들이 이어지지만 그 안의 삶은 벽 너머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닮은 외부와 알 수 없는 내부가 한 공간에 공존한다. 여기서는 비슷하다는 사실도, 다르다는 사실도 타인을 이해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화성인과 인간을 구분하려던 화자의 곤경은 가장 가까운 이웃조차 그가 누구인지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인간의 오래된 곤경과 이어진다.

이때 ‘판박이’의 문제는 개인의 정체성에서 공동체의 문법으로 범위를 넓힌다. 인간은 언어와 문화, 고향과 민족을 통해 자신이 속한 자리를 확인하고 그 이름들로 ‘우리’를 만든다. 그러나 닮음과 차이가 존재의 본질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소설의 논리를 여기까지 밀어붙이면,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기준 역시 절대적인 자격을 잃는다. 냉전과 핵전쟁의 공포가 현실이던 1960년대에 지구인과 화성인의 고유성을 지워가는 이야기가 쓰였다는 사실은 이 사유에 역사적인 무게를 더한다. 차이를 고유한 본질로 고정하고 다시 우열의 근거로 바꾸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만든 범주에 갇힌다. 화성인과 지구인을 닮게 만든 아베 고보의 상상력은 타자를 하나의 모습으로 환원하기보다, 우리가 차이를 사용하는 방식 자체를 의심하는 쪽으로 향한다.

아베 고보의 문학에서 고향과 소속을 잃은 인간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도 그래서 눈여겨볼 만하다. 그의 인물들은 자신을 설명하던 좌표를 상실하면서 고독해지지만, 역설적으로 그 순간 사회가 개인에게 얼마나 많은 이름을 붙여왔는지도 드러낸다. 『인간 판박이』의 화자는 인간이라는 가장 넓고 견고해 보이는 소속마저 의심받는다. 자신을 보호하던 마지막 범주가 심문의 대상이 된 셈이다.

다나카가 정말 화성인이었는지는 그래서 점점 덜 중요해진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면 인간과 화성인을 가르던 선도 다시 그을 수 있다. 세계는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화는 안전하게 허구의 자리로 밀려날 것이다. 아베 고보는 그 판정을 유예한 채 화성인을 향하던 시선을 인간 쪽으로 돌린다. 소설의 처음에는 한 명의 수상한 남자가 심문대에 서 있었다. 마지막에 이르면 그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그곳에는 자신이 인간임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사람이 서 있다.

『인간 판박이』는 화성을 보여주지 않고 지구를 낯설게 만든다. 인간과 닮은 외계인을 상상한 뒤 외계인의 차이를 찾는 대신 인간만의 차이를 찾아보라고 요구한다. 그 요구 앞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예상보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아베 고보가 뚫어놓은 작은 구멍 너머에는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는 대신, 같은 세계가 전혀 다른 논리로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낯선 존재는 화성인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한 번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인간이다.

✏️도서출판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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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들어 주는 벤치 - 열네 명의 할머니, 한 개의 벤치, 오십만 명을 살린 마음 치유의 혁명
딕슨 치반다 지음, 주민아 옮김 / 판미동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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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에 닿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거리가 필요할까. 너무 멀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너무 가까워 타인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덮어버려도 마음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을 들어 주는 벤치』에는 그 거리를 가늠하게 만드는 장소가 있다. 나무 아래 놓인 평범한 벤치. 마주 보기를 강요하지 않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같은 높이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듣는다. 열네 명의 할머니와 하나의 벤치에서 시작된 변화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갔다.

