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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워진 세계
아사쿠라 히로카게 지음, 이구름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9월
평점 :
매일 도시에서는 엄청난 양의 물건이 사라진다. 쓰임을 다한 가구와 생활용품, 어제까지 누군가의 손에 있던 물건들이 봉투와 수거함에 담긴다. 그것들은 망가졌기 때문에 버려지기도 하지만, 멀쩡한 채로 폐기되기도 한다. 더 좋은 것이 생겼거나, 싫증이 났거나, 기억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사물의 생애를 끝내는 것은 대개 물건의 상태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판단이다.
청소회사 직원인 아사히는 매일 그렇게 거리로 나온 쓰레기를 수거한다. 타인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생활에서는 불필요한 것을 철저하게 밀어낸다. 그의 옆집에는 반대 방향으로 살아가는 도모에가 있다. 남들이 내놓은 물건을 다시 주워오고, 그렇게 모인 것들로 자신의 공간을 채운다. 비어 있는 방과 넘쳐나는 방.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벽 하나를 두고 소설은 인간이 세계를 견디는 상반된 방식을 마주 세운다.
버림에는 권력이 있다. 무엇이 아직 가치 있고 무엇이 이제 쓸모없는지를 결정하는 쪽은 대개 버리는 사람이다. 어제까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컵도 쓰레기봉투에 들어가는 순간 함부로 만지기 꺼려지는 것이 된다. 물건 자체에는 거의 아무 변화가 없는데도 이름과 대우가 달라진다. ‘쓰레기’라는 말에는 사물의 상태보다 그것을 둘러싼 관계의 종료가 먼저 새겨져 있는 셈이다. 『우리가 주워진 세계』가 쓰레기를 통해 바라보는 것도 이러한 가치의 유동성이다. 인간의 세계에도 비슷한 판단이 끊임없이 작동한다.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지에 따라 사람의 자리가 매겨진다. 쓸모라는 말이 사물에게 적용될 때에는 효율의 언어지만 인간에게 옮겨오는 순간 존재를 서열화하는 기준이 된다. 제 몫을 해내지 못한다는 감각이 반복되면 인간은 타인의 평가가 닿기도 전에 스스로를 먼저 폐기하려 든다.
도모에는 그 반대편에서 버려진 것들을 거두어들인다. 필요해서 버리는 것과 버리지 못해서 갖는 것 사이의 경계는 그녀의 방에서 흐려진다. 물건을 처분하는 데 지속적인 어려움을 느끼고, 실제 쓰임과 무관하게 보관해야 한다는 강한 필요 때문에 생활공간까지 물건으로 채워지는 모습은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저장장애의 특징과 겹쳐 읽을 수 있다. 저장은 소유의 즐거움보다 상실의 불안을 피하는 행위와 결속되기도 한다. 도모에의 방을 채운 사물들을 보고 있으면 그래서 양보다 관계를 먼저 헤아리게 된다. 사람은 무엇을 그렇게 많이 가진 것일까. 혹은 무엇을 잃지 않으려고 그토록 많은 것을 곁에 두는 것일까. 사물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억을 불러오는 데에는 익숙하다. 오래된 옷의 구김이나 낡은 그릇의 흠집에는 그것을 사용하던 시절이 함께 붙어 있다. 사물의 물질적 가치는 줄어들어도 그것과 연결된 시간까지 같은 속도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떤 물건을 버리는 일은 공간 몇 센티미터를 비우는 것보다 훨씬 큰 결단이 된다. 인간은 물건을 소유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시간을 그곳에 보관한다.
그렇다면 아사히의 비움은 자유로울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생활 역시 과도한 축적만큼이나 한 사람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다. 소유하지 않으면 잃을 일도 줄어들고, 애초에 들이지 않으면 떠나보내는 수고도 필요하지 않다. 도모에가 상실을 견디기 위해 물건을 남겨둔다면 아사히는 상실할 가능성 자체를 줄이는 쪽을 택한다. 한 사람은 사물로 빈자리를 메우고 다른 사람은 빈자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비움과 축적은 서로의 반대편에서 출발했지만, 삶이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두 사람의 공간을 대비시키는 소설의 방식도 그래서 인상적이다. 아사히와 도모에의 방은 배경에 그치지 않고 각자의 내면이 바깥으로 번역된 장소처럼 기능한다. 한쪽에서는 제거가 반복되고 다른 쪽에서는 축적이 반복된다. 그 사이에서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익숙한 구분도 흔들린다. 물건이 적은 방이 언제나 건강한 삶을 뜻하지는 않으며, 쌓여 있는 사물 역시 무질서라는 말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으로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다시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그러나 버려진 사물의 운명이 폐기에서만 멈추지는 않는다. 도모에의 손에 들어온 것들은 뜻밖의 형상을 얻으며 이전과 다른 맥락에 놓인다. 쓰임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지 않아도 존재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는 ‘다시 쓸모 있는 것이 되어야 가치가 생긴다’는 조건조차 필요하지 않다. 효용을 되찾는 것보다 중요한 변화는 버려진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발생한다. 폐기물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표현의 재료가 되는 동안 사물은 같은 모습으로도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그 변화는 사람에게도 이어진다. 인간 역시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버려졌던 경험도, 스스로를 포기했던 순간도 없애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줍는다’는 행위는 원상복구보다 이후의 시간을 함께 만드는 일로 읽힌다. 바닥에 떨어지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대신, 떨어진 적이 있는 존재에게도 다음 자리가 있음을 몸으로 알려주는 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도 그와 닮았다. 타인의 상처를 완전히 이해하겠다는 마음에는 때로 상대의 삶을 자신의 언어 안에 넣으려는 욕망이 섞인다. 같은 고통을 겪었다 해도 각자가 통과한 시간은 같을 수 없다.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는 언제나 닿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 그럼에도 관계는 성립한다. 알 수 없는 부분을 남겨둔 채 옆에 있고, 상대가 다시 자신을 내던지는 순간 그를 폐기된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 것. 이해의 완성이 없어도 돌봄은 시작될 수 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주워준다는 약속에는 구원보다 동행의 의미가 짙다. 누군가의 손이 다른 사람의 삶 전체를 책임질 수는 없다. 대신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여기게 된 사람에게 당신의 시간이 여기서 폐기될 필요는 없다고 말해줄 수 있다. 한 번의 손길로 모든 것이 회복되는 기적보다, 또 버려지면 또 주워주겠다는 반복의 마음. 『우리가 주워진 세계』가 따뜻해지는 순간은 바로 그 끈질긴 반복 속에서 찾아온다.
버려진다는 것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일까. 이 소설을 지나고 나면 그 문장에서 ‘필요’라는 단어부터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인간의 가치는 누군가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유용하지 않은 순간에도 존재하고,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날에도 살아 있으며, 누군가의 선택에서 밀려난 뒤에도 다음 시간을 가진다. 세상이 우리를 필요와 불필요로 나누는 동안 사람은 서로에게 전혀 다른 기준을 건넬 수 있다.
버려진 것을 줍는 손은 그것이 여전히 쓸 만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그 존재를 버려진 자리에 혼자 두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손도 있다. 아사히와 도모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시간을 지나 조금씩 상대의 세계를 바라보는 동안, 소설의 ‘쓰레기’는 더는 폐기의 끝에만 놓여 있지 않는다. 버려진 자리에서도 관계는 시작될 수 있고, 한 번 잃어버린 존재도 이전과 다른 의미로 세계에 놓일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주워야 하는 까닭은 다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도 쓸모만으로 버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도서출판 해피북스투유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