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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사회 - 이상적 이미지를 넘어 자기-세계를 만드는 15가지 방법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9월
평점 :
누군가의 삶이 손가락 한 번의 움직임으로 펼쳐진다. 낯선 사람의 아침 식탁과 여행지의 햇빛, 정돈된 서재와 성공의 기록들이 작은 화면 안에서 쉼 없이 교체된다. 그중 어떤 장면은 동경의 대상이 되고, 어떤 장면은 자신의 삶을 초라하게 만드는 척도가 된다. 타인의 일상이 이토록 가까워진 시대에 정작 자신의 일상은 점점 낯설어진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른 사람의 삶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는 얼마나 오래 시선을 두고 있을까.
정지우의 『환상사회』는 이미지가 인간의 욕망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시대를 진단한다. 저자는 현실의 자신보다 이상적인 자기 이미지에 이끌리는 현대인을 ‘호모 판타즈마’라 명명한다. 이들은 자신을 전시하고 타인을 구경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이상을 찾아 움직인다.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는 사회적 관계를 분석했다면, 오늘날의 환상사회에서는 각자의 욕망에 맞춰 선별된 이미지가 개인의 현실 인식까지 조작한다. 무엇을 동경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조차 외부에서 공급되는 시대. 자신을 표현하는 자유는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의무와 뒤섞인다.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욕망은 종종 타인의 인정을 향해 굽어진다. 남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가 되고 싶으면서도, 그 고유함이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장폴 사르트르가 타자의 시선을 통해 설명했던 대상화의 경험은 오늘날 디지털 공간에서 더욱 일상적인 형태를 취한다. 앨리스 E. 마윅과 다나 보이드는 2011년 『뉴 미디어 앤드 소사이어티(New Media & Society)』에 발표한 논문 「나는 솔직하게 트윗하고, 열정적으로 트윗한다: 트위터 이용자, 맥락 붕괴, 상상된 청중」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 관계의 청중들이 하나의 온라인 공간에 겹쳐지는 현상과 이용자들이 ‘상상된 청중’을 고려해 자신의 표현을 조절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자신을 보여주는 행위에는 이미 그 모습을 바라볼 타인에 대한 예상이 스며 있는 셈이다. 게시물을 올리기 전 타인의 반응을 예상하고, 자신이 보여줄 만한 모습을 골라내는 동안 자아는 전시 가능한 부분들을 중심으로 편집된다. 타인의 시선은 자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그 기준은 점차 내면의 판단까지 대신한다. 남다르게 보이기 위해 선택한 취향과 생활 방식이 어느새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는 광경도 낯설지 않다. 자신을 발견하려는 노력과 자신을 연출하려는 욕망이 구별되지 않을 때, 인간은 스스로 만든 이미지의 관객이 된다.
이러한 삶을 지배하는 감정으로 저자는 ‘항시적-초조함’을 제시한다. 이상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면 인간은 체념할 여지라도 갖는다. 그러나 환상사회가 보여주는 이상은 언제나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을 듯한 거리에 놓인다. 타인의 성취는 가능성의 증거처럼 제시되고, 아직 그곳에 이르지 못한 자신의 현재는 미완성의 시간으로 평가된다. 비슷한 나이의 누군가가 이룬 성취를 확인한 뒤,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가던 자신의 하루를 뒤늦게 부족한 시간으로 느끼는 순간처럼. 비교의 대상이 무한히 늘어나는 사회에서 만족의 기준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무엇을 아직 갖지 못했는지에 더욱 민감해지고, 삶의 충만함을 측정하는 감각마저 결핍의 언어에 익숙해진다.
그 결과 현재는 살아내는 시간보다 미래의 자신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으로 취급된다. 휴식에도 생산성이 요구되고, 취미는 전문성이 되어야 하며, 평범한 경험마저 성장의 증거로 환산된다. 산책하며 찍은 사진 한 장에도 기록할 만한 의미를 찾고, 좋아서 시작한 일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되는 일상이다.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무한한 자기개선의 명령으로 바뀌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이루면서도 충분하다는 감각을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 결핍은 일시적인 상태를 넘어 삶을 조직하는 원리가 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오늘의 시간을 선점하고, 인간은 자신의 현재를 언제나 잠정적인 것으로 경험한다.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고 믿는 동안에도 정작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은 끊임없이 유예된다.
