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아픔으로 끝나지 않도록 - 권오중의 삶의 긍정
권오중 지음 / 수오서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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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사랑하는 사람과 얼마만큼의 계절을 나눌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미래를 계획하고 약속을 건네며, 오늘의 평온이 내일도 이어지리라 믿는다. 생의 질서는 언제든 예고 없이 무너진다.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해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 있고, 온 힘을 다해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고통이 있다. 인간의 의지로 다스릴 수 없는 영역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세상이 자신에게 약속한 적 없는 내일을 너무 오래 당연하게 믿으며 살아온 탓일까. 배우 권오중의 첫 에세이 『아픔이 아픔으로 끝나지 않도록』은 익숙한 삶의 경계에서 시작된 한 사람의 고백이다.

권오중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먼저 유쾌한 웃음과 익살스러운 표정이 그려진다. 사극 속 인물로 시대를 넘나들고, 단발머리 가발을 뒤집어쓴 채 영화 속 하비에르 바르뎀의 기묘한 표정까지 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익살꾼.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웃게 하던 배우에게도 무대 밖에서는 웃음으로 건너기 어려운 날들이 있었다. 아들 혁준은 어린 시절부터 자주 넘어지고 또래보다 말이 늦었다. 오랜 검사와 진료 끝에 밝혀진 원인은 미토콘드리아의 칼슘 흡수를 조절하는 유전자 MICU1의 변이였다. 널리 알려진 병명조차 낯선, 유전자의 기호를 통해서야 그 실체를 설명할 수 있었던 극희귀질환. 수많은 유전자의 작은 서열 하나가 아이의 몸에 이토록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정교한 질서가 얼마나 섬세한 균형 위에 놓여 있는지 보여주는 현실이었다. 전국의 병원을 전전한 오랜 세월 뒤에야 확인한 병명은 불확실성의 일부를 해소했지만 가족이 감당해야 할 현실까지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권오중은 아들의 숨소리를 확인하고서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던 날들을 고백한다. 누군가에게는 무심히 지나가는 아침이 그에게는 매번 안도해야 하는 사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무력함을 가장 뼈아프게 경험한다. 부모라는 이름에는 자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이 따르지만, 그 책임을 감당할 능력까지 언제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오중은 아들을 낫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다녔다. 무엇이든 해주고 싶지만 정작 가장 절실한 것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러나 이 가족의 이야기는 치료의 가능성을 좇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오늘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외출할 때면 권오중은 자신의 팔꿈치를 내밀고 혁준은 그 팔을 잡는다. 걸음의 속도도, 몸의 균형도 서로에게 맞추어야 하는 길. 누군가의 팔에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잠시 타인에게 맡기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팔을 내어준다는 것은 그 믿음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걷는다. 앞서가는 사람도, 뒤처지는 사람도 없이.

돌봄은 한 사람의 생을 다른 사람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여놓는다. 끼니를 챙기고, 몸의 상태를 살피고,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는 일이 반복된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상대의 고통을 온전히 대신 겪을 수는 없기에 돌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미처 해주지 못한 일들이 생긴다. 하지만 돌봄받는 사람 또한 누군가의 보살핌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치유자’ 혁준은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면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병원에 데려가고 싶어 한다. 자신의 몸이 겪어온 어려움을 통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아보는 것이다. 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과 그 사람이 지닌 고유한 마음을 알아보는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돌봄은 서로가 가진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조금씩 상대의 세계를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가까운 사람을 가장 잘 안다고 믿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 사람의 슬픔을 놓칠 수 있다. 권오중은 신혼 시절부터 아내가 건넸던 부탁을 떠올리며 자신이 얼마나 무심한 남편이었는지 돌아본다. 밖에서는 웃고 떠들며 사람들과 어울렸지만, 정작 집에서는 아내가 감당하는 외로움을 충분히 살피지 못했다. 명절이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던 아버지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그 모습을 오랫동안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습관으로 여겼다. 그러나 간암 말기 진단 이후 권오중은 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을 뒤늦게 돌아보게 된다. 오랜 시간 같은 집의 불빛 아래 있었어도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방이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상대에 대해 익숙해질수록 이미 알고 있다는 확신을 키운다. 그러는 사이 작은 변화와 말끝에 묻어나는 피로, 평소와 다른 침묵을 지나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모습만큼이나 아직 드러내지 못한 내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혁준의 삶 역시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비슷한 순서로 성장하고 비슷한 속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기대 속에서 자란다. 제때 말을 배우고 학교에 다니며 직업을 갖는 일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무엇이 평범하고 무엇이 정상적인 삶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생각보다 좁다. 혁준은 그림을 그리고, 혼자 버스를 타고 화실에 가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있고, 스스로 해내는 일에서 얻는 기쁨도 있다. 인간의 존엄은 얼마나 많은 일을 혼자 해결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내민 팔꿈치를 잡고 걷는 혁준과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혁준은 동일한 한 사람이다. 그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과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순간 모두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고통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머물지 않는다. 권오중은 오랫동안 성공을 좇았고, 배우로 인정받고 싶어 했으며, 지금도 다른 사람의 성취 앞에서 질투를 느낀다고 고백한다.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에 자리한 오만함을 발견했고,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에게 충분히 다정하지 못했던 시절을 후회한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생겨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무심한 순간은 찾아온다. 인간의 내면은 한 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권오중은 자신이 좋은 아버지이자 남편이라고 선언하는 대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의 이야기가 친밀하게 읽히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후회하고 흔들리는 존재인지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부끄러운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아들의 숨소리를 확인하던 아침과 아버지의 고통을 뒤늦게 이해한 순간 사이에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유한성이 흐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실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이미 지나간 날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 인간은 내일을 보장할 수도, 어제를 다시 살아낼 수도 없다. 그렇기에 사랑은 자주 서툴고 후회는 언제나 한 박자 늦다. 그래서 함께 맞이하는 하루는 반복되는 일상의 얼굴을 하고서도 매번 다른 무게를 지닌다. 다만 고통을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반드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아픔은 오래 지속되고, 아무런 보상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권오중은 자신이 살아온 방향을 돌아보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피려 한다. 삶을 대하는 태도는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 어제는 지나쳤던 표정을 오늘은 알아보고, 미처 듣지 못했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사랑하는 사람의 걸음에 자신의 보폭을 맞추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달라진다.