정신과 의사 딕슨 치반다가 그 거리의 의미를 절실하게 깨달은 계기는 스물다섯 살 에리카의 죽음이었다. 치료가 필요한 환자와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병원까지 가야 할 긴 길과 버스비가 놓여 있었다. 의학은 마음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나 그 지식이 에리카가 살아가는 자리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의료의 한계는 지식의 부족보다 접근할 수 없는 거리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치반다는 사람들이 진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치료가 그들의 일상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을 찾는다. 그렇게 정신건강 돌봄의 자리가 병원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벤치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일은 말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이를 ‘쿠부라 풍그와(kuvhura pfungwa)’, 마음을 여는 일이라 불렀다. 누군가 고통을 털어놓을 때 우리는 자주 해결책부터 찾곤 한다. 위로할 말을 고르고, 원인을 분석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쓸 만한 답을 꺼내 건넨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선의가 너무 빠르게 앞서가면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다시 작아진다. 경청에는 타인의 삶을 대신 해석하려는 욕망을 잠시 유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가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정해주지 않고, 미처 문장이 되지 못한 감정까지 자신의 속도로 꺼낼 수 있도록 기다리는 일. 그런 기다림 속에서 한 사람의 고통은 처리해야 할 문제가 아닌 누군가의 삶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삶에는 저마다의 언어가 있다. 쇼나어 ‘쿠풍기시사(kufungisisa)’,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은 이 책에서 특히 오래 바라보게 되는 말이다. 짐바브웨의 정신건강 연구에서 쿠풍기시사는 우울이나 불안이라는 하나의 진단 범주에 정확히 포개지지 않는다. 걱정과 절망, 사회적 어려움과 영적인 괴로움까지 여러 층위의 고통이 이 단어 안에서 함께 움직인다. 한 사람의 마음은 진단명보다 훨씬 많은 삶의 사정을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우울도 상실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부재의 감각으로, 가난 속에서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관계에서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고립의 감각으로 모습을 달리한다. 정신의학의 언어가 증상을 식별하고 치료의 길을 찾는다면, 삶의 언어는 그 증상이 누구의 어떤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를 들려준다. 벤치에서는 이 두 언어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은 채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말로 만난다.

그래서 우정 벤치를 단순히 ‘잘 들어주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읽기에는 그 안의 치료가 꽤 정교하다. 할머니들은 문제해결치료를 훈련받고 지속적인 감독 아래 상담을 진행한다. 임상 연구에서는 지역 보건인력이 제공하는 여섯 차례의 문제해결치료와 동료지원이 실제 정신건강 증상의 개선으로 이어지는지도 검증했다. 따뜻한 마음만으로 모든 고통을 치료할 수 있다는 낭만적인 믿음과는 결이 다르다. 이곳에서 의학적 전문성은 공동체의 경험과 만나 비로소 생활의 언어를 얻는다. 치반다는 할머니들에게 치료의 방법을 전하고, 할머니들은 그에게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배운 지식과 살아낸 지식이 한쪽을 지우지 않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이러한 방식은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치료’의 범위를 조금 더 넓게 바라보게 한다. 마음의 고통 가운데에는 상담 몇 번으로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난과 사별, 질병과 폭력의 경험을 말 몇 마디로 없앨 수는 없다. 벤치에서 이루어지는 문제해결 역시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정리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충분히 풀어놓고, 지금 손댈 수 있는 문제를 함께 찾아보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돕는다. 치유는 고통의 완전한 소멸만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 속에서 잃어버렸던 선택의 감각, 자기 삶에 다시 참여할 수 있다는 감각이 돌아오는 순간에도 회복은 시작된다.

그때 치료하는 사람과 치료받는 사람을 가르던 선도 조금 흐려진다. 벤치의 할머니들에게도 상실과 가난, 가족의 문제를 지나온 시간이 있다. 자신의 삶에서 취약함을 경험한 사람이 다른 취약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인간은 언제나 도움을 주는 쪽과 받는 쪽 가운데 하나로만 살아가지 않는다. 어느 날에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다른 날에는 누군가가 기댈 자리를 내어준다. 이 상호의존은 인간의 부족함을 증명하는 흔적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조건에 가깝다. 벤치의 구조는 이러한 관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둔 대면도,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자리도 없이 두 사람이 같은 높이에 나란히 앉는다. 서로의 상처를 없애줄 수 없는 두 사람이 잠시 같은 세계를 바라보는 것. 돌봄은 그 짧은 동행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에리카의 죽음은 마음의 고통을 다시 사회의 문제로 돌려놓는다. 정신질환을 오직 개인 내부의 문제로 읽을 때 병원까지의 거리와 버스비, 의료 인력의 부족과 빈곤은 치료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사회와 분리된 밀실에서 아프지 않는다. 살아가는 조건은 감정의 형태를 만들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환경은 회복의 가능성에도 영향을 준다. 세계보건기구가 우정 벤치를 지역사회 정신건강 체계의 한 모델로 주목하는 이유 역시 치료를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 가까이 옮겨놓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정신건강은 개인이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아픈 사람이 도움에 닿을 수 있도록 사회가 얼마나 가까운 자리를 마련해두었는가와도 연결된다.

