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성
구소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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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믿는 일은 생각보다 위태롭다.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믿을 수 있고, 아무도 믿지 않는 곳에서 혼자 믿음을 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일까, 진심일까, 혹은 그것을 믿고 살아낸 시간일까. 구소현의 『환호성』은 이 불안정한 믿음의 지형 위에 세워진 소설집이다.

『환호성』에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유령과 최면, 사이비 종교와 폐쇄된 방,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지구 같은 비현실적인 장치들이 등장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소설집에서 비현실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현실의 작동 원리를 과장해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령, 삶의 시간을 건너뛰게 하는 최면, 이미 무너진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종말은 모두 지금의 현실이 품고 있는 어떤 감각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너무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만큼 쉽게 잊히고 버려지는 세계. 현실이 충분히 기묘하기에 소설은 현실보다 더 기묘한 장치를 빌려 현실을 보여준다.

그 세계에서 믿음은 삶을 지탱하는 사적인 질서가 된다. 믿을 만한 근거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한 작은 세계를 만든다. 한 사람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방 한 칸일 수도 있으며, 종교나 신념처럼 거대한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크기가 아니라 바깥의 불확실성을 견디기 위해 내부에 확실성을 구축한다는 사실이다. 구소현의 인물들에게 이러한 확실성은 자주 고립의 형태를 취한다. 외부의 판단과 규범에서 자신을 떼어내고 자기만의 감각과 논리를 보존하려는 행위. 그래서 고립은 자기보존의 기술인 동시에 자기폐쇄의 기술이 된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자리는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장소가 되지만, 바깥을 차단한 세계는 타인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거나 지워버릴 가능성까지 품는다. 고립이 깊어질수록 세계는 작아지고, 세계가 작아질수록 그 안에서 통용되는 믿음은 강해진다.

여기서 『환호성』의 ‘진짜’와 ‘가짜’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거짓임을 알면서도 믿을 수 있고, 가짜인 것을 진심으로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심은 사실 여부를 보증하지 않으며, 행위의 정당성도 보증하지 않는다. 사랑이 진심이라는 사실과 그 사랑이 타인에게 가한 결과는 별개의 문제다.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만든 세계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한다면, 그 세계의 진실성만으로 행위까지 정당해질 수는 없다. 이때 믿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윤리의 문제로 이동한다. 사적인 확신은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로 남을 수 있는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세계가 타인을 배제하기 시작할 때, 그 세계를 여전히 존엄의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작품은 이 순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이라는 익숙한 분류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상처 입은 사람의 선택이라고 해서 모두 정당한 것도 아니며, 비정상으로 분류된 감각이라고 해서 모두 거짓인 것도 아니다. 인간의 선택은 언제나 타인의 삶과 맞닿아 있고, 바로 그 접점에서 진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책임이 발생한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 ‘닿음’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화면을 통해 연결되는 세계에서 타인의 존재는 정보와 이미지의 형태로 가벼워진다. 손가락으로 넘길 수 있는 관계와 저장할 수 있는 기억, 빠르게 소비되고 폐기되는 이미지 속에서 인간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의 무게를 경험하지 못한다. 반대로 몸과 몸이 부딪히고, 목소리를 듣고, 한 사람의 속도에 맞춰 무언가를 읽는 순간에는 추상화된 타인이 다시 하나의 몸으로 돌아온다. 이 소설집에서 감각은 단순한 분위기의 장치가 아니다. 정보와 이미지로 납작해진 세계에 맞서 타인의 실재를 복원하는 방식이다. 믿음이 내면에 세계를 만드는 힘이라면, 닿음은 그 세계 바깥에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되돌려놓는 감각이다.

