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으로 들어가기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언가가 끝났다는 사실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끝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감각이다. 사라진 자리는 비어 있지 않고,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무게로 채워진다. 그래서 상실은 하나의 사건이 아닌 시간을 따라 번지는 상태에 가깝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잔향처럼, 이미 끝난 순간이 계속해서 현재를 건드린다. 마음은 그 상태를 감당하지 못할 때 방향을 잃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에도 머물 수 없어서. 그때 비로소 인간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떠남은 더 이상 한 자리에 있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하는 방식에 가깝다. 그것은 이미 밀려난 자리에서 겨우 쥐게 되는 또 다른 형태의 생존이기도 하다.

그 움직임의 의미를 따라가는 책이 바로 이 작품이다. 삶이 무너진 이후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그 이어짐 속에서 인간은 어떤 태도로 존재할 것인가를 묻는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은 종종 언어보다 앞서 몸을 밀어낸다. 익숙한 장소에서 벗어나고, 낯선 공기 속으로 들어가고, 아무 연고 없는 곳에 스스로를 내려놓는다. 그러나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감정의 성질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이 낯설어졌을 때, 내부의 감각은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외부의 소음이 줄어들수록 마음속에 남아 있던 것들이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갖기 시작한다. 그것은 설명되기보다 먼저 느껴지고, 이해되기보다 먼저 견뎌야 하는 것들이다.

그 목소리는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성질을 지닌다. 그래서 인간은 타인을 향한다. 이 작품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관계들은 특별한 이름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운명도, 구원도 아니다. 다만 어떤 순간에 우연히 겹쳐진 시간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누어지는 아주 사소한 온기들이다.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시간, 별다른 이유 없이 말을 건네는 순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있게 되는 밤. 그런 장면들은 삶을 극적으로 바꾸지 않으면서도 이상할 만큼 깊이 남는다. 인간은 완전히 회복된 이후에야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만은 아니다. 어딘가 부서지고 구멍난 채로도 타인의 온기를 통해 잠시 호흡을 이어가는 존재이다. 어쩌면 관계란 삶을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미세한 균형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은 앞으로 흐르지만, 감정은 종종 뒤에 머문다. 이미 지나간 일들이 현재의 감각을 흔드는 방식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이유 없이 되살아나고, 이미 끝난 장면들이 현재를 다시 점유한다. 그것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형으로 존재하는 경험이 된다. 이때 인간은 두 가지 선택 앞에 놓인다. 그것을 밀어내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끌어안은 채로 계속 걸어갈 것인가. 작가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이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만이 조금씩 달라질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변화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미세한 반복 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진다.

완전히 온전해진 이후에야 우리는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온전해지지 못한 상태에서도 이미 삶은 계속되고 있을까. 인간은 늘 준비된 상태에서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어지러운 순간에, 가장 불완전한 상태로 무언가를 붙잡는다. 그 선택은 서툴고 흔들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미완의 결심 속에서 삶은 조금씩 방향을 얻는다. 방향이란 언제나 또렷하게 주어지기보다,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폭풍 속을 통과하는 배처럼, 완벽한 항로를 알지 못한 채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듯이. 그리고 어쩌면 삶이란, 그렇게 불완전한 상태로도 계속 선택해나가는 일 자체인지도 모른다.

상실 이후에도 감정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사람에게, 한 번 무너진 삶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겪어본 사람에게 이 책을 건넨다. 관계가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왜 여전히 누군가의 곁을 필요로 하는지 오래 고민해본 이들에게도. 그리고 완전히 괜찮아지지 못한 자신을 끝내 외면하지 못한 채, 그 불완전함을 안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순간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은 폭풍 속의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삶이란 온전해진 이후에야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 위에서도 이미 계속되고 있으니. 당신들은 앞으로도 여전히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방식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다시 붙잡아야 하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도서출판 다산책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