치료와 일상의 거리를 좁히는 과정은 벤치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처음 붙였던 ‘정신건강 벤치’라는 이름에 사람들은 선뜻 다가오지 않았고, 할머니들은 이를 ‘우정 벤치’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진단과 치료를 연상시키던 자리는 그 이름을 바꾸면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는 일상의 공간으로 스며든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먼 곳을 찾아가는 대신, 이미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가까운 자리. 이름의 변화는 그렇게 정신건강 돌봄과 사람들의 삶 사이에 놓인 거리를 한 걸음 더 좁힌다.

에리카와 치반다 사이에는 너무 먼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를 건너지 못했던 기억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이제 수많은 사람 곁의 벤치로 이어진다. 그 위에서 할머니들이 건넨 것은 완벽한 해답보다 한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누군가 듣고 있다는 감각, 혼자 감당하던 고통을 잠시 함께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감각. 인간은 그런 관계 속에서 다시 자기 삶을 움직일 힘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쩌면 마음을 돌보는 사회의 모습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고통을 해결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만의 자리가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잠시 자신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자리. 나무 아래의 작은 벤치는 그 가능성을 가장 소박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누군가 자신의 가장 아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그의 말을 바꾸거나 재촉하지 않고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앉는 것. 한 사람의 마음으로 향하는 길은 그렇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거리에서 시작된다.

✏️도서출판 판미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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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40
헤르만 헤세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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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면에는 서로 다른 방향을 원하는 힘이 함께 산다. 세계를 이해하고 질서 속에 놓으려는 정신이 있는가 하면, 몸으로 세계를 통과하며 사랑하고 경험하려는 생명이 있다. 하나는 영원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순간에 매혹된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이 오래된 대립에 두 사람의 이름을 부여한다. 정신과 사색의 삶을 살아가는 나르치스, 감각과 사랑과 예술을 좇는 골드문트. 두 사람은 서로 닮아가는 대신 각자의 방향을 깊숙이 살아가며, 자신에게 결여된 영역을 상대를 통해 알아간다.

골드문트의 출발에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가치와 기대를 물려받는다. 타인이 정해준 길을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기도 하고, 오래 반복된 명령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아를 찾아간다는 것은 새로운 무엇을 획득하는 일보다 이미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 가운데 무엇이 진정 자신의 것인지 식별하는 과정일 것이다. 골드문트의 방랑은 이런 의미에서 장소의 이동보다 존재의 이동으로 읽힌다. 정해진 삶의 바깥으로 걸어나간 그는 세계와 직접 접촉하면서 자신이라는 인간의 윤곽을 만들어간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차이는 서로 다른 앎의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나르치스가 사유와 분별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면 골드문트는 감각과 경험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인다. 몸과 사랑, 욕망과 고통, 자연과 방랑은 그에게 하나의 지식이다. 사유가 경험을 해석할 언어를 준다면 경험은 사유가 추상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정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이 있고, 경험만으로 의미를 얻기 어려운 순간도 있다.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의 미숙한 형태로 간주하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의 절반은 쉽게 누락된다.

이미선은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나타나는 에로스」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자신에게 없는 것을 향한 끌림이라는 플라톤적 에로스와 연결한다. 서로의 차이는 결핍이면서 동시에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이때 헤세가 그리는 조화는 두 극단을 희석하여 안전한 가운데를 선택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나르치스는 정신의 사람으로, 골드문트는 감각의 사람으로 자신의 성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방식의 삶에도 고유한 진실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존이란 서로의 차이를 좁혀 같은 곳에 도착하는 것보다, 그 차이를 보존한 채 상대의 삶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이를 얻는 일에 있다.

