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히, 휩쓸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 흔들리는 시간을 지혜롭게 건너는 마음의 철학
나디 미리안 지음, 김지유 옮김 / 북파머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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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삶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을까. 예측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우리가 세워둔 질서는 무력해지고, 익숙했던 세계는 어느 날 낯선 모습으로 다가온다. 상실은 준비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며, 관계의 변화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온다. 그럼에도 인간은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여긴다. 감정을 능숙하게 다스리고, 불행을 신속하게 극복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이 성숙한 인간의 표본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삶의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없는 존재에게 완전한 평온을 요구하는 일은 얼마나 가혹한가. 인간의 취약함은 의지의 부족에서 발생하는 결함일까, 아니면 살아 있다는 사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조건일까.

독일의 심리치료사 나디 미리안은 『단단히, 휩쓸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에서 고통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그것을 규정하는 사회적 관습을 살핀다. 철학과 심리학, 예술과 실제 삶의 경험을 넘나드는 그의 논의는 고통을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로 끌어올린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은 끊임없는 욕망과 결핍의 운동 속에 놓인 존재였으며, 카뮈가 그려낸 시시포스는 완결되지 않는 노동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는 인간의 형상이었다. 서로 다른 사유의 출발점에는 인간이 세계의 모든 조건을 결정할 수 없다는 인식이 놓여 있다. 고통의 가능성이 사라진 삶을 상상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유한성마저 지워버리게 된다. 삶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일은 자신의 한계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데 유난히 인색하다. 슬픔에는 적당한 기간이 정해지고, 좌절에는 극복의 서사가 요구되며, 불안은 관리해야 할 심리적 문제로 분류된다. 누군가의 상실 앞에서 우리는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허락하기보다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저자가 비판하는 자기최적화의 문화 속에서 이러한 태도는 개인의 내면에까지 침투한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분석한 성과주체는 끊임없는 자기개선의 요구를 내면화한 인간이다. 이러한 성과의 논리가 감정의 영역에까지 확장되면서, 슬픔과 불안조차 관리하고 개선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된다. 행복은 추구해야 할 성과로, 회복은 증명해야 할 능력으로 변모한다. 자신의 슬픔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일이 발생하는 까닭이다. 고통을 겪는 시간마저 생산성과 효율의 척도로 평가받는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불행을 온전히 경험할 자유를 잃어간다.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목격하는 환경은 이러한 압박을 더욱 정교하게 만든다. SNS에 펼쳐진 타인의 성취와 행복은 개인의 삶을 측정하는 비공식적인 기준이 되고, 서로 다른 삶의 조건과 시간은 어느새 앞서거나 뒤처졌다는 평가의 기준으로 바뀐다. 누군가는 이미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데 자신은 여전히 지난 상실을 애도하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는 실패를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데 자신은 아직 두려움 속에 있다는 사실이 불안을 증폭시킨다. 사회적 비교의 문제는 단순한 열등감에서 그치지 않는다. 타인의 속도를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개인은 고유한 경험을 해석할 권한까지 외부에 맡기게 된다. 고통의 크기와 회복의 속도를 비교하는 행위에는 서로 다른 삶을 동일한 척도로 환산할 수 있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그러나 상실의 무게는 객관적인 순위로 측정할 수 없으며, 감정이 통과하는 시간에도 보편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가 다시 살펴보는 회복탄력성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회복탄력성은 흔히 역경을 겪은 뒤 빠르게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능력으로 이해되지만, 인간의 회복은 언제나 이전의 모습으로 복귀하는 과정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상실은 삶의 조건을 영구적으로 변화시키며,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회복은 그렇게 달라진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관계를 다시 조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저자가 강조하는 고통의 개별성은 여기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무게와 필요한 시간이 다르며, 회복의 방식 또한 각자의 경험과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슬픔을 충분히 경험하는 시간은 정체의 증거로 환산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필요한 도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회복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책의 띠지에 적힌 이 문장은 강인함의 의미를 다시 검토하게 한다. 우리는 흔히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감정에 동요하지 않는 사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사람을 강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 아래에서 인간은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에너지를 소모한다. 강인함을 고통에 대한 무감각으로 이해한다면, 가장 인간적인 감정들이 오히려 극복해야 할 약점으로 취급될 것이다.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기에 상처받고,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기기에 상실을 두려워한다. 취약함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신의 슬픔을 인정하고,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며,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삶을 이어가는 능력 또한 강인함의 중요한 형태다. 그 힘은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휩쓸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스토아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데 주목했다. 타인의 판단과 이미 발생한 사건은 개인의 의지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 속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행동을 선택할 것인지는 여전히 사유할 수 있다. 여기서 수용은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뜻하지 않는다. 바꿀 수 없는 사건을 인정하는 일과 부당한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자신의 중심을 지킨다는 것 역시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거나 관계에서 철수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타인의 평가를 듣되 그것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권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외부의 속도에 자극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필요한 시간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주체성은 세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려는 욕망을 내려놓을 때, 주어진 현실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으로 구체화된다.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는 ‘파테이 마토스(Pathei Mathos)’, 곧 고통을 통해 배운다는 사유는 상처가 반드시 성장을 가져오는가 하는 오래된 물음을 다시 불러온다. 인간은 상실을 경험하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감각을 획득하기도 한다. 예술이 개인의 고통을 표현과 소통의 형식으로 전환하는 과정 역시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배움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며, 상처를 경험한 사람에게 반드시 성장의 결과를 요구할 수도 없다. 고통을 통해 성숙해져야 한다는 명령은 행복을 증명해야 한다는 사회의 요구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은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을 수 있고, 어떤 상실은 뚜렷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 삶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 고통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 혹은 당장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자유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크기를 미리 알지 못한다. 평온한 시절에는 사소하게 여겼던 사건이 삶 전체를 뒤흔들기도 하고, 도저히 견딜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시간을 지나 다시 일상의 감각을 회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강인함은 미래의 불행을 대비해 미리 갖추어둘 수 있는 완성된 성질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삶이 예측을 벗어날 때마다 자신의 한계를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과 관계된다. 나디 미리안이 이야기하는 회복의 가능성 또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알 수 없는 시간을 살아갈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은 언제나 확신이나 용기의 형태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도 타인과 관계를 지속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또 다른 강인함을 발견한다. 삶은 그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그 약속 없이도 살아가는 법을 배워왔다.