『환상사회』가 제안하는 ‘세계-만들기’는 이러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시도다. 저자는 이상적인 자아상을 완성하려는 ‘나-되기’의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로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제안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에 시간을 기꺼이 사용하는지, 어떤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지에 따라 한 사람의 세계는 조금씩 형태를 갖춘다. 사회가 이미 마련해 둔 성공의 기준을 따르는 대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스스로 정립하는 일. 이때 정체성은 완성된 형태로 획득해야 하는 목표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구체화되는 삶의 내용으로 이해된다. 자신의 세계를 가진다는 것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알아보고, 그것들이 삶에서 차지할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한 세계는 반드시 특별하거나 독창적인 모습일 필요가 없다. 남에게 설명할 수 없어도 충분히 소중한 시간이 있고, 사회적인 성취로 환산할 수 없어도 한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관계가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책의 한 구절을 오래 읽거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같은 길을 걷고, 별다른 목적 없이 누군가와 시간을 나누는 일도 한 사람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 시간들이 쌓여 취향이 되고, 기억이 되고,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고유한 감각이 된다. 외부의 기준이 삶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소한 경험들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는 말에도 경계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 자신만의 취향과 경험, 관계마저 경쟁력으로 계산하기 시작한다면 세계-만들기는 또 다른 자기계발의 과제가 될 수 있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다시 전시할 만한 삶을 제작하는 일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자신이 읽은 책과 방문한 장소, 쌓아온 경험을 하나의 완성된 인물상으로 배열하는 동안 세계는 또다시 평가받기 위한 이미지가 된다. 읽는 동안 즐거웠던 책은 어느새 한 해에 몇 권을 완독했는지 증명하는 숫자가 되고, 여행에서 보낸 시간보다 게시할 사진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지는 순간, 경험은 자신의 삶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세계가 얼마나 특별해 보이는지보다 그 안에서 실제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에 관한 감각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이 타인의 인정과 무관하게 지속될 수 있을 때, 세계는 비로소 삶을 지탱하는 내적인 질서를 갖춘다.
한 사람의 세계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열어준 문이 있다. 인간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발견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말과 경험이 개입한다. 혼자서는 알지 못했을 세계를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고, 타인의 관심을 따라가다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들여놓기도 한다. 관계는 각자의 세계를 확인하는 절차를 넘어, 그 세계를 변화시키는 경험이 된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만나는 순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차이도 발생하지만, 그 차이를 성급히 평가하지 않는 태도 속에서 관계의 깊이가 형성된다. 자신의 세계를 가진 사람은 타인의 세계 역시 자신이 전부 알 수 없는 고유한 질서를 갖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타인을 구경하는 문화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관찰하면서도 그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사정에는 무관심해지는 현상은 환상사회의 또 다른 빈곤함을 드러낸다. 환하게 웃는 여행 사진 한 장으로 그 사람의 행복을 판단하거나, 짧게 편집된 실수 하나로 그의 인격 전체를 평가하는 일이 그렇다. 이미지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담길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 전체가 담기지는 않는다. 타인의 성공을 부러워하거나 실패를 평가하기 전에 그 이미지 바깥에 존재하는 삶을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해란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 해석하는 과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을 인정하고, 타인이 스스로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드러낼 수 있도록 기다리는 태도 또한 이해의 일부다.
자신의 관심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관심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할 자리를 허락하는 것. 서로 다른 세계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되지 않은 채 관계를 맺고,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경험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윤리의 토대가 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자신을 보여주며, 그 시선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헤아릴 것이다. 그러나 삶의 모든 순간이 누군가에게 증명될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의 세계는 그가 오래 바라본 것들과 기꺼이 나누어준 시간, 서로에게 허락한 자리들로 이루어진다. 화면에서는 수많은 이미지가 빠르게 사라지지만, 함께 나눈 대화는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오래 지속한 관심은 하루의 리듬을 만든다. 그렇게 축적된 일상의 세부들이 저마다 다른 생애의 무늬를 이룬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삶은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이어간다. 그 시간을 충분히 감각하며 다른 존재의 삶을 이해할 자리를 마련하는 일. 환상사회의 한가운데서도 우리가 지켜낼 수 있는 현실은 바로 그곳에서 자라난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