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사회 - 이상적 이미지를 넘어 자기-세계를 만드는 15가지 방법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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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삶이 손가락 한 번의 움직임으로 펼쳐진다. 낯선 사람의 아침 식탁과 여행지의 햇빛, 정돈된 서재와 성공의 기록들이 작은 화면 안에서 쉼 없이 교체된다. 그중 어떤 장면은 동경의 대상이 되고, 어떤 장면은 자신의 삶을 초라하게 만드는 척도가 된다. 타인의 일상이 이토록 가까워진 시대에 정작 자신의 일상은 점점 낯설어진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른 사람의 삶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는 얼마나 오래 시선을 두고 있을까.

정지우의 『환상사회』는 이미지가 인간의 욕망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시대를 진단한다. 저자는 현실의 자신보다 이상적인 자기 이미지에 이끌리는 현대인을 ‘호모 판타즈마’라 명명한다. 이들은 자신을 전시하고 타인을 구경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이상을 찾아 움직인다.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는 사회적 관계를 분석했다면, 오늘날의 환상사회에서는 각자의 욕망에 맞춰 선별된 이미지가 개인의 현실 인식까지 조작한다. 무엇을 동경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조차 외부에서 공급되는 시대. 자신을 표현하는 자유는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의무와 뒤섞인다.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욕망은 종종 타인의 인정을 향해 굽어진다. 남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가 되고 싶으면서도, 그 고유함이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장폴 사르트르가 타자의 시선을 통해 설명했던 대상화의 경험은 오늘날 디지털 공간에서 더욱 일상적인 형태를 취한다. 앨리스 E. 마윅과 다나 보이드는 2011년 『뉴 미디어 앤드 소사이어티(New Media & Society)』에 발표한 논문 「나는 솔직하게 트윗하고, 열정적으로 트윗한다: 트위터 이용자, 맥락 붕괴, 상상된 청중」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 관계의 청중들이 하나의 온라인 공간에 겹쳐지는 현상과 이용자들이 ‘상상된 청중’을 고려해 자신의 표현을 조절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자신을 보여주는 행위에는 이미 그 모습을 바라볼 타인에 대한 예상이 스며 있는 셈이다. 게시물을 올리기 전 타인의 반응을 예상하고, 자신이 보여줄 만한 모습을 골라내는 동안 자아는 전시 가능한 부분들을 중심으로 편집된다. 타인의 시선은 자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그 기준은 점차 내면의 판단까지 대신한다. 남다르게 보이기 위해 선택한 취향과 생활 방식이 어느새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는 광경도 낯설지 않다. 자신을 발견하려는 노력과 자신을 연출하려는 욕망이 구별되지 않을 때, 인간은 스스로 만든 이미지의 관객이 된다.

이러한 삶을 지배하는 감정으로 저자는 ‘항시적-초조함’을 제시한다. 이상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면 인간은 체념할 여지라도 갖는다. 그러나 환상사회가 보여주는 이상은 언제나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을 듯한 거리에 놓인다. 타인의 성취는 가능성의 증거처럼 제시되고, 아직 그곳에 이르지 못한 자신의 현재는 미완성의 시간으로 평가된다. 비슷한 나이의 누군가가 이룬 성취를 확인한 뒤,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가던 자신의 하루를 뒤늦게 부족한 시간으로 느끼는 순간처럼. 비교의 대상이 무한히 늘어나는 사회에서 만족의 기준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무엇을 아직 갖지 못했는지에 더욱 민감해지고, 삶의 충만함을 측정하는 감각마저 결핍의 언어에 익숙해진다.

그 결과 현재는 살아내는 시간보다 미래의 자신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으로 취급된다. 휴식에도 생산성이 요구되고, 취미는 전문성이 되어야 하며, 평범한 경험마저 성장의 증거로 환산된다. 산책하며 찍은 사진 한 장에도 기록할 만한 의미를 찾고, 좋아서 시작한 일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되는 일상이다.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무한한 자기개선의 명령으로 바뀌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이루면서도 충분하다는 감각을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 결핍은 일시적인 상태를 넘어 삶을 조직하는 원리가 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오늘의 시간을 선점하고, 인간은 자신의 현재를 언제나 잠정적인 것으로 경험한다.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고 믿는 동안에도 정작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은 끊임없이 유예된다.