✏️소정의 원고료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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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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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가 세상을 떠난 지 열 해가 흘렀다. 그동안 그의 문장은 조금도 늙지 않았고,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은 지금도 여전히 세월의 바깥에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더는 새로운 작품이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존재하는 문장들의 무게를 달리한다. 세 세대에 걸친 악의 역사를 좇는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작가의 부재와 인간의 계승이라는 두 개의 시간을 겹쳐 보이게 한다. 한 사람의 생애는 멈추었으나 그가 쓴 이야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삶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도착한 과거를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소설의 세계는 아홉 개의 지구로 분할되어 있다. 권력과 부가 집중된 1지구에서 버림받은 9지구까지, 숫자는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결정한다. 60년 전 발생한 12월의 폭동은 국가의 공식적인 역사 속에서 위험한 반란으로 기록되었고, 그 기억은 하위 지구 사람들을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질서 안에서 성장한 다윈 영은 명문학교의 모범생이자 고위 관료의 아들이다. 그가 속한 세계의 안정은 누군가의 배제와 침묵을 토대로 유지되지만, 그에게 주어진 일상에서는 그러한 조건을 의심할 이유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오래전 발생한 살인 사건이 친구 루미의 추적을 통해 그의 일상에 들어오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질서에도 의문의 여지가 생긴다. 오래전 살해당한 소년 제이 헌터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은 다윈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계급은 제도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감각과 판단을 길들인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처럼, 사회적 환경에서 습득한 가치와 행동 양식은 개인에게 자연스러운 성향으로 체화된다. 아비투스는 자신이 속한 계층의 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내면의 습관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은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신뢰하며 어떤 삶을 가능하다고 여길 것인지까지 규정한다. 상위 지구의 사람들에게 하위 지구의 삶은 이해해야 할 현실보다 경계해야 할 위험으로 인식된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도덕적 기준조차 출신과 지위에 따라 다른 무게를 갖는다. 이 사회에서 악은 특정 개인의 내면에 고립된 성질로 설명되기 어렵다.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하고 다른 누군가의 특권을 보호하는 구조가 인간의 선택을 지속적으로 압박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압박이 모든 행위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박지리는 사회적 조건과 개인의 책임이 서로를 침범하는 영역을 세밀하게 탐색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가족의 역사는 국가의 역사와 기묘하게 닮아 있다. 12월의 폭동을 기록한 사진과 삭제된 자료, 오랜 세월 반복되는 추도식은 모두 과거를 보존하거나 특정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와 연결된다. 기억은 사실을 저장하는 행위인 동시에 무엇을 드러내고 감출 것인지 결정하는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가가 불편한 역사를 공식적인 기록에서 밀어내듯, 가족 역시 현재의 안녕을 위해 과거의 일부를 봉인한다. 그러나 삭제된 기록은 사라진 사건과 동일하지 않다. 침묵 속에서 유지된 비밀은 후손의 삶에 새로운 의무를 부과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까지 과거의 이해관계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때 혈연은 사랑과 보호의 관계를 넘어, 미처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전달되는 통로가 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은 가장 강력한 보호의 명분을 얻는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애착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강렬한 유대 가운데 하나지만, 그 감정의 깊이가 언제나 윤리적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이유가 되는 순간, 선의 언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질된다.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이자 도덕철학자인 아이리스 머독은 도덕적 삶에서 자신의 욕망과 환상을 넘어 타인의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머독에게 도덕적 성찰은 행동을 결정하는 순간에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기중심적인 환상을 걷어내고, 그 사람의 독립적인 삶을 인정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윤리적 실천에 속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소설 속 가족애의 비극은 사랑의 결핍보다 그 시야의 편협함에서 발생한다. 가족을 지킨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타인의 고통은 감수해야 할 대가로 계산된다. 그렇게 인간은 사랑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으며, 타인의 삶을 침범할 권리까지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다윈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모순이 한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보여준다. 그는 처음부터 악의를 품고 살아온 소년이 아니다. 성실함과 공정함을 자신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존경하는 아버지의 삶에서 도덕적 모범을 발견한다. 그러나 자신이 신뢰했던 질서의 이면을 알게 되면서 그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한다. 진실을 아는 일과 그 진실에 따라 행동하는 일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인간은 무엇이 옳은지 이해하면서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상실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다윈의 선량함은 그가 지키고 싶은 세계와 충돌하는 순간 시험대에 오른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온 원칙을 스스로 유예하는 동안, 악은 낯선 충동보다 익숙한 애착의 언어를 통해 그의 내면에 자리를 얻는다.


