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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40
헤르만 헤세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26년 8월
평점 :
인간의 내면에는 서로 다른 방향을 원하는 힘이 함께 산다. 세계를 이해하고 질서 속에 놓으려는 정신이 있는가 하면, 몸으로 세계를 통과하며 사랑하고 경험하려는 생명이 있다. 하나는 영원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순간에 매혹된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이 오래된 대립에 두 사람의 이름을 부여한다. 정신과 사색의 삶을 살아가는 나르치스, 감각과 사랑과 예술을 좇는 골드문트. 두 사람은 서로 닮아가는 대신 각자의 방향을 깊숙이 살아가며, 자신에게 결여된 영역을 상대를 통해 알아간다.
골드문트의 출발에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가치와 기대를 물려받는다. 타인이 정해준 길을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기도 하고, 오래 반복된 명령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아를 찾아간다는 것은 새로운 무엇을 획득하는 일보다 이미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 가운데 무엇이 진정 자신의 것인지 식별하는 과정일 것이다. 골드문트의 방랑은 이런 의미에서 장소의 이동보다 존재의 이동으로 읽힌다. 정해진 삶의 바깥으로 걸어나간 그는 세계와 직접 접촉하면서 자신이라는 인간의 윤곽을 만들어간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차이는 서로 다른 앎의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나르치스가 사유와 분별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면 골드문트는 감각과 경험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인다. 몸과 사랑, 욕망과 고통, 자연과 방랑은 그에게 하나의 지식이다. 사유가 경험을 해석할 언어를 준다면 경험은 사유가 추상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정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이 있고, 경험만으로 의미를 얻기 어려운 순간도 있다.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의 미숙한 형태로 간주하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의 절반은 쉽게 누락된다.
이미선은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나타나는 에로스」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자신에게 없는 것을 향한 끌림이라는 플라톤적 에로스와 연결한다. 서로의 차이는 결핍이면서 동시에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이때 헤세가 그리는 조화는 두 극단을 희석하여 안전한 가운데를 선택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나르치스는 정신의 사람으로, 골드문트는 감각의 사람으로 자신의 성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방식의 삶에도 고유한 진실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존이란 서로의 차이를 좁혀 같은 곳에 도착하는 것보다, 그 차이를 보존한 채 상대의 삶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이를 얻는 일에 있다.
골드문트가 사랑한 감각의 세계에는 아름다움과 소멸이 나란히 존재한다. 생을 깊이 경험할수록 그는 모든 아름다운 것이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젊음은 늙고 육체는 쇠하며 사랑하는 존재는 사라진다. 아름다움은 지속되는 성질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라질 운명을 품고 있기에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욱 절실해지고, 소유할 수 없는 순간이기에 더욱 선명하게 감각된다. 생을 향한 골드문트의 열정과 죽음에 대한 감수성이 서로 맞닿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삶을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삶을 잃을 가능성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그의 삶을 따라 반복되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이 생과 죽음의 감각을 한층 깊게 만든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한 사람의 기억이었던 어머니가 점차 여성과 자연, 관능과 탄생을 품는 원형적 존재로 확장되고, 그 안에는 죽음까지 들어온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힘과 그것을 다시 거두는 힘이 하나의 형상 안에 겹쳐지는 셈이다. 시작과 소멸이 하나의 순환 안에 놓일 때 어머니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찾아야 할 대상보다 인간이 태어나고 사랑하고 죽는 세계 전체의 형상이 된다. 골드문트가 평생 어머니를 향해 움직였다는 것은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동시에 유한한 존재로서의 운명을 알아가는 여정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무상성의 자각이 예술로 이어진다는 점은 작품에서 특히 아름답다. 예술의 충동에는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인간의 욕망이 숨어 있다. 시간은 육체를 변화시키고 기억을 흐리게 하지만, 예술은 한때 존재했던 생에 형태를 부여한다. 그래서 골드문트에게 조각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수단보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을 향해 시도하는 하나의 응답이 된다. 죽음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도, 사랑했던 것의 형상을 세계에 새기는 일은 가능하다. 여기에서 헤세는 정신과 감각을 예술 안에서 다시 만나게 한다. 골드문트가 빚어내는 형상에는 그가 몸으로 통과한 세계와 정신이 추구하는 질서가 함께 들어 있다. 관능과 성스러움, 육체와 영혼, 순간과 영원은 예술 안에서 서로를 훼손하지 않고 한 형태를 이룬다.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생의 온기가 나오기 어렵고, 형식을 얻지 못한 경험은 시간과 함께 흩어진다. 예술은 이 둘 사이에서 경험을 기억으로, 기억을 형상으로 바꾸는 장소가 된다. 골드문트가 단순한 장인의 안정에 자신을 맡길 수 없었던 이유 역시 예술을 기술의 완성보다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우정은 서로의 부족한 절반을 채워 하나의 완성된 인간을 만드는 관계로만 읽기에는 부족하다. 타자는 나에게 없는 것을 대신 소유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 더욱 정확하게 보게 하는 존재다. 자신과 다른 삶을 바라볼 때 자신의 선택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도 함께 드러난다. 젊은 날에는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의 본성을 먼저 알아보았다면,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골드문트가 살아낸 생이 나르치스에게 정신만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영역을 보여준다. 서로를 변화시키면서도 상대를 자기와 같은 인간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깊어진다. 평생 자신을 절제하며 살아온 나르치스에게 사랑은 사유만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고, 감각을 따라 살아온 골드문트에게 정신은 자신의 경험을 바라볼 또 하나의 시선이었다. 어느 삶도 홀로 인간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만남이 보여주는 것은 완벽한 합일보다 차이를 보존한 관계의 가능성이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언어 안에 완전히 편입시키는 일이 아니라, 나의 언어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까지 그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오래된 작품임에도 지금의 삶과 맞닿는 까닭은 인간 내부의 양극성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역시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경험하고 싶은 마음, 자신을 지키려는 질서와 그 바깥으로 향하려는 충동, 영원을 갈망하는 정신과 사라질 순간을 사랑하는 육체를 함께 지닌 채 살아간다. 그중 하나를 선택해 다른 하나를 지워내는 것으로 인간은 온전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힘이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은 채 한 생 안에서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자신과 다른 타자의 삶을 통해 미처 살아보지 못한 영역까지 인정하는 것. 헤세가 두 영혼의 긴 순례를 통해 그려낸 성숙은 그런 넓이를 획득해가는 과정에 놓여 있다.
✏️문예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