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판박이
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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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신분에는 신분증이 없다. 지구에서 태어났다는 기억도, 가족도, 직업도 그것을 완벽하게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인간임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은 채 인간으로 살아간다. 너무 당연해서 증거조차 필요 없었던 사실. 아베 고보는 바로 그런 것들을 골라 의심의 대상으로 만든다.

『인간 판박이』에서 세계를 뒤엎는 데 필요한 것은 화성인의 출연조차 아니다. “나는 화성인입니다.” 한 남자가 그렇게 말하면 된다. 라디오 프로그램 「안녕하세요 화성인」의 각본가인 ‘나’에게 그 말은 처음부터 판정의 대상이다. 사실인가 망상인가, 인간인가 화성인인가. 판정하는 쪽과 판정받는 쪽의 위치도 명확하다. 그러나 다나카 이치로는 자신의 정체를 입증하는 대신 화자에게 증명을 요구한다. 당신은 무슨 근거로 자신이 지구인이라고 믿습니까. 그 한 번의 반문으로 재판정되어야 할 존재는 화성인에서 인간으로 바뀐다.

여기서 아베 고보는 정체성을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춰진 어떤 진실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체성을 성립시키는 외부의 조건들을 차례로 노출한다. 출생과 기억, 이름과 직업, 가족과 소속. ‘나’를 설명하기 위해 꺼내놓는 것들은 정작 나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이 거의 없다. 사회가 승인하고 타인이 확인해준 표지들을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며 살아왔을 뿐이다. 존재한다는 감각과 자신이 누구라는 확신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간격이 있다.

그래서 다나카의 궤변은 우스우면서도 위험하다. 자신을 화성인이라고 믿는 지구인 미치광이와, 자신을 화성인이라고 믿는 지구인 미치광이라고 믿는 화성인. 문장은 꼬리를 물고 증식하고, 정상과 광기 사이에 세워놓았던 구분은 언어의 반복 속에서 효력을 잃는다. 이 소설의 미로에는 복잡한 통로나 막다른 골목이 없다. 문장 하나가 다음 문장을 낳고, 논리가 논리를 복제하면서 출구를 없앤다. 아베 고보는 사람을 방에 가두는 대신 사고의 형식 안에 가둔다.

토폴로지는 이 기묘한 언어의 미로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한다. 형태가 달라도 관계와 구조가 보존된다면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는 발상이 인간과 화성인의 구별에 침투하면서 ‘고유함’이라는 말의 기반을 건드린다. 화성인이 인간과 완전히 같다면 무엇으로 화성인을 화성인이라 부를 것인가. 반대로 인간에게만 속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성질은 무엇인가. 이때 제목의 ‘판박이’는 더욱 짓궂어진다. 판박이에는 언제나 먼저 존재하는 원본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과 화성인이 서로를 닮고 어느 쪽에서도 원본의 자격을 찾아낼 수 없다면, 복제되었다고 말할 대상 역시 사라진다. 제목은 인간을 기준으로 화성인을 명명하는 듯하다가 어느새 그 기준 자체를 빼앗는다. 누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 수 없게 된 자리에는 ‘인간’이라는 명칭만 덩그러니 남는다.

이러한 역전은 실화와 우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구인은 실화이고 화성인은 우화라는 구분은 화자가 세계를 이해하는 최초의 문법이다. 다나카는 자신의 우화를 실화로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화자의 실화가 왜 실화인지 따져 묻는다. 이것이 『인간 판박이』의 영리한 방식이다. 거짓을 진실처럼 꾸미는 대신 진실이 누리던 특권을 박탈하는 것. 현실은 하나뿐인 단단한 실체에서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가장 익숙해서 채택된 형태로 내려온다.