이러한 전개는 성장소설의 익숙한 서사적 관습을 뒤집는다. 통상 성장의 과정에서 세계의 모순을 발견하는 경험은 자아의 확장과 윤리적 성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박지리의 세계에서 앎은 성숙을 보증하지 않는다. 김현정(2022)은 「박지리 청소년 소설에 나타난 ‘악’의 양상 연구」에서 세 세대에 걸친 악의 진화와 속죄의식의 부재를 분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성장이라는 말에 내재한 낙관을 걷어내고,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어떻게 악의 계보에 편입되는지 살펴보게 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을 빌리자면 인간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다.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따를 가치와 삶의 방향을 구체화한다. 다윈 역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가족의 역사와 계급적 환경 속에서 태어났지만, 그 사실만으로 자신의 행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도덕적 한계와 마주하며, 그 한계를 넘어서거나 그 안에 자신을 가두는 선택을 거듭한다. 박지리는 성숙의 가능성과 타락의 가능성이 동일한 인간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가혹할 만큼 정교하게 드러낸다.

세 세대의 역사를 연결하는 후드는 작품의 이러한 사유를 응축한 사물이다. 처음에는 저항과 연대의 의미를 지녔던 물건이 시간이 흐르며 전혀 다른 목적에 동원된다. 하나의 사물이 역사적 맥락에 따라 의미를 바꾸듯, 악 역시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얻으며 자신의 존재를 지속한다. 여기서 제목의 ‘다윈’은 특별한 울림을 갖는다. 진화론을 정립한 찰스 다윈의 이름은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변화와 적응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환기하는 것처럼 읽힌다. 생물학적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환경에 따른 형질의 변화와 선택이며, 그 과정에는 인간이 기대하는 도덕적 진보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소설은 이러한 진화의 개념을 악의 역사에 빗대어, 시대마다 다른 명분을 획득하는 폭력의 생존 방식을 드러낸다. 선대의 선택이 만들어낸 조건을 후대가 물려받고, 그 조건 속에서 다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역사적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반복되는 폭력의 형식은 닮아 있지만, 각자의 선택에 부여되는 책임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박지리는 이러한 사유를 거대한 관념의 설명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사진과 녹음기, 오래된 의복과 기록물처럼 구체적인 사물에 과거의 흔적을 새겨 넣고, 미스터리의 추적 과정에 사회의 역사와 가족의 비밀을 겹쳐 놓는다. 독자는 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믿어온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재검토하게 된다. 피해자의 삶에도 폭력의 흔적이 있고, 가해자의 내면에도 사랑과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러한 복합성은 범죄의 책임을 흐리는 장치로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가 얼마나 다양한 감정과 이해관계 속에서 발생하는지 드러냄으로써 책임의 문제를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856쪽에 이르는 분량은 수많은 인물의 삶을 하나의 윤리적 문제로 수렴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으로 기능한다.

우리는 왜 지금도 박지리의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 그의 소설에서 인간은 자신의 도덕을 배반하면서도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 믿을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사랑은 잔혹함과 공존하고, 정의에 대한 확신은 이해관계에 따라 손쉽게 방향을 바꾼다. 박지리는 이러한 모순을 인물의 성격적 결함으로 축소하지 않고, 그들이 속한 사회와 관계의 역사 속에서 치밀하게 길어 올린다.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은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에 관한 단순한 판정 이상의 것이 아닐까. 그의 인물들은 자신의 잘못을 설명할 언어를 너무도 능숙하게 찾아낸다. 생존과 보호, 사랑과 책임이라는 익숙한 가치들이 폭력의 명분으로 동원되고, 그럴듯한 이유를 획득한 잔혹함은 평범한 일상의 일부가 된다. 인물들은 저마다 구축한 논리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독자는 그 논리들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인간의 복잡성을 경험한다. 박지리는 독자가 누군가를 쉽게 단죄할 수 있도록 인물들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는 일이 죄의 무게를 덜어주도록 허락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 냉정한 거리에서 그의 문학은 인간을 향한 예리한 통찰을 획득한다. 선량한 사람에게도 잔혹함의 가능성이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의지가 타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 박지리의 문학은 독자를 인간의 가장 익숙한 표정 아래 감춰진 잔혹함의 기원으로 데려간다.