위로를 약속하는 문장들은 세상에 넘쳐난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언어로 정직하게 드러내는 일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픔이 아픔으로 끝나지 않도록』은 배우 권오중이라는 익숙한 이름 뒤에 놓여 있던 한 인간의 사적인 슬픔을 보여준다. 그 슬픔은 독자의 동정을 구하거나 대단한 교훈을 설파하려 들지 않는다. 삶의 고단함을 담담하게 털어놓는 문장들 사이로 아버지의 두려움과 남편의 후회, 배우의 열등감, 한 가족이 함께 만들어가는 작고 평범한 기쁨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무거운 사연을 품고 있으면서도 책이 수월하게 읽히는 까닭은 이러한 꾸밈없는 고백이 독자를 한 사람의 삶 가까이 데려가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한 수식으로 슬픔을 장식하지 않기에 오히려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누군가의 삶을 읽는 일이 어느새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는 일로 이어지는 순간도.

아픔이 아픔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고통이 사라진 미래를 약속하는 말과는 다르다. 해결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며, 오늘을 함께 살아가려는 의지에 대한 고백이다. 올해 서른 살이 된 혁준은 여전히 자신의 속도로 세상을 배워가고, 권오중 부부는 홍제천을 따라 달리며 몸을 움직인다. 세 사람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길 위로 나서기도 한다. 2인용 자전거 한 대와 1인용 자전거 한 대. 누군가는 페달을 조금 더 세게 밟고, 누군가는 잠시 속도를 늦추는 동안에도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있다. 삶은 여전히 그들에게 쉬운 길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바퀴가 한 번 구를 때마다 발아래로 새로운 길이 지나간다. 그렇게 이 가족은 오늘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길을 달리고 있다.

✏️도서출판 수오서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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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과 무릎들 - 성기게 엉기는 남해살이 이야기
김소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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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혼자 있을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홀로 남겨질 가능성에는 유난히 겁이 많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하루를 꿈꾸다가 문득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 내일을 두려워한다. 독립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의존을 부끄러워하는 습관은, 정작 가장 취약한 순간에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할지 모르게 만든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조차 자신의 몸이 언제까지나 그 약속을 지켜주리라는 낙관을 전제한다. 늙고 병드는 일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자부심은 몸의 사소한 고장 앞에서도 무력해질 수 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날들을 조금씩 나누어 갖는 일이기도 하다.

김소민의 『책방과 무릎들』은 이러한 불안에서 출발한다. 오랜 기자 생활을 거친 작가는 늙음과 가난, 아픈 몸을 홀로 감당해야 할 미래를 두려워하다가 마을 공동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2024년 봄, 반려견 몽덕이와 함께 경남 남해로 이주한 그는 작은 책방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낯선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해변과 한적한 마을이 곧 평온한 일상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웃들은 불쑥 찾아와 말을 걸고, 함께하는 식사는 예상보다 길어지며, 책방의 일들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외로움을 피하려고 찾아온 곳에서 오히려 혼자 있고 싶은 순간이 잦아지는 것이다. 남해에서의 하루는 기대했던 고요함보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뜻밖의 소동으로 더 자주 채워진다. 저자는 사람 때문에 웃다가도 화가 치밀고, 다정함에 고마워하다가도 참견이 성가셔지는 감정을 특유의 유머와 솔직함으로 기록한다. 그 덕분에 남해는 낭만적인 도피처라는 외피를 벗고, 각자의 사정을 지닌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생활의 장소가 된다.