『환상사회』가 제안하는 ‘세계-만들기’는 이러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시도다. 저자는 이상적인 자아상을 완성하려는 ‘나-되기’의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로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제안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에 시간을 기꺼이 사용하는지, 어떤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지에 따라 한 사람의 세계는 조금씩 형태를 갖춘다. 사회가 이미 마련해 둔 성공의 기준을 따르는 대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스스로 정립하는 일. 이때 정체성은 완성된 형태로 획득해야 하는 목표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구체화되는 삶의 내용으로 이해된다. 자신의 세계를 가진다는 것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알아보고, 그것들이 삶에서 차지할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한 세계는 반드시 특별하거나 독창적인 모습일 필요가 없다. 남에게 설명할 수 없어도 충분히 소중한 시간이 있고, 사회적인 성취로 환산할 수 없어도 한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관계가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책의 한 구절을 오래 읽거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같은 길을 걷고, 별다른 목적 없이 누군가와 시간을 나누는 일도 한 사람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 시간들이 쌓여 취향이 되고, 기억이 되고,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고유한 감각이 된다. 외부의 기준이 삶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소한 경험들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는 말에도 경계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 자신만의 취향과 경험, 관계마저 경쟁력으로 계산하기 시작한다면 세계-만들기는 또 다른 자기계발의 과제가 될 수 있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다시 전시할 만한 삶을 제작하는 일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자신이 읽은 책과 방문한 장소, 쌓아온 경험을 하나의 완성된 인물상으로 배열하는 동안 세계는 또다시 평가받기 위한 이미지가 된다. 읽는 동안 즐거웠던 책은 어느새 한 해에 몇 권을 완독했는지 증명하는 숫자가 되고, 여행에서 보낸 시간보다 게시할 사진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지는 순간, 경험은 자신의 삶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세계가 얼마나 특별해 보이는지보다 그 안에서 실제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에 관한 감각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이 타인의 인정과 무관하게 지속될 수 있을 때, 세계는 비로소 삶을 지탱하는 내적인 질서를 갖춘다.

한 사람의 세계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열어준 문이 있다. 인간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발견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말과 경험이 개입한다. 혼자서는 알지 못했을 세계를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고, 타인의 관심을 따라가다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들여놓기도 한다. 관계는 각자의 세계를 확인하는 절차를 넘어, 그 세계를 변화시키는 경험이 된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만나는 순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차이도 발생하지만, 그 차이를 성급히 평가하지 않는 태도 속에서 관계의 깊이가 형성된다. 자신의 세계를 가진 사람은 타인의 세계 역시 자신이 전부 알 수 없는 고유한 질서를 갖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타인을 구경하는 문화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관찰하면서도 그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사정에는 무관심해지는 현상은 환상사회의 또 다른 빈곤함을 드러낸다. 환하게 웃는 여행 사진 한 장으로 그 사람의 행복을 판단하거나, 짧게 편집된 실수 하나로 그의 인격 전체를 평가하는 일이 그렇다. 이미지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담길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 전체가 담기지는 않는다. 타인의 성공을 부러워하거나 실패를 평가하기 전에 그 이미지 바깥에 존재하는 삶을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해란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 해석하는 과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을 인정하고, 타인이 스스로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드러낼 수 있도록 기다리는 태도 또한 이해의 일부다.

자신의 관심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관심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할 자리를 허락하는 것. 서로 다른 세계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되지 않은 채 관계를 맺고,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경험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윤리의 토대가 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자신을 보여주며, 그 시선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헤아릴 것이다. 그러나 삶의 모든 순간이 누군가에게 증명될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의 세계는 그가 오래 바라본 것들과 기꺼이 나누어준 시간, 서로에게 허락한 자리들로 이루어진다. 화면에서는 수많은 이미지가 빠르게 사라지지만, 함께 나눈 대화는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오래 지속한 관심은 하루의 리듬을 만든다. 그렇게 축적된 일상의 세부들이 저마다 다른 생애의 무늬를 이룬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삶은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이어간다. 그 시간을 충분히 감각하며 다른 존재의 삶을 이해할 자리를 마련하는 일. 환상사회의 한가운데서도 우리가 지켜낼 수 있는 현실은 바로 그곳에서 자라난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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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줘
길리언 플린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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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에도 예절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지어야 할 표정과 슬픔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식, 타인의 위로에 응답하는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비극을 겪은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감당하는 동시에 그것이 진짜 고통임을 증명해야 한다. 카메라 앞에서 흘리지 못한 눈물은 의심을 사고, 무심코 지은 웃음은 인격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슬픔의 진정성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의 내부에서 발생하지만, 그 진정성을 승인하는 권한은 어느새 타인의 손으로 넘어간다.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는 이러한 감정의 사회적 규율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한 인간의 삶이 타인의 해석에 의해 얼마나 쉽게 재편되는지 보여준다.

결혼 5주년 아침, 아내 에이미가 사라진다. 남편 닉은 아내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경찰은 집 안에 남겨진 흔적들을 조사한다. 실종 사건은 곧 전국적인 관심을 받으며, 닉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건을 해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결혼생활은 행복했는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질문들은 실종된 사람의 행방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내면으로 방향을 바꾼다. 사적인 관계의 역사는 공적인 검증의 대상이 되고, 한 사람의 성격과 습관은 범죄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자료가 된다. 닉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건에 관한 설명뿐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증명이다. 인간의 얼굴에는 감정의 흔적이 드러나지만, 그 흔적을 읽는 방식에는 관찰자의 기대가 개입한다. 같은 침묵도 누군가에게는 충격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관심으로 받아들여진다. 슬픔의 표준을 벗어난 반응이 의심받는 까닭은 우리가 감정을 특정한 표정과 연결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감정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플린은 이 간극을 이용해 인간이 타인을 판단할 때 얼마나 많은 부분을 추측으로 채우는지 드러낸다. 얼굴은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그 얼굴의 의미는 보는 사람의 경험과 욕망에 따라 달라진다. 가장 공개적인 신체의 일부가 가장 사적인 오해를 생산하는 셈이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상대의 현재보다 그에 관해 축적해온 기억을 먼저 읽는다. 부부는 서로의 습관과 취향을 알고, 일상의 사소한 변화를 알아차리며, 오랜 시간을 공유한다. 그러나 함께 보낸 시간의 길이가 상대를 이해하는 깊이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 익숙함은 관찰을 생략하게 만들고,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성격은 새로운 행동을 해석하는 기준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오래 바라볼수록 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굳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상대가 실제로 어떤 말을 하는지보다 그가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근거로 말을 이해한다. 친밀함이 깊어질수록 타인을 새롭게 발견하는 능력은 오히려 둔해질 수 있다.