✏️도서출판 사계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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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살인, 본격 미스터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가타오카 쇼 지음, 김예진 옮김 / 리드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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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첫머리에 놓인 저택의 평면도에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기척이 서려 있다. 복도와 계단의 위치, 서로 맞닿은 방의 구조, 출입구와 창문의 개수까지. 건축가에게는 생활을 위한 설계일 공간이 독자에게는 의심의 좌표로 읽힌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관계를 정리한 목록 역시 마찬가지다. 몇 줄의 소개만으로 사람들은 잠재적인 용의자가 되고, 사소한 특징 하나에도 훗날의 범행을 설명할 가능성이 부여된다. 본격 미스터리를 오래 읽어 온 독자라면 이런 형식만으로도 충분한 설렘을 느낀다. 가타오카 쇼의 『그 살인, 본격 미스터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는 그 오래된 독서의 쾌감을 능숙하게 호출한다. 도면을 펼치는 순간부터 독자는 사건의 바깥에서 관찰하는 사람인 동시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수수께끼의 참가자가 된다.

작품의 발상은 제목만큼이나 능청스럽다. 명탐정을 꿈꾸는 소녀 부우는 살인을 둘러싼 심상치 않은 계획을 알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머더 미스터리 플래너 야마이누와 손을 잡는다. 실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살인 사건을 연출한다는 기발한 구상은 시작부터 통상적인 추리소설의 순서를 뒤흔든다. 부우가 탐정이라는 역할에 품은 동경과 야마이누가 사건을 하나의 게임으로 구성하는 능력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면서도 기묘하게 맞물린다. 한쪽에서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건을 꾸며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사건이 얼마나 그럴듯한 미스터리로 완성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이 진지하면서도 엉뚱한 조합이 두 사람의 유쾌한 호흡을 만들어 낸다. 머더 미스터리와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익숙한 장치들까지 한데 모이면서 작품은 정교한 수수께끼와 희극적인 활기를 동시에 획득한다.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 살인을 연출한다는 모순적인 발상에는 본격 미스터리의 관습을 마음껏 가지고 노는 작가의 장난기가 배어 있다.

본격 미스터리의 역사는 독자와 작가 사이에 축적된 약속의 역사이기도 하다. 밀실은 불가능해 보이는 범행의 논리적 해명을 예고하고, 고립된 저택은 제한된 용의자들 사이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독자는 이러한 약속을 학습하면서 장르에 능숙해진다. 건물의 구조를 살피고, 인물들의 동선을 계산하며,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사물의 위치를 기억하는 행위에는 오랜 독서로 단련된 특유의 감각이 작동한다.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가 계승하고 발전시켜 온 건축적 트릭과 논리적 추론의 미학 역시 이러한 독서의 즐거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타오카 쇼는 그 전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규칙들을 자유롭게 재배열한다. 저택은 사건을 수용하는 무대인 동시에 추리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물이 되고, 게임은 등장인물의 행동을 조직하는 또 하나의 서사적 질서가 된다. 장르의 관습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유희다.

이러한 구성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게임의 개념과도 연결된다. 언어의 의미가 그것을 사용하는 삶의 맥락과 규칙 속에서 형성되듯, 추리소설의 장치들 역시 독자가 공유하는 장르적 문법 안에서 특정한 의미를 획득한다. 밀실이라는 공간이 수수께끼로 성립하려면 출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관한 공통의 이해가 필요하고, 단서가 단서로 인식되려면 어떤 사물이 사건의 해명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가 선행되어야 한다. 머더 미스터리는 이러한 규칙의 성격을 한층 선명하게 드러낸다. 참가자들은 각자 부여받은 역할에 따라 행동하고, 정해진 정보와 조건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석한다. 그러나 같은 행동과 사물이라도 그것이 놓인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작품은 이러한 의미의 가변성을 활용해 장르의 규칙이 얼마나 정교한 동시에 유연한 체계인지를 보여준다. 독자는 그 규칙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즐거움을 얻지만, 그 지식이 언제나 올바른 해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추리에는 습관이 있다. 어떤 인물이 지나치게 수상하면 오히려 의심을 거두고, 사소한 물건이 반복해서 등장하면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다. 장르에 익숙한 독자는 사건이 제시되기도 전에 가능한 해답의 목록을 작성한다. 이처럼 축적된 독서 경험은 새로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동시에 해석의 방향을 미리 제한하기도 한다. 가다머의 해석학에서 선이해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이미 지니고 있는 역사적·경험적 조건을 가리킨다. 인간은 아무런 전제 없이 대상을 바라볼 수 없으며, 이해는 언제나 기존의 지평과 새로운 경험이 만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추리소설을 읽는 행위에도 이러한 구조가 작동한다. 독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행의 유형과 서술의 관습을 바탕으로 단서를 배열하고, 그 배열이 그럴듯할수록 자신의 판단을 더욱 신뢰한다. 가타오카 쇼는 이 익숙한 인식의 과정을 작품의 유희와 결합한다. 본격 미스터리를 잘 아는 독자에게는 반가운 장치들이, 동시에 자신의 독서 습관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추리소설 특유의 지적 쾌락이 발생한다. 독자는 작가가 제공한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문장 사이의 공백을 살피고, 인물의 진술을 비교하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인과관계를 스스로 구성하려 한다. 하나의 단서가 여러 가설을 낳고, 서로 모순되는 정보들이 잠정적인 질서를 이루는 과정은 인간의 인식 활동을 압축해 놓은 듯하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제한된 사실을 바탕으로 타인의 의도를 추측하고, 우연히 발생한 일들 사이에서 원인을 찾으며, 불완전한 정보에 일관된 설명을 부여한다. 추리소설은 그러한 인식의 욕망을 극도로 정교한 형식 안에 배치한다. 특히 본격 미스터리에서는 해답에 도달하는 논리적 과정 자체가 미적 경험이 된다. 복잡하게 흩어진 요소들이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되는 순간의 쾌감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부우와 야마이누의 관계는 이러한 인식의 문제를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한다. 명탐정을 동경하는 부우에게 사건은 언젠가 자신의 추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생명이 걸린 현실적인 문제다. 반면 미스터리 플래너인 야마이누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경험하고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게 될지 설계하는 일에 능숙하다. 한 사람은 사건의 진실을 발견하려 하고, 다른 사람은 사건이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되도록 조건을 마련하는 셈이다. 이처럼 발견과 설계라는 상이한 활동이 한 이야기 안에서 만난다는 점이 작품의 독창성을 형성한다. 더욱이 두 사람은 추리소설의 관습을 공유하면서도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역할이 다르기에, 같은 상황을 두고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인물 사이의 경쾌한 호흡을 가능하게 하면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사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해석이 개입한다. 사건을 설명하는 이야기의 순서가 달라지면 중요하게 보이는 단서도 달라지고, 동일한 행동조차 전혀 다른 의도를 지닌 것처럼 읽힐 수 있다. 진실을 향한 추리가 이야기의 구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들의 기묘한 동행을 통해 부각된다.