타인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자신의 일상에 예측할 수 없는 변수를 들이는 일이다. 혼자라면 간단하게 결정할 수 있는 일도 관계 속에서는 상대의 형편과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 누군가의 호의가 기쁨이 되는 순간과 부담이 되는 순간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김소민이 경험한 남해의 일상은 이러한 친밀함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함께 밥을 먹고 마을 행사에 참여하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이 관계의 온기를 만들어내지만, 그만큼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공동체를 향한 열망과 고독에 대한 욕구는 한 사람 안에서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순간을 공유할 필요는 없으며, 혼자 있고 싶다는 바람이 타인을 향한 애정을 약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편안한 관계는 상대의 고독까지 존중할 때 가능해진다. 곁에 있어주는 다정함과 한 발 물러서 주는 배려가 함께 필요하다는 사실을 남해의 소란스러운 일상이 가르쳐준다.

그러나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에는 적절한 거리 이상의 조건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식사를 준비하고, 공간을 청소하고, 손님을 맞이하며, 서로의 불편을 살펴야 한다. 저자가 몸담은 작은 책방 역시 누군가의 수고 없이는 하루도 굴러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처음에는 임금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겼던 노동이 점차 인정과 보상의 문제로 이어지고, 매출과 북토크를 둘러싼 부담은 좋아하는 일을 지속하는 기쁨마저 잠식한다.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에는 구체적인 노동이 수반되며, 그 노동을 지속하려면 돌보는 사람의 형편도 충분히 살펴야 한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라도 누군가의 희생만으로 유지된다면 언젠가 지치게 마련이다. 애정과 책임이 한 사람에게 쏠리지 않을 때 오래도록 함께할 힘이 생긴다. 『책방과 무릎들』은 이러한 현실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기꺼이 수고를 감수하는 순간들의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

관계의 어려움은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의 한계에서도 비롯된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에는 예민하지만, 자신이 무심코 건넨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상처를 입혔는지는 뒤늦게 깨닫곤 한다. 김소민은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모멸에 대한 두려움을 숨기지 않는다. 상대의 태도에서 무시의 기색을 읽어내고, 서운함을 쌓아두다가 감정이 터져 나오는 순간까지 자신의 불편한 내면을 드러낸다. 동시에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가볍게 대했던 경험도 돌아본다. 자기 마음의 상처에만 시선을 두고 있을 때는 타인의 사정을 충분히 살피기 어렵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판단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상대의 두려움과 서운함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저자의 고백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깔끔하게 정리하거나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했다고 선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의심하고 질투하며 옹졸해지는 자신을 인정하는 태도에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대하는 정직함이 있다. 그 솔직함은 웃음을 자아내고, 누구나 비슷한 마음을 품어본 적 있다는 사실에 은근한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살아온 환경도, 익숙한 생활 방식도,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남해에서의 갈등과 책방을 떠나는 경험, 새로운 공유공간을 만들어가는 시도는 이러한 차이를 안고서도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서운함에 등을 돌렸다가도 다시 마주 앉아 밥을 나누는 일이 그곳에서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된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언제나 일정할 수 없고, 그때마다 서로에게 허락되는 자리 또한 달라진다. 이때 책의 부제인 ‘성기게 엉기는 남해살이 이야기’가 한층 다정하게 읽힌다. 성기다는 것은 서로의 사이에 빈틈이 있다는 뜻이고, 엉긴다는 것은 그 빈틈을 사이에 두고도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억지로 채우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의 외로움을 모두 덜어줄 수는 없어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고, 마음의 모양이 달라도 내민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은가.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다가 서로에게 필요한 순간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남해의 이웃들은 그렇게 완벽한 이해 없이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간다.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무릎’은 이러한 관계를 가장 구체적인 신체의 언어로 표현한다. 무릎은 누군가가 몸을 기대어 쉬는 자리가 되지만, 동시에 몸의 무게를 견디고 움직임을 지탱하는 관절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기대고 싶은 순간이 있고, 누군가를 받쳐주어야 하는 순간도 찾아온다. 그러나 타인의 무게를 감당하는 무릎에도 피로가 쌓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몽덕이와 남해의 이웃들이 저자에게 내어준 자리는 서로의 취약함을 인정하며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곳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없지만, 혼자 감당하기 벅찬 순간에 조금의 무게를 나누어 질 수는 있다. 잠시 기대어 쉬고, 다시 자기 발로 일어설 수 있도록 곁을 내어주는 일. 오래도록 혼자 버텨온 사람에게는 그 잠깐의 쉼이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된다. 누군가의 무릎에 기대어 한숨 돌리고 나면, 다시 걸어갈 힘도 조금은 생길 테니. 남해의 사람들은 오늘도 서로에게 투덜거리고 웃음을 터뜨리며 제각기 서툰 걸음으로 하루를 건너고 있을 것이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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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은 계절보다 늦게
오윤희 지음 / 리프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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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있다는 사실과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고향이라는 말에는 지리적 좌표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어떤 이에게 국경은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계이고, 다른 이에게는 일생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한 번의 정치적 결정으로 수많은 사람이 조상의 땅에서 추방되고, 그 후손들은 자신이 직접 떠나온 적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어떤 기억은 당사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다음 세대의 언어와 습관 속에 스며들고, 어떤 상실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정체성에까지 흔적을 새긴다. 그렇다면 인간이 고향이라고 부르는 곳은 어디까지 자신의 것일 수 있을까. 오윤희의 장편소설 『작별은 계절보다 늦게』는 그렇게 역사의 바깥으로 떠밀린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발견한 친숙함을 통해, 인간에게 소속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색한다.