연애의 시작에서 인간은 자신을 가장 매력적인 형태로 제시한다. 좋아하는 사람의 농담에 조금 더 크게 웃고, 관심 없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불편한 성격을 적당히 감춘다. 관계를 맺기 위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조정에는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작용한다. 어빙 고프먼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무대에 비유했듯, 우리는 타인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그 표현에 대한 반응을 살핀다. 고프먼의 관점에서 자아는 타인과 분리된 채 완성되는 실체라기보다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조율되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무대 위의 배우가 관객의 반응을 의식하듯, 인간 역시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며 그 역할에 걸맞은 인상을 유지하려 한다. 문제는 사랑받기 위해 선택한 모습이 어느 순간 상대에게 약속된 성격처럼 취급된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호의였던 행동이 의무가 되고, 자발적인 배려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으로 굳어진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만들어낸 가장 좋은 모습이 이후의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나를 찾아줘』의 결혼생활에도 서로가 기대하는 역할의 무게가 짙게 실려 있다. 닉과 에이미가 기억하는 과거에는 서로에게 매혹되었던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의 매력은 시간이 흐르며 현재의 불만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경제적 불안과 생활환경의 변화는 두 사람의 관계에 새로운 조건을 부여하고, 한때 사랑했던 성격은 다른 맥락에서 불편한 특성으로 읽힌다. 여기서 결혼의 시간은 두 사람이 함께 변화해온 역사이면서 서로의 변화를 평가해온 기록이기도 하다. 상대가 달라졌다는 불만에는 자신이 사랑했던 모습을 계속 유지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숨어 있다. 인간이 변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사랑 안에서는 종종 배신처럼 받아들여진다.

사랑에는 상대를 알고 싶어 하는 욕망과 상대에게 알려지고 싶은 욕망이 공존한다. 우리는 자신의 복잡한 내면을 누군가가 알아봐 주기를 바라면서도, 그가 자신을 단정하는 순간 답답함을 느낀다. 타인의 이해를 갈망하면서 동시에 그 이해의 한계에 저항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이해받고 싶다는 소망에는 자신조차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숨어 있다. 그러나 타인의 이해가 완전해지는 순간을 상상할수록, 그 이해 속에서 허용되지 않을 자신의 가능성 또한 의식하게 된다. 가장 친밀한 사람에게도 설명되지 않는 영역은 존재한다. 서로의 삶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그 영역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할 뿐, 그것을 소유할 권리까지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관계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쉽게 흐려진다. 상대를 잘 안다는 확신은 그가 자신의 예상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플린은 이러한 사적인 확신이 사회적 판단과 만나는 과정을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실종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은 닉의 말과 행동을 선택하고 배열하며, 대중은 그 장면들을 통해 한 인간의 도덕성을 평가한다. 몇 초간의 웃음과 침묵, 카메라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의 내면을 설명하는 자료로 소비된다. 개인의 감정은 화면에 적합한 길이와 형태로 편집되고, 복잡한 관계의 역사는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로 정돈된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불행을 목격하면서 동시에 그 불행을 해석하는 즐거움에 참여한다. 사건의 진상을 기다리는 인내보다 누가 어떤 인간인지 먼저 규정하는 만족감이 앞서기도 한다. 오늘날 이러한 판단은 짧게 편집된 영상과 온라인 댓글을 통해 더욱 빠르게 확산된다. 하나의 표정이 맥락을 잃은 채 유통되고, 반복된 의혹은 어느새 검증된 사실과 비슷한 무게를 얻는다. 판단에 참여하는 사람은 늘어나지만 그 판단에 책임지는 사람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언론이 제공하는 것은 정보와 함께 인물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어떤 장면을 먼저 보여주는지, 누구의 말을 인용하는지, 어느 표정을 반복해서 재생하는지에 따라 대중의 판단은 달라진다. 푸코가 진실의 생산과 권력의 관계를 논의했듯,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진실은 그것을 전달하고 승인하는 구조와 분리되기 어렵다. 『나를 찾아줘』에서 공적인 시선은 사건을 밝히기 위한 감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개인의 삶을 일정한 서사에 맞춰 해석하도록 압박한다. 진실을 알고 싶다는 욕망은 때로 한 사람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축소하려는 욕망과 결합한다. 사람들은 복잡한 현실보다 인과관계가 분명한 이야기를 더 쉽게 믿는다.