골드문트가 사랑한 감각의 세계에는 아름다움과 소멸이 나란히 존재한다. 생을 깊이 경험할수록 그는 모든 아름다운 것이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젊음은 늙고 육체는 쇠하며 사랑하는 존재는 사라진다. 아름다움은 지속되는 성질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라질 운명을 품고 있기에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욱 절실해지고, 소유할 수 없는 순간이기에 더욱 선명하게 감각된다. 생을 향한 골드문트의 열정과 죽음에 대한 감수성이 서로 맞닿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삶을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삶을 잃을 가능성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그의 삶을 따라 반복되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이 생과 죽음의 감각을 한층 깊게 만든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한 사람의 기억이었던 어머니가 점차 여성과 자연, 관능과 탄생을 품는 원형적 존재로 확장되고, 그 안에는 죽음까지 들어온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힘과 그것을 다시 거두는 힘이 하나의 형상 안에 겹쳐지는 셈이다. 시작과 소멸이 하나의 순환 안에 놓일 때 어머니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찾아야 할 대상보다 인간이 태어나고 사랑하고 죽는 세계 전체의 형상이 된다. 골드문트가 평생 어머니를 향해 움직였다는 것은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동시에 유한한 존재로서의 운명을 알아가는 여정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무상성의 자각이 예술로 이어진다는 점은 작품에서 특히 아름답다. 예술의 충동에는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인간의 욕망이 숨어 있다. 시간은 육체를 변화시키고 기억을 흐리게 하지만, 예술은 한때 존재했던 생에 형태를 부여한다. 그래서 골드문트에게 조각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수단보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을 향해 시도하는 하나의 응답이 된다. 죽음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도, 사랑했던 것의 형상을 세계에 새기는 일은 가능하다. 여기에서 헤세는 정신과 감각을 예술 안에서 다시 만나게 한다. 골드문트가 빚어내는 형상에는 그가 몸으로 통과한 세계와 정신이 추구하는 질서가 함께 들어 있다. 관능과 성스러움, 육체와 영혼, 순간과 영원은 예술 안에서 서로를 훼손하지 않고 한 형태를 이룬다.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생의 온기가 나오기 어렵고, 형식을 얻지 못한 경험은 시간과 함께 흩어진다. 예술은 이 둘 사이에서 경험을 기억으로, 기억을 형상으로 바꾸는 장소가 된다. 골드문트가 단순한 장인의 안정에 자신을 맡길 수 없었던 이유 역시 예술을 기술의 완성보다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우정은 서로의 부족한 절반을 채워 하나의 완성된 인간을 만드는 관계로만 읽기에는 부족하다. 타자는 나에게 없는 것을 대신 소유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 더욱 정확하게 보게 하는 존재다. 자신과 다른 삶을 바라볼 때 자신의 선택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도 함께 드러난다. 젊은 날에는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의 본성을 먼저 알아보았다면,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골드문트가 살아낸 생이 나르치스에게 정신만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영역을 보여준다. 서로를 변화시키면서도 상대를 자기와 같은 인간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깊어진다. 평생 자신을 절제하며 살아온 나르치스에게 사랑은 사유만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고, 감각을 따라 살아온 골드문트에게 정신은 자신의 경험을 바라볼 또 하나의 시선이었다. 어느 삶도 홀로 인간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만남이 보여주는 것은 완벽한 합일보다 차이를 보존한 관계의 가능성이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언어 안에 완전히 편입시키는 일이 아니라, 나의 언어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까지 그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오래된 작품임에도 지금의 삶과 맞닿는 까닭은 인간 내부의 양극성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역시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경험하고 싶은 마음, 자신을 지키려는 질서와 그 바깥으로 향하려는 충동, 영원을 갈망하는 정신과 사라질 순간을 사랑하는 육체를 함께 지닌 채 살아간다. 그중 하나를 선택해 다른 하나를 지워내는 것으로 인간은 온전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힘이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은 채 한 생 안에서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자신과 다른 타자의 삶을 통해 미처 살아보지 못한 영역까지 인정하는 것. 헤세가 두 영혼의 긴 순례를 통해 그려낸 성숙은 그런 넓이를 획득해가는 과정에 놓여 있다.