한편 살인을 하나의 게임으로 구성한다는 발상에는 추리소설이 오래도록 품어 온 윤리적 긴장도 배어 있다. 본격 미스터리에서 죽음은 수수께끼를 발생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며, 독자는 그 비극을 출발점으로 지적 즐거움을 경험한다. 피해자의 죽음이 논리적 퍼즐의 일부로 편입되는 순간, 인간의 고통과 추리의 쾌락은 동일한 서사 안에 공존하게 된다. 가타오카 쇼는 이러한 장르의 특성을 무거운 교훈으로 환원하기보다, 가짜 살인이라는 희극적인 발상을 통해 새롭게 환기한다. 특히 누군가의 죽음을 막으려는 부우의 목적은 추리의 즐거움과 생명의 무게가 공존하는 작품의 기묘한 분위기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사건을 정교하게 연출할수록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기준은 중요해지고, 추리의 대상으로서의 죽음과 인간에게 실제로 발생하는 죽음 사이의 거리 역시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긴장은 작품의 경쾌한 분위기 아래에서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지닌 독특한 성격을 드러낸다. 독자가 즐기는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논리적으로 해소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는 인간이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찾으려는 오래된 욕망이 깃들어 있다.

『그 살인, 본격 미스터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의 매력은 본격 미스터리의 전통에 대한 애정과 그 전통을 자유롭게 다루는 상상력이 한데 어우러진다는 데 있다. 가타오카 쇼는 도면과 저택, 탐정과 용의자, 단서와 트릭이라는 익숙한 요소들을 통해 장르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면서도, 그 기대가 형성되는 방식까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부우와 야마이누의 요란한 동행에는 추리소설을 향한 동경과 사건을 설계하는 즐거움이 뒤섞여 있고, 두 인물의 경쾌한 호흡은 정교한 추리의 구조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첫 장에서 펼쳐 보았던 저택의 도면은 어느새 독자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능성의 경로로 다시 그려진다. 종이 위의 선들은 공간의 구조를 정확하게 보여주지만, 그 공간에서 무엇을 의심하고 어떤 가능성을 선택할지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정교하게 설계된 건축물 안에서 독자의 상상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통로를 찾아 나선다. 본격 미스터리의 즐거움은 그렇게, 이미 주어진 규칙을 이해하는 지성과 그 규칙 너머를 상상하는 자유가 만나는 곳에서 완성된다.

✏️도서출판 리드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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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읽는 최치원 풍류길 - 고운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생태 인문 기행
김재웅 지음 / 책과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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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는 인간의 연대기가 없다. 왕조의 몰락도, 한 문장가의 영광도 나이테에 이름을 새기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오래된 숲 앞에서 우리는 지나간 사람들의 시간을 떠올린다. 누군가 나무를 심었고, 누군가는 그늘을 빌렸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가지를 잘라내거나 쓰러진 나무의 자리에 새로운 묘목을 심었다. 숲의 역사는 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손을 거쳐 자라난다. 김재웅의 『나무로 읽는 최치원 풍류길』은 신라 말의 문인 최치원이 남긴 문장과 행적을 나무의 생태적 시간 속에 펼쳐 놓는다. 당나라에서 명성을 얻은 문장가, 신라의 개혁을 꿈꾼 지식인, 가야산으로 향한 은둔자. 역사에 기록된 몇 개의 이름 사이로 향나무와 박달나무, 느티나무와 전나무가 자라난다.