표제작에서 파도 소리는 박수 소리처럼 들린다. 실제로 누군가가 보내는 환호는 없는데도, 바깥의 소리를 마음속에서 박수로 번역할 수 있다. 파도는 계속 밀려오고, 우리는 그 소리를 제멋대로 해석한다. 박수라고 믿을 수도 있고, 경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아무 의미 없는 소음으로 흘려들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파도가 정말 박수였는지를 판별하는 일이 아니다. 세계가 보내는 신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능력, 그리고 그 의미가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왜곡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이중성이다. 누군가의 환호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그것을 환호로 받아들이는 순간, 세계는 잠시 다른 얼굴을 갖는다. 그 믿음은 구원이 될 수도 있고 착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환호성』에서 믿음은 진실의 반대편에 놓인 개념이 아니다. 믿음은 진실이 완전히 주어지지 않은 세계에서 인간이 삶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믿음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강한가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 믿음이 어떤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안에 누가 들어오며, 그 바깥에서 누가 밀려나는지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강한 믿음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확신이 단단해질수록 그것을 의심하고 수정할 능력은 약해질 수 있다. 『환호성』의 인물들은 독자가 쉽게 편을 고를 수 없는 자리에 놓인다. 각자의 세계 안에서 지나치게 일관된 인물들의 태도는 때로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밀어내는 폭력이 된다.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건네지는 간편한 해답 역시 이 경계 위에서는 힘을 잃는다. 누군가의 삶을 살게 하는 믿음과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믿음 사이에는 선명한 경계가 그어져 있지 않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보다 어려운 것은, 믿고 있는 자신을 어디까지 의심할 수 있는가를 견디는 일이다. 『환호성』은 그 불편한 자리에서 멈춘다.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 믿음과, 믿음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인간 사이. 그 사이에서 울리는 환호성은 세계가 인간에게 보내는 축하가 아니다. 아무도 박수를 보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박수,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바깥의 소리를 자기 안으로 번역해낸 소리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온전하지도 않다. 때로는 자신을 살게 하고, 때로는 타인을 다치게 하며, 때로는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붙잡게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의미 없는 파도 앞에서 계속 의미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환호성』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불온하고 필사적인 믿음의 형식이다.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믿어야 하지만, 그 믿음이 만든 세계까지도 의심해야 하는 인간.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박수라고 번역하면서도, 그 박수가 정말 자신을 향한 것인지 끝까지 확인할 수 없는 존재. 어쩌면 이 책의 환호성은 그런 인간이 세계를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보내는 가장 위태로운 생의 신호일 것이다.

✏️도서출판 문학과지성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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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현대지성 클래식 78
샬럿 브론테 지음, 공경희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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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대에는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 삶의 반경부터 정해졌다.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까지.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그 좁은 반경 안에 한 여자의 목소리를 세워놓는다. 고아라는 출신도, 가난도, 평범한 외모도, 가정교사라는 신분도 제인의 존재를 대신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제인이 끈질기게 지켜내는 것은 대단한 성공이 아닌 자기 삶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권이다.

19세기 영국의 여성에게 사회가 요구한 미덕은 순종과 정숙, 가정에 대한 헌신이었다. 교육받은 여성이라고 해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았고, 결혼은 사랑의 결실인 동시에 생존의 안전망이었다. 그런 시대에 제인이 가정교사라는 직업을 택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녀는 교육받았지만 상류층의 일원이 아니며, 노동하지만 하인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주인의 집에서 일하면서도 그 집의 가족은 될 수 없는 사람. 손필드의 제인은 정확히 그 어중간한 문턱에 서 있다. 이 위치는 제인의 불안정한 삶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녀의 시선을 만든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제인은 자신을 둘러싼 계급의 언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로체스터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그의 재산이나 지위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위치에 있는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제인은 자신의 영혼까지 그 차이에 맞춰 작게 만들지는 않는다. 제인의 자존심은 허영과 다르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가 사회적 서열로 환산될 수 없다는 감각이다.

그래서 제인은 유난히 자주 ‘아니오’라고 말한다. 게이츠헤드의 부당함에도, 로우드의 위선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에도, 종교적 의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결혼에도. 제인의 거절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타인이 정해준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방향이다. 이 거절들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내가 누구인지 결정할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것. 제인의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새로운 것을 얻는 순간보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순간들에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가장 원하는 것마저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자유는 비로소 추상적인 단어에서 삶의 태도로 바뀐다.