아베 고보에게 SF가 필요했던 까닭도 여기에서 읽힌다. 『인간 판박이』에는 우주의 장관도, 외계 문명의 세밀한 묘사도 없다. 오히려 무대는 놀라울 만큼 좁다. 규격화된 단지의 방 몇 개와 두 사람의 대화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좁은 방 안에서 지구 전체의 현실성이 위태로워진다. SF의 규모를 공간으로 측정한다면 작은 소설이지만, 하나의 가설이 침범할 수 있는 현실의 범위로 측정하면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커진다. “저 남자가 정말 화성인이라면.” 아베 고보에게 필요한 SF적 장치는 사실 이것 하나뿐이다. 불가능한 가설을 일상의 한가운데 놓은 뒤 주변의 조건은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익숙한 세계가 그대로 유지될수록 가설의 이물감은 선명해지고, 그것을 제거하려는 논리가 오히려 일상의 토대를 파헤친다. 화성은 멀리 떨어진 행성이면서 현실을 낯설게 보기 위해 마련된 관측 위치가 된다. 우주로 나가지 않고도 지구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아베 고보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감각과도 맞닿는다. 『타인의 얼굴』의 가면, 『모래의 여자』의 구덩이와 모래, 『불타버린 지도』의 도시와 지도. 그의 소설에는 익숙한 세계를 낯선 장소로 변환하는 강력한 장치가 놓여 있다. 장치는 대개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환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일상적인 사물과 공간이다. 『인간 판박이』에서는 그 자리를 언어가 차지한다. 이전 작품의 인물들이 얼굴과 모래와 도시에서 길을 잃었다면, 이곳의 화자는 말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잃는다. 그래서 아베 고보의 문체에는 설명하면서 동시에 설명을 의심하게 만드는 묘한 운동성이 있다. 과학 용어와 궤변, 농담과 진지한 논증이 같은 문장 안에서 뒤섞이고, 독자는 어디까지 웃어야 하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다나카의 말은 황당해서 웃기다가 지나치게 정교해서 섬뜩해진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밀어내려는 순간, ‘말이 안 된다’고 판정했던 기준부터 해명해야 한다. 화자와 함께 논리를 따라가는 동안 독자 역시 어느새 다나카가 만든 규칙으로 사고한다.

소설을 에워싼 단지 역시 이 기묘한 ‘판박이’의 논리를 공간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같은 규격으로 복제된 집들이 이어지지만 그 안의 삶은 벽 너머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닮은 외부와 알 수 없는 내부가 한 공간에 공존한다. 여기서는 비슷하다는 사실도, 다르다는 사실도 타인을 이해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화성인과 인간을 구분하려던 화자의 곤경은 가장 가까운 이웃조차 그가 누구인지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인간의 오래된 곤경과 이어진다.

이때 ‘판박이’의 문제는 개인의 정체성에서 공동체의 문법으로 범위를 넓힌다. 인간은 언어와 문화, 고향과 민족을 통해 자신이 속한 자리를 확인하고 그 이름들로 ‘우리’를 만든다. 그러나 닮음과 차이가 존재의 본질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소설의 논리를 여기까지 밀어붙이면,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기준 역시 절대적인 자격을 잃는다. 냉전과 핵전쟁의 공포가 현실이던 1960년대에 지구인과 화성인의 고유성을 지워가는 이야기가 쓰였다는 사실은 이 사유에 역사적인 무게를 더한다. 차이를 고유한 본질로 고정하고 다시 우열의 근거로 바꾸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만든 범주에 갇힌다. 화성인과 지구인을 닮게 만든 아베 고보의 상상력은 타자를 하나의 모습으로 환원하기보다, 우리가 차이를 사용하는 방식 자체를 의심하는 쪽으로 향한다.

아베 고보의 문학에서 고향과 소속을 잃은 인간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도 그래서 눈여겨볼 만하다. 그의 인물들은 자신을 설명하던 좌표를 상실하면서 고독해지지만, 역설적으로 그 순간 사회가 개인에게 얼마나 많은 이름을 붙여왔는지도 드러낸다. 『인간 판박이』의 화자는 인간이라는 가장 넓고 견고해 보이는 소속마저 의심받는다. 자신을 보호하던 마지막 범주가 심문의 대상이 된 셈이다.

다나카가 정말 화성인이었는지는 그래서 점점 덜 중요해진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면 인간과 화성인을 가르던 선도 다시 그을 수 있다. 세계는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화는 안전하게 허구의 자리로 밀려날 것이다. 아베 고보는 그 판정을 유예한 채 화성인을 향하던 시선을 인간 쪽으로 돌린다. 소설의 처음에는 한 명의 수상한 남자가 심문대에 서 있었다. 마지막에 이르면 그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그곳에는 자신이 인간임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사람이 서 있다.

『인간 판박이』는 화성을 보여주지 않고 지구를 낯설게 만든다. 인간과 닮은 외계인을 상상한 뒤 외계인의 차이를 찾는 대신 인간만의 차이를 찾아보라고 요구한다. 그 요구 앞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예상보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아베 고보가 뚫어놓은 작은 구멍 너머에는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는 대신, 같은 세계가 전혀 다른 논리로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낯선 존재는 화성인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한 번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인간이다.

✏️도서출판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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