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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볼딘 동물원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3
송섬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8월
평점 :
관계는 어느 순간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 인사를 나눈 날, 더는 연락하지 않게 된 날, 상대의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날. 이별에는 분명한 순간이 있는 듯하지만 함께한 시간이 삶에서 빠져나가는 시각까지 정할 수는 없다. 떠난 사람은 기억 속에서 몇 번이고 되돌아오고, 오래전의 관계는 이후에 맺는 관계에도 조금씩 스며든다. 헤어진 뒤에도 관계는 삶의 다른 곳으로 흘러가며 모습을 바꾼다.
『멜볼딘 동물원』의 수진과 연서는 멜볼딘여고에서 만나 가까워졌다가 헤어지고, 16년이 지나 우연히 재회한다. 그동안 각자 다른 삶을 살았지만 비슷한 농도의 불행을 지나온 두 사람은 오래 비워둔 시간을 메우듯 여러 곳을 함께 여행한다. 그러나 연서는 다시 수진의 곁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10년 뒤, 이번에는 연서의 딸 표은이 수진을 찾아온다. 한 사람의 부재가 두 사람에게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 수진이 다시 만난 연서와 표은이 잃어버린 연서는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되찾은 친구였던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떠나버린 엄마였다. 한 인간은 관계의 수만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그중 어느 하나만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진과 표은의 만남에는 연서를 기억한다는 공통점만큼이나 서로가 알지 못했던 연서를 마주해야 하는 낯섦이 있다. 상대의 기억을 통해 자신이 알던 사람의 바깥을 발견하는 일은 때로 그 사람을 다시 이해하는 과정이 된다.
이 소설이 이별을 다루는 방식도 그와 닮았다. 관계가 끝난 뒤 남는 것을 미련이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만 정리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은 그 사람을 바라보던 방식, 그 곁에서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 이후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마음에도 남아 있다. 관계는 지속되거나 단절되는 두 가지 상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헤어진 뒤에는 헤어진 사람끼리의 시간이 있다. 더는 함께하지 않으면서도 한때 함께했다는 사실을 품고 살아가는 시간들.
그런 의미에서 수진과 연서가 서로에게 쓰기로 한 ‘부치지 않는 편지’는 이 작품의 관계를 닮아 있다. 편지는 본래 누군가에게 가기 위해 쓰이지만, 두 사람은 처음부터 보내지 않기로 약속한다. 모두 한 번쯤 부치지 않을, 혹은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써본 적이 있지 않을까. 마음속으로든 편지지 위로든. 그 순간의 편지는 무엇을 위해 적히고 무엇을 위해 보내지지 않았던가.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말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답장이 도착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상대의 반응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과 뒤늦게 알아버린 감정, 관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문장으로 확인한다. 마음속에 있을 때 감정은 현재의 자신과 뒤섞여 있지만, 문장이 되는 순간 그것은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된다. 쓰는 사람은 과거의 자신에게서 조금 떨어져 그때의 마음을 읽고, 이미 지나간 관계에 현재의 언어로 다시 의미를 부여한다. 기억할 수밖에 없는 과거와 새롭게 살아야 하는 현재 사이에서 글쓰기는 두 시간을 이어주는 행위가 되는 셈이다. 편지는 상대에게 도착하지 않더라도 쓰는 사람에게 먼저 도착한다. 지나간 관계를 되살릴 수는 없어도 그 관계를 지나온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다시 읽어볼 수 있다.
그래서 『멜볼딘 동물원』에서 이별은 이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출발점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연서가 없는 자리에서 수진과 표은이 만나듯, 이미 끝난 관계는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후의 삶에 참여한다. 과거를 없애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받은 것까지 지닌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 새로운 사랑과 관계는 완전히 비어 있는 자리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통과한 채 서로에게 도착한다.
송섬은 이러한 관계의 시간을 장소에도 겹쳐놓는다. 멜볼딘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여러 여행지를 지나 동물원으로 향하고, 시간이 흐른 뒤 또 다른 관계가 다시 동물원을 찾아간다. 같은 종류의 장소를 찾아간다고 과거의 시간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곳을 찾는 사람도, 함께 걷는 사람도 달라져 있다. 장소는 지나간 시간을 복원하는 대신 무엇이 사라졌고 무엇이 남았는지를 함께 보여준다. 그래서 폐장한 동물원이라는 공간은 이 소설의 이별과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동물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동물들이 살았던 시간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빈 우리는 부재의 모습인 동시에 한때 누군가 그곳에 있었다는 흔적이 된다. 관계 역시 헤어졌다는 사실만으로 함께했던 시간이 삶에서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다만 이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어떤 관계는 다시 이어지고, 어떤 관계는 한쪽의 기억에서만 계속된다. 또 어떤 관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건너가 새로운 만남의 일부가 된다. 『멜볼딘 동물원』은 그 변화들을 바라보며 이별 이후에도 사람 사이에는 시간이 계속 흐른다는 사실을 그린다. 지나간 관계를 지우지도,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지도 않은 채 자신의 삶 안에 둘 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이다. 어쩌면 부치지 않는 편지도 그래서 필요한 것일 테다. 상대에게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했던 자신을 데리고 다음 삶으로 가기 위해서. 이별은 두 사람이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 순간에 시작되지만, 관계의 의미까지 그날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와 헤어진 뒤에도 우리는 그 관계에서 받은 것들을 지닌 채 또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삶에는 떠난 사람과 아직 곁에 있는 사람,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의 시간이 조금씩 겹쳐진다.
✏️도서출판 은행나무로부터 은행잎 4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