소설의 형식은 이러한 인간의 인식 습관을 독서의 과정으로 옮겨놓는다. 닉의 현재와 에이미의 과거가 교차하면서 독자는 두 사람이 공유했던 시간을 서로 다른 언어로 접한다. 하나의 결혼생활은 각자의 기억 속에서 다른 순서와 무게를 얻는다. 같은 사건도 그것을 설명하는 목소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독자는 어느 진술에 더 설득되는지 끊임없이 선택하게 된다. 플린은 정보를 제한하고 시점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독자의 판단을 유도한다. 독자는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면서도 자신이 어떤 인물에게 호감을 느끼고 어떤 태도를 의심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독자는 소설의 심판석에 앉아 있다고 믿지만, 자신이 내린 판결의 근거 또한 작가가 배치한 언어와 장면에서 빌려온 것이다. 심리 스릴러의 긴장은 단서가 축적되는 속도와 판단이 뒤집힐 가능성 사이에서 형성된다. 독자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어 하지만, 그 욕망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로 이야기를 완성하려는 조급함을 동반한다. 길리언 플린은 이 조급함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는다. 독자의 확신이 서사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 추리의 즐거움에는 자신의 판단을 의심해야 하는 불편함이 스며든다.

『나를 찾아줘』라는 제목에는 한 사람의 행방을 찾는 사건의 표면과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겹쳐 있다. 우리는 타인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인물로 존재하지만, 그 기억이 자신의 전부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소망과 그가 이해한 모습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한 사람의 내부에서 동시에 작용한다. 타인에게 발견되기를 바라면서도 그가 부여한 의미만으로 자신의 존재가 완성되는 것을 경계하는 인간의 모순이 그 안에 있다. 길리언 플린은 가장 가까운 관계를 통해 인간이 타인의 삶을 얼마나 성급하게 해석하고, 그 해석을 얼마나 쉽게 진실로 받아들이는지 드러낸다. 누군가를 오래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 사람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과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삶의 영역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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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의 짧은 체류
스티븐 L. 펙 지음, 김항나 옮김 / 자음과모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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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도 출구가 있다면 희망을 품어도 좋을까. 자신이 살아온 모든 순간이 정확하게 기록된 단 한 권의 책을 찾으면 이곳을 떠날 수 있다. 그 책은 분명 존재한다.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도 확실하다. 다만 서가의 규모가 인간의 상상력을 아득하게 넘어선다는 것이 문제다. 스티븐 L. 펙의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가 만든 지옥에는 불길도 형벌을 집행하는 고문관도 필요하지 않다. 원하는 음식과 잠자리를 누릴 수 있고 죽음조차 영속적인 끝이 되지 못한다. 그곳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오히려 희망이다.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체념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발견할 수 있다는 약속은 끊임없이 다음 책을 펼치게 한다. 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사이에서 희망은 서서히 형벌의 모습을 얻는다.

이 기묘한 지옥에서 소런이 찾아야 하는 책은 그의 삶을 완벽하게 기록하고 있다. 살아온 모든 순간과 행동이 한 글자의 오류도 없이 적혀 있다면 그것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같은 기억조차 시간이 흐르면 다른 의미를 얻고, 과거의 선택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지금의 자신에 따라 달라진다. 폴 리쾨르가 정체성을 하나의 완결된 실체보다 삶을 이야기하고 다시 해석하는 과정과 연결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생은 사건의 총합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소런이 찾는 한 권은 그를 가장 정확하게 증명하는 기록인 동시에, 더는 고쳐 쓸 수 없는 과거의 총체이기도 하다. 자신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문장을 갖고 싶다는 욕망에는 기묘한 모순이 따른다. 완벽하게 기록되는 순간 삶은 더 이상 해석될 여지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위해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한다는 설정은 어느새 자신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문제로 옮겨간다.

도서관의 서가에는 인간이 평생 읽어도 소진할 수 없는 언어의 가능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이곳에는 정해진 문자와 기호로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조합의 책이 놓여 있다. 위대한 문학도, 누군가의 진실한 생애도, 그것과 거의 똑같지만 한 글자만 다른 거짓도 함께 존재한다. 대부분의 페이지를 채우는 것은 읽을 수조차 없는 문자의 나열이다. 모든 정보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진실은 오히려 희귀해지고, 의미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공간에서 저자는 앎의 풍요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그 반대편을 보여준다. 책을 사랑하던 소런에게 형벌은 가장 좋아했던 것의 모습을 빌려 찾아온다. 그가 평생 가까이했던 책으로 서가를 가득 채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고를 수 있다는 기쁨은 사라지고, 무수한 책을 펼쳐야만 하는 의무가 독서의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은 그럼에도 문장을 읽고, 우연한 배열에서 자신과 닮은 무언가를 발견하며, 의미 없는 것들 사이에 질서를 만든다. 모든 것이 기록된 도서관조차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대신 결정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의미는 세계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존재하는가보다 그 가운데 무엇을 자신의 것으로 읽어내는가와 깊이 연결된다.

