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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순간을 기억해?
숀 마이클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3월
평점 :
언어로 평생을 살아온 한 인간과, 언어를 끝없이 생산하는 존재가 마주 앉는다. 이 기묘한 장면은 단순한 대비를 넘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언어의 기원을 다시 흔든다. 말은 본래 삶을 통과하며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라 믿어왔기 때문이다. 어떤 문장은 시간을 견디며 겨우 건져 올려지고, 또 어떤 문장은 그 시간을 거치지 않은 채 순식간에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는 일은 창작을 바라보던 오래된 감각 또한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언어가 태어나는 순간은 곧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어온 방식을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창작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말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는가. 그리고 그 ‘자신의 것’이라는 감각은 정말로 붙잡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시를 쓴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몸부림으로 생각해왔다. 이해란 단순한 인식이 아닌 몸을 통과해 남은 흔적에 가깝다. 감각이 지나간 자리, 감정이 오래 머물다 떠난 자리에서 비로소 말은 형태를 얻는다. 그래서 문장은 늘 완전하지 못하고,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온도를 가진다. 완벽하게 설명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여백이야말로 살아 있는 언어의 증거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가 만들어낸 문장이 그 온도를 닮아 있을 때, 익숙하게 믿어온 질서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경험 없이도 닿을 수 있는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 위에 서 있는가. 그 기반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왜 그것에 마음을 건네는가. 이해하지 못한 채 만들어진 말이 이해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언어에 기대어 살아온 시간들마저 낯설게 되돌아온다.
이해는 무엇으로 증명되는 것일까. 이해했다는 감각은 언제나 사후적으로만 확인된다. 이미 지나간 감정들을 더듬으며, 그것이 나의 것이었다고 겨우 확신하는 식이다. 이해는 순간이 아닌 해석이며, 살아가는 동안이 아니라 지나온 뒤에야 겨우 형태를 갖춘다. 그렇다면 이해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문장과, 이해했다고 믿으며 써 내려간 문장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남는가. 표현은 종종 감정을 앞지르고, 때로는 감정을 대신해버린다. 말해진 순간 감정은 이미 다른 것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언어는 의미를 담는 그릇이라기보다, 의미가 있었던 자리를 모양으로만 남겨두는 껍질에 가깝다. 그 껍질이 충분히 정교하다면 그 안이 비어 있다는 사실조차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의미를 이해한다기보다, 의미처럼 보이는 형식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익숙함 속에서 우리는 이해했다는 착각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남은 언어의 공허함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감각을 다시 일깨운다. 이해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이해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사실. 완벽하게 전달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끝내 말을 건네는 행위가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 말은 언제나 미끄러지고, 감정은 늘 남겨진다. 그 남겨진 부분을 붙잡기 위해 우리는 다시 문장을 쓴다.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는 행위처럼, 언어는 늘 실패를 전제로 반복된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게 가까워지기도 하고, 끝내 닿지 못한 채 멈춰 서기도 한다. 언어는 이해를 완성하기보다, 이해에 이르지 못한 채 머무르게 한다. 언어는 도달이 아닌 반복이며, 완성이 아닌 계속해서 어긋나는 시도이다.
이해와 표현 사이를 오가며 끝내 겹쳐지지 않는 두 층위. 그 사이에서 문장은 태어나고, 또 사라진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말은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지는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음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태도, 그 불완전함을 끌어안은 채 말을 건네는 일이야말로 언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다. 언어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는 것 곁에 머물기 위해 존재한다. 그 곁에 머무르는 시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해로 남는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함을 견디기 위해 말을 이어간다. 말은 진실을 담지 못한다. 다만, 끝내 닿지 못한 진실의 주변을 오래 맴돈다.
이 책은 언어를 다루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의 말을 끝내 확신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물러본 사람에게 천천히, 그러나 깊게 스며들 것이다. 쓰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며, 문장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남은 침묵까지 끌어안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또한 이해한다는 감각이 언제나 뒤늦게 따라온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껴온 사람에게도 낳설지 않게 닿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 곁에 머무는 시간을 견디려 하는 이들에게. 말로 다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 알지 못한 채 머무는 시간을 견디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문장을 붙잡아온 이들에게 이 이야기는 곁을 내어줄 것이다.
✏️도서출판 문학수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