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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들어 주는 벤치 - 열네 명의 할머니, 한 개의 벤치, 오십만 명을 살린 마음 치유의 혁명
딕슨 치반다 지음, 주민아 옮김 / 판미동 / 2026년 9월
평점 :
사람의 마음에 닿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거리가 필요할까. 너무 멀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너무 가까워 타인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덮어버려도 마음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을 들어 주는 벤치』에는 그 거리를 가늠하게 만드는 장소가 있다. 나무 아래 놓인 평범한 벤치. 마주 보기를 강요하지 않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같은 높이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듣는다. 열네 명의 할머니와 하나의 벤치에서 시작된 변화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갔다.
정신과 의사 딕슨 치반다가 그 거리의 의미를 절실하게 깨달은 계기는 스물다섯 살 에리카의 죽음이었다. 치료가 필요한 환자와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병원까지 가야 할 긴 길과 버스비가 놓여 있었다. 의학은 마음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나 그 지식이 에리카가 살아가는 자리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의료의 한계는 지식의 부족보다 접근할 수 없는 거리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치반다는 사람들이 진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치료가 그들의 일상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을 찾는다. 그렇게 정신건강 돌봄의 자리가 병원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벤치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일은 말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이를 ‘쿠부라 풍그와(kuvhura pfungwa)’, 마음을 여는 일이라 불렀다. 누군가 고통을 털어놓을 때 우리는 자주 해결책부터 찾곤 한다. 위로할 말을 고르고, 원인을 분석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쓸 만한 답을 꺼내 건넨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선의가 너무 빠르게 앞서가면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다시 작아진다. 경청에는 타인의 삶을 대신 해석하려는 욕망을 잠시 유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가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정해주지 않고, 미처 문장이 되지 못한 감정까지 자신의 속도로 꺼낼 수 있도록 기다리는 일. 그런 기다림 속에서 한 사람의 고통은 처리해야 할 문제가 아닌 누군가의 삶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삶에는 저마다의 언어가 있다. 쇼나어 ‘쿠풍기시사(kufungisisa)’,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은 이 책에서 특히 오래 바라보게 되는 말이다. 짐바브웨의 정신건강 연구에서 쿠풍기시사는 우울이나 불안이라는 하나의 진단 범주에 정확히 포개지지 않는다. 걱정과 절망, 사회적 어려움과 영적인 괴로움까지 여러 층위의 고통이 이 단어 안에서 함께 움직인다. 한 사람의 마음은 진단명보다 훨씬 많은 삶의 사정을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우울도 상실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부재의 감각으로, 가난 속에서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관계에서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고립의 감각으로 모습을 달리한다. 정신의학의 언어가 증상을 식별하고 치료의 길을 찾는다면, 삶의 언어는 그 증상이 누구의 어떤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를 들려준다. 벤치에서는 이 두 언어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은 채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말로 만난다.
그래서 우정 벤치를 단순히 ‘잘 들어주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읽기에는 그 안의 치료가 꽤 정교하다. 할머니들은 문제해결치료를 훈련받고 지속적인 감독 아래 상담을 진행한다. 임상 연구에서는 지역 보건인력이 제공하는 여섯 차례의 문제해결치료와 동료지원이 실제 정신건강 증상의 개선으로 이어지는지도 검증했다. 따뜻한 마음만으로 모든 고통을 치료할 수 있다는 낭만적인 믿음과는 결이 다르다. 이곳에서 의학적 전문성은 공동체의 경험과 만나 비로소 생활의 언어를 얻는다. 치반다는 할머니들에게 치료의 방법을 전하고, 할머니들은 그에게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배운 지식과 살아낸 지식이 한쪽을 지우지 않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이러한 방식은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치료’의 범위를 조금 더 넓게 바라보게 한다. 마음의 고통 가운데에는 상담 몇 번으로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난과 사별, 질병과 폭력의 경험을 말 몇 마디로 없앨 수는 없다. 벤치에서 이루어지는 문제해결 역시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정리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충분히 풀어놓고, 지금 손댈 수 있는 문제를 함께 찾아보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돕는다. 치유는 고통의 완전한 소멸만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 속에서 잃어버렸던 선택의 감각, 자기 삶에 다시 참여할 수 있다는 감각이 돌아오는 순간에도 회복은 시작된다.
그때 치료하는 사람과 치료받는 사람을 가르던 선도 조금 흐려진다. 벤치의 할머니들에게도 상실과 가난, 가족의 문제를 지나온 시간이 있다. 자신의 삶에서 취약함을 경험한 사람이 다른 취약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인간은 언제나 도움을 주는 쪽과 받는 쪽 가운데 하나로만 살아가지 않는다. 어느 날에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다른 날에는 누군가가 기댈 자리를 내어준다. 이 상호의존은 인간의 부족함을 증명하는 흔적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조건에 가깝다. 벤치의 구조는 이러한 관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둔 대면도,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자리도 없이 두 사람이 같은 높이에 나란히 앉는다. 서로의 상처를 없애줄 수 없는 두 사람이 잠시 같은 세계를 바라보는 것. 돌봄은 그 짧은 동행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에리카의 죽음은 마음의 고통을 다시 사회의 문제로 돌려놓는다. 정신질환을 오직 개인 내부의 문제로 읽을 때 병원까지의 거리와 버스비, 의료 인력의 부족과 빈곤은 치료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사회와 분리된 밀실에서 아프지 않는다. 살아가는 조건은 감정의 형태를 만들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환경은 회복의 가능성에도 영향을 준다. 세계보건기구가 우정 벤치를 지역사회 정신건강 체계의 한 모델로 주목하는 이유 역시 치료를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 가까이 옮겨놓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정신건강은 개인이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아픈 사람이 도움에 닿을 수 있도록 사회가 얼마나 가까운 자리를 마련해두었는가와도 연결된다.
치료와 일상의 거리를 좁히는 과정은 벤치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처음 붙였던 ‘정신건강 벤치’라는 이름에 사람들은 선뜻 다가오지 않았고, 할머니들은 이를 ‘우정 벤치’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진단과 치료를 연상시키던 자리는 그 이름을 바꾸면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는 일상의 공간으로 스며든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먼 곳을 찾아가는 대신, 이미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가까운 자리. 이름의 변화는 그렇게 정신건강 돌봄과 사람들의 삶 사이에 놓인 거리를 한 걸음 더 좁힌다.
에리카와 치반다 사이에는 너무 먼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를 건너지 못했던 기억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이제 수많은 사람 곁의 벤치로 이어진다. 그 위에서 할머니들이 건넨 것은 완벽한 해답보다 한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누군가 듣고 있다는 감각, 혼자 감당하던 고통을 잠시 함께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감각. 인간은 그런 관계 속에서 다시 자기 삶을 움직일 힘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쩌면 마음을 돌보는 사회의 모습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고통을 해결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만의 자리가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잠시 자신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자리. 나무 아래의 작은 벤치는 그 가능성을 가장 소박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누군가 자신의 가장 아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그의 말을 바꾸거나 재촉하지 않고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앉는 것. 한 사람의 마음으로 향하는 길은 그렇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거리에서 시작된다.
✏️도서출판 판미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