로체스터와의 사랑은 이 자아의 문제를 가장 뜨겁게 드러낸다. 그는 제인의 내면을 알아보는 사람이고, 제인은 그에게 깊이 끌린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 사이의 불평등 역시 선명해진다. 저택의 주인과 가정교사, 남성과 여성,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사랑은 이 차이를 잠시 잊게 할 수는 있지만 없애주지는 않는다. 제인은 그 사실을 감정의 열기에 묻어버리지 않는다. 로체스터의 제안을 거절하고 손필드를 떠나는 제인의 선택은 그래서 ‘사랑보다 자존심을 택한 장면’으로만 읽기 어렵다. 제인은 그를 사랑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떠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소유하거나 자신을 내어주는 순간 관계는 쉽게 지배와 종속으로 변한다. 제인이 지키려는 것은 사랑의 순수함보다 더 근본적인 것, 사랑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자기 자신의 자리다. 제인은 누군가의 사랑을 얻음으로써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소설에서 사랑이 유독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제인은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로체스터가 원하는 이상적인 여성이 되지도 않고, 세인트 존이 요구하는 신앙적 사명에 자신을 바치지도 않는다. 두 남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인을 자기 삶의 일부로 편입시키려 하지만, 제인은 그 어느 쪽에도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사랑과 의무의 방향은 달라도 그 끝에서 자기 자신을 잃는다면 결과는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제인 에어』의 결혼은 당시의 여성 서사와 묘한 긴장을 만든다. 제인은 결국 결혼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자유는 결국 결혼이라는 익숙한 제도로 돌아가기 위한 우회로였을까. 그렇게 읽기에는 결말에 이르는 제인의 조건이 지나치게 치밀하게 달라져 있다.

제인의 삶에서 돈은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아무리 단단해도 생계를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사람의 선택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 제인은 가정교사로 노동하고, 유산을 통해 경제적 독립을 얻는다. 이것은 단순한 서사의 보상이 아니다. 당시 여성에게 결혼은 경제적 안전을 확보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고, 경제적 의존은 곧 선택의 범위를 좁히는 일이었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삶, 동시에 누구도 자신의 삶에 의존하도록 만들지 않는 삶. 제인에게 돈은 사치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물질적 형태다. 제인은 결혼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여성이 되는 대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결혼을 선택할 수 있는 여성이 된다. 의존해야 해서 사랑하는 것과, 의존하지 않아도 사랑하기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관계다.

그래서 펀딘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비로소 관계의 무게중심이 달라진다. 한때 손필드의 모든 것을 소유했던 로체스터는 화재 이후 이전과 같은 남자가 아니다. 제인 역시 더 이상 그의 저택에 고용된 가정교사가 아니다. 재산과 노동, 판단을 자신의 것으로 가진 제인은 이제 그의 곁으로 돌아갈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여성의 독립이 결혼으로 회수되는 장면이라기보다, 독립을 획득한 여성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게 된 장면으로 읽을 때 훨씬 선명해진다. 사랑이 제인을 구원한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게 된 제인이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제인 에어』를 오늘날의 페미니즘과 완전히 포개어 읽을 수는 없다. 이 작품에는 분명한 시대의 그림자가 있다. 가장 어두운 곳에 버사 메이슨이 있다. 손필드의 다락방에 갇힌 버사는 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제인의 서사가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타인의 자리이기도 하다. 특히 버사의 자메이카 출신 배경과 식민주의적 맥락을 함께 놓으면 이야기는 단순한 여성 해방의 서사에서 벗어난다. 제인이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는 주체인 동시에, 자신이 속한 시대의 제국주의적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당대의 질서를 거부하면서도 그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의 자립을 꿈꾸면서도 결국 결혼과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이야기를 완성하고, 한 여성의 내면적 자유를 그려내면서도 또 다른 여성에게는 침묵과 격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작품의 가치를 지우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한계를 품은 채 그 경계를 조금씩 밀어내는 작품이기에 『제인 에어』는 오래된 고전의 자리에서 아직도 살아 움직인다.

결국 제인의 독립을 가능케 한 것은 성격의 강인함 하나만이 아니다. 자존심, 노동, 경제적 자립, 도덕적 판단, 사랑에 대한 욕망이 서로 얽혀 하나의 삶을 만든다. 정신만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낭만적인 믿음도,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냉정한 계산도 이 소설에는 없다.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면 내면의 의지와 그것을 지탱할 현실의 조건이 함께 필요하다. 제인은 특별한 영웅이 아니다. 가진 것도 많지 않고, 사회적 권력도 없으며, 아름다운 외모조차 자신의 무기로 삼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영혼만큼은 흥정하지 않는다. 19세기 영국의 좁은 세계에서 한 여성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급진적인 재산은 어쩌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일.

