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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사랑 이야기 ㅣ 망한 OO 이야기
안서인.한승민.조은혜 지음 / 온프북스 / 2026년 10월
평점 :
기억의 서랍장을 열어 사랑이라고 적힌 칸을 뒤적여 보자. 먼지 낀 기억들 사이로 망한 사랑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한밤중 불쑥 떠올라 멀쩡한 이불을 걷어차게 만드는 사랑, 오래전에 헤어졌으면서도 슬픔만은 유통기한을 잊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사랑. 누군가는 그때의 자신을 철없었다고 꾸짖고, 누군가는 지금이라도 상대에게 따지고 싶은 말들을 머릿속에서 연습한다. 그런데 그토록 확신에 차서 실패라 명명한 관계를 상대방도 같은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한 사람의 흑역사가 다른 사람에게는 제법 근사한 청춘의 한 페이지였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사랑의 성적표는 처음부터 공정성을 의심받는다.
안서인, 한승민, 조은혜의 『망한 사랑 이야기』는 세 작가가 자신의 연애사를 다시 꺼내어 쓴 에세이집이다. 안서인의 〈해피엔딩〉에서 첫사랑 N의 애정은 화자에게 확신보다 해명해야 할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상대는 끊임없이 사랑을 증명했지만,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은 좀처럼 자라지 못했다. 한승민의 〈관계의 환상통〉에서는 동경으로 시작된 관계가 죄책감과 용서의 기묘한 위계를 형성한다. 상대의 이해가 깊어질수록 자신은 더욱 비참해지는 역설 속에서 첫사랑의 흔적은 환상통으로 지속된다. 조은혜의 〈나는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 잠을 잤다〉에서는 혼자 잠들기 위해 찾았던 모텔이 외도의 증거로 오인된다. 화자는 자신에게 씌워진 죄목을 부정하면서도 관계를 끝내기 위해 진실을 숨겼던 책임까지 회피하지 않는다. 세 편은 서로 다른 경위로 관계의 파국을 통과하지만, 공통적으로 사랑을 경험하던 당시의 자신과 그 경험을 돌아보는 현재의 자신을 마주 세운다. 서로 다른 두 시점의 화자가 같은 사건을 두고 벌이는 조용한 논쟁이 이 책의 중요한 동력이다.
사랑의 성패를 판정하는 일에는 묘한 계산법이 적용된다. 오랜 세월 지속된 관계에는 성공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이별한 관계에는 그동안 축적된 애정까지 소급하여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뼛속까지 문과지만 수식으로 옮기자면 ‘(두 사람의 애정 × 함께한 시간) × 결말(이별이면 0) = 사랑의 성적’ 정도가 되겠다. 세상에, 결말 하나로 그동안의 계산을 몽땅 0점 처리하다니. 그러나 헤어졌다는 사실이 함께 웃었던 날들의 가치를 지우거나, 당시의 선택이 지녔던 진정성까지 무효로 만들 수 있을까. 실패한 결말은 그 관계의 일부일 뿐, 지나온 모든 순간을 대표할 자격까지 갖지는 못한다. 어떤 사랑은 헤어졌기에 비극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랑은 헤어짐으로써 더 큰 상처를 피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망한 사랑’이라는 판정에는 언제나 미처 청취하지 못한 또 하나의 증언이 존재한다. 사랑의 오답노트를 작성하기 어려운 까닭은 애초에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문제를 풀고 있었을 가능성마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불완전한 판정에는 상대의 증언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자신 또한 제대로 변론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별 이후의 기억은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의 감정보다 결말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한때 절실했던 기다림은 어리석은 미련으로, 다정했던 친밀함은 고통의 전조로 다시 읽히기도 한다. 심리학자 프레더릭 바틀릿이 연구한 재구성적 기억의 특성처럼, 인간의 기억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저장 장치가 아니다. 회상하는 사람은 익숙한 이야기의 틀에 맞추어 어떤 세부를 덜어내고, 때로는 빠진 맥락을 스스로 메우기도 한다. 현재의 감정과 지식이 회상에 개입하고,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 오래전 장면의 의미를 바꾸어 놓는다. 기억의 서랍장에 들어 있던 물건은 그대로인 듯한데, 그것을 꺼내 든 사람의 손길이 달라진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후회가 그때의 확신보다 반드시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후회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지혜를 과거의 자신에게 요구하는 데 능숙하다. 그때 조금만 덜 불안했더라면, 그 말을 삼켰더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가 사유했던 시간의 비가역성은 이런 가정법의 부질없음과 애처로움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한 번 일어난 사건은 무효로 돌릴 수 없으며, 그 사건을 통과하기 전의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지나간 순간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데, 인간은 그 순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갈림길을 숱하게 만들어낸다. 그러나 가정법으로 구성된 과거에는 현실이 감당해야 했던 우연과 불확실성이 생략되어 있다. 지금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과거의 자신에게 부여한 채 다른 선택을 요구하는 일은 어쩐지 불공평하다. 당시의 자신은 그때 주어진 감정과 이해의 범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뒤늦은 성찰이 의미를 얻으려면 지나간 자신을 유죄로 확정하는 일만큼이나 그가 무엇을 알지 못했는지 살피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사랑이 끝난 뒤에도 그 사랑을 거듭 이야기할까. 이미 잃어버린 사람을 되찾을 수 없고, 언어로 되감은 장면이 실제 과거를 수정해주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사랑하는 동안에는 상대의 표정 하나, 답장의 간격 하나에도 온 신경을 쏟으면서 정작 그 관계 속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에게 버림받는 일이 두려웠는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신의 판단이 두려웠는지조차 구별하지 못한 채 관계를 통과하기도 한다. 그러다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그제야 자기 행동의 낯선 동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사랑을 경험했던 사람과 그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은 동일한 인물이지만, 둘 사이에는 적지 않은 세월과 서로 다른 앎이 가로놓여 있다.