2000년 겨울,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숲에서 북한 출신 벌목공 영호와 고려인 4세 소냐가 만난다. 1937년 스탈린 정권은 일본의 첩자 침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소련 극동 지역의 고려인 약 17만 2천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며칠의 통보만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은 열차에 실려 낯선 땅으로 향했고, 그 추방의 역사는 후손들의 정체성에도 깊이 새겨졌다. 한편 북한은 외화벌이를 위해 소련과 러시아의 벌목장으로 노동자들을 보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고된 노동과 통제를 피해 작업장을 탈출하기도 했다. 영호는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났지만 낯선 땅에서도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소냐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살아가면서도 어디에 자신의 뿌리가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두 사람이 짊어진 역사의 무게는 서로 다르지만, 어느 곳에서도 온전한 안식을 얻지 못한다는 고독은 닮아 있다. 소설은 이들의 만남을 통해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개인의 감정과 연결한다. 국가가 결정한 경계는 지도에서 끝나지만, 그 경계의 영향은 사람들의 일상과 관계,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침투한다. 개인이 겪는 소외의 배후에 얼마나 오랜 역사가 축적되어 있는지 두 인물의 삶이 증언하고 있다.

독일 출신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겪는 권리의 상실을 논하며 ‘권리를 가질 권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권리를 선언하는 언어보다 그 권리를 실제로 보장하고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정치적 소속의 조건이었다.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존엄과 자유가 보장되리라는 믿음은 정치적 공동체의 보호를 상실하는 순간 취약해진다. 영호가 처한 현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구체적인 삶의 조건으로 드러낸다. 위험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자유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어디에 머물 수 있는지, 자신의 이름으로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조차 불확실한 사람에게 국경 너머의 세계는 또 다른 위협이 될 수 있다. 소냐가 경험하는 소외와 영호의 법적·정치적 불안정성은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에서 비롯되었지만, 두 사람 모두 역사적 조건이 개인의 정체성과 소속감에 깊이 관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소설 속 고향은 그리운 장소인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자리를 보장받기 위해 끊임없이 협상해야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익숙한 눈빛을 발견한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소속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는 순간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인간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 타인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 연결이 끊어진 자리에서는 익숙한 언어조차 낯설어지고, 오랫동안 살아온 공간도 온전한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충분히 자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도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살아갈 토양이 필요하다. 소냐와 영호에게 사랑은 낯선 세계에서 잠시나마 그러한 토양을 발견하는 경험이다. 서로의 결핍을 이해한다는 사실이 두 사람 사이에 친밀함을 만들어내고, 고향이라는 말은 어느새 지리적 공간을 넘어 한 사람의 존재와 연결된다.

그러나 누군가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안식을 타인의 존재에 의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신이 속할 자리를 발견하는 일은 아름답지만, 인간의 관계에는 언제나 서로 다른 기억과 욕망이 개입한다. 사랑이 깊어진다고 해서 두 사람이 완전히 동일한 세계를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조차 상대의 내면에 닿을 수 없는 순간이 존재한다. 이때 소설이 제시하는 이방인의 의미는 역사적 추방의 경험을 넘어 친밀한 관계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같은 공간에서 오랜 세월을 공유하더라도 마음의 거리가 저절로 좁혀지지는 않으며, 한 사람에게 소중한 기억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고독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랑의 깊이를 가늠하는 일은 서로가 감당해 온 외로움을 이해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작품은 소냐와 영호가 공유한 특별한 감정에만 시선을 집중하지 않고, 그들 곁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의 내면까지 살핀다. 악셀 호네트는 『인정을 위한 투쟁』(1992)에서 사랑을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는 중요한 인정 관계로 설명했다. 여기서 인정은 상대를 단순히 애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을 넘어 그의 고유한 감정과 필요를 존중하는 태도와 관련된다. 소냐의 남편 파샤라는 인물을 통해 사랑의 문제는 누가 더 오랫동안 곁에 있었으며 누구의 감정이 더욱 강렬했는지를 판별하는 일에서 벗어난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그의 외로움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고, 오랜 동행 속에서도 상대가 충분히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다.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도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랑이 얼마나 복잡한 상호 이해의 과정인지를 보여준다.