제인의 내면에서 울리던 작은 북소리는 결국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목소리가 된다. 세상이 정해준 자리에 머물지 않겠다는 목소리, 사랑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목소리, 혼자가 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목소리. 그 소리를 따라간 끝에서 제인은 사랑을 얻는다. 그러나 사랑이 그녀의 삶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사랑조차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인 에어』가 오래된 고전 가운데서도 유난히 생생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제인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끝까지 자기 삶의 문장을 직접 쓰는 여자의 이야기니까. 사랑은 그 문장의 마지막 단어가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온 사람이 스스로 골라 적은 한 문장일 뿐이다.

✏️도서출판 현대지성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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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안정 - '결혼'이 만드는 꿈과 불안, 그 너머 관계의 기하학
안희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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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부터 결혼이라는 이름을 필요로 하게 되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잠들고, 힘든 날 서로의 등을 내어주는 일에는 본래 결혼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랑은 결혼으로 향해야 온전해지고, 결혼에 이르러야 비로소 안정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안희제의 『사랑과 안정』은 결혼을 둘러싼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사랑과 안정이라는 두 단어를 얼마나 오랫동안 결혼이라는 하나의 제도 안에 포개어왔는지 보여준다. 사랑과 결혼, 가정과 안정 사이에 당연한 듯 놓여 있던 연결고리를 하나씩 풀어내면서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모양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결혼을 꿈꾸는 마음에는 낭만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섞여 있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주거,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생활비와 돌봄,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인간관계 속에서 결혼은 삶의 바닥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울타리처럼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지만, 그 사람이 나의 가족이고 나의 집이며 어려운 순간에도 책임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종류의 안도감을 준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쉽게 대체되는 시대일수록 오래 머무르겠다는 약속을 품은 관계에 마음이 기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버려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느 순간 하나가 되어, 결혼이라는 형태를 향하게 된다. 그래서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익숙한 방법이 된다.

하지만 안정이 결혼이라는 하나의 문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문밖에 서 있는 삶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으로 남게 된다. 좋은 직업을 얻고, 돈을 모으고, 집을 마련하고, 적절한 나이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삶. 우리는 이것을 평범한 삶이라고 부르지만 그 평범함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결혼할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관리하며, 남성에게는 경제적 능력과 책임감이, 여성에게는 외모와 나이, 출산과 돌봄의 가능성이 따라붙는다. 누구도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결혼하지 않는 삶을 불안해하고, 누구도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았는데 이미 정해진 생애의 순서를 따라가게 된다. 가장 단단한 규칙은 명령의 목소리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생각과 욕망인 것처럼 마음속에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그 문을 통과한 뒤에는 또 다른 이름들이 기다리고 있다.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 위에 사회가 오래도록 정해온 역할이 포개진다. 사랑은 때때로 그 역할들을 부드럽게 감싸는 언어가 된다. 사랑하니까 이해하고, 사랑하니까 양보하고, 사랑하니까 돌본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운 말 뒤에서 누군가의 희생이 당연한 몫으로 굳어진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오래된 사회의 관습은 사라지는 대신 사랑의 얼굴을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누군가는 가족을 책임질 경제력을 증명해야 하고,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경력을 조정해야 한다. 특히 여성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계산하게 만드는 사건이 된다. 사랑이 두 사람의 세계를 넓히는 힘이 되려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한 자원으로 소모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안정이라는 말의 자리를 조금 넓혀볼 수 있지 않을까. 안정은 정말 배우자 한 사람에게서만 얻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 곁을 내어주는 친구, 경제적으로 어려운 순간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관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해주는 사람, 아픈 날 말없이 찾아와주는 사람. 삶을 지탱하는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다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오랫동안 사랑과 돌봄과 책임과 주거와 경제적 연대를 한데 묶어온 탓에, 그 밖의 관계들은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을 뿐이다.

