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순간을 기억해?
숀 마이클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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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평생을 살아온 한 인간과, 언어를 끝없이 생산하는 존재가 마주 앉는다. 이 기묘한 장면은 단순한 대비를 넘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언어의 기원을 다시 흔든다. 말은 본래 삶을 통과하며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라 믿어왔기 때문이다. 어떤 문장은 시간을 견디며 겨우 건져 올려지고, 또 어떤 문장은 그 시간을 거치지 않은 채 순식간에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는 일은 창작을 바라보던 오래된 감각 또한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언어가 태어나는 순간은 곧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어온 방식을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창작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말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는가. 그리고 그 ‘자신의 것’이라는 감각은 정말로 붙잡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시를 쓴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몸부림으로 생각해왔다. 이해란 단순한 인식이 아닌 몸을 통과해 남은 흔적에 가깝다. 감각이 지나간 자리, 감정이 오래 머물다 떠난 자리에서 비로소 말은 형태를 얻는다. 그래서 문장은 늘 완전하지 못하고,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온도를 가진다. 완벽하게 설명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여백이야말로 살아 있는 언어의 증거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가 만들어낸 문장이 그 온도를 닮아 있을 때, 익숙하게 믿어온 질서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경험 없이도 닿을 수 있는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 위에 서 있는가. 그 기반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왜 그것에 마음을 건네는가. 이해하지 못한 채 만들어진 말이 이해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언어에 기대어 살아온 시간들마저 낯설게 되돌아온다.

이해는 무엇으로 증명되는 것일까. 이해했다는 감각은 언제나 사후적으로만 확인된다. 이미 지나간 감정들을 더듬으며, 그것이 나의 것이었다고 겨우 확신하는 식이다. 이해는 순간이 아닌 해석이며, 살아가는 동안이 아니라 지나온 뒤에야 겨우 형태를 갖춘다. 그렇다면 이해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문장과, 이해했다고 믿으며 써 내려간 문장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남는가. 표현은 종종 감정을 앞지르고, 때로는 감정을 대신해버린다. 말해진 순간 감정은 이미 다른 것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언어는 의미를 담는 그릇이라기보다, 의미가 있었던 자리를 모양으로만 남겨두는 껍질에 가깝다. 그 껍질이 충분히 정교하다면 그 안이 비어 있다는 사실조차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의미를 이해한다기보다, 의미처럼 보이는 형식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익숙함 속에서 우리는 이해했다는 착각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남은 언어의 공허함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감각을 다시 일깨운다. 이해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이해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사실. 완벽하게 전달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끝내 말을 건네는 행위가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 말은 언제나 미끄러지고, 감정은 늘 남겨진다. 그 남겨진 부분을 붙잡기 위해 우리는 다시 문장을 쓴다.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는 행위처럼, 언어는 늘 실패를 전제로 반복된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게 가까워지기도 하고, 끝내 닿지 못한 채 멈춰 서기도 한다. 언어는 이해를 완성하기보다, 이해에 이르지 못한 채 머무르게 한다. 언어는 도달이 아닌 반복이며, 완성이 아닌 계속해서 어긋나는 시도이다.

이해와 표현 사이를 오가며 끝내 겹쳐지지 않는 두 층위. 그 사이에서 문장은 태어나고, 또 사라진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말은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지는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음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태도, 그 불완전함을 끌어안은 채 말을 건네는 일이야말로 언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다. 언어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는 것 곁에 머물기 위해 존재한다. 그 곁에 머무르는 시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해로 남는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함을 견디기 위해 말을 이어간다. 말은 진실을 담지 못한다. 다만, 끝내 닿지 못한 진실의 주변을 오래 맴돈다.

이 책은 언어를 다루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의 말을 끝내 확신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물러본 사람에게 천천히, 그러나 깊게 스며들 것이다. 쓰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며, 문장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남은 침묵까지 끌어안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또한 이해한다는 감각이 언제나 뒤늦게 따라온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껴온 사람에게도 낳설지 않게 닿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 곁에 머무는 시간을 견디려 하는 이들에게. 말로 다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 알지 못한 채 머무는 시간을 견디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문장을 붙잡아온 이들에게 이 이야기는 곁을 내어줄 것이다.

✏️도서출판 문학수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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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으로 들어가기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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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끝났다는 사실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끝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감각이다. 사라진 자리는 비어 있지 않고,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무게로 채워진다. 그래서 상실은 하나의 사건이 아닌 시간을 따라 번지는 상태에 가깝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잔향처럼, 이미 끝난 순간이 계속해서 현재를 건드린다. 마음은 그 상태를 감당하지 못할 때 방향을 잃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에도 머물 수 없어서. 그때 비로소 인간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떠남은 더 이상 한 자리에 있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하는 방식에 가깝다. 그것은 이미 밀려난 자리에서 겨우 쥐게 되는 또 다른 형태의 생존이기도 하다.

