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라이프 : 글리치
박새봄 외 지음 / 멜라이트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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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까지 세계는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흘러간다. 의심할 이유가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현실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앤솔러지는 그 평온한 표면을 아주 미세하게 건드린다. 설명되지 않는 장면 하나, 어긋난 감각 하나가 스며드는 순간, 익숙했던 삶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글리치’라 불리는 이 미세한 오류는 세계를 무너뜨린다기보다, 더 깊은 층위를 드러낸다. 우리가 믿어왔던 세계는 과연 언제부터 그렇게 믿어지기 시작한 것일까. 우리는 왜 이 삶을 현실이라고 믿어왔는가. 그 오래된 신뢰의 출처는 어디인가.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단단해 보였던 믿음은 단 한 번의 틈 앞에서 흔들린다. 그 틈은 파괴가 아닌 질문이 태어나는 자리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한 번도 스스로를 의심해본 적 없는 세계를 뒤늦게 돌아보게 만든다.

책 속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같은 중심을 향해 기울어 있다. 누군가는 타인이 보지 못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누군가는 하나의 생을 여러 겹의 이야기로 다시 펼쳐 보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시간의 미묘한 어긋남 속에서 자신과 마주한다. 심지어 삶의 끝이라 여겼던 지점에서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지속이 시작된다. 이 모든 순간에는 공통된 정적이 흐른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세계가 더 이상 스스로를 설명하지 못하는 순간. 그 침묵 앞에서 현실은 더 이상 견고한 사실이 아닌 잠정적인 합의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던 것은 어쩌면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지되어야만 하는 균형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한 번이라도 시선이 어긋나는 순간, 그 균형을 쉽게 기울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이때 떠오르는 감각은 낯설다기보다 오히려 지나치게 익숙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해온 어떤 사실에 가까운 느낌. 세계는 하나의 얼굴만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지금의 삶 역시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로 겨우 이어지고 있을 뿐이라는 감각. 우리가 단단하다고 믿어온 현실은, 어쩌면 반복과 습관이 만들어낸 표면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같은 하루가 계속된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해왔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은 무언가를 바꾸기보다, 우리가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부터 되묻게 만든다. 한 번 시선이 흔들리고 나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은 단단해서 유지된 것이 아니라, 의심하지 않았기에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순간부터 세계는 이전보다 조금 더 낯설고, 동시에 조금 더 넓어진다.

무엇보다 마음에 남는 것은, 각각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채로 남겨둔 여백이다. 단편이라는 형식은 이 세계들을 담기에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마치 문이 닫힌 것이 아니라 잠시 덜 닫힌 채로 남겨진 느낌이 든다. 그 틈 사이로 이후의 시간이 스며들고,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 다음을 상상하게 된다. 이야기의 끝이 도착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아쉬움이라는 감정은 단순한 부족함이 아닌, 더 많은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닌, 계속해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삶과 같은 것.

결국 ‘글리치’란 잘못된 작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왔는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사건이다. 매끄럽게 이어지던 현실에 아주 작은 틈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묻기 시작한다. 지금 이 삶이 유일한 것인지, 아니면 수많은 가능성 중 잠시 선택된 경로에 불과한 것인지. 그 질문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대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한 번 흔들린 믿음은 다시 예전처럼 단단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믿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의심하는 감각과 함께 살아가게 되기 때문에. 그 의심은 불안을 남기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만드는 감각이기도 하다.

단편이지만 깊은 여운과 확장성을 지닌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 하나의 세계가 끝난 이후에도 그 다음을 스스로 상상해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또한 익숙한 일상에 균열을 내는 낯선 상상과 사유를 사랑하는 이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굳어버린 감각을 한 번쯤 의심해보고 싶은 이들에게도 잘 어울릴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 질문을 조금 더 깊은 곳까지 끌고 들어갈 것이다.



✏️도서출판 멜라이트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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