책을 찾는 이야기는 점차 사람을 찾고 관계를 지속하는 일의 의미까지 헤아리게 한다. 소런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긴 시간을 지나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감각에는 언제나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함께 늙어가는 일, 기억을 쌓는 일, 다음 계절을 약속하는 일처럼 사랑은 유한한 생의 방향 위에서 형태를 얻는다. 그러나 소런이 살아가는 세계에는 함께 늙어갈 육체도, 마지막을 예감하며 서로의 손을 잡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허락되었는데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순간은 한없이 불확실하다. 오래도록 함께했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다는 보증이 되어주지 않는 곳에서, 사랑은 지속된 시간만큼이나 닿을 수 없는 거리의 무게를 갖는다. 타인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 안에 담아두려는 욕망은 언제나 그 사람의 고유한 삶과 마주한다. 이 거대한 서가는 타인에게 도달한다는 일이 본래 품고 있던 불가능성을 공간과 시간의 크기로 펼쳐 보인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탐색과 타인에게 향하는 움직임은 그렇게 서로의 모습을 조금씩 닮아간다.

무한처럼 펼쳐지는 서가 앞에서는 인간이 사용해온 시간과 크기의 단위도 차츰 힘을 잃는다. 저자는 이 공간을 막연히 ‘아주 크다’고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자 수와 페이지, 가능한 조합을 계산하며 수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뜻과 다르다. 어떤 수는 분명 유한하면서도 인간의 생애와 감각 안에서는 무한과 구별되지 않는다. 칸트는 인간의 상상력이 감당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크기를 마주할 때 발생하는 경험을 ‘수학적 숭고’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우리는 거대한 대상을 부분적으로 헤아릴 수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완전한 모습으로 떠올리는 데에는 한계를 느낀다. 이때 감각과 상상력의 한계를 자각하는 동시에, 그 크기를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까지 의식하게 된다.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는 그 압도적인 크기 속에 인간을 실제로 집어넣는다. 그 순간 백 년과 천 년은 더 이상 장구한 세월을 뜻하지 못하고, 우리가 영원처럼 사용하던 표현들은 하나씩 인간적인 척도를 잃는다. 무한 자체보다 두려운 것은 어쩌면 끝을 상정할 수 있으면서도 그 끝까지의 거리를 살아 있는 존재의 감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소런은 자신이 평생 믿었던 세계의 질서가 죽음과 동시에 뒤집히는 경험을 한다. 새로운 진리가 제시된 뒤에도 그것이 정말 마지막 진실이라고 확신할 근거는 없다. 신앙이 무너진 자리에 또 다른 확신을 세우기보다, 알 수 없는 상태를 견디며 계속 한 권의 책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세계가 자신의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을 때에도 인간은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만들고, 무의미한 문자에서 읽을 수 있는 한 줄을 찾아낸다. 지옥의 거대한 도서관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작은 존재가 의미를 만드는 일을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도 함께 보여준다.

그 모든 시간을 지나고도 제목은 여전히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다. ‘짧다’는 말이 이토록 섬뜩하게 들리는 경우도 드물다. 인간의 생애를 몇 번이고 포개고도 남을 시간을 짧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너머에 영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을 살아본 적이 없고, 영원을 기준으로 현재의 고통을 측정할 수도 없다. 언젠가 도달할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금 견디고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볍게 만들 수 있는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제목은 거대한 시간의 농담처럼 읽히면서도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아주 가까이 닿아 있다.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펼쳐야 하는 수많은 페이지에는 소런이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긴 세월이 쌓여간다. 자신의 삶을 증명할 기록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도 그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알던 세계의 바깥을 경험한다. 삶을 온전히 담아낼 한 권의 책을 찾아야 하는 운명 속에서 그의 생은 이미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지나 계속 쓰이고 있다. 그리하여 가장 완벽한 기록을 향한 탐색은 역설적으로 기록될 수 없는 삶의 현재를 드러낸다. 한 사람의 생애를 설명하는 모든 문장이 마련되어 있다 해도, 그 문장을 읽는 순간의 인간은 이미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도서출판 자음과모음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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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수련 - 내게 없는 것으로 삶과 맞서는 법
이예지 지음 / 세미콜론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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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타인의 것을 바라보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들키는 감정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순간에는 그 사람이 가진 것을 탐내는 마음과 내가 갖지 못했다는 결핍의 감각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래서 질투는 대개 감추거나 다스려야 할 감정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감정에 선악의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 안을 잠시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것이 보인다. 누구에게 마음이 흔들리는지, 그의 무엇이 유독 부러운지 따라가다 보면 욕망은 구체적인 방향을 갖는다. 질투는 타인을 바라보며 시작되지만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언제나 자신이 있다. 『질투 수련』은 타인을 향한 곁눈질을 자기 안으로 꺾어보며, 부끄러워 숨겨온 감정에서 욕망의 모양을 읽어낸다.