빌헬름 딜타이의 해석학에서 체험은 표현을 거쳐 다시 이해의 대상이 된다. 그에게 체험의 표현은 당사자조차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내면의 맥락을 드러내는 통로이기도 했다. 마음속에서 뒤엉켜 있던 감정은 언어의 형태를 얻으면서 비로소 살펴볼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망한 사랑 이야기』의 세 작가 역시 지나간 관계를 기록하면서 당시의 자신을 다시 읽는다. 특히 안서인은 문예창작 수업에서 N과 재회하는 허구를 썼던 과거를 회상하며, 이번에는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는 결말을 선택한다. 한때는 사랑의 성취를 위해 만들어냈던 문학적 우연을 스스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한승민은 첫사랑의 흔적을 환상통에서 성장통으로 다시 해석하고, 조은혜는 상대가 자신에게 내린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으면서 자신의 실제 책임을 인정한다. 세 사람이 새롭게 구성하는 결말은 과거의 상처를 지우거나 지난 사랑을 성공으로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겪은 일을 어떤 언어로 책임지고 이해할 것인지 결정하는 행위다.
그러나 글쓰기가 과거를 해명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과거의 최종 판결권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한다. 사랑은 두 사람이 경험했으나 회고록의 문장은 한 사람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서술자는 어떤 장면을 보존할지, 어떤 대화를 생략할지, 누구의 침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결정한다. 그렇게 탄생한 이야기는 분명 자신의 경험에 관한 진실을 담고 있지만, 상대가 경험했던 사랑의 전모까지 대변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상처였던 일이 상대에게도 동일한 무게였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랑에 관한 회고가 정직해지는 순간은 모든 정황을 완벽하게 설명할 때보다 자신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인정할 때 찾아온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망한 사랑 이야기』라는 제목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세 작가가 적어 내려간 것은 사랑의 실패를 입증하는 증거 목록일까, 한때 자신의 세계를 이루었던 관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기록일까. 오답노트라는 표현에는 틀린 선택을 찾아내 다음에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인간의 관계에는 같은 조건으로 다시 풀 수 있는 문제가 드물다. 상대도 달라지고 자신도 변하며, 사랑을 둘러싼 사정 역시 매번 새롭게 형성된다. 그때의 오답이 다른 관계에서는 정답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실패를 기록하는 목적을 더 나은 연애를 위한 정답 수집에 한정한다면, 그 기록은 인간의 복잡성을 또 한 번 간추려버리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랑은 오래 지속되었어도 자신을 잃게 만들었고, 어떤 사랑은 짧게 끝났어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상처가 성장의 필수 조건인 양 실패를 미화할 필요도 없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경험을 이해하려 애쓰는 일과 그 경험을 좋았던 일로 바꾸는 일은 서로 다르다. 이미 발생한 상처의 크기를 줄이지 않으면서도 그 관계에 존재했던 다정함을 인정할 수 있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비겁함을 돌아볼 수도 있다. 하나의 관계를 성공과 실패라는 두 칸에 억지로 밀어 넣는 동안, 그 사이에서 숨 쉬던 복잡한 감정들은 갈 곳을 잃는다.
사랑의 결말에는 마침표가 찍히지만, 그 사랑을 이해하는 문장에는 정해진 완성 시점이 없다. 한때는 창피해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장면을 훗날 조금 덜 매정한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추억이라 믿었던 순간에서 자신이 감당했던 부당함을 뒤늦게 발견할 수도 있다. 세 작가가 적어 내려간 문장들은 그렇게 한 사람의 과거를 향한 늦은 독해가 된다. 서랍장 깊숙이 밀어 넣었던 연애의 기록을 꺼내면, 오래 묵은 먼지와 함께 당시에는 차마 읽지 못했던 문장들이 쏟아진다. 그중에는 아직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순간이 있고, 이제야 잘못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순간도 있다. 먼지를 털어낸 자리에 드러나는 것은 사랑의 정답지보다 훨씬 난해한 필체다. 한때 누군가를 사랑하느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읽히지 못했던 사람의 필체.
✏️도서출판 온프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