관계의 가치는 이름보다 그 안에서 서로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내 곁에 붙잡아두는 것이 사랑의 증명이 될 필요는 없다. 상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때로는 등을 내어주고, 필요할 때 다시 일어설 힘을 건네는 것 역시 사랑의 한 형태다. 돌봄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대신 살아주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삶을 살아갈 힘을 잃지 않도록 곁을 내어주는 일이라면, 돌봄은 희생의 다른 이름이 아닌 서로를 살아 있게 하는 관계의 방식이 된다. 좋은 관계 속에서는 한 사람의 세계가 다른 사람 때문에 작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에게 기대면서 각자의 세계가 조금 더 넓어진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독립을 이루는 일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관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안정』의 마지막에는 관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넓어진다.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던 사랑과 결혼과 가정과 안정 사이에 다른 길들이 생겨난다. 친구와 가족 사이에도 돌봄이 있고, 연인 사이에도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거리가 있으며, 이름 붙이기 어려운 관계 속에서도 서로의 삶을 견디게 하는 책임과 애정이 존재한다. 안정은 한 사람의 어깨에 모든 무게를 올려두는 대신 여러 관계 사이에서 서로의 무게를 나누어 갖는 일일 수 있다.

‘관계의 기하학’이라는 말은 그래서 이 책의 사유를 잘 보여준다. 삶은 하나의 직선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고, 또 다른 사람의 곁을 지켜주면서 수많은 선과 면을 만들어간다. 그 모든 관계가 반드시 같은 모양일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사람이 작아지지 않는 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 삶을 잃지 않는 일, 서로의 불안을 혼자 견디게 하지 않는 일이다.

사랑은 누군가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안정될 필요가 없다. 안정 역시 한 사람의 어깨 위에만 세워질 이유가 없다. 서로의 삶을 지탱하면서도 각자의 삶이 더 넓어질 수 있도록 곁을 내어주는 것. 어쩌면 우리가 오래도록 사랑이라고 부르며 찾아 헤맨 것은 그런 관계였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이름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 그리고 결혼이라는 이름 너머에서도 계속 살아가는 것. 『사랑과 안정』은 사랑과 안정 사이에 너무 오래 놓여 있던 하나의 등식을 천천히 풀어내며, 그 자리에 우리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수많은 관계의 형태를 그려낸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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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 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
수레카 데이비스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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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래전부터 괴물을 상상해왔다. 켄타우로스와 좀비,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 인간을 닮은 기계와 외계인까지. 시대가 달라질 때마다 괴물의 모습도 달라졌다. 그러나 이 존재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외형의 기괴함이나 공포의 정도가 아니다. 인간이 설정한 기존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점이다.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곳에서 괴물이 출현한다. 수레카 데이비스의 『괴물의 탄생』은 괴물의 역사를 통해 인간이 경계를 어떻게 설정해왔는지를 살핀다.

이 책에서 괴물은 기존의 분류 체계를 벗어나는 존재, 곧 ‘범주를 깨뜨리는 존재’다. 무엇이 괴물인가를 결정하려면 먼저 무엇이 정상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고대의 괴물 지도와 자연사에서 인종과 국가, 성별과 신체, 프릭쇼, 신과 마녀, 기계와 외계인으로 이동하는 구성은 경계 설정의 변화를 보여준다. 기존의 질서로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를 발견하면 인간은 먼저 그것을 분류하고 이름 붙인다. 따라서 괴물의 역사는 정상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정상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기준처럼 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변화하는 사회적 규범이다. 정상적인 몸이 정해지면 비정상적인 몸이 생기고, 인간의 범주가 정해지면 인간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존재가 생겨난다.

분류는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배제를 가능하게 한다. 문명과 야만, 정상과 비정상, 우리와 그들 같은 구분은 어느 순간 단순한 차이를 설명하는 언어를 넘어선다. 한쪽에 정상과 문명의 자리를 부여하면 다른 쪽에는 결핍과 위험, 열등함의 의미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한 단계 더 세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은 ‘징그러움’과 ‘혐오’다. 책에 수록된 과거의 괴물 삽화 가운데는 본능적으로 불쾌감이나 이질감을 일으키는 이미지가 있다. 낯선 신체의 비율, 과장된 얼굴, 인간과 동물의 특징이 뒤섞인 형상은 설명보다 먼저 감각적인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혐오 감정에 관한 진화심리학 연구에서는 불쾌감과 회피를 유발하는 감정이 병원체나 감염 위험을 피하기 위한 행동 면역체계와 관련된다고 설명한다.