세상 온갖 만물에 질투를 느끼는 사람으로서 나는 무엇을 가장 질투하는가. 타인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나에 대해 생각한다. 재능과 성취, 단단한 취향과 자기 확신까지 부러운 것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질투의 근원을 따라 마음속 깊은 곳까지 내려가면 질투하지 않는 사람을 가장 질투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누군가의 좋은 일을 자신의 결핍으로 환산하지 않는 사람, 타인의 몫이 커졌다고 자신의 자리가 작아졌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 그들에게서 가장 부러운 것은 타인의 기쁨을 온전히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다. 그런 사람을 질투한다는 사실 자체가 결국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준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타인이 가진 것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의 크기를 다시 재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이예지가 질투하는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비슷한 원리가 반복된다. 그레타 거윅에게서는 남은 생의 시간을 헤아리며 작업을 이어가는 야심을, 원소윤에게서는 삶의 불행을 농담으로 바꾸는 낙천성을, 김애란에게서는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문학적 상상력을 바라본다. 홍세화의 똘레랑스와 이불의 ‘취약할 의향’에 이르면 질투의 대상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가 부러워하는 것은 타인이 소유한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세계 앞에 자신을 놓아두는 방식이다. 타인의 재능을 바라보던 시선은 ‘저것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지나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처럼 감정에 휩쓸리는 일과 다른 차원의 움직임을 만든다. 무엇이 나를 흔드는지 알아보는 순간, 막연했던 질투는 자신의 욕망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언어가 된다.

하지만 질투가 가리키는 방향을 곧장 ‘나의 욕망’이라고 믿기에는 우리의 시선이 너무 많은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삼성그룹 회장이 사용하는 립밤의 브랜드까지 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참고로 그 립밤은 소프트립스였다.— 손바닥만 한 화면에는 타인의 집과 여행, 몸과 옷, 성공과 행복이 쉬지 않고 흘러든다. 그 모습을 충분히 오래 바라보다 보면 이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것을 원하게 된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며 형성된다고 보았다. 대상의 가치가 욕망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것을 욕망한다는 사실이 그 대상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욕망의 장면에는 늘 ‘나’와 ‘대상’ 외에 그것을 먼저 바라보고 있던 타인이 끼어든다. 오늘의 플랫폼과 광고는 이 삼각형을 무수히 복제한다. ‘너도 이것을 바라지?’라는 속삭임이 반복되는 동안 타인의 욕망은 어느새 나의 욕망처럼 자리 잡는다. 질투는 이처럼 지극히 사적인 감정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시대가 욕망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무엇을 부러워하는지 살펴보는 일은 그러므로 한 번의 의심이 더 필요하다. 지금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 나의 것이며, 어디부터 타인의 삶을 오래 바라본 끝에 배운 것인가.

타인을 바라보는 일이 꼭 비교와 경쟁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김애란의 문학에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상상력을 발견하고,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작업을 통해 멀리 떨어진 고통을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이며, 홍세화에게서는 혐오보다 분노를, 분노보다 연대를 택하는 태도를 바라본다. 질투의 시선은 어느 순간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선과 포개진다. 다른 사람의 자리에 완전히 서볼 수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상상력을 요청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거리를 함부로 지우지 않은 채 가까워지려는 태도. 비교의 순간 나를 작아 보이게 했던 바로 그 타인이, 어느 순간 혼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를 바라보는 동안 나라는 세계의 경계 역시 이전보다 조금 넓어진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질투해온 것들의 총합이자, 동시에 그것에 반발해온 저항들의 총체”(274쪽)라는 고백은 질투에 관한 이야기를 정체성의 문제까지 확장한다. 인간의 자아에는 생각보다 많은 타인의 흔적이 섞여 있다. 누군가의 태도를 동경해 조금씩 닮아가고,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며 삶의 방향을 틀기도 한다. 그렇게 동경은 모방으로, 거부감은 저항으로 옮겨가며 한 사람의 선택 속에 축적된다. ‘나답다’고 믿는 것조차 수많은 관계와 영향 사이에서 고르고 버린 것들의 오랜 배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타인의 흔적은 자아의 순도를 흐리는 불순물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에 저항해왔는지를 기록한 이력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질투 수련』은 서른 명의 타인을 기록하면서 완성된 한 사람의 자화상처럼 읽힌다. 수많은 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 사이에서 선명해지는 것은 이예지라는 사람의 윤곽이다.

서른 번의 ‘질투한다’를 지나온 책은 마지막에 다섯 번의 ‘질투하지 않는다’로 방향을 튼다. 원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만큼 원하지 않는 것을 알아보는 일 역시 자신을 구성한다. 세상이 부러워하라고 가리키는 방향마다 마음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 화려한 소비의 세계를 가까이에서 경험하고도 그것을 욕망하지 않을 수 있으며, 모두가 이상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모습 앞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거둘 수 있다. 무엇을 질투할 것인지 선택하는 능력에는 무엇을 더 이상 질투하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자유까지 포함된다. 외부에서 주어진 욕망을 하나씩 걷어내며 자신이 가치를 두고 싶은 것을 분별하는 일, 그 선택이야말로 책 제목의 ‘수련’이라는 말에 가장 오래 시선이 가게 한다.

이 책을 읽는다고 바로 질투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다시 누군가의 재능을 곁눈질하고, 남의 성취 앞에서 슬며시 나의 몫을 헤아리고, 화면 너머의 삶과 내 삶을 저울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모든 시샘에서 아름다운 욕망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전과 같은 질투가 찾아왔을 때 그 감정에 끌려가는 대신 한 번쯤 그 방향을 들여다볼 수는 있겠다. 무엇을 탐내고 있는지, 누구의 욕망을 빌려온 것인지, 그 사람에게서 정말 부러운 것은 무엇인지. 수련에는 단번에 달라지는 사람보다 같은 마음 앞에 여러 번 서보는 사람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번 알아차린 감정도 다시 찾아오고, 오래된 비교의 습관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다음번 질투 앞에서는 그것을 숨기는 데 쓰던 마음을 조금 다른 곳에 써보려 한다. 부러워하고 시샘하고 비교하면서도, 그 마음이 보여주는 나를 이전보다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쪽으로.