더욱이 사람들은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한다. 누군가에게 지나간 관계는 소중한 청춘의 일부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그 기억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타인의 영역이다. 기억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감정에 따라 새롭게 해석된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내면에서 여전히 생생한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의미로 존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소설 속 25년이라는 간극은 그러한 기억의 비대칭성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낸다. 같은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도 서로 다른 과거가 축적되고, 그 기억들은 현재의 관계에 각기 다른 무게로 작용한다. 인간은 자신의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 기억을 새롭게 이해하기도 한다. 사랑은 그렇게 서로 다른 과거를 지닌 두 사람이 각자의 경험을 존중하며 하나의 현재를 공유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나간 계절은 인간에게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오는가. 작품에서 계절의 반복은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의 비가역성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룬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찾아오지만 그 계절을 맞이하는 사람은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2000년의 겨울과 2025년의 봄 사이에는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지나온 나날들이 놓여 있다. 그사이 각자의 삶에는 새로운 관계와 책임, 오래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상들이 쌓여간다.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조차 그 모든 세월을 통과한 현재의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과거를 되돌리는 대신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 그 사랑을 경험했던 자신 사이에도 스물다섯 해의 거리가 생겨난다.

어느 계절에 속했던 사람들은 그 계절이 지나간 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간은 태어난 땅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의 곁에서도 이방인이 될 수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한때 자신이었던 사람조차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자연의 계절은 일정한 질서에 따라 순환하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달력으로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른다. 어떤 겨울은 눈이 모두 녹은 뒤에도 계속되고, 어떤 봄은 이미 도착했으나 아직 봄으로 불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오래전의 이별이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얼굴로 찾아오기도 한다. 떠나온 장소와 헤어진 사람, 그 시절의 자신을 하나씩 떠올리는 동안 서로 다른 시간들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뒤섞인다. 계절은 이미 여러 번 바뀌었는데, 아직 어느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마음. 그렇게 뒤늦게 도착한 작별 앞에서, 사람은 지나온 계절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

✏️도서출판 포레스트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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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증인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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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다면, 그날의 진실도 되찾을 수 있을까. 건물의 위치와 거리의 폭, 가로등의 밝기까지 똑같이 재현한다면 인간의 기억도 최초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공간을 되돌리는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도 그곳에 다시 선 인간은 이미 과거의 자신과 다르다. 기억에는 이후의 경험이 스며들고, 확신에는 타인의 말과 사회적 판단이 덧씌워진다. 니시무라 교타로의 『7인의 증인』은 이러한 인간 인식의 취약성을 기묘하고도 대담한 실험으로 형상화한다. 한 번 내려진 판결을 다시 검토하기 위해 살인 현장 전체를 복제한다는 발상. 그 무대 위에서 가장 먼저 의심받는 것은 범인의 정체보다 인간이 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경시청의 도쓰가와 경부는 느닷없이 납치되어 외딴섬에서 깨어난다. 그곳에는 1년 전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거리가 정교하게 재현되어 있고, 당시 법정에서 증언했던 일곱 사람이 함께 끌려와 있다. 이 모든 일을 계획한 사사키는 살인죄로 복역하다 사망한 아들의 결백을 밝히려는 노인이다. 그는 증인들에게 당시의 위치로 돌아가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다시 진술하도록 강요한다. 이미 법적으로 종결된 사건을 사적인 법정에 소환한 것이다. 그러나 증언이 반복될수록 과거의 확신은 서로 충돌하고, 새로운 살인까지 발생하면서 섬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실험실이자 또 다른 범죄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사실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한다. 직접 보았다는 경험은 전해 들은 이야기보다 확실해 보이며, 생생한 기억은 종종 객관적인 사실과 혼동된다. 그러나 목격은 언제나 제한된 위치에서 이루어진다. 누군가는 창문 너머로 사건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어두운 거리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을 포착한다. 각자가 확보한 정보는 하나의 사건에 속하지만 그들이 바라본 장면의 범위와 놓친 사실은 서로 다르다. 무엇보다 목격자가 자신이 본 장면에 부여한 의미와 실제로 발생한 사건 사이에는 해석의 거리가 존재한다. 『7인의 증인』은 그 거리를 증인들의 진술과 물리적으로 복원된 현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심리학자 프레더릭 바틀릿은 『기억』(Remembering, 1932)에서 인간의 기억이 경험을 그대로 저장하고 재생하는 수동적인 기능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의 연구에서는 이야기를 반복해 회상하는 과정에서 낯선 요소들이 생략되거나 익숙한 서사에 맞춰 변형되는 양상이 관찰되었다. 우리는 기존의 지식과 기대, 익숙한 사고의 틀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재구성한다. 따라서 기억의 생생함과 정확성은 반드시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작품 속 증인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신의 진술을 확신하는 모습은 이러한 기억의 특성을 드러낸다. 특히 사진이라는 시각적 기록조차 촬영된 순간의 전후 관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인상적이다. 카메라는 눈앞의 장면을 고정할 수 있지만, 그 장면이 어떤 행위의 시작인지 결과인지는 별도의 검증을 요구한다. 정확하게 보존된 이미지조차 잘못된 해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개인의 불완전한 인식이 사회적 판단의 권위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한 사람의 기억은 오류를 포함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비슷한 내용을 증언하면 그 주장은 객관적인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기 쉽다. 서로 독립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진술들이 동일한 전제에 의존하고 있다면, 증인의 숫자가 늘어나도 판단의 정확성이 높아진다고 보장할 수 없다. 오히려 다수의 동의가 불확실성을 은폐하고, 최초의 추정을 반박하기 어려운 확신으로 굳힐 수 있다. 1985년 미국에서 성폭행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로널드 코튼은 두 피해자의 범인 지목에도 불구하고, 1995년 DNA 검사를 통해 결백이 밝혀졌다. 이렇듯 목격자들이 확신했던 기억과 실제 사건 사이의 불일치는 증언의 일관성이나 단호한 태도만으로 사실의 정확성을 보증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소설은 일곱 사람의 증언을 차례로 해체하면서, 증거의 양보다 그것이 형성되고 검증된 과정을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철학자 미란다 프리커는 『인식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 2007)에서 사회적 편견이 한 사람의 증언에 부여되는 신뢰도를 부당하게 낮출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증언적 부정의라 명명하며, 발언자의 사회적 위치나 정체성에 대한 선입견이 지식의 전달 과정에서도 차별을 발생시킨다고 보았다. 살인죄로 기소된 청년의 결백 주장과 그를 지목한 목격자들의 진술은 과연 동일한 엄격함으로 검증되었을까. 더구나 피고인에게 불리한 과거의 행적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현재의 혐의를 판단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누군가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일에는 사실관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 인물의 이미지가 개입한다. 이때 한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평가를 넘어 자신의 말을 인정받기 어려워진다. 증언의 신뢰성을 판단하는 권한이 곧 타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법정은 이러한 인간적 오류를 통제하기 위해 증거와 절차를 마련한다. 하지만 제도적 절차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오판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판결은 제도적 권위를 지니지만, 그 권위의 정당성은 증거의 충분성과 검증의 엄밀함에 의존한다. 『7인의 증인』에서 이미 종결된 사건이 다시 심판대에 오르는 것은 그 판결을 지탱했던 근거들이 여전히 검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확정된 판단을 존중하는 일과 그 판단의 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은 양립할 수 있다.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처벌의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사법적 확신에는 더욱 무거운 증명의 책임이 따른다.