봉암사의 박달나무 앞에서 저자는 최치원과 일연, 단군신화의 시간을 한데 불러 모은다.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한 인물과 이야기가 한 그루의 나무를 중심으로 겹쳐지는 순간이다. 이 장면을 역사적 사실의 복원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박달나무는 그 모든 시간을 실제로 목격한 증인이 아니며, 나무의 수명만으로 과거의 진위를 판별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한 장소에 쌓인 기억은 반드시 물질적 연속성을 통해서만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름은 비석에 새겨지고, 어떤 이야기는 사람의 입을 거쳐 전해지며, 때로는 나무 한 그루가 그 기억들을 다시 호출하는 계기가 된다. 저자의 답사에는 이처럼 기록의 빈틈을 현장의 감각으로 더듬으려는 시도가 있다. 나무의 종류와 생태를 살피는 시선 곁에 오래된 문헌과 지역의 전승이 나란히 놓인다. 역사적 장소는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만큼이나, 후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기로 선택했는가에 의해서도 형성된다.

함양 상림에는 인간의 의지가 숲의 형태로 이어진 시간이 있다. 최치원이 천령군 태수로 재직하며 홍수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자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숲이다. 물길을 다스리고 나무를 심는 일은 당장의 재난에 대응하는 행정적 실천이었겠지만, 그 결과는 한 관리의 임기를 훌쩍 넘어섰다. 상림의 나무들은 자라고 죽고 다시 뿌리를 내리며 오랜 세월 숲의 형태를 이어 왔다. 여기에는 인간의 의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의 역사가 함께 축적되어 있다. 일찍이 한스 요나스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논할 때 강조했던 것은 현재의 행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삶의 조건까지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이었다. 상림의 조성을 오늘날의 생태윤리와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나무를 심는 행위가 품은 시간의 방향은 주목할 만하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계속될 세계를 위해 지금 무엇을 마련할 것인가. 숲은 한 시대의 필요에서 태어나 다른 시대의 생명을 받아들이며 자란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돌봄은 자신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미래에까지 도달한다.

최치원의 정치적 생애를 떠올리면 이 숲의 존재는 더욱 복잡하게 읽힌다. 당나라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귀국한 그는 신라의 쇠락을 목격했고, 시무 십조를 올려 개혁을 모색했다. 그러나 골품제의 질서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가 꿈꾼 변화는 충분히 실현되지 못했다. 문장으로 세상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식인이 마주한 것은 문장의 능력만으로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유교적 출처관에서 벼슬에 나아감과 물러남은 개인의 처세를 넘어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판단이었다. 최치원의 행적에도 그러한 고민이 배어 있는 듯하다.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진 뒤에도 그는 산천을 유람하고 학문과 문학을 이어 갔다. 세상을 향했던 정신이 자연 속에서 다른 리듬을 얻는 과정이었다. 다만 그의 은둔을 정치적 좌절의 필연적 귀결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한 인간의 선택에는 역사적 상황과 개인의 기질, 당대의 사상적 풍토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청량산에서 독서와 바둑을 즐겼다는 전승, 임경대에서 마주하는 낙동강의 물길, 동백섬의 해안 풍경은 정치와 학문의 언어로만 설명할 수 없는 최치원의 삶을 펼쳐 보인다. 산천을 유람하며 시를 짓는 문인의 풍류에는 자연을 감각하는 일과 자신을 수양하는 일이 함께 놓여 있었다. 유교의 학문과 불교의 수행, 도가적 자연관이 서로 접촉했던 신라 말의 사상적 환경도 이러한 풍류를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산을 오르고 물을 바라보는 동안 인간의 사유는 책상 위에서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바람의 방향과 물의 흐름은 인간의 계획을 따르지 않으며, 나무는 자신의 생장에 필요한 시간만큼 계절을 통과한다. 그 질서를 바라보는 일에는 인간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세계를 인정하는 태도가 수반된다. 풍류의 정신을 오늘날 다시 읽는다면, 자연을 자신의 감정에 맞추어 해석하기에 앞서 그 고유한 리듬을 감각하는 능력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해인사 학사대의 전나무 앞에서는 한 인간의 마지막 행적을 둘러싼 침묵이 짙어진다. 최치원의 말년은 정확한 기록으로 온전히 복원되지 않는다. 가야산에 은둔했다는 이야기와 신선이 되었다는 전승은 역사적 공백 위에 여러 세대의 상상력이 쌓인 결과다. 저자는 학사대의 전나무를 찾을 때마다 그 웅장한 모습에서 최치원의 기상을 떠올린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나무를 통해 사라진 인간의 정신을 가늠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나무의 수명처럼 일정한 생물학적 연속성을 갖지 않는다. 기억은 전해지는 동안 변형되고, 시대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최치원이라는 이름 역시 당대의 문장가에서 후대의 은둔자와 신선으로 거듭 해석되었다. 전나무가 환기하는 것은 한 인물의 변하지 않는 본모습보다, 그를 기억해 온 사람들의 오랜 시간이 아닐까. 나무 앞에 선 현재의 시선에는 수많은 과거의 시선이 겹쳐 있다.