✏️문예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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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워진 세계
아사쿠라 히로카게 지음, 이구름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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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도시에서는 엄청난 양의 물건이 사라진다. 쓰임을 다한 가구와 생활용품, 어제까지 누군가의 손에 있던 물건들이 봉투와 수거함에 담긴다. 그것들은 망가졌기 때문에 버려지기도 하지만, 멀쩡한 채로 폐기되기도 한다. 더 좋은 것이 생겼거나, 싫증이 났거나, 기억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사물의 생애를 끝내는 것은 대개 물건의 상태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판단이다.

청소회사 직원인 아사히는 매일 그렇게 거리로 나온 쓰레기를 수거한다. 타인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생활에서는 불필요한 것을 철저하게 밀어낸다. 그의 옆집에는 반대 방향으로 살아가는 도모에가 있다. 남들이 내놓은 물건을 다시 주워오고, 그렇게 모인 것들로 자신의 공간을 채운다. 비어 있는 방과 넘쳐나는 방.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벽 하나를 두고 소설은 인간이 세계를 견디는 상반된 방식을 마주 세운다.

버림에는 권력이 있다. 무엇이 아직 가치 있고 무엇이 이제 쓸모없는지를 결정하는 쪽은 대개 버리는 사람이다. 어제까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컵도 쓰레기봉투에 들어가는 순간 함부로 만지기 꺼려지는 것이 된다. 물건 자체에는 거의 아무 변화가 없는데도 이름과 대우가 달라진다. ‘쓰레기’라는 말에는 사물의 상태보다 그것을 둘러싼 관계의 종료가 먼저 새겨져 있는 셈이다. 『우리가 주워진 세계』가 쓰레기를 통해 바라보는 것도 이러한 가치의 유동성이다. 인간의 세계에도 비슷한 판단이 끊임없이 작동한다.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지에 따라 사람의 자리가 매겨진다. 쓸모라는 말이 사물에게 적용될 때에는 효율의 언어지만 인간에게 옮겨오는 순간 존재를 서열화하는 기준이 된다. 제 몫을 해내지 못한다는 감각이 반복되면 인간은 타인의 평가가 닿기도 전에 스스로를 먼저 폐기하려 든다.

도모에는 그 반대편에서 버려진 것들을 거두어들인다. 필요해서 버리는 것과 버리지 못해서 갖는 것 사이의 경계는 그녀의 방에서 흐려진다. 물건을 처분하는 데 지속적인 어려움을 느끼고, 실제 쓰임과 무관하게 보관해야 한다는 강한 필요 때문에 생활공간까지 물건으로 채워지는 모습은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저장장애의 특징과 겹쳐 읽을 수 있다. 저장은 소유의 즐거움보다 상실의 불안을 피하는 행위와 결속되기도 한다. 도모에의 방을 채운 사물들을 보고 있으면 그래서 양보다 관계를 먼저 헤아리게 된다. 사람은 무엇을 그렇게 많이 가진 것일까. 혹은 무엇을 잃지 않으려고 그토록 많은 것을 곁에 두는 것일까. 사물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억을 불러오는 데에는 익숙하다. 오래된 옷의 구김이나 낡은 그릇의 흠집에는 그것을 사용하던 시절이 함께 붙어 있다. 사물의 물질적 가치는 줄어들어도 그것과 연결된 시간까지 같은 속도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떤 물건을 버리는 일은 공간 몇 센티미터를 비우는 것보다 훨씬 큰 결단이 된다. 인간은 물건을 소유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시간을 그곳에 보관한다.