사사키의 행동은 이러한 사법적 문제의식에 복잡한 윤리적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들과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그는 뒤늦게 찾아온 부성의 책임을 막대한 재산과 극단적인 계획으로 대신하려 한다. 무인도에 복원된 거리는 아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법정인 동시에, 아버지로서 자신의 부재를 보상하려는 속죄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절박함이 납치와 협박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사사키는 부당하다고 여기는 판결을 바로잡으려 하면서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새로운 위험을 초래한다.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법적 절차의 바깥에서 무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때, 그 행위는 또 다른 심판의 대상이 된다. 소설은 사사키의 고통을 이해할 여지를 제공하면서도 그가 선택한 방식에 대한 윤리적 판단까지 독자에게 위임한다.

이러한 철학적 긴장은 작품의 독창적인 추리 형식과 정교하게 맞물린다. 무인도라는 폐쇄된 공간, 제한된 인물, 과거 사건의 재연, 이어지는 새로운 살인이라는 장치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도쓰가와가 증언의 모순을 검증하는 과정은 독자로 하여금 목격자의 시선과 사건 현장의 구조를 반복해서 대조하게 만들고, 익숙한 장면을 전혀 다른 가능성 아래 다시 살펴보도록 유도한다. 특히 인공적으로 조성된 거리는 사건을 설명하는 배경을 넘어 추리의 논리를 가시화하는 무대가 된다. 일본 본격 미스터리가 지닌 기발한 발상과 치밀한 논리적 검증의 매력이 이 설정에 응축되어 있다. 추리의 즐거움이 인간의 인식에 대한 철학적 의심과 결합하면서 작품의 지적 긴장도 한층 깊어진다. 철도 미스터리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니시무라 교타로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동의 속도보다 한 장소에 인물들을 고립시켰을 때 발생하는 논리적 긴장에 집중한다. 공간 전체를 하나의 추리 장치로 활용하는 과감한 발상에서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풍부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7인의 증인』이 다루는 문제는 살인사건의 진범을 밝혀내는 일에서 인간이 타인의 죄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검토하는 일로 확장된다. 과거의 거리는 복원할 수 있어도 그날의 목격을 최초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는 없다. 인간이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불완전한 기억과 해석, 사회적 편견과 제도적 판단이 개입한다. 그럼에도 진실을 향한 검증을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은 우리의 확신이 누군가의 자유와 존엄, 나아가 생사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시무라 교타로는 일곱 개의 증언을 통해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쉽게 잘못된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타인을 심판하는 권한 앞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윤리임을 일깨운다.