✏️도서출판 세미콜론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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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의 아이들
알렉산더 와인스타인 지음, 임현정 옮김 / 에이유앤씨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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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대신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기억을 저장하고 몸을 기계로 보완하며 현실보다 정교한 가상세계를 살아가는 일은 오래전부터 SF가 상상해온 미래다. 『신세계의 아이들』에는 그보다 더 낯선 일들이 수없이 벌어진다. 그러나 기술이 멀리 나아간 만큼 인간까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휴머노이드와 가족을 이루고 가상세계에 자신의 일부를 옮겨놓은 뒤에도 인간은 사랑하는 것을 잃지 않으려 한다. 기억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고, 사랑하는 존재를 잃고 싶지 않으며, 타인과 더 깊이 연결되고 싶은 마음. 기술은 수십 년을 앞서 있지만 욕망은 몇천 년 전의 인간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다. 미래와 인간 사이에 벌어진 이 시간차는 『신세계의 아이들』을 더욱 서늘하게 만든다.

이 책에는 미래를 처음 구경하는 사람의 눈이 없다. 누구도 새로운 기술 앞에서 오래 감탄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것들이 충분히 평범해진 세계에서 밥을 먹고, 연애하고, 아이를 키우고, 돈을 벌고, 누군가와 헤어진다. 와인스타인의 미래는 발명의 순간을 건너뛰고 곧장 습관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한때 세계를 뒤집었을 기술에는 생활의 때가 묻어 있고, 경이로웠을 발명품은 가족의 식탁과 침실, 직장과 연애 안에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다. 혁신이 일상이 된 뒤에는 기계의 새로움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습성이 도드라진다. 욕심과 외로움, 사랑과 권태도 기술과 함께 미래로 건너간다. 와인스타인은 미래의 발명품보다 그것에 익숙해진 인간에 대해 쓴다.

SF에서 미래는 반드시 예언의 시간이 될 필요가 없다.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멀리 세워두면 오히려 현재와 인간을 낯설게 바라볼 거리가 생긴다. 『신세계의 아이들』은 그 거리를 꽤 넓게 사용한다. 국내에서 최근 접해온 SF 가운데 인물의 정서와 관계에 무게를 싣는 작품들이 많았다면, 이 책은 기술적 가정을 충분히 확장한 다음 그 변화의 폭만큼 인간의 감정과 윤리, 사회의 형태까지 함께 이동시킨다. 기억 하나를 옮길 수 있게 되었을 뿐이지만 ‘나’의 경계가 흔들리고, 연결의 범위가 넓어지자 친밀함의 의미가 달라진다.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늘어나는 순간 상실의 범위 역시 함께 넓어진다. 기술적 상상은 인간을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인간에게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한 우회로가 된다. 하드 SF의 사고실험과 소프트 SF의 인간 탐구가 한쪽씩 자리를 나누는 대신, 서로의 깊이를 만들어가는 작품이다. 기술은 인간을 얼마나 바꾸게 될까. 그보다 더 오래 따라오는 물음은, 그렇게 많은 것이 바뀐 뒤에도 인간에게서 무엇이 자꾸 되풀이되는가 하는 것이다.

와인스타인의 기술은 인간이 견뎌온 수많은 ‘어쩔 수 없음’을 하나씩 지운다. 잊는 일, 멀어지는 일, 상대의 마음을 전부 알 수 없는 일 같은 것들. 인간은 그런 한계를 불편해하면서도 그 안에서 관계를 만들어왔다. 신세계에서는 그 경계들이 하나씩 허물어진다. 그러나 타인의 내부가 환히 보인다고 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가능성은 친밀함의 극점처럼 보이지만, 완전한 이해에는 상대가 더 이상 발견될 여지가 없다는 역설도 숨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들어가 본 적 없는 시간이 있고, 들은 적 없는 생각과 기억이 있다. 우리는 그 빈칸을 묻고 기다리며 때로는 잘못 짐작한다. 타인은 이해가 부족해서 타인인 것이 아니라, 아무리 이해해도 전부 나의 것이 될 수 없기에 타인이다. 기술이 없애려던 거리가 오히려 관계를 가능하게 했던 공간으로 되돌아온다.

기억으로 들어가면 경계는 한층 흐려진다. 몸은 하나인데 그 안에 다른 삶의 기억이 들어올 수 있고, 지나갔어야 할 순간은 보존되어 다시 현재로 불려온다. 여기서 기억은 과거의 보관함이라는 익숙한 자리에서 빠져나온다. 겪지 않은 일을 그리워하게 된다면 그 그리움은 누구의 것일까. 사실과 기억이 갈라지고도 감정이 남는다면 어느 쪽을 진짜라고 불러야 할까. 애초에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정확하게 보관하며 살아오지도 않았다. 잊고, 덧붙이고, 같은 일을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표정으로 기억한다. 와인스타인이 기억에 기술을 섞는 순간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부터 불안정했던 ‘나’의 경계가 눈에 보이는 형태를 얻는 일이다. 기술이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전에 정체성은 이미 기억이라는 흔들리는 재료 위에 놓여 있었다.