그렇다면 아사히의 비움은 자유로울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생활 역시 과도한 축적만큼이나 한 사람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다. 소유하지 않으면 잃을 일도 줄어들고, 애초에 들이지 않으면 떠나보내는 수고도 필요하지 않다. 도모에가 상실을 견디기 위해 물건을 남겨둔다면 아사히는 상실할 가능성 자체를 줄이는 쪽을 택한다. 한 사람은 사물로 빈자리를 메우고 다른 사람은 빈자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비움과 축적은 서로의 반대편에서 출발했지만, 삶이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두 사람의 공간을 대비시키는 소설의 방식도 그래서 인상적이다. 아사히와 도모에의 방은 배경에 그치지 않고 각자의 내면이 바깥으로 번역된 장소처럼 기능한다. 한쪽에서는 제거가 반복되고 다른 쪽에서는 축적이 반복된다. 그 사이에서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익숙한 구분도 흔들린다. 물건이 적은 방이 언제나 건강한 삶을 뜻하지는 않으며, 쌓여 있는 사물 역시 무질서라는 말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으로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다시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그러나 버려진 사물의 운명이 폐기에서만 멈추지는 않는다. 도모에의 손에 들어온 것들은 뜻밖의 형상을 얻으며 이전과 다른 맥락에 놓인다. 쓰임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지 않아도 존재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는 ‘다시 쓸모 있는 것이 되어야 가치가 생긴다’는 조건조차 필요하지 않다. 효용을 되찾는 것보다 중요한 변화는 버려진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발생한다. 폐기물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표현의 재료가 되는 동안 사물은 같은 모습으로도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그 변화는 사람에게도 이어진다. 인간 역시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버려졌던 경험도, 스스로를 포기했던 순간도 없애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줍는다’는 행위는 원상복구보다 이후의 시간을 함께 만드는 일로 읽힌다. 바닥에 떨어지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대신, 떨어진 적이 있는 존재에게도 다음 자리가 있음을 몸으로 알려주는 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도 그와 닮았다. 타인의 상처를 완전히 이해하겠다는 마음에는 때로 상대의 삶을 자신의 언어 안에 넣으려는 욕망이 섞인다. 같은 고통을 겪었다 해도 각자가 통과한 시간은 같을 수 없다.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는 언제나 닿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 그럼에도 관계는 성립한다. 알 수 없는 부분을 남겨둔 채 옆에 있고, 상대가 다시 자신을 내던지는 순간 그를 폐기된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 것. 이해의 완성이 없어도 돌봄은 시작될 수 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주워준다는 약속에는 구원보다 동행의 의미가 짙다. 누군가의 손이 다른 사람의 삶 전체를 책임질 수는 없다. 대신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여기게 된 사람에게 당신의 시간이 여기서 폐기될 필요는 없다고 말해줄 수 있다. 한 번의 손길로 모든 것이 회복되는 기적보다, 또 버려지면 또 주워주겠다는 반복의 마음. 『우리가 주워진 세계』가 따뜻해지는 순간은 바로 그 끈질긴 반복 속에서 찾아온다.

버려진다는 것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일까. 이 소설을 지나고 나면 그 문장에서 ‘필요’라는 단어부터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인간의 가치는 누군가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유용하지 않은 순간에도 존재하고,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날에도 살아 있으며, 누군가의 선택에서 밀려난 뒤에도 다음 시간을 가진다. 세상이 우리를 필요와 불필요로 나누는 동안 사람은 서로에게 전혀 다른 기준을 건넬 수 있다.

버려진 것을 줍는 손은 그것이 여전히 쓸 만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그 존재를 버려진 자리에 혼자 두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손도 있다. 아사히와 도모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시간을 지나 조금씩 상대의 세계를 바라보는 동안, 소설의 ‘쓰레기’는 더는 폐기의 끝에만 놓여 있지 않는다. 버려진 자리에서도 관계는 시작될 수 있고, 한 번 잃어버린 존재도 이전과 다른 의미로 세계에 놓일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주워야 하는 까닭은 다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도 쓸모만으로 버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도서출판 해피북스투유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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