✏️도서출판 블루홀식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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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사랑 이야기 ㅣ 망한 OO 이야기
안서인.한승민.조은혜 지음 / 온프북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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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서랍장을 열어 사랑이라고 적힌 칸을 뒤적여 보자. 먼지 낀 기억들 사이로 망한 사랑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한밤중 불쑥 떠올라 멀쩡한 이불을 걷어차게 만드는 사랑, 오래전에 헤어졌으면서도 슬픔만은 유통기한을 잊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사랑. 누군가는 그때의 자신을 철없었다고 꾸짖고, 누군가는 지금이라도 상대에게 따지고 싶은 말들을 머릿속에서 연습한다. 그런데 그토록 확신에 차서 실패라 명명한 관계를 상대방도 같은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한 사람의 흑역사가 다른 사람에게는 제법 근사한 청춘의 한 페이지였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사랑의 성적표는 처음부터 공정성을 의심받는다.

안서인, 한승민, 조은혜의 『망한 사랑 이야기』는 세 작가가 자신의 연애사를 다시 꺼내어 쓴 에세이집이다. 안서인의 〈해피엔딩〉에서 첫사랑 N의 애정은 화자에게 확신보다 해명해야 할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상대는 끊임없이 사랑을 증명했지만,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은 좀처럼 자라지 못했다. 한승민의 〈관계의 환상통〉에서는 동경으로 시작된 관계가 죄책감과 용서의 기묘한 위계를 형성한다. 상대의 이해가 깊어질수록 자신은 더욱 비참해지는 역설 속에서 첫사랑의 흔적은 환상통으로 지속된다. 조은혜의 〈나는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 잠을 잤다〉에서는 혼자 잠들기 위해 찾았던 모텔이 외도의 증거로 오인된다. 화자는 자신에게 씌워진 죄목을 부정하면서도 관계를 끝내기 위해 진실을 숨겼던 책임까지 회피하지 않는다. 세 편은 서로 다른 경위로 관계의 파국을 통과하지만, 공통적으로 사랑을 경험하던 당시의 자신과 그 경험을 돌아보는 현재의 자신을 마주 세운다. 서로 다른 두 시점의 화자가 같은 사건을 두고 벌이는 조용한 논쟁이 이 책의 중요한 동력이다.

사랑의 성패를 판정하는 일에는 묘한 계산법이 적용된다. 오랜 세월 지속된 관계에는 성공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이별한 관계에는 그동안 축적된 애정까지 소급하여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뼛속까지 문과지만 수식으로 옮기자면 ‘(두 사람의 애정 × 함께한 시간) × 결말(이별이면 0) = 사랑의 성적’ 정도가 되겠다. 세상에, 결말 하나로 그동안의 계산을 몽땅 0점 처리하다니. 그러나 헤어졌다는 사실이 함께 웃었던 날들의 가치를 지우거나, 당시의 선택이 지녔던 진정성까지 무효로 만들 수 있을까. 실패한 결말은 그 관계의 일부일 뿐, 지나온 모든 순간을 대표할 자격까지 갖지는 못한다. 어떤 사랑은 헤어졌기에 비극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랑은 헤어짐으로써 더 큰 상처를 피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망한 사랑’이라는 판정에는 언제나 미처 청취하지 못한 또 하나의 증언이 존재한다. 사랑의 오답노트를 작성하기 어려운 까닭은 애초에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문제를 풀고 있었을 가능성마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불완전한 판정에는 상대의 증언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자신 또한 제대로 변론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별 이후의 기억은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의 감정보다 결말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한때 절실했던 기다림은 어리석은 미련으로, 다정했던 친밀함은 고통의 전조로 다시 읽히기도 한다. 심리학자 프레더릭 바틀릿이 연구한 재구성적 기억의 특성처럼, 인간의 기억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저장 장치가 아니다. 회상하는 사람은 익숙한 이야기의 틀에 맞추어 어떤 세부를 덜어내고, 때로는 빠진 맥락을 스스로 메우기도 한다. 현재의 감정과 지식이 회상에 개입하고,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 오래전 장면의 의미를 바꾸어 놓는다. 기억의 서랍장에 들어 있던 물건은 그대로인 듯한데, 그것을 꺼내 든 사람의 손길이 달라진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후회가 그때의 확신보다 반드시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후회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지혜를 과거의 자신에게 요구하는 데 능숙하다. 그때 조금만 덜 불안했더라면, 그 말을 삼켰더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가 사유했던 시간의 비가역성은 이런 가정법의 부질없음과 애처로움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한 번 일어난 사건은 무효로 돌릴 수 없으며, 그 사건을 통과하기 전의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지나간 순간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데, 인간은 그 순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갈림길을 숱하게 만들어낸다. 그러나 가정법으로 구성된 과거에는 현실이 감당해야 했던 우연과 불확실성이 생략되어 있다. 지금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과거의 자신에게 부여한 채 다른 선택을 요구하는 일은 어쩐지 불공평하다. 당시의 자신은 그때 주어진 감정과 이해의 범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뒤늦은 성찰이 의미를 얻으려면 지나간 자신을 유죄로 확정하는 일만큼이나 그가 무엇을 알지 못했는지 살피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사랑이 끝난 뒤에도 그 사랑을 거듭 이야기할까. 이미 잃어버린 사람을 되찾을 수 없고, 언어로 되감은 장면이 실제 과거를 수정해주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사랑하는 동안에는 상대의 표정 하나, 답장의 간격 하나에도 온 신경을 쏟으면서 정작 그 관계 속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에게 버림받는 일이 두려웠는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신의 판단이 두려웠는지조차 구별하지 못한 채 관계를 통과하기도 한다. 그러다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그제야 자기 행동의 낯선 동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사랑을 경험했던 사람과 그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은 동일한 인물이지만, 둘 사이에는 적지 않은 세월과 서로 다른 앎이 가로놓여 있다.

