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질투 수련 - 내게 없는 것으로 삶과 맞서는 법
이예지 지음 / 세미콜론 / 2026년 9월
평점 :
질투는 타인의 것을 바라보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들키는 감정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순간에는 그 사람이 가진 것을 탐내는 마음과 내가 갖지 못했다는 결핍의 감각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래서 질투는 대개 감추거나 다스려야 할 감정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감정에 선악의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 안을 잠시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것이 보인다. 누구에게 마음이 흔들리는지, 그의 무엇이 유독 부러운지 따라가다 보면 욕망은 구체적인 방향을 갖는다. 질투는 타인을 바라보며 시작되지만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언제나 자신이 있다. 『질투 수련』은 타인을 향한 곁눈질을 자기 안으로 꺾어보며, 부끄러워 숨겨온 감정에서 욕망의 모양을 읽어낸다.
세상 온갖 만물에 질투를 느끼는 사람으로서 나는 무엇을 가장 질투하는가. 타인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나에 대해 생각한다. 재능과 성취, 단단한 취향과 자기 확신까지 부러운 것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질투의 근원을 따라 마음속 깊은 곳까지 내려가면 질투하지 않는 사람을 가장 질투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누군가의 좋은 일을 자신의 결핍으로 환산하지 않는 사람, 타인의 몫이 커졌다고 자신의 자리가 작아졌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 그들에게서 가장 부러운 것은 타인의 기쁨을 온전히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다. 그런 사람을 질투한다는 사실 자체가 결국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준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타인이 가진 것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의 크기를 다시 재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이예지가 질투하는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비슷한 원리가 반복된다. 그레타 거윅에게서는 남은 생의 시간을 헤아리며 작업을 이어가는 야심을, 원소윤에게서는 삶의 불행을 농담으로 바꾸는 낙천성을, 김애란에게서는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문학적 상상력을 바라본다. 홍세화의 똘레랑스와 이불의 ‘취약할 의향’에 이르면 질투의 대상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가 부러워하는 것은 타인이 소유한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세계 앞에 자신을 놓아두는 방식이다. 타인의 재능을 바라보던 시선은 ‘저것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지나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처럼 감정에 휩쓸리는 일과 다른 차원의 움직임을 만든다. 무엇이 나를 흔드는지 알아보는 순간, 막연했던 질투는 자신의 욕망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언어가 된다.
하지만 질투가 가리키는 방향을 곧장 ‘나의 욕망’이라고 믿기에는 우리의 시선이 너무 많은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삼성그룹 회장이 사용하는 립밤의 브랜드까지 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참고로 그 립밤은 소프트립스였다.— 손바닥만 한 화면에는 타인의 집과 여행, 몸과 옷, 성공과 행복이 쉬지 않고 흘러든다. 그 모습을 충분히 오래 바라보다 보면 이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것을 원하게 된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며 형성된다고 보았다. 대상의 가치가 욕망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것을 욕망한다는 사실이 그 대상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욕망의 장면에는 늘 ‘나’와 ‘대상’ 외에 그것을 먼저 바라보고 있던 타인이 끼어든다. 오늘의 플랫폼과 광고는 이 삼각형을 무수히 복제한다. ‘너도 이것을 바라지?’라는 속삭임이 반복되는 동안 타인의 욕망은 어느새 나의 욕망처럼 자리 잡는다. 질투는 이처럼 지극히 사적인 감정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시대가 욕망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무엇을 부러워하는지 살펴보는 일은 그러므로 한 번의 의심이 더 필요하다. 지금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 나의 것이며, 어디부터 타인의 삶을 오래 바라본 끝에 배운 것인가.
타인을 바라보는 일이 꼭 비교와 경쟁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김애란의 문학에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상상력을 발견하고,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작업을 통해 멀리 떨어진 고통을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이며, 홍세화에게서는 혐오보다 분노를, 분노보다 연대를 택하는 태도를 바라본다. 질투의 시선은 어느 순간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선과 포개진다. 다른 사람의 자리에 완전히 서볼 수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상상력을 요청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거리를 함부로 지우지 않은 채 가까워지려는 태도. 비교의 순간 나를 작아 보이게 했던 바로 그 타인이, 어느 순간 혼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를 바라보는 동안 나라는 세계의 경계 역시 이전보다 조금 넓어진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질투해온 것들의 총합이자, 동시에 그것에 반발해온 저항들의 총체”(274쪽)라는 고백은 질투에 관한 이야기를 정체성의 문제까지 확장한다. 인간의 자아에는 생각보다 많은 타인의 흔적이 섞여 있다. 누군가의 태도를 동경해 조금씩 닮아가고,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며 삶의 방향을 틀기도 한다. 그렇게 동경은 모방으로, 거부감은 저항으로 옮겨가며 한 사람의 선택 속에 축적된다. ‘나답다’고 믿는 것조차 수많은 관계와 영향 사이에서 고르고 버린 것들의 오랜 배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타인의 흔적은 자아의 순도를 흐리는 불순물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에 저항해왔는지를 기록한 이력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질투 수련』은 서른 명의 타인을 기록하면서 완성된 한 사람의 자화상처럼 읽힌다. 수많은 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 사이에서 선명해지는 것은 이예지라는 사람의 윤곽이다.
서른 번의 ‘질투한다’를 지나온 책은 마지막에 다섯 번의 ‘질투하지 않는다’로 방향을 튼다. 원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만큼 원하지 않는 것을 알아보는 일 역시 자신을 구성한다. 세상이 부러워하라고 가리키는 방향마다 마음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 화려한 소비의 세계를 가까이에서 경험하고도 그것을 욕망하지 않을 수 있으며, 모두가 이상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모습 앞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거둘 수 있다. 무엇을 질투할 것인지 선택하는 능력에는 무엇을 더 이상 질투하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자유까지 포함된다. 외부에서 주어진 욕망을 하나씩 걷어내며 자신이 가치를 두고 싶은 것을 분별하는 일, 그 선택이야말로 책 제목의 ‘수련’이라는 말에 가장 오래 시선이 가게 한다.
이 책을 읽는다고 바로 질투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다시 누군가의 재능을 곁눈질하고, 남의 성취 앞에서 슬며시 나의 몫을 헤아리고, 화면 너머의 삶과 내 삶을 저울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모든 시샘에서 아름다운 욕망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전과 같은 질투가 찾아왔을 때 그 감정에 끌려가는 대신 한 번쯤 그 방향을 들여다볼 수는 있겠다. 무엇을 탐내고 있는지, 누구의 욕망을 빌려온 것인지, 그 사람에게서 정말 부러운 것은 무엇인지. 수련에는 단번에 달라지는 사람보다 같은 마음 앞에 여러 번 서보는 사람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번 알아차린 감정도 다시 찾아오고, 오래된 비교의 습관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다음번 질투 앞에서는 그것을 숨기는 데 쓰던 마음을 조금 다른 곳에 써보려 한다. 부러워하고 시샘하고 비교하면서도, 그 마음이 보여주는 나를 이전보다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쪽으로.
✏️도서출판 세미콜론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