그 움직임의 의미를 따라가는 책이 바로 이 작품이다. 삶이 무너진 이후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그 이어짐 속에서 인간은 어떤 태도로 존재할 것인가를 묻는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은 종종 언어보다 앞서 몸을 밀어낸다. 익숙한 장소에서 벗어나고, 낯선 공기 속으로 들어가고, 아무 연고 없는 곳에 스스로를 내려놓는다. 그러나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감정의 성질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이 낯설어졌을 때, 내부의 감각은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외부의 소음이 줄어들수록 마음속에 남아 있던 것들이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갖기 시작한다. 그것은 설명되기보다 먼저 느껴지고, 이해되기보다 먼저 견뎌야 하는 것들이다.

그 목소리는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성질을 지닌다. 그래서 인간은 타인을 향한다. 이 작품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관계들은 특별한 이름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운명도, 구원도 아니다. 다만 어떤 순간에 우연히 겹쳐진 시간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누어지는 아주 사소한 온기들이다.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시간, 별다른 이유 없이 말을 건네는 순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있게 되는 밤. 그런 장면들은 삶을 극적으로 바꾸지 않으면서도 이상할 만큼 깊이 남는다. 인간은 완전히 회복된 이후에야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만은 아니다. 어딘가 부서지고 구멍난 채로도 타인의 온기를 통해 잠시 호흡을 이어가는 존재이다. 어쩌면 관계란 삶을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미세한 균형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은 앞으로 흐르지만, 감정은 종종 뒤에 머문다. 이미 지나간 일들이 현재의 감각을 흔드는 방식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이유 없이 되살아나고, 이미 끝난 장면들이 현재를 다시 점유한다. 그것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형으로 존재하는 경험이 된다. 이때 인간은 두 가지 선택 앞에 놓인다. 그것을 밀어내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끌어안은 채로 계속 걸어갈 것인가. 작가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이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만이 조금씩 달라질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변화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미세한 반복 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진다.

완전히 온전해진 이후에야 우리는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온전해지지 못한 상태에서도 이미 삶은 계속되고 있을까. 인간은 늘 준비된 상태에서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어지러운 순간에, 가장 불완전한 상태로 무언가를 붙잡는다. 그 선택은 서툴고 흔들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미완의 결심 속에서 삶은 조금씩 방향을 얻는다. 방향이란 언제나 또렷하게 주어지기보다,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폭풍 속을 통과하는 배처럼, 완벽한 항로를 알지 못한 채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듯이. 그리고 어쩌면 삶이란, 그렇게 불완전한 상태로도 계속 선택해나가는 일 자체인지도 모른다.

상실 이후에도 감정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사람에게, 한 번 무너진 삶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겪어본 사람에게 이 책을 건넨다. 관계가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왜 여전히 누군가의 곁을 필요로 하는지 오래 고민해본 이들에게도. 그리고 완전히 괜찮아지지 못한 자신을 끝내 외면하지 못한 채, 그 불완전함을 안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순간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은 폭풍 속의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삶이란 온전해진 이후에야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 위에서도 이미 계속되고 있으니. 당신들은 앞으로도 여전히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방식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다시 붙잡아야 하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도서출판 다산책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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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혜영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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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언제부터 값으로 환산될 수 있게 되었을까. 어떤 삶은 너무 가난해서, 선택이 아닌 삭제된 가능성 위에 서게 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인간은 스스로를 결정하기보다 주어진 조건 안에 놓인다. 삶은 점점 계약의 형식을 닮아가고, 몸은 하나의 기능으로 호출된다. 그러나 계약이라는 형식은 언제나 깔끔한 문장으로 완결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감정은 끝내 문장처럼 정리되지 않는다. 남겨지는 것은 늘 설명되지 않는 흔적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애초에 인간이 단순한 조건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한다. 때로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남아, 아무리 정교한 조건과 문장이 덧붙여지더라도 우리가 끝내 무엇이 될 수 없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대리모라는 제도는 생명을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이해하려 한다.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 수정, 임신, 출산, 그리고 인도. 각각은 분명히 구분되고 역할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경계 사이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스며든다. 하나의 몸을 통과하는 동안, 생명은 이미 누군가의 기대와 두려움,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감각들을 함께 품는다. 몸은 분명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까지 완전히 목적에 종속되지는 않는다. 그 틈에는 끝내 기능으로 환원되지 않는 감정이 남는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묻는다. 생명은 사랑 없이도 완성될 수 있는가. 혹은 사랑이 배제된 자리일수록 더 강하게 사랑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요구는 누구의 몫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피로 이어진다는 믿음은 언제나 관계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듯 보이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오히려 가장 흔들리는 것이 된다. 확실해야 할 것이 불확실해지고, 불확실해야 할 선택이 오히려 관계를 지탱한다. 누군가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끌어안고도 관계를 이어가려 하고, 누군가는 끝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몫을 고른다. 그렇게 관계는 더 이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 위에 놓인다. 주어진 조건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안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는 결국 스스로의 몫으로 남는다. 관계는 결국 선택의 다른 이름이 되고, 그 선택은 누구에게도 완전히 전가될 수 없다. 인간은 완전히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끝내 선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선택 이후에 남겨지는 책임은 각자의 삶에 스며든다.