이 책에서 나무는 자주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양주의 녹나무가 지닌 왕성한 생명력은 당나라에서 활약한 최치원의 모습과 연결되고, 해인사의 전나무는 그의 기상을 떠올리게 한다. 식물의 생태적 특성을 인간의 성품과 대응시키는 방식은 오래된 문학적 전통이기도 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무의 존재가 인간을 위한 상징으로만 좁혀지는 순간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녹나무의 씨앗은 문장가의 명성을 위해 퍼져 나가지 않으며, 전나무는 누군가의 정신을 보존하려고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나무에게는 인간의 해석이 미처 포괄하지 못하는 고유한 생의 질서가 있다. 저자가 청량산에서 줄기 일부가 고사한 느티나무를 살피고, 오랜 나무를 보호해 온 사람들의 수고를 떠올리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각별하다. 나무를 인간의 역사와 연결하는 상상력 곁에 실제 생명을 향한 관찰과 돌봄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가 얼마나 오래 기억될지 알 수 없다. 한때 세상의 질서를 바꾸려 했던 최치원의 문장은 비석과 문집에 전해지고, 그가 백성을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숲은 오늘날에도 새로운 생명을 길러 낸다. 그러나 문헌의 보존과 숲의 생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이어 간다. 문헌은 과거의 언어를 후대에 전달하고, 숲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생명의 관계를 계속 만들어 낸다. 김재웅은 그 두 시간 사이를 걸으며 역사적 인물의 생애를 다시 읽는다. 상림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맡긴 미래를, 학사대에서는 자연을 통해 되살리는 과거를 마주한다. 우리가 지나온 자리에 무엇을 심고 어떤 것을 돌보았는가에 따라 후대가 물려받을 세계의 모습도 달라진다. 한 인간의 시대가 저문 뒤에도 숲은 자란다. 그 숲의 내일에는 우리가 오늘 선택한 삶의 방식까지 뿌리내리고 있다.


✏️도서출판 책과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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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밖 감정
성해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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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위의 경계선은 언제부터 삶의 가능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까.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에는 기회와 성공이 특정한 장소에 집중되어 있다는 오랜 인식이 배어 있다. 어느 도시에서는 저녁 식사 후 가볍게 들를 수 있는 문화 행사가 다른 도시에서는 하루의 일정과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된다. 같은 책을 좋아하고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도, 그 마음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은 거주지에 따라 달라진다. 문화적 풍요가 특정한 장소에 집중될수록 취향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 지리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서울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도시를 지칭하는 동시에 기회와 가능성의 척도로도 작동한다.

여섯 작가가 참여한 『서울 밖 감정』은 서울을 향한 서로 다른 감정의 궤적을 따라간다. 서울을 떠난 사람과 서울에 들어온 사람, 그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통해 도시의 이면을 드러낸다. 이들의 기억에는 동경과 모멸, 자유와 외로움, 안도와 불안이 뒤섞여 있다. 한 도시를 향한 감정이 이토록 복잡한 까닭은 공간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단일한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의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질서는 개인의 욕망을 형성하고, 그곳에서 축적된 경험은 다시 장소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놓는다.

성해나의 <탑승 시 손을 흔드시오>에서 버스는 지역 간 불균형을 드러내는 가장 일상적인 사물이다. 정류장에서 손을 흔들어야 멈추는 버스와 승객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차하는 버스 사이에는 서로 다른 생활의 규칙이 존재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버스를 놓쳐도 곧 다른 교통수단을 선택할 수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한 번의 놓침이 하루의 일정을 뒤흔든다. 불편을 오래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익숙함은 환경에 적응하도록 돕는 동시에 더 나은 조건을 상상할 기회마저 좁힌다.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는 정도에 따라 개인이 사용하는 시간과 선택의 범위도 달라진다는 사실은 지역의 격차를 단순한 편의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게 만든다.

공간이 인간의 삶을 제약하는 방식은 주거에서도 발견된다. 이기호의 <두 번째 만남>에는 구기동의 열악한 자취방과 결로 문제를 둘러싼 분쟁, 법정에서 들었던 ‘가난한 작가’라는 말이 등장한다. 경제적 형편이 타인의 언어를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순간, 가난은 생활의 조건을 넘어 존엄을 침범하는 경험이 된다. 김현의 <장면들>에서 집은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지하와 반지하를 거쳐 서울 밖에 마련한 집에 손님방이 생기면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던 공간은 타인을 맞이하는 장소로 확장된다. 주거의 여유는 면적이나 소유의 문제를 넘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과 연결된다. 대학 시절 병원 실습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고시원은 몸 하나를 눕히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하루의 긴장을 풀어야 할 방에서 오히려 숨이 막히던 경험은 집이 인간에게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안온함을 돌아보게 한다. 공간의 크기는 신체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그 안에서 반복되는 감각은 마음의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에게는 휴식조차 어려운 방이 주어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누군가를 초대할 여유가 허락된다. 집의 형태가 곧 삶의 형태를 결정하지는 않더라도, 그 안에서 허용되는 일상의 폭은 분명 다르다.