빌헬름 딜타이의 해석학에서 체험은 표현을 거쳐 다시 이해의 대상이 된다. 그에게 체험의 표현은 당사자조차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내면의 맥락을 드러내는 통로이기도 했다. 마음속에서 뒤엉켜 있던 감정은 언어의 형태를 얻으면서 비로소 살펴볼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망한 사랑 이야기』의 세 작가 역시 지나간 관계를 기록하면서 당시의 자신을 다시 읽는다. 특히 안서인은 문예창작 수업에서 N과 재회하는 허구를 썼던 과거를 회상하며, 이번에는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는 결말을 선택한다. 한때는 사랑의 성취를 위해 만들어냈던 문학적 우연을 스스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한승민은 첫사랑의 흔적을 환상통에서 성장통으로 다시 해석하고, 조은혜는 상대가 자신에게 내린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으면서 자신의 실제 책임을 인정한다. 세 사람이 새롭게 구성하는 결말은 과거의 상처를 지우거나 지난 사랑을 성공으로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겪은 일을 어떤 언어로 책임지고 이해할 것인지 결정하는 행위다.

그러나 글쓰기가 과거를 해명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과거의 최종 판결권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한다. 사랑은 두 사람이 경험했으나 회고록의 문장은 한 사람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서술자는 어떤 장면을 보존할지, 어떤 대화를 생략할지, 누구의 침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결정한다. 그렇게 탄생한 이야기는 분명 자신의 경험에 관한 진실을 담고 있지만, 상대가 경험했던 사랑의 전모까지 대변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상처였던 일이 상대에게도 동일한 무게였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랑에 관한 회고가 정직해지는 순간은 모든 정황을 완벽하게 설명할 때보다 자신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인정할 때 찾아온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망한 사랑 이야기』라는 제목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세 작가가 적어 내려간 것은 사랑의 실패를 입증하는 증거 목록일까, 한때 자신의 세계를 이루었던 관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기록일까. 오답노트라는 표현에는 틀린 선택을 찾아내 다음에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인간의 관계에는 같은 조건으로 다시 풀 수 있는 문제가 드물다. 상대도 달라지고 자신도 변하며, 사랑을 둘러싼 사정 역시 매번 새롭게 형성된다. 그때의 오답이 다른 관계에서는 정답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실패를 기록하는 목적을 더 나은 연애를 위한 정답 수집에 한정한다면, 그 기록은 인간의 복잡성을 또 한 번 간추려버리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랑은 오래 지속되었어도 자신을 잃게 만들었고, 어떤 사랑은 짧게 끝났어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상처가 성장의 필수 조건인 양 실패를 미화할 필요도 없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경험을 이해하려 애쓰는 일과 그 경험을 좋았던 일로 바꾸는 일은 서로 다르다. 이미 발생한 상처의 크기를 줄이지 않으면서도 그 관계에 존재했던 다정함을 인정할 수 있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비겁함을 돌아볼 수도 있다. 하나의 관계를 성공과 실패라는 두 칸에 억지로 밀어 넣는 동안, 그 사이에서 숨 쉬던 복잡한 감정들은 갈 곳을 잃는다.

사랑의 결말에는 마침표가 찍히지만, 그 사랑을 이해하는 문장에는 정해진 완성 시점이 없다. 한때는 창피해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장면을 훗날 조금 덜 매정한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추억이라 믿었던 순간에서 자신이 감당했던 부당함을 뒤늦게 발견할 수도 있다. 세 작가가 적어 내려간 문장들은 그렇게 한 사람의 과거를 향한 늦은 독해가 된다. 서랍장 깊숙이 밀어 넣었던 연애의 기록을 꺼내면, 오래 묵은 먼지와 함께 당시에는 차마 읽지 못했던 문장들이 쏟아진다. 그중에는 아직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순간이 있고, 이제야 잘못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순간도 있다. 먼지를 털어낸 자리에 드러나는 것은 사랑의 정답지보다 훨씬 난해한 필체다. 한때 누군가를 사랑하느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읽히지 못했던 사람의 필체.

✏️도서출판 온프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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