이 작품을 읽는 일은, 어떤 판단에 도달하기보다 판단 이전의 감각에 오래 머무는 경험에 가깝다. 옳고 그름을 나누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얽혀 있고, 쉽게 이해했다고 말하기에는 자꾸만 어긋나는 지점이 남는다. 그래서 독자는 해석하기보다 되묻게 될 것이다. 왜 이 장면이 불편한지, 왜 이 선택이 납득되지 않는지. 그 질문을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규정되지 않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해는 종종 결론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또 다른 질문의 시작이 된다.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머무는 자리에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의 개념이 아닌 하나의 존재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순간, 타인의 삶 또한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의 장면이다. 모든 계약과 조건이 끝난 자리에서 한 사람은 끝내 나누지 못한 것을 선택한다. 그것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위에 내려앉는다. 인간은 언제나 계산된 선택 속에서도 계산되지 않는 것을 남긴다. 그리고 그 남겨진 몫이야말로 끝내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마지막 흔적이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이유도, 어쩌면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서보다,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서 흔들리는지를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에게 더 깊이 남을 것이다. 인간의 선택이 어디까지 자유로운지, 그리고 그 선택이 누구의 몫으로 남는지를 고민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를 쉽게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관계가 혈연이나 제도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끝내 감당해야 하는 태도 위에 놓인다고 느껴본 이들에게 이 작품은 오래 남는 질문이 된다.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 싶은 사람보다, 무엇이 끝내 설명되지 않는지를 마주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더 어울릴 이야기.



✏️도서출판 해피북스투유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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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라이프 : 글리치
박새봄 외 지음 / 멜라이트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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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까지 세계는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흘러간다. 의심할 이유가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현실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앤솔러지는 그 평온한 표면을 아주 미세하게 건드린다. 설명되지 않는 장면 하나, 어긋난 감각 하나가 스며드는 순간, 익숙했던 삶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글리치’라 불리는 이 미세한 오류는 세계를 무너뜨린다기보다, 더 깊은 층위를 드러낸다. 우리가 믿어왔던 세계는 과연 언제부터 그렇게 믿어지기 시작한 것일까. 우리는 왜 이 삶을 현실이라고 믿어왔는가. 그 오래된 신뢰의 출처는 어디인가.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단단해 보였던 믿음은 단 한 번의 틈 앞에서 흔들린다. 그 틈은 파괴가 아닌 질문이 태어나는 자리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한 번도 스스로를 의심해본 적 없는 세계를 뒤늦게 돌아보게 만든다.

책 속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같은 중심을 향해 기울어 있다. 누군가는 타인이 보지 못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누군가는 하나의 생을 여러 겹의 이야기로 다시 펼쳐 보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시간의 미묘한 어긋남 속에서 자신과 마주한다. 심지어 삶의 끝이라 여겼던 지점에서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지속이 시작된다. 이 모든 순간에는 공통된 정적이 흐른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세계가 더 이상 스스로를 설명하지 못하는 순간. 그 침묵 앞에서 현실은 더 이상 견고한 사실이 아닌 잠정적인 합의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던 것은 어쩌면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지되어야만 하는 균형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한 번이라도 시선이 어긋나는 순간, 그 균형을 쉽게 기울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이때 떠오르는 감각은 낯설다기보다 오히려 지나치게 익숙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해온 어떤 사실에 가까운 느낌. 세계는 하나의 얼굴만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지금의 삶 역시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로 겨우 이어지고 있을 뿐이라는 감각. 우리가 단단하다고 믿어온 현실은, 어쩌면 반복과 습관이 만들어낸 표면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같은 하루가 계속된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해왔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은 무언가를 바꾸기보다, 우리가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부터 되묻게 만든다. 한 번 시선이 흔들리고 나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은 단단해서 유지된 것이 아니라, 의심하지 않았기에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순간부터 세계는 이전보다 조금 더 낯설고, 동시에 조금 더 넓어진다.