다른 존재를 보고 이질감이나 징그러움을 느끼는 것과 그 존재를 혐오하는 것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감정은 자동적으로 발생할 수 있지만, 그 감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낯설다’는 판단이 ‘이상하다’로, 다시 ‘비정상이다’와 ‘위험하다’로 확장되는 과정에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기준이 개입한다. 감정이 사회적 판단으로 전환되는 순간 개인의 감각은 타인을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 특정한 몸이나 집단을 불결하고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는 언어가 반복될 때 혐오는 하나의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은 인간이라는 범주가 만들어내는 ‘부산물’이다. 인간은 자신을 동물과 구별하면서 인간을 정의하고, 문명인을 야만인과 구별하면서 문명의 의미를 정하며, 정상인을 비정상인과 구별하면서 정상의 위치를 확보한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그것의 외부를 함께 만들어낼 때 더욱 선명해진다. 괴물은 이 외부를 가시화하는 장치다.

이러한 구조는 과거의 신화와 자연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에는 미지의 땅과 낯선 신체, 종교적 상상력이 괴물의 주요한 배경이었다면 현대에는 유전공학과 인공지능, 로봇과 외계 생명체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은 다시 조정되어야 한다. 괴물의 역사가 계속되는 까닭은 인간이 여전히 경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괴물 미래주의’는 하나의 정상만을 기준으로 삼아 타자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재검토하는 대안이다. 서로 다른 몸과 정체성, 문화와 능력이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전제를 내려놓는다면 괴물이라는 범주의 필요성도 약해진다. 결국 『괴물의 탄생』은 괴물에 관한 책이면서 인간의 분류 체계에 관한 책이다. 괴물의 얼굴은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괴물을 만들어내는 분류의 방식은 반복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괴물의 목록이 아니라 인간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해온 기준을 검토하는 일이다. 인간의 범주를 더 넓게 설정할수록 괴물의 영역은 줄어든다. 당신의 마음속에 존재했던 괴물의 이름표를 떼어내 보자.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낯선 타자가 아닌 우리가 아직 부르는 법을 배우지 못한 또 하나의 존재다.

✏️현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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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리 숍앤센터
설재인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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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에서 버려진 기관들을 모아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면, 그 존재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인간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을 조합해 만들어진 생명체 ‘프랑’. 여덟 개의 팔과 네 개의 코, 겹눈처럼 인간의 신체 질서에서는 벗어난 형상을 지녔고 머릿속에는 뇌 대신 칩이 들어 있다. 인간의 몸에서 비롯되었으나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는 존재다. 설재인의 『셸리 숍앤센터』는 이 낯선 생명체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준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랑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의 욕망에 맞춰 형태가 결정되며,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된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존재이고 누군가에게는 소유할 수 있는 상품이며, 필요가 사라지는 순간 버려질 수도 있는 생명이다. 유기된 프랑들이 입양 혹은 죽음을 기다리는 ‘셸리 센터’라는 공간은 이 세계의 질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생명을 만들어내는 기술과 생명을 소비하는 욕망이 아무런 충돌 없이 한자리에 놓여 있는 곳이다. 살아 있는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소유가 되고, 사랑받을 가치와 버려질 가치까지 인간의 판단에 따라 나뉜다. 프랑의 기괴한 몸은 단순한 장르적 장치로만 머물지 않고, 그 몸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까지 함께 들여다보게 만든다.

바디 호러의 공포를 이루는 것도 결국 몸이다.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신체가 낯선 방식으로 해체되고 재조합되면서, 하나의 온전한 몸이라는 믿음은 무너진다. 팔과 다리, 장기와 감각기관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고유한 일부라는 생각도 흔들린다. 서로 다른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이 한 존재 안에 결합한다면 그 존재는 누구의 몸을 가진 것일까. 몸이 인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믿어왔다면, 프랑은 그 믿음에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것들로 이루어졌지만 인간이 아니며, 인간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 여기에서 바디 호러의 낯섦은 신체의 변형 자체보다 우리가 몸을 통해 존재를 판단해온 방식으로 옮겨간다.