도시가 인간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은 물질적인 환경에서 그치지 않는다. 임선우의 <너도 어서!>에서 서울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앞서 나가라고 재촉하는 도시다. 더 높은 학력과 소득, 더 좋은 직장과 집을 향한 욕망은 개인의 열망처럼 느껴지지만, 그 기준은 이미 사회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목소리가 반복될수록 인간은 자신의 속도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의 감각이 창작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작가의 고백은 도시의 욕망을 쉽게 선악으로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사회가 형성한 열망이라 해도 그것을 통과하며 이루어낸 성취에는 개인의 시간과 노력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호정의 <새소리>는 그와 다른 방향에서 도시의 자유를 살핀다. 여러 세대가 함께 살던 집을 떠나 혼자만의 공간을 얻은 뒤 찾아온 고요는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도시의 익명성은 사람들을 고립시키지만,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들여다보지 않는 거리 또한 제공한다. 관심이 언제나 배려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걱정과 애정에서 비롯된 말조차 상대에게는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고 정당화해야 한다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타인을 존중하는 일에는 그가 아직 말하지 않은 사정을 섣불리 해석하지 않는 태도도 포함된다. 외로움과 자유가 서로의 곁에 놓일 수 있다는 현호정의 인식은 공동체의 친밀함을 무조건적인 미덕으로 받아들이던 시선을 다시 살피게 한다.

장소와 인간의 관계는 기억 속에서 더욱 복잡해진다. 김화진의 <둘로 나뉘어 있다는 감각>에서 남태령역과 선바위역은 서울의 자신과 안양의 자신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가 된다. 같은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뿐인데, 특정한 역을 통과하는 순간 자신이 속한 세계가 달라진다고 느낀다. 그가 동경하던 문화적 공간에 가까워지기 위해 서울로 이주한 뒤에도 소속의 감각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거주지는 바뀔 수 있어도 그곳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여전히 일상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환경심리학자 스캐넬과 기퍼드(Scannell & Gifford, 2010)는 논문 〈장소애착의 정의: 삼차원적 구성 체계(Defining Place Attachment: A Tripartite Organizing Framework)〉에서 장소애착을 인간과 심리적 과정, 장소라는 세 차원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장소에 대한 애착은 개인과 공동체가 부여하는 의미, 감정과 기억을 비롯한 인지적 경험,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히며 형성된다. 따라서 같은 장소를 경험하더라도 그곳에 부여하는 의미는 서로 다를 수 있으며, 한 사람이 장소와 맺는 관계 또한 축적된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자연이 지천이었던 나의 고향에서는 나무와 하늘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다. 등하굣길이나 밤 산책에서 무심히 올려다보던 하늘은 다른 도시에서 생활하게 된 뒤에야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고향의 밤을 밝히던 주황색 가로등은 낯선 도시의 흰 불빛 아래에서 오래전의 색채로 되살아난다. 저녁이면 고요한 거리로 밥 짓는 소리와 냄새가 흘러나왔고, 밤이 깊어지면 눈이 내려앉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사위가 잠잠한 나의 고향. 도시의 밤이 여전히 사람들의 발걸음과 소음으로 이어질 때, 고향의 밤은 하루의 생활을 천천히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건물 사이에서 문득 하늘을 바라볼 때면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는다. 떠난 장소는 기억 속에서 새롭게 읽힌다. 그리움의 대상에는 고향의 풍경뿐 아니라 그 풍경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던 과거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장소는 눈에 보이는 풍경뿐 아니라 빛의 색과 소리, 냄새와 침묵을 통해서도 한 사람의 내면에 새겨진다.

그러나 주황빛 가로등 아래에서 누렸던 고요가 그곳의 모든 시간을 다정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자연과 친숙했던 생활에는 촘촘한 인간관계가 있었고, 더 넓은 도시에서는 자연과의 거리가 멀어진 대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여지가 생겼다. 친밀함이 안정감을 제공하는 만큼 개인을 평가하는 시선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며, 익명성은 외로움을 동반하면서도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낼 기회를 허락한다. 어느 장소가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자유의 형태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같은 장소로 돌아간다고 해서 과거와 동일한 감정을 경험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장소를 기억하는 사람 역시 시간 속에서 변화해왔으므로.

결국 『서울 밖 감정』의 여섯 산문이 함께 보여주는 것은 장소와 인간이 서로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서울이라는 중심은 기회와 자원의 배분을 통해 삶의 조건을 바꾸고, 개인은 그 안에서 욕망과 좌절, 애정과 소외를 경험한다. 그러나 한 장소의 의미는 그곳에 주어진 조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구와 관계를 맺고 어떤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지에 따라 소속의 감각도 달라진다. 그곳에서 누리는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기울이는 관심과 책임 역시 장소를 삶의 일부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 서울의 안과 밖을 가르는 선은 지도 위에 선명하게 그어져 있지만, 인간의 감정은 그 경계를 따라 나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서울은 도달하고 싶은 세계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떠나야만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던 장소다. 같은 도시에서도 누군가는 기회를 발견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를 잃는다. 장소에 대한 판단은 삶의 어느 시기에, 어떤 조건으로 그곳을 통과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한때 자신을 가두었던 거리가 훗날에는 돌아가고 싶은 풍경이 되고, 그리워하던 도시의 불빛이 어느 날에는 피로의 색으로 번진다. 장소는 그대로여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시간은 계속 흐른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안과 밖을 다시 그려나간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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