무엇보다 마음에 남는 것은, 각각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채로 남겨둔 여백이다. 단편이라는 형식은 이 세계들을 담기에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마치 문이 닫힌 것이 아니라 잠시 덜 닫힌 채로 남겨진 느낌이 든다. 그 틈 사이로 이후의 시간이 스며들고,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 다음을 상상하게 된다. 이야기의 끝이 도착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아쉬움이라는 감정은 단순한 부족함이 아닌, 더 많은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닌, 계속해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삶과 같은 것.

결국 ‘글리치’란 잘못된 작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왔는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사건이다. 매끄럽게 이어지던 현실에 아주 작은 틈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묻기 시작한다. 지금 이 삶이 유일한 것인지, 아니면 수많은 가능성 중 잠시 선택된 경로에 불과한 것인지. 그 질문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대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한 번 흔들린 믿음은 다시 예전처럼 단단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믿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의심하는 감각과 함께 살아가게 되기 때문에. 그 의심은 불안을 남기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만드는 감각이기도 하다.

단편이지만 깊은 여운과 확장성을 지닌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 하나의 세계가 끝난 이후에도 그 다음을 스스로 상상해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또한 익숙한 일상에 균열을 내는 낯선 상상과 사유를 사랑하는 이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굳어버린 감각을 한 번쯤 의심해보고 싶은 이들에게도 잘 어울릴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 질문을 조금 더 깊은 곳까지 끌고 들어갈 것이다.



✏️도서출판 멜라이트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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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의 애인에게
백영옥 지음 / 김영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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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언제나 두 사람의 이야기라고 배워왔다. 서로를 향해 서 있는 두 개의 시선, 그 사이를 채우는 감정의 밀도. 그러나 <애인의 애인에게>는 그 익숙한 구도를 무너뜨린다. 사랑은 결코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같은 사람을 바라보고 있어도 각자가 붙잡고 있는 감정의 결은 끝내 다르다. 사랑은 공유되는 감정이 아닌, 각자가 혼자 감당하는 고유한 경험이다. 서로를 향해 있다고 믿는 순간에도, 사실은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이 어긋남이야말로 사랑의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 어긋남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 애써 같은 이름을 붙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은 각자의 사랑을 할 뿐이다. 한 문장으로 잘라 말할 수 있는 이 진실은, 그러나 쉽게 견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같은 순간을 지나왔음에도, 서로가 전혀 다른 사랑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랑은 더 이상 둘의 언어로 유지되지 못한다. 하나의 감정이라 믿었던 것은, 각자의 내부에서 서로 다른 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이미 끝난 마음을 붙들고 있고, 누군가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감정을 기다린다. 그 미묘한 어긋남은 선택이나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구조에 가깝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랑은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무너진다. 그 엇갈림은 필연에 가깝고, 그래서 더 고요하게 잔인하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끝내 같은 장면을 공유하지 못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처음부터 같은 장면 위에 서 있지 않았던 것에 가깝다. 같은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고 믿는 동안에도, 각자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장면을 살아낸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의 문제로 옮겨간다.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가가 관계의 방향을 결정한다. 자크 라캉이 말했듯, 인간은 스스로 욕망한다고 믿지만, 실은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기에. 이들의 감정은 상대에게 곧장 닿지 않는다. 언제나 한 번 비켜가고, 한 번 늦게 도착한다. ‘애인의 애인’이라는 위치는 그 우회의 궤적이 드러나는 자리이다. 사랑은 대상에 닿기 전에 이미 타인의 시선을 경유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형태를 바꾼다. 그래서 사랑은 충만해지는 대신 점점 더 또렷한 결핍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사랑은 정말 둘만의 세계일까. 사랑은 언제나 제3자를 품고 있다. 이미 지나간 관계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그리고 말해지지 않은 수많은 기억들까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가 지나온 시간과 그를 스쳐간 모든 관계를 함께 마주하는 일이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감정 속으로 계속 스며든다. 그래서 사랑은 단일한 관계가 아니라 여러 겹의 시간이 포개진 상태에 가깝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도, 그 사이에는 이미 수많은 타인의 그림자가 겹쳐져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종종 타인의 자리를 대신 살아가기도 하고, 누군가의 부재를 채우려 애쓰기도 한다. 사랑은 그렇게 나의 감정이면서 동시에 나의 것이 아닌 감정으로 남는다.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외면할 수 없는 마음.


결국 사랑은 두 사람이 완성하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의 시간이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남긴 자국에 가깝다. 한 사람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감정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 이해하지 못했던 사랑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제때 도착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것들과 아직 오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만 희미하게 감지된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감정들 위에 뒤늦게 붙여진 하나의 이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름은 끝내 하나의 의미로 머물지 못한 채, 계속해서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그것이 누구의 것이었는지조차 확정되지 않은 채로.

✏️도서출판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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