그 흔들림은 사랑과 상실 앞에서 더욱 커진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보다 함께 보낸 시간이 먼저 관계를 만든다면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던 선은 생각보다 쉽게 흐려진다. 누군가의 하루에 자리를 차지하고, 기다림의 대상이 되고, 사라졌을 때 빈자리를 만든 존재라면 그 관계의 실재를 무엇으로 판별할 수 있을까. 이 작품집에서 기술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를 늘리고, 그와 동시에 애도해야 할 존재도 늘린다. 대체 가능한 것들이 많아질수록 상실까지 가벼워질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복제할 수 있는 존재와 대체할 수 있는 관계는 같은 말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를 구성했던 시간까지 복제할 수 없다면 대체품은 빈자리를 없애기보다 그 모양을 더 정확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집의 따뜻함을 기술의 반대편에 따로 놓기는 어렵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랑하게 하고 현실에 없던 관계를 가능하게 한 것도 기술이며, 이전에는 없었던 이별과 고독 역시 같은 가능성에서 태어난다. 사랑의 범위가 넓어질 때 슬픔의 영토도 함께 넓어진다. 차갑게 설계된 미래와 그 안에서 발생하는 온기가 한 장면 안에서 포개지는 순간, 따뜻함과 서늘함도 서로의 경계를 잃는다.

더 오래 살고 싶고, 고통을 줄이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타인의 마음을 알고 싶으며, 행복했던 순간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달라지는 것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과 범위다. 기술은 불가능했던 소망을 가능한 것으로 옮겨놓고 인간에게 자신이 원했던 것을 실제로 가져보게 한다. 그런데 와인스타인은 소망의 성취에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기억을 잃지 않게 된 뒤의 인간, 거리를 없앤 뒤의 관계, 더 많은 존재를 사랑하게 된 이후의 상실을 바라본다. 원하는 것을 얻은 자리에는 충만보다 다음 욕망이 먼저 도착한다. 결핍이 욕망을 만드는 것인지, 욕망하는 인간이 계속해서 새로운 결핍을 발명하는 것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신세계는 인간의 부족함을 채워가면서 동시에 부족함의 종류를 늘린다.

이쯤에서 기술을 모든 불행의 원인으로 세우는 일은 지나치게 쉬운 독법이 된다. 와인스타인의 시선이 매서워지는 순간은 오히려 기술 뒤로 숨었던 인간이 다시 앞으로 나올 때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 곁에는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연결되고 싶은 마음 곁에는 타인을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마음이 있다. 더 나은 기술이 더 나은 인간을 자동으로 만들지 않듯, 기술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이 본래의 선함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문명이 모습을 바꾸어도 사람은 다시 무리를 만들고, 경계를 긋고, 누군가를 돌보는 동시에 누군가를 밀어낸다. 기술이 미래의 것이라면 그 기술을 사용하는 욕망은 지독할 만큼 인간의 것이다.

이 때문에 『신세계의 아이들』을 디스토피아라는 말 하나로 묶기에도 조금 아까워진다. 이곳의 불안은 기술이 인간을 정복하는 장면보다 인간의 소원을 너무 충실하게 들어주는 순간에 더 짙어진다. 기억하고 싶다는 바람, 연결되고 싶다는 바람, 잃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다. 문제는 그것들이 한계 없이 실현되었을 때 나타난다. 와인스타인의 신세계는 인간에게 금지된 세계라기보다 너무 많은 것이 허락된 세계다. 억압보다 충족이, 결핍보다 과잉이 인간을 낯설게 만드는 미래. 기술은 인간의 욕망을 새로 만들어내는 괴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욕망이 이전보다 훨씬 멀리 갈 수 있도록 반경을 넓힌다.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신세계에서도 대체되지 않는 하나의 고결한 본질이 남아 있다고 말하기에는 인간은 훨씬 복잡하다. 사랑하고 애도하는 마음과 소유하고 배제하는 마음이 한 존재 안에 함께 산다. 누군가에게 닿고 싶어 하면서 그 사람을 자신의 이해 안에 넣으려 하고, 사라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 기억을 보존하면서 그 기억에 갇히기도 한다. 몇 겹의 미래를 통과한 뒤에도 사랑과 욕망, 다정함과 잔혹함은 새로운 형태를 얻어 인간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그것들을 아름다운 본질이라고 부르기에는 서로 너무 모순되어 있고, 결함이라고만 부르기에는 그 안에서 사랑과 돌봄 역시 태어난다. 기술은 이 모순을 발명하지도 해결하지도 않은 채, 인간이 품고 있던 것들이 움직일 수 있는 세계만 훨씬 넓혀놓는다. 기술은 인간을 얼마나 바꾸게 될까. 『신세계의 아이들』을 지나며 질문의 방향이 조금 뒤집힌다. 이토록 많은 것이 바뀌어도 인간은 왜 계속 인간인 채로 남는가. 그 익숙함이 따뜻하고, 동시에 서늘하다.

✏️영화사 찬란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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