그 질문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노엘이다. 프랑이면서 인간 여자아이와 똑같이 생긴 노엘에게 외형은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인간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소속을 보장하지 않고, 프랑이라는 사실 역시 다른 프랑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 결국 노엘에게 남는 것은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보다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몸의 모양, 기억과 감정, 자기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바라보는 의식. 인간을 구성한다고 믿어온 조건들을 하나씩 들여다볼수록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 어렵다. 인간이라는 분류가 생물학적 사실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면, 그 이름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이 인간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고, 그 생명의 형태와 쓰임을 정하며,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이름까지 붙인다. 프랑의 삶에는 처음부터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어떤 관계를 맺을지, 누구에게 사랑받을지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반려동물’이라는 말 역시 이 세계에서는 단순한 애정의 표현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진 생명이 상품으로 거래되고, 애정은 소유의 방식으로 나타나며, 버림받은 생명은 다시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로 보내진다.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힘과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는 언제나 함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과 생명을 소유하는 권리를 거의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프랑을 둘러싼 문제는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만날 때마다 이름을 붙이고 경계를 만든다. 정상과 비정상, 우리와 타인, 보호해야 할 생명과 이용할 수 있는 생명을 구분하면서 세계를 정리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 너무 익숙해지는 순간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판단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는 데 있다. 무엇이 정상인지 결정하는 순간 정상의 바깥에 놓이는 존재가 생기고, 누군가를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결정하는 순간 보호받지 못해도 되는 존재 역시 만들어진다. 노엘이 프랑들 사이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되는 모습은 이러한 질서가 인간과 프랑 사이의 경계에서만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간과 닮았다는 이유로 인간 행세를 한다는 비난을 받는 노엘에게도 ‘프랑다운 모습’이라는 또 다른 기준이 요구된다. 타자는 언제나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집단 안에서도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에게는 새로운 경계가 그어진다. 프랑의 몸을 기괴하다고 바라보는 시선도 그 질서 안에 놓인다. 낯선 몸을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끼는 감각보다, 그 불편함을 근거로 상대의 가치와 자격까지 판단해버리는 태도가 더 깊은 폭력을 품는다.

이 소설에서 ‘인간다움’은 생물학적인 분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인간의 몸을 가졌다는 사실이 인간다움의 충분조건이라면, 인간이 다른 생명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자의 고통을 인식하고, 다른 존재의 삶을 하나의 독립된 삶으로 인정하는 능력을 인간다움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지,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는 그다음의 문제가 된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다른 생명을 마음대로 규정하고 소유하는 존재와, 자신과 다른 존재의 고통을 알아보는 존재를 같은 기준으로 인간답다고 부를 수 있을까. 결국 인간다움은 몸 안에 고정된 어떤 본질이라기보다 타자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드러난다.

이 관점에서 프랑의 존재는 인간에게 하나의 거울이 된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을 이용해 프랑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과 용도를 부여했다. 인간이 프랑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바라보는 일은 곧 인간이 자신보다 약하고 낯선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대하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생명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함부로 다루지 않는 태도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다른 생명에게 이름을 붙여왔다. 그 이름에는 때로 사랑이 있었고, 동시에 소유와 지배도 함께 들어 있었다.

『셸리 숍앤센터』의 기괴함은 프랑의 외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생명을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사랑하고, 소유하고, 버리는 일. 너무도 익숙하게 반복되어 온 인간의 행동들이 프랑이라는 존재를 사이에 두고 다시 바라보일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폭력성이 드러난다. 인간에게 버려진 몸의 조각들이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 정작 낯설어진 것은 프랑의 몸이 아닌 인간의 태도다.

버려진 것은 신체의 일부다. 그러나 그 조각들로 만들어진 생명체를 바라보다 보면 인간이 함께 버려온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생명을 필요와 가치의 기준으로 나누는 습관, 자신에게 쓸모없는 존재를 쉽게 외면하는 태도, 세계의 중심에 자신을 놓아두는 오만까지. 인간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이 모여 프랑이라는 존재를 이루었다면, 인간이라는 이름을 이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설재인은 기괴한 신체를 빌려 이 오래된 물음을 낯선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인간처럼 생긴 존재가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오히려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들에게 그 이름의 자격을 묻게 된다. 『셸리 숍앤센터』는 인간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로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내고, 그 생명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인간 자신에게 돌려놓는다. 프랑이 인간인가를 묻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도서